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32화 (32/104)

32. 그의 지독한 습관은 바로, 그녀.

2016.12.22.

돌리지 않고 서슴없이 치고 들어오는 도준 때문에 제아는 순간 벙 쪄버렸다.

한지로도 종종 느닷없이 제 마음을 고백하며 치고 들어오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떨리진 않았는데.

“그, 그런 말을 대놓고 하면 어떻게 해?”

“자극해도 좋다고 말한 건 너 아닌가?”

“그래도 여기는 회사잖아! 회사에서만큼은 자중해줬으면 좋겠어!”

“그래서 눈으로만 보겠다잖아.”

“설마 여기 앉혀놓은 것도, 일부러 앉혀놓은 거야?”

도준의 침묵에 공과 사는 정확히 구분하는 도준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던 제아의 착각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엄연히 권력 남용이야!”

“이런 것도 권련 남용이라면. 그 권력, 난 마음껏 쓸 생각이야.”

“……!”

“그러니까 내 눈에서 벗어날 생각하지 마.”

말과 동시에 도준은 소파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턱까지 괸 채 대놓고 제아를 보기 시작했다.

앉혀놓은 명목은 비서지만, 바라보는 이유는 영락없이 제 여자 보듯이 보고 있었다.

뭐라고 반박을 해야 하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버텨볼 테니 자극하라고 한 건 그녀 자신이었으니까.

찌르듯이 파고드는 그의 눈빛에 심장이 후덜덜 떨려오지만, 제아는 침착하게 심호흡을 내쉬었다. 오기가 생겨났다.

저 외모도 계속 보다 보면 질릴 것이다. 처음이 힘들 뿐, 무뎌지면 버티기 쉬울 것이다.

제아는 보란 듯이 그를 무시하고 서류를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도준은 투명인간이다. 이 공간엔 나만 있다.’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최면까지 걸었다. 그런데 그게 먹힌 걸까. 여전히 손끝은 떨려오지만, 꽤 차분하게 손가락이 움직였다.

시작한 건 어떻게든 끝을 맺어야 하는 성격이 도진 건지 머리를 어지럽히던 도준의 존재도 천천히 사라져갔다. 뒤죽박죽 섞여 있던 자료도 분류별로 정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서류를 정리하던 제아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돌아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존재.

그가 앉아 있던 소파는 텅 비어 있고 코끝으로 간질이듯 청량한 체취가 스며들었다.

그녀의 바로 옆 소파 등받이 위에 상체를 걸친 도준이 보이자 어깨가 바짝 치솟아 올랐다.

도준은 아직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의 존재를 무시하고 일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제아는 다시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서류를 내려다보는 긴 속눈썹까지도.

그때, 바짝 틀어 올렸던 와인빛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얼굴을 감싸며 흘러내렸다.

“……뭐 하는 거야!?”

고개를 트니 도준이 그녀의 머리를 고정해주었던 머리끈을 손에 쥐고 있었다.

“넌 머리 푼 게 예뻐.”

나직하게 울리는 음성. 머리칼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진다. 머리칼에도 피부가 존재하는 걸까.

그의 손길이 흘러내릴 때마다 온몸이 쭈뼛쭈뼛 곤두서고 찌르르한 감각이 손끝 발끝으로 퍼져 나갔다.

“비서는…… 헤어스타일을 단정하게 해야 해.”

제아는 최대한 태연한 척 말하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넌 예외야.”

“.......?”

“너는 내, 특별 비서니까.”

그의 한마디에 숨이 탁, 막히는 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인호가 들이닥쳤다. 그제야 도준은 몸을 일으켜 세웠고, 제아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정말,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제아는 오후 출근이라는 인호가 왜 이렇게 일찍 나타났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고마움이 역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뿐.

인호는 그런 제아를 잠시 의문스럽게 바라보더니 갑자기 씨익 웃었다.

“문 비서, 나 좋아하면 안 됩니다. 한 사장이 날 죽일지도 몰라요.”

‘그전에 제가 죽는 줄 알았어요!’라고 눈빛으로 대답하며 제아는 벌떡 일어났다.

“시키신 서류 분류, 모두 끝냈습니다.”

또 잡힐세라 제아는 도망치듯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무언가에 단단히 홀린 표정으로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기는 그녀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려왔다.

잠시 후 인호가 집무실에서 나왔다.

“자, 우리 비서 아가씨들이 일 제대로 했는지 업무 체크 한번 해봅시다!”

즐겁게 손뼉을 치며 회의실로 향하는 인호를 보는 여비서들의 표정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회의실 테이블 상석에 앉아 업무를 체크하는 인호의 모습에선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눈웃음과 장난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비서들이 대충 했거나 실수한 부분까지 족집게같이 찾아내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런 인호의 모습에 죄지은 게 없는 제아마저도 등에서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이래서 오빠가 믿는구나.

“신 비서와 문 비서는 뭐 잡아낼 게 없어, 통과! 특히 문 비서, 처음인데도 아주 잘했습니다. 사장님 출장 보좌 건도 그렇고, 완벽해요!”

1시간 만에 드디어 회의가 끝났다. 윤 비서와 김 비서는 눈물 콧물 쏙 빠지도록 혼이 났지만, 신 비서와 제아는 칭찬을 받았다.

기분 좋게 회의실에서 나오는 제아의 어깨를 신 비서가 부드럽게 토닥였다.

“지금처럼만 해. 누가 알아? 비서실 고정될지.”

“감사합니다!”

비서들 중에서 제일 꼬장꼬장한 신 비서가 드디어 제아에게 마음을 연 것이다. 일은 잘하지만 시키는 일만 딱딱 하는 두 비서와 제아는 비교가 확실히 되었다.

스펙은 없어도 시키기도 전에 알아서 움직이고,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알고, 궂은일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타고난 부지런함에 싹싹함까지 더해지니. 어떤 상사가 이런 후배를 미워할 수 있을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윤 비서와 김 비서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신 비서와 대화하면서 회의실을 나서는 제아를 인호가 다시 불러 세웠다.

“문 비서는 잠깐 남아요.”

회의실 문이 다시 닫히고 제아가 의자에 앉자마자 인호가 방금 전의 위엄을 싹 거둔 채 제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

“문 비서, 나 좀 도와줘요!”

“예? 갑자기 무슨…….”

“한 사장네 집 헬퍼 채용, 문 비서가 대신해주면 안 됩니까? 내가 이렇게 사정할게요. 내가 절대 문 비서를 무시해서 이런 부탁하는 게 아니에요. 남자인 내가 처리하기엔 내 분야가 아니라서 아주 힘들어 죽겠어요. 그리고 한 사장이 또 오죽 깐깐합니까?”

난 또 뭐라고. 제아는 너무도 싱거운 인호의 부탁에 생긋, 웃음을 지었다.

“알겠어요. 그런데 우선, 이 손 좀 놓고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

그제야 인호는 잡고 있던 제아의 손을 놓으면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내가 이렇게 프린트까지 해놨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헬퍼한테 입 아프게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어요. 며칠 전에 한 사장 집 정리하는 거 보니까 손끝이 아주 야무지던데, 그렇게만 헬퍼가 하게 교육시켜주면 돼요.”

“최선을 다해볼게요.”

“하루 서너 시간만 청소하고 월급 300만 원 받는 거니 구하는 게 어렵……?”

“300만 원이요?”

받아든 종이를 훑어보던 제아는 갑자기 귀가 번쩍했다. 고작 하루 몇 시간인데, 월급이 300만 원이라고?

얼마나 크게 소리쳤는지 제아의 반응을 오해한 인호가 급하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한 사장이 워낙 지랄 맞기로 소문이 나서 헬퍼 구하기가 좀 힘들긴 해요. 혹시 채용한 헬퍼가 월급을 더 요구하면 나한테 말해줘요. 내 사비를 털어서라도?”

인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번엔 제아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실장님, 그 헬퍼 제가 할게요!”

그렇지 않아도 알바를 알아보려고 했던 제아였다. 그런데 생각하지도 못한 고액 알바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을 줄이야!

그 돈이면 적금도 다시 들 수 있고 윤영의 환한 얼굴도 볼 수 있다.

“제가 돈이 좀 많이 급하거든요! 그러니까 그 헬퍼, 제가 하면 안 될까요? 저 정말 잘할 수 있어요!”

갑자기 역전된 상황에 당황한 건 인호였다.

“저기 문 비서, 사실은 말이에요. 그 일이 만만치가 않아요. 도준이가 엄청 깔끔하긴 한…….”

“엄청 깔끔하긴 한데 정리는 지지리도 못하고 잘도 어지럽힌다. 그런데 또 엄청 깐깐하다, 이 말씀하시려는 거죠?”

족집게 도사도 아니고 자신이 하려는 말을 그대로 한 제아가 신기한지 인호는 멍한 표정이었다.

“그걸 어떻게.”

“저희 오빠였잖아요.”

제아는 절대 인호가 거부할 수 없는 히든카드를 내밀었다. 바로 인호가 주었던 종이를 그의 눈앞에 다시 바짝 들이댄 것이다.

“여기 있는 내용들, 다 제가 해주던 거예요.”

“예?”

“어렸을 때 오빠 뒤치다꺼리, 다 제가 했거든요.”

제아는 머쓱한 듯 웃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의 이준은 집에서도 그리고 학교에서도 떠받드는 존재였다.

게다가 과외로 돈까지 딱딱 벌어다 주니 윤영이 집안일은 손도 대지 못하게 한 것이다.

“제가 그렇게 해준 게 습관이 들어서, 아직도 그런가 봐요.”

배시시 웃는 제아를 보며 인호는 알아버렸다. 10년이 흘렀어도 변하지 않은 한도준의 지독한 습관은 바로, 문제아라는 것을. 정말 유별난, 남매구나. 새삼 깨닫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한 번? 하지만 이내 인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도준이 제아를 제 집 헬퍼로 쓴 걸 알기라도 하면. 갑자기 인호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내가 미쳤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그런데도 천성적으로 밝고 유쾌한 그의 내면에서 작은 호기심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눈엔 완벽하게 깨끗한 집이건만, 도준은 꼭 무언가를 귀신처럼 집어냈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결벽증을 만들어낸 동생의 손이 닿아도 트집을 잡을까?

갑자기 미치도록 궁금해졌다.

“한 사장이 알면, 내 피를 쫙쫙 메마르게 해서 나를 죽이려고 할 겁니다.”

역시, 무리한 부탁이었구나. 제아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려는 순간 인호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합시다.”

“네?”

제아가 고개를 다시 번쩍 들자, 생글생글 웃고 있는 인호가 보였다.

“대신에 딱 6개월만, 그 안에 헬퍼 구해서 교육 완벽하게 시키는 조건으로 채용하는 겁니다. 그리고 절대 한 사장한테 들켜서는 안 돼요. 어떻습니까?”

“감사합니다, 실장님!”

은밀한 비밀을 공유한 제아를 향해 인호가 손을 내밀었다.

“본드 걸, 우리 007 작전 잘해봅시다. 악당 한도준에게 들키지 않도록.”

졸지에 본드걸이 되어버린 제아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인호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그가 내민 손을 꼭 잡았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제임스 본드 님.”

도준은 절대 모르는, 그가 알게 되면 난리가 날 은밀한 거래가 성립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윤 비서와 김 비서가 회의실 문의 투명한 틈을 기어코 찾아내서 훔쳐보고 있었다.

***

“문제아 씨, 우리 좀 봐요.”

점심시간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바로 의자에 착석해서 업무에 몰두하던 제아는 고개를 들었다.

뭐가 그리 불만인지 단단히 팔짱을 끼고 있는 김 비서와 윤 비서가 보였다.

바보가 아닌지라 두 여비서가 왜 부르는지 이유가 짐작이 되었다.

마침 신 비서는 자리를 비우고 없으니 제아는 결국 두 여비서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사옥 옥상에 도착하자마자 제아는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두 여비서에게 내밀었다.

그래도 그녀 딴에는 좋게 해결하려고 자존심을 죽이고 내민 음료수였다.

그런데 그 음료수는 어느새 바닥에 볼품없이 나뒹굴고 있었다. 김 비서가 음료수를 손으로 쳐버린 것이다.

“참 내. 누가 이딴 거 먹자고 부른 줄 아나.”

자신보다 몇 살 더 어린데도 건방지게 말꼬리를 잘라먹는 김 비서의 말에 제아의 한쪽 눈썹이 꿈틀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유 없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무시하는 것, 특히 반말하는 건 딱 질색인 그녀였으니까.

“정윤 씨 말이 너무 짧은 거 같네요.”

“신 비서님한테는 선배님 선배님하면서 죽는 시늉 다 하면서 우리는 선배 취급 안 한다 이거지? 그리고 사장님한테도 눈웃음 살살 흘리고, 유 실장님은 손까지 덥석 잡던데.”

김 비서의 막무가내 말에 제아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윤 비서는 김 비서 뒤에서 옳거니 하면서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그래도 참자. 대화, 대화로 풀어야 돼.’

제아는 스스로에게 타이르며 최대한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윤 씨도, 그리고 세희 씨도 선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실장님과 사장님은.”

거기까지 말하던 제아는 말문이 순간 탁, 막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준에게 오늘 웃어준 적도 없었고, 인호의 손을 잡은 건. 하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그 모습을 오해한 김 비서는 눈을 앙칼지게 뜨며 이젠 삿대질까지 서슴없이 했다.

“이봐, 이봐, 말 못 하잖아!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스펙 없이 이 회사 어떻게 버티나 했는데 항상 그렇게 몸으로 밀어붙이나 보지? 어휴, 정말 더러워.”

더럽다는 말에 참고 있던 제아의 인내심이 드디어 폭발해버렸다.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제아의 눈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을 감지하지 못한 김 비서는 득의양양 웃으면서 명령조로 말을 했다.

“좋은 말할 때 눈 깔아.”

“…….”

“그리고 귓구멍 파고 내 말 똑바로 들어. 우리 사장님이랑 실장님한테 다시는 꼬리치지 마. 알았어? 안 그럼 아주 확 그냥!”

겁을 주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는데도 제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때릴 테면 때려봐.

제아의 노골적인 눈빛에 본때를 보여주려는 듯 번쩍 치켜든 김 비서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그 손이 뺨에 닿기도 전에 제아가 움켜잡았다.

“어, 어쭈? 이거 안 놔? 내가 이래 봬도 청담에서 쫌 놀아본……? 흡!”

순식간이었다. 제아가 옥상 벽으로 단번에 밀어붙이며 김 비서의 목을 움켜쥔 건.

치마의 옆트임이 뜯어지든 말든, 한쪽 발은 김 비서의 바로 옆에 떡 하니 올렸다.

“내가 여길 조금만 더 누르면, 지금보다 더 고통스러울 거야.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숨조차 제대로 못 쉬고 버둥거리는 김 비서의 모습에 깜짝 놀라 달려드려는 윤 비서를 제아가 매섭게 노려보았다.

“세희 씨도 이 꼴 나기 싫으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

눈빛만큼 매서운 한마디에, 꽤가 아니라 굉장히 놀아본 것 같은 포스에. 제아에게 향하던 윤 비서의 발걸음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나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하는 거니까, 귓구멍 파고 똑바로 들어.”

윤 비서에게까지 들리도록 제아는 차분하면서도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난 정말 조용히 회사 생활하고 싶어. 그리고 세희 씨랑 정윤 씨랑도 정말 사이좋게 지내고 싶구. 내 마음, 이해하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김 비서와 윤 비서의 모습에 그제야 제아는 아주 천천히 김 비서의 목을 움켜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컥, 캑캑!”

무슨 이런 괴물이 있냐는 듯, 제아를 바라보는 여비서들의 눈빛은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 눈빛에 제아는 머쓱한 웃음을 삼켰다. 김 비서의 목을 움켜쥐어 꼼짝 못하게 한 건 손의 힘이 아니었다.

‘힘이 중요한 게 아니야, 정확하게 어딜 짚느냐가 중요한 거지.’

이준이 그녀에게 알려준 방법이었다. 덩치에 상관없이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치한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문이준의 여동생이란 타이틀은 편하기도 했지만 고달픈 일이 더 많았으니까.

옛 기억을 애써 지운 제아는 잔뜩 겁에 질린 여비서들을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우리, 사이좋게 지내는 거다?”

“그, 그럼요! 그럼 우리 먼저, 내려가 봐도 될까요?”

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두 여비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옥상을 빠져나갔다. 그녀들의 뒷모습을 보며 제아는 사옥 벤치에 털썩 앉았다.

결국 또 이런 방식으로 해결했다는 게 마음이 착잡했다. 그런데 옥상 끝에 위치한 실내 정원의 뒤에서 새하얀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거기 누구예요?”

제아의 앙칼진 한마디에 느릿하게 구두 굽 소리가 퍼지면서 도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는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담배가 들려 있었다.

오빠가 대체 왜 거기 있냐고 쏘아붙이려던 제아는 허무한 웃음을 속으로 흘렸다.

사장이 가지 못할 곳이 어디 있을까. 게다가 실내 정원은 사장만이 갈 수 있는 공간이니까.

담배를 끈 도준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왔다. 오지 말라고 오지 않을 도준도 아니었기에 입 아프게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 봤어?”

제아의 앞까지 당도한 도준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나한테 뭐라고 할 생각하지 마. 마음 같아선 어린 것들이 반말 틱틱 내뱉는 거 보고 머리채를 틀어잡고 싶었는데 가까스로 참은 거니까.”

“김 비서, 윤 비서는 해고야.”

“……뭐?”

너무도 쉽게 내뱉은 도준의 말에 제아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물론 두 여비서가 얄밉긴 했다.

하지만 제아는 자신 때문에 능력 있는 여비서를 도준이 해고하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아니지! 오빠한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잘라?! 일도 엄청 잘하던데!”

“널 건드리는 존재들은 남녀노소, 나이를 막론하고 나는 용서하지 않아.”

도준은 지극히 덤덤히 말을 흘렸지만 허튼 말은 절대 하지 않는 그의 성격을 제아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꽤 다정했던 이준이었는데, 지금의 도준은 왜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잖아.”

“…….”

“옛날엔 그래도 다정하기도 하고 친절하기도 했었는데. 지금의 오빤, 너무 냉정해. 얼음 같아.”

내리깐 도준의 시선이 찢어진 치마의 옆트임 사이로 아찔하게 드러난 새하얀 허벅지에 닿았다. 화르륵 달아오른 얼굴로 제아는 얼른 손을 들어 허벅지를 가렸다.

슈트 재킷을 벗은 도준이 프러포즈라도 하는 것처럼 제아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왜, 왜 이래? 얼른 일어나! 누가 보면 어쩌려고?”

제아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도준이 몸을 기울여왔다. 피하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릿하게.

“그새 잊었나 보군.”

하지만 나직하게 울리는 그의 음성에 사로잡혀 제아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도준의 양팔이 제아의 양쪽 허리를 파고들어 휘감았다.

“내 다정함도, 그리고 친절함도.”

그가 허리를 휘감았던 손을 거두고 제아를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오로지 너에게만 해당되는걸.”

제아는 파르르 떨리는 시선을 내렸다. 그의 재킷이 허리에서 묶여 드러난 허벅지를 가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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