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내 품에 안겨 있던 여자가 너인 것 같아서.
2016.12.19.
얼마나 그렇게 그의 품에 꼭 안겨 있었을까. 떨림이 잦아들고, 숨도 못 쉴 정도로 제아를 옭아매던 도준의 팔다리에 스르륵,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조심히 고개를 드니, 붉은빛을 되찾은 입술과 백자처럼 새하얀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쌔근거리는 숨결도 안정적이었다.
이제는 괜찮아졌는지 편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잠이 든 도준은 더 이상 제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손으로 그의 한쪽 어깨를 툭 밀자, 도준의 몸이 스르륵 뒤집어졌다. 30여 분 만에 침대에서, 그리고 도준의 품에서 탈출한 제아는 그의 이마에 가만히 손을 올려보았다.
손바닥으로 스며드는 따스한 온기.
“휴, 다행이다.”
제아는 남아 있던 가운의 한쪽 팔에 도준의 팔을 껴서 입힌 후 푹신한 이불로 그의 몸을 꼭 감싸준 후에 작별 인사를 했다.
“잘 자, 도준 오빠.”
도준의 집을 나온 제아는 다시 한 번 으리으리한 주상 복합 아파트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살고 있는 초록색 대문 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집. 차이 나는 넓이만큼, 그리고 높이만큼 도준과의 거리감이 더 절실하게 와 닿았다.
제아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밤 11시가 거의 다 된 시각이었다. 그런데 불이 꺼져 있어야 할 집 안에서 환하게 불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거실에서 흐느끼고 있는 윤영이 보였다.
“엄마! 무슨 일이야!? 응?”
웬만해선 울지 않는 윤영이란 걸 알기에 제아는 더 가슴이 타들어갔다. 눈물 가득한 눈으로 제아를 본 윤영이 아직도 화가 나는지 입술을 바르르 떨며 말했다.
“네 아빠 때문에 못살겠다, 정말! 그 돈이 어떤 돈인데! 흑흑!”
“엄마, 울지 말고 말 좀 해봐, 응?”
“귀 얇은 네 아빠가 또 주식을 했단다! 이번엔 또 어떤 망할 친구 놈이 꼬셨는지! 그것도 적금이며 예금이며 몽땅 찾아가서는……. 흑흑! 우리 또 빈털터리 됐어, 제아야! 어떻게 하니? 네 아빠 어떻게 해야 하니? 정말 네 아빠 때문에 엄마가 못살겠어!”
제아는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꼭 닫힌 방문을 응시했다. 윤식은 아마도 저 안에서,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있을 것이다.
결과는 또 최악이었지만 제아는 윤식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가장인데도 가장 노릇 못 하는 걸 윤식은 항상 미안해했으니까.
그리고 윤식이 가장 노릇을 못 하게 만든 건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엄마, 아빠가 혹시 돈까지 빌려서 한 건 아니지?”
“그렇긴 한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
제아는 윤영의 손을 꼭 잡으며 눈을 맞추었다.
“그럼 됐지. 빚진 것만 아니면 다시 시작하면 돼. 그까짓 돈 다시 모으면 되지! 엄마 딸 아직 젊거든? 몇십 년은 월급 가져다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
의젓한 딸을 바라보던 윤영의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치겠니. 통장 관리 못 한 내 잘못도 있지. 이보다 더한 일도 이겨냈는데. 엄마도 다시 식당 나가고 둘이 벌면 그까짓 돈 못 모으겠니? 네 아버지 병원비쯤이야 거뜬하지.”
윤영이 다시 식당을 나간다는 말에 제아는 정색을 하며 말렸다.
“엄마는 일할 생각 하지 마. 관절도 안 좋으면서! 내가 더 벌어다 주면 되잖아!”
“제아야.”
“내가 알바를 해서라도 더 벌어올 테니까, 엄만 집에 있어. 엄마까지 건강 나빠지면 나 진짜 못 버텨.”
“날마다 야근하면서 알바는 무슨 알바야. 지금도 충분히 넌 잘하고 있어. 그러니까 엄마 걱정은 하지 마. 무리하지 않게 조금만 하면 될……?”
“나 비서 되어서 월급 올랐어!”
다급한 나머지 불쑥 튀어나온 말에 제아도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뒤늦게 후회해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비서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일 잘한다고 사장님 비서 됐어. 그래서 월급도 더 준대!”
“어머, 그래? 언제부터? 얼마나?”
반짝이는 윤영의 눈빛과 달리 제아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글쎄, 비서 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정해지진 않았는데 꽤 오를걸? 그러니까 엄마는 절대 식당 일 하지 마! 알았어?”
“내가 정말 딸 하나는 잘 뒀다니까?”
다시 웃음을 찾은 윤영을 바라보는 제아의 속은 속이 아니었다.
기존 업무에 특별 비서 업무까지 병행하는 조건에 월급이 더 오를 거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비서실로 발령이 나버린 상황이었다.
그래서 월급이 정말 오를지 안 오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김 부장 말도 믿어야 할지 모르겠고.
하지만 뭐 어떤가. 월급이 안 오르면 알바를 해서라도 윤영에게 돈을 더 가져다주면 되는 일인데.
가족들이 다시 웃음을 찾을 수 있다면,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이 한 몸 24시간 일해서 불태워버려도 상관없다.
제아는 배시시 웃으며 윤영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아빠 원망하지 마, 알았지? 아빠 없었으면, 나 같은 딸 못 얻었다? 아빠도 다신 안 그럴 거야, 이제.”
이준 오빠도…… 이젠 그만 원망해줘, 엄마. 하지만 그 말은 다시 입 안으로 삼켜버렸다.
그가 떠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집에서 금지어가 된 이름이 바로 문이준이었으니까.
윤영이 제아를 품에 꼭 안으며, 말을 했다.
“엄마는 열 아들 안 부럽다! 아들이 다 무슨 소용이니? 딸이 최고지!”
***
정각 8시에 출근한 신 비서와 김 비서, 윤 비서는 오늘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1시간이나 일찍 출근했는데도 제아는 어제처럼 깨끗하게 비서실과 로비까지 청소한 후에 그들을 맞은 것이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는 제아의 미소가 너무도 해맑아서 하마터면 여비서들도 따라서 미소 지을 뻔했다. 하지만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신 비서였다.
“흠흠, 난 청소까지 시킨 적은 없는데?”
“온라인 팀에 있을 때 청소하던 게 버릇 들어서요. 깨끗하긴 한데 조금 더 해야 할 것 같아서 했는데. 그럼 앞으로 하지 말까요?”
제아가 조심히 묻자 신 비서는 순간 생각에 잠겼다.
세세한 청소와 정리정돈은 여비서의 몫이기에 도준을 맞는 아침마다 그녀들은 초긴장 상태였다.
한도준 사장은 완벽한 외모처럼 업무 능력도 완벽, 결벽증도 완벽이었다. 청소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잘린 여비서들도 있다고 했으니.
물론 여비서들은 강훈이 밀어 넣은 비서들을 도준과 인호가 트집 잡아 잘라버린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모르니 여비서들은 서로 집무실 청소를 미루고 있는 상황이었다.
괜히 잘못했다가 잘리기라도 하면…….
연봉도 센 편이고 젊고 아름다운 상사를 볼 수 있는 직장은 흔치 않으니 말이다. 물론 한 독종으로 돌변할 때면 사직서를 던져 버리고 싶긴 하지만.
그런데 신참이 그 총대를 기꺼이 메려고 하니, 신 비서가 그걸 놓칠 리 없었다.
“그럼 제아 씨가 오늘부터 집무실도 좀 정리해줄래?”
“네, 신 선배님! 뭐든지 시켜만 주세요!”
신 비서의 속셈을 알 리 없는 제아는 씩씩하게 대답을 하며 집무실로 향했다.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자 여비서들의 힐이 대리석 바닥을 난잡하게 어지럽혔다. 그 마지막 끝에 선 제아는 궁금했다.
‘도준 오빠, 다 나았겠지?’
바빠서 나오지 않았는지 아니면 하루를 더 아팠는지, 꼬박 이틀 만에 보는 도준이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구두 굽 소리가 일정하게 대리석 바닥을 울렸다.
여비서들은 오늘 또 트집 잡히지 않을까 전전긍긍했고, 제아는 알 수 없는 묘한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도준이 궁금하지만 고개를 들어서 그를 똑바로 볼 순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구두 굽 소리가 돌연 멈추었다.
그 순간, 떨어진 시야 밑으로 반질거리는 구두 굽이 스윽 밀려들었다.
제아가 고개를 들자 기다렸다는 듯 도준이 상체를 기울여왔다. 그리고 제아는 본능적으로 그만큼 상체를 뒤로 뺐다. 하지만 집요한 그의 시선은 제아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
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어젯밤 일…… 설마, 다 기억하는 걸까? 그게 아니면, 오늘 처음 해본 올림머리가 이상한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좋은 아침.”
도준이 건네는 아침 인사를 제아는 그저 비서들에게 늘 건네는 아침인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준이 소리 없이 입을 뻥긋거리는 순간, 제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문제아.’
당황한 그녀의 시선이 얼른 옆을 훑었다. 다행히도 여비서들은 바닥에 뭐라도 있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은밀하면서도 비밀스러운 아침 인사에 심장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제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버릇처럼 있지도 않은 옆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겼다.
나른하지만 총기 어린 또렷한 눈동자, 새하얀 얼굴, 붉은 입술.
하루 사이 도준은 완벽하게 회복한 상태였다.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도준은 여전히 제아의 앞을 차지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이루어진 도준의 비서실 체류에 여비서들이 조금씩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제아가 불안함을 눈동자에 드러내는 순간, 도준의 음성이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유 실장은 오후 출근합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도준은 집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여비서들은 난리가 났다.
“세상에! 저희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사장님이…… 아침 인사를 건네다니!”
“우리 오늘은 무사히 넘어간다는 신호인 거죠? 그렇죠?”
“흠흠, 호들갑들 좀 떨지 마. 사장님이 성격이 무뚝뚝하셔서 그러지, 우리 비서들을 제일 아끼는 거 모르니?”
그나마 연장자인 신 비서가 차분하게 말을 했지만, 그녀조차도 귀에 걸린 입은 어쩔 수 없었다.
“제아 씨, 봤지? 임원들까지도 후려잡는 우리의 무서우신 사장님이 우리 비서들만은 엄청 아끼시는 거. 그러니 제아 씨도 열심히 일해. 우리처럼 예쁨 받고 싶으면. 뭐, 비서실에서 살아남을지 모르겠지만.”
“네, 열심히 할게요!”
“제아 씨는 저 뒤에 있는 캐비닛 안에 있는 파일, 연도별로 정리 먼저 해줄래? 데이터가 몽땅 다 날아가 버려서 우리가 다시 컴퓨터로 파일 작업해야 하니까. 할 수 있지?”
어찌 보면 허드렛일이나 마찬가지라서 한국대를 나온 자부심이 강한 윤 비서와 김 비서는 하기를 꺼려했다.
“아주 깔끔하게 해놓을게요. 제가 정리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조금의 싫은 내색 없이 바로 캐비닛으로 돌진하는 제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신 비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사실 남자들은 죄다 홀리고도 남을 커다란 고양이 눈에 하얀 피부의 제아를 본 순간 왠지 모르게 질투가 났었다. 스펙도 없는 주제에 이 회사에서 버티는 건 저 외모로 남자를 홀린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직원이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비서실로 들어온 게 못마땅했다. 비서실의 위상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그래서 좀 괴롭혀주려고 했는데.
‘싹싹하고 밝고. 뭐 괜찮은 것 같네.’
집무실로 들어온 도준은 내부를 쭉, 둘러보았다. 완벽하게 정리가 된 깨끗한 집무실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완벽하게 정리가 된 집 같았다.
곳곳에서 느껴지는 제아의 야무진 손끝이 느껴지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그래서일까. 집무 책상에 앉은 도준은 여느 때처럼 바로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일들이 쌓여 있는데도 닫힌 문만 뚫어버릴 듯 노려보았다.
저 문만 열면, 진짜 제아를 볼 수 있다. 그 생각을 하니 손이 간질거려오고, 눈은 자꾸만 문으로 향했다.
어젯밤,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얼음처럼 차가웠던 밤바다에 빠져들었던 건, 그에게도 꽤 힘든 일이었다.
끔찍이도 싫어하는 물, 바다, 에일 듯이 파고드는 냉기.
치가 떨리는 짙은 어둠에 사로잡혀 있을 때 조금씩 스며드는 따스한 체온이 그를 차가운 바다에서 건져주었다.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품 안에 딱 맞아떨어지던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몸으로 온기를 나눠주는 게 제아라는 걸.
아픈 와중에도 품에 안겨든 제아는 그의 남성적인 본능을 지독하게 자극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고장이 나버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눈을 뜨니 아침이었고, 그의 예상과 달리 품은 허전했다. 하지만 온몸을 내리누르던 기분 나쁜 감각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침마다 찾아드는 두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1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을 땐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줄 알았다. 그런데 곁에 두고 싶어졌다.
그리고 곁에 두니 하루 종일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가지고 싶어, 미칠 것만 같다.
결국 도준은 벌떡 일어나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집무실 문이 열리자 여비서들이 그가 외출하는 줄 알고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늘한 그의 시선이 비서실 내부를 빠르게 훑었다.
그가 원하는 존재는, 비서실 뒤쪽에 위치한 캐비닛 앞에서 바지런히도 움직이고 있었다. 꽤 무거울 것 같은 두툼한 파일들을 가녀린 팔로 번쩍 들고서 말이다.
너무 집중을 해서인지, 그게 아니면 거리가 꽤 있어서 그가 나온 줄 모르는 건지.
잠깐 발걸음을 바닥에 붙이고 서 있어 보지만, 제아는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여비서들은 긴장한 눈빛으로 그만 바라보고 있다.
결국 도준은 애꿎은 화장실에 출석 도장을 찍고 왔다.
30분 후, 도준은 두 번째 도전을 했다.
그가 집무실 문을 열고 나오자 세 명의 여비서들은 더 놀란 토끼 눈이었다. 외출하지 않는 이상 집무실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 도준의 두 번째 등장에 불안함을 느낀 것이다.
‘혹시 우리가 뭘 잘못했나.’
두려움에 섞인 눈빛으로 도준을 바라보았다. 그러든지 말든지, 괜한 헛기침까지 어색하게 날려보지만 제아는 여전히 시선도 주지 않는다. 얄미울 만큼 사랑스러운 뒤통수만 보여주는 뒷모습을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도준의 그 눈빛을 철저하게 오해한 신 비서가 살금살금 다가와서 도준에게 조심히 물었다.
“사장님 혹시, 문 비서가 실수한 게 있나요?”
“……없습니다.”
톡 쏘아붙이고는 도준은 다시 화장실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며 신 비서는 생각했다.
스펙 없는 문 비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고.
30분 만에 화장실을 다시 방문한 도준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시니컬하게 중얼거렸다.
“지금,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정말 너란 여자, 나를 이렇게까지 바보로 만들어버리다니.
집무실로 미련 없이 복귀한 도준은 업무에 집중했다. 그런데 직접 부서에 들려 확인해야 할 일이 생겼다. 인호가 있다면 대신했겠지만, 그는 오후 출근이니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정말 볼 일이 있어서 나간 건데, 다시 머뭇거리면서 다가온 신 비서가 그의 손에 뭔가를 조심히 쥐여준다.
“사장님, 이거……요.”
웬만해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였다. 그런데 손에 들린 그 무언가를 확인한 순간 저절로 눈살이 확 찌푸려졌다.
설. 사. 약.
좀 더 한걸음 다가선 신 비서가 도준만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다른 비서들은 몰라도 저는 그 고통 잘 알아요, 그래서 항상 준비해서 다녀요. 오늘 사장님 비밀은 저희 비서실에서 꼭 지켜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세 비서 중에서도 일도 가장 잘하고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냉정한 성격 때문에 그나마 마음에 든 게 신 비서였다. 그런데, 맙소사.
도준은 질끈 눈을 감으며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답지 않게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는 모습에 오해를 한 것이었다.
도준은 가까이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를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신 비서 손에 다시 약을 쥐여주었다.
그리고 아주 또렷하게 말했다. 다른 비서들도 들을 수 있을 만큼 확고하게 말이다.
“신 비서, 나는 지금 화장실이 아니라 마케팅 부서 가려는 겁니다.”
“아…… 저, 저는, 죄송합니다! 피,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호출해주세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신 비서가 자리로 후다닥 돌아가며 한 말이었다.
그 한마디가 도준의 뇌리를 세차게 두드렸다.
이런, 바보 같으니라고. 그답지 않게 정말 멍청한 짓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엄연히 회사, 그리고 그는 사장, 제아는 비서였다. 그답지 않게 지극히 단순한 걸 너무도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문제아란 이름 하나에, 빠르게 돌아가던 뇌에 항상 제동이 걸리는 것이다.
다시 몸을 튼 도준의 시선이 캐비닛 앞을 빠르게 왔다갔다하는 제아에게 꽂혔다. 보고 싶으면, 직접 불러서 그의 눈앞에 앉혀놓으면 될 일이었다.
“문 비서.”
제아를 부르는 도준의 음성은 나직하지만 힘이 있었다. 그의 음성을 들었는지, 제아가 드디어 그를 돌아보았다.
정확한 목적을 담고 있는 도준의 눈빛과 영문을 모르는 제아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10분 후에 집무실로 오세요. 유 실장이 부재라 업무 보조가 필요하니까.”
“사장님 업무 보조라면 제가?”
눈치도 없게 끼어드는 신 비서에게 도준의 서늘한 시선이 꽂혔다.
“신 비서는 꽤 많이 바쁜 걸로 아는데. 아닙니까?”
아니라고 대답했다가는 업무 태만으로 쫓아내버릴 눈빛이었다. 비서실 일은 넘치고도 남았으니까.
밀폐된 한 공간에서 사장을 마음껏 보려는 욕심을 신 비서는 하는 수 없이 접어야 했다.
정확히 10분 후 제아는 집무실 안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도준의 레이더망 안에 말이다.
착각인지 몰라도 서류를 정리하는 손길을 멈추고 고개를 틀 때마다 도준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멀쩡한 집무 책상을 놔두고 맞은편에 위치한 소파에 앉아서 말이다.
도대체 일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눈빛이 너무 집요하고 뜨거워서 서류를 정리하는 손이 자꾸만 떨려왔다. 결국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나서야 제아가 톡 쏘아붙였다.
“그만 좀 보면 안 돼? 일을 못 하겠잖아.”
“어젯밤 내 품에 안겨 있던 여자가 너인 것 같아서, 말이야.”
제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설마, 다 기억하고 있는 거야? 분명 눈조차 제대로 못 뜨고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그, 그건 오빠가 아파서 어쩔 수 없었어!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
“오해는 안 해, 단지.”
“……?”
“좋아하는 여자가 눈앞에 있는데 만질 순 없으니.”
탁―.
도준이 사인을 휘갈긴 결제안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스윽, 무릎 위에 양 팔을 올린 채 테이블 위로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 왔다. 조금이라도 제아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듯.
“눈으로라도 실컷 보고 싶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