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29화 (29/104)

29. 벗은 몸으로 다가오지 마!

2016.12.12.

인호의 그 한마디에 제아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설마, 도준에게 정말 첫사랑이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그의 첫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도준이 책임감과 사랑을 헷갈려 하는 건 아닐까?

다행히도 인호는 제아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운전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문 비서는 알 것 같아서 묻는 거예요. 한 사장이 항상 목에 걸고 다니는 반지가 있어요. 클로버 무늬가 새겨진 오래된 반지인데 딱 봐도 여자 거거든. 내가 또 그런 거 보는 눈은 기가 막힙니다. 미국에 오기 전부터 하고 있던 것 같은데 샤워할 때 빼고는 항상 목에 걸고 있는 게 분명 첫사랑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그 개차반 성격이 그렇게 소중히 간직할 리가 없잖아요?”

클로버가 새겨진 반지라면, 그녀의 목에도 걸려 있었다. 사라져버린 그녀의 반지 대신 놓여있던 반지. 제아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만 겨우 내쉬고 있었다.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온갖 의심들이 반지 이야기에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점멸해버렸다. 그 반지를…… 오빠가 가지고 갔었다니.

때마침 신호가 걸려서 인호가 드디어 시선을 틀었다. 도무지 대답 한마디 돌아오지 않으니 궁금했던 것이다.

“어? 문 비서 목에.”

빨대를 입에 문 채 제아도 멍하게 시선을 틀었다. 그런데 인호가 목 언저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블라우스 사이로 반지가 기어 나왔나? 반지? 반지를 본 건 아니겠지?

얼마나 놀랐는지 갑자기 숨을 들이쉬는 바람에 아이스티가 입 안으로 넘치게 흘러 들어왔다.

“컥, 컥컥! 콜록, 콜록!”

제아가 콜록거리자 인호가 얼른 손수건을 내밀었다.

“문 비서, 괜찮아요?”

기침을 토해내면서도 고개를 숙이자 목걸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주 얌전하게 그녀의 가슴골 사이에 잘 숨겨져 있었다. 그럼 도대체 왜?

제아가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 의미를 알아챘는지 인호가 씩 웃으며 잽싸게 손을 뻗었다 거두었다.

“머리카락 떼어주려고 한 거니, 오해 말아요.”

“아, 네…….”

“내가 세상 모든 여자들한테 작업해도 문 비서한테는 절대 안 합니다. 한 사장 같은 오빠가 있는 여자라면…… 어후, 상상도 하기 싫어요.”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제아 자신이 딱 그 꼴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무리 지금은 완벽하게 남남이라고 해도 과거에, 그것도 오랫동안 남매 사이였던 둘이었다.

그런 둘의 복잡 미묘한 관계를 고운 시선으로 바라봐 줄 이들은 한국에서 흔치 않으리라. 자유분방한 외국이라면 모를까.

무엇보다 도준이 유일하게 믿는 이가 인호라를 걸 알고 있는 그녀였다. 그런 인호가 도준을 이상하게 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문 비서 얼굴색이 창백해요. 어디 아픈 거 아닙니까? 당장 병원으로?”

“잠을 잘 못 자서 그래요. 죄송하지만, 저 잠깐 눈 좀 붙이고 있어도 괜찮을까요, 실장님?”

저 지금, 머릿속이 엄청 터져버릴 것 같거든요. 한도준 씨 때문에.

“당연히 괜찮죠! 내가 깨워줄 테니 눈 감고 있어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제아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곤 본능적으로 얇은 블라우스 사이에서 느껴지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문제아, 고등학생이 된 걸 축하해.’

나른하게 웃으며 반지를 껴주던 도준의 모습이 감은 시야를 어지럽혔다.

흠집이라도 날까 봐 샤워를 하거나 잠이 들 때면 항상 반지 케이스에 소중하게 빼놓았던 반지.

그런 반지가 사라진 건 10년 전이었다.

그리고 사라진 반지가 있던 반지 케이스엔 똑같은 디자인의 남자 반지가 놓여 있었다.

그날 처음 알았다. 그 반지가 커플링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 처음 알았다. 그 반지를 도준이 가져갔다는 것을.

도준의 선전 포고가 두 번째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 고백, 진심이야.

부드럽지도, 다정하지도, 달콤하지도 않지만 강렬하게 심장을 뒤흔들었던 도준의 고백이 귓가를 맴돌고 뇌리를 울린다.

다시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린다.

어질어질 현기증이 일어난다.

도준의 마음이 진심이란 걸 알아버린 순간, 가슴에서 시작된 기묘한 설렘이 섬세하게 온몸을 퍼져나갔다.

감당할 수 없는 그의 고백이 심장을 무겁게 내리누르는데도, 불현듯 떠오르는 말도 안 되는 생각.

나, 설마 오빠를 남자로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

자유란 것도 즐겨본 사람이 즐기는 것이었다. 주말까지 빡세게 불려 나와 일을 하던 제아에게 일주일의 휴가는 무의미했다.

무엇보다 할 일이 없으니 자꾸만 복잡해지는 머리 때문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화요일 아침 팀장에게 전화를 한 후에 결국은 오후 출근을 했다.

그녀가 출근하자 다소 의외라는 듯 부서원들이 쳐다보기는 했지만 은근히 반기는 기색이었다.

“제아 씨, 재고 입력 좀 해줄래? 리스트에 있는 재고도 파악해주고.”

“제아 씨, 2015년도 분기별 브랜드 판매 실적 어디에 있지?”

“물류 센터 전화해서 박 과장이랑 통화 좀 해줘봐. 오늘 발송 다 나갈 수 있는지.”

쏟아지는 일거리들, 바쁘게 움직이면서 제아는 생각했다. 대체 오늘 내가 출근 안 했으면 어쩌려고.

그때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박 팀장이 신경질적으로 제아에게 말을 했다.

“문제아 씨, 지금 당장 비서실로 옮길 준비해.”

“가, 갑자기 왜요?”

비서실로 옮긴다는 건, 도준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봐야 한다는 뜻이다.

팀장의 말에 제아처럼 사색이 된 건 바로 부서원들이었다.

아주 잠깐의 시간 공백에 제아의 빈자리를 절실하게 느낀 게 바로 몇 분 전인데, 비서실 발령이라니. 하지만 그걸 윗머리인 박 팀장이 알 리가 없었다.

“인사과 지시야.”

“그러긴 하지만 업무를 같이 겸하는 비서로 저는 인폼 받았는데요.”

“어차피 우리 부서에서야 할 일 없는 거, 본인이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리고 여기 있는다고 누가 비서 일을 가르쳐줘? 이참에 비서실에서 비서 업무 잘 배워서 좋은 기회 놓치지 말도록 해. 누가 아나? 비서실에 말뚝 박을지.”

제아는 박 팀장의 시커먼 속을 알고 있었다.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단정하고 비서실로 보내는 것조차도.

신입 환영회 때 얼큰하게 취해선 내가 팍팍 밀어주지라고 은근하게 속삭였다. 그러면서 다리를 만지려는 손을 매정하게 뿌리친 이후, 박 팀장은 보란 듯이 제아의 앞길을 막아버렸다.

게다가 옥의 티처럼 회사에서 유일하게 학력, 스펙 없는 직원이 자신의 부서원이라는 게 창피했던 박 팀장이었다.

이참에 제대로 옥의 티를 털어버리려는 속셈을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상사 지시에 불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제아는 짐을 바리바리 싸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어차피, 저런 부서 따위 그녀도 미련은 없었으니까.

비서실에 도착하자 구석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책상이 보였다. 제아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비서실의 최고참인 신 비서가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우리랑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온 건 아니지? 우리는 한국대 비서과 출신이거든? 언제 잘릴지 모르는 임시 비서에게 일급 업무를 공개할 순 없잖아?”

회사라면 피할 수 없는 게 바로 학력, 스펙인가 보다. 그럼에도 제아는 싹싹하게 신 비서에게 인사를 했다. 경력에 나이까지, 어느 모로 보나 그녀는 제아의 선배였으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선배라는 호칭이 싫지는 않았는지 조금 누그러진 신 비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짐은 책상 위에 올려두고 바로 지하 주차장 1층으로 내려가 봐. 비서실장님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영문은 모르지만 제아는 책상 위에 짐을 올려놓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를 대고 서 있는 인호가 제아를 반갑게 맞이했다.

“갑자기 불러내서 놀랐죠?”

“조금요.”

“나도 놀랐습니다. 문 비서가 비서실로 출근했다는 말에.”

“집에만 있으려니 좀 쑤셔서요. 할 일도 없고.”

“뭐 잘 된 일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딱 출근해주다니.”

제아는 인호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

“오늘 불러낸 거, 사실은 비서 업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부탁입니다. 괜찮죠?”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요.”

“그런데 문 비서도 한 사장 닮아서 지독한 워커홀릭인가 봅니다. 쉬라고 해도 출근을 하다니.”

“저는 오빠 발끝도 못 따라가요. 뭐든지 한 번 몰입하기 시작하면 집중력이 무시무시해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해요. 학교에서 선생님들조차 도준 오빠 눈치 봤거든요.”

집중력 대단한 자타 공인 그 남자가 지금, 그녀에게 집중을 하고 있었다.

“이야, 그 정도였습니까? 수재는 달라도 확실히 다르네. 그런데 정말 문 비서도 모릅니까, 한 사장 첫사랑?”

아마도 ‘그 첫사랑이, 저인 것 같아요.’라고 차마 말을 할 순 없으니 제아는 그저 마른 침만 꼴깍 삼키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호가 제아를 데려간 곳은 최고급 주상복합건물, 그중에서도 55층인 펜트하우스였다. 대체 여기를 왜 데려왔냐는 눈빛으로 인호를 응시하자, 인호가 말을 했다.

“부탁할 게 이 집 안에 있습니다. 아주 민감하고 예민한 부탁거리.”

카드키를 대고 문을 열자 긴 복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호가 들어가라는 신호를 보내자, 잠시 머뭇거리던 제아는 그 안으로 조심히 발을 들였다.

긴 복도를 지나자마자 전망이 빵 뚫린 통유리가 보이고 운동장만큼 드넓은 공간과 최고급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대리석 바닥을 밟으며 거실에 다다른 제아의 시야 끝에, 가죽 소파에 시체처럼 길게 늘어져 있는 남자가 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설 때마다 또렷해지는 남자의 눈부신 정체.

아름다운 뱀파이어처럼 창백한 얼굴로 소파에 쓰러져 있는 남자는 바로 도준이었다.

아직 그를 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당혹스러운 제아의 눈빛이 잠이 든 도준의 얼굴에 닿았다.

“한 사장, 자는 것 같죠? 그런데 기절한 겁니다.”

“……네에?”

무슨 말이냐는 듯 제아가 돌아서자, 인호가 머쓱한 웃음을 날렸다.

“밤바다에 빠졌을 때부터 몸살감기가 온 것 같아요. 그런데 내색을 안 하니 알 수가 있나. 그 몸으로 오늘 아침 스케줄까지 다 소화한 후에 저렇게 기절한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인호가 은근한 웃음을 지으면서 제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인호의 눈빛에 제아는 문득 불안함을 느꼈다.

“오늘 하루만. 시름시름 앓고 있는 야수 한 마리 부탁 좀 해도 되겠습니까?”

“저보다는 병원, 가야 할 것 같은데요.”

제아는 아직 그와 전투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타들어가는 그녀의 속도 모르고 인호가 말을 이었다.

“내 말은 통 듣지를 않아요. 그래도 한 사장을 쉽게 주무르는 사람이 문 비서 말고 더 있습니까?”

인호의 말에 제아는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난 네게 쉬운 남자, 도준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친 것이다. 정말 나만 모르고 있었구나. 하다못해 몇 번 본 인호까지 알고 있는 걸.

살짝 치켜 올라간 아몬드 형 눈꼬리와 고집스러운 턱 때문에 고양이 같다, 여우 같다고 많이 들었다. 그런데 실상은 아주 둔하디 둔한 곰이었다.

“병원도 싫다, 집에서 쉬는 것도 싫다. 아마 조금 있다가 일어나면 또 일하려고 달려들 겁니다.”

“…….”

“문 비서, 내 부탁 거절할 겁니까?”

거절하기에는 며칠 만에 핼쑥해진 도준이 미치도록 마음에 걸렸다. 눈을 뜨고 있을 땐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단신으로 상대할 듯이 도도하고 당당하더니만.

기절하듯이 눈을 감은 모습은 또 왜 이렇게 앳되어 보이고 안쓰러워 보이는지.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제가 뭘 하면 되죠?”

“역시! 우리 한 사장 걱정하는 사람은 문 비서밖에 없습니다!”

이젠 오빠한테 저 말고 진짜 가족이 있잖아요. 하지만 제아는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컨벤션에서 마주쳤던 가족보다 못한 강훈이 떠올라서. 그래도 어머니는 좋은 분이라고 했으니까.

“그냥 오늘 하루 푹 쉬게만 해주십시오. 워낙 체력이 좋으니 하루 푹 쉬면 아주 멀쩡해질 겁니다. 한 사장이 빨리 회복해줘야 나도 숨통이 트이거든요.”

인호에게서 도준의 집 카드키와 신용카드까지 받았다. 한숨을 푹 내쉬며 건물에 있는 마트에 들러 간단히 장을 본 제아는 아무 생각 없이 카드키를 찍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도준이 누워 있던 소파가 텅 비어 있다.

“설마, 그 몸으로 일하러 나간 건 아니겠지?”

급한 마음에 제아는 방마다 문을 열고 도준을 찾기 시작했다. 도준의 성격을 떠올리며 유추해 보건데 드레스 룸에 있을 확률이 컸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만큼 방 수도 꽤 많았다. 세 번째 만에 드레스룸을 찾아낸 제아는 문을 벌컥 열었다. 그녀의 집만 한 넓이의 드레스룸을 꽉 채운 고가의 옷과 액세서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잡지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명품 브랜드로 꽉 차 있는 드레스 룸의 환상적인 자태에 홀린 듯이 그 안으로 들어섰다.

무엇보다 드레스룸 안의 공기에 도준의 체향이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향수도 안 쓰는데 오빠한테 참 좋은 냄새 나는 거, 오빤 모르지? 그걸 체향, 체향이라고 한 대.’

오래전 그녀가 했던 말. 10년이나 흘렀지만, 체향은 변하지 않았나 보다.

대체 이 향기는 어디서 나는 걸까?

코를 킁킁거리며 두리번거리는 제아의 시야에 무언가 들어왔다.

드레스룸 가운데에 배치되어 있는 유리 진열장 위에 놓인 목걸이.

새하얀 조명을 받고 은근하게 빛을 내는 목걸이의 펜던트는 마치, 반지처럼 생겼다.

―한 사장이 항상 목에 걸고 다니는 반지가 있어요. 클로버 무늬가 새겨진 오래된 반지인데 딱 봐도 여자 거거든.

거리감이 꽤 있어서 가까이 가서 봐야 정확히 알 것 같다. 저 반지 모양의 펜던트가 정말, 몇 개월 동안 제 손가락을 차지하고 있던 그 반지가 맞는지.

그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두근두근, 터질 것처럼 뛰었다.

다가서는 마음은 반반이었다.

차라리 그 반지가 아니었으면.

아니 차라리…… 그 반지였으면.

발걸음을 떼는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돌아본 제아는 후다닥 도망치듯이 뒷걸음질을 쳤다. 등 뒤에 딱딱한 무언가 닿는 순간, 위태로운 발걸음에 제동이 걸렸다.

샤워를 마친 듯, 아찔한 치골에 아슬아슬하게 타월을 두른 도준이 문가에 서 있었다.

머리칼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또르륵, 선명하게 파인 날렵한 가슴팍을 가르고 흘러 내렸다.

슈트를 입었을 땐 모델처럼 호리호리했는데, 헐벗은 상체는 매끈하고 탄탄했다. 눈을 뗄 수 없는 환상적인 남자의 몸체였다.

섹시한 치골 선에서 시선을 좀 더 올리니 선명하게 갈라진 배 근육이 보인다. 식스……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지금 머리가 멍해서 그런지 이것마저 떠오르지 않았다.

좀 더 시선을 들고, 또 들고…… 그러다가 그와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도준에게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새하얘져 버렸다.

나른한 듯하면서 또렷하고, 서늘한 듯하면서 뜨겁고, 섬세한 듯하면서도 광포한 짙은 눈동자…….

그 눈동자가 찌르듯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반나체는 그녀가 아닌 도준이다. 그런데 헐벗은 건 본인인 듯 민망하고 창피한 건 제아였다. 그에 반해 도준은, 너무도 당당하고 도도했다.

확 떼어버려야 하는데, 도무지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때, 도준이 자비심 없는 걸음걸이를 옮겼다.

“버, 벗은 몸으로 다가오지 마!”

경고를 날렸는데도 당겨지는 거리에 거침이 없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다비드 상을 차마 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바닥에 내리꽂는 순간, 제아의 한쪽 손목이 완력에 의해 확 당겨졌다.

격하게 숨을 들이쉬자 물기 젖은 아찔할 체향이 공격적으로 후각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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