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세컨드 따위, 절대 안 할 거야.
2016.12.08.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은 그 한마디에 제아는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실낱같은 이성을 놓지 않게 해준 건 바로, 감은 눈 사이로 아른거리는 부모님의 얼굴이었다.
물 밀 듯이 밀려오는 윤식의 사고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책임감.
도준을 사랑한다는 건 부모님에게 불효를 저지르는 짓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도대체 오빠 같은 남자가 뭐가 아쉽다고 나를.’
고백에 대한 대답보다는 의심만 되고 의문점만 들 뿐이었다.
그의 고백에 심장이 떨리기는 했지만, 기쁘지는 않았다. 재벌남이 고백했다고 넙죽 받아먹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건 아직 도준에 대한 감정이 위험한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대로 도준을 남자로 느끼고 있다고 해도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도준이 못한다면 그녀라도 확고하게 그어주어야 했다. 그와 그녀 사이의 넘어서는 안 될 38선을.
“나한테 한도준은 오빠야. 앞으로도 쭉.”
도준이 손을 뻗었다. 제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문에 더욱더 몸을 바싹 붙였다.
악마처럼 조종하는 마성의 눈빛도 문제지만, 묘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손길도 만만치 않았다.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그의 손길이 제아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올려주었다.
섬세하게 흘러내린 손길이 허리선에서 출렁이는 머리칼의 끝까지 어루만졌다.
“단정 짓지 마. 앞일은 모르는 법이니.”
“……!”
“내가 꽤, 전투적이거든.”
그가 어루만지는 건 머리카락인데도, 피부가 어루만짐을 당한 듯 솜털이 곤두서는 묘한 감각.
“12월은 꽤 고달플 거야. 그러니까 푹 쉬어.”
마지막 울림이 귓속을 파고드는 순간, 머리칼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멀어졌다.
그제야 제아는 후다닥 들어와 문을 쾅, 닫고 휘청거리는 몸을 문에 기댔다. 극심한 혼동이 일어났다.
뒤죽박죽 꼬여버린 머릿속, 제어가 되지 않는 심장, 일렁이는 마음.
느닷없이 치고 들어온 도준의 고백에 모든 게 헷갈려지기 시작했다. 혼동이 일어났다.
오빠인지, 남자인지.
옛정인지, 사랑인지.
거짓인지, 진실인지.
자쿠지 욕조에 거품을 가득 띄우고 아로마 향을 풀었다. 따스한 물에 몸을 푹 담근 채 제아는 생각에 잠겨들었다.
10년 전 이준의 고백이 진심이었다면, 그건 그녀가 첫사랑이라는 뜻이리라.
그리고 남자들은 첫사랑을 못 잊는다고 했다. 정복하지 못한 여자일수록 더욱더.
그 말인즉슨, 버티면 버틸수록 도준이 더 불타오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고도 남을 성격이니까.
그렇다고 무너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설마 도준과 같은 마음이 된다고 해도 결국 돌아오는 건 버림 또는 세컨드이겠지.
한 번은 버림받았지만, 두 번은 받지 않으리라. 그리고…….
“세컨드 따위, 절대 안 할 거야.”
결혼 따로, 사랑 따로 한다는 재벌가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서 은밀한 그림자에 숨어 지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
***
예상보다 너무 빠르게 제아에게 고백을 해버렸다. 진심을 말해버렸다. 그럼에도 도준은 조금의 후회도 하지 않는다. 좀 더 신중을 기할 뿐.
‘문제아, 지금 꽤 머릿속이 복잡하겠지.’
평소에는 온순하지만, 고집을 세우는 순간 통제 불가능한 문제아라는 걸 알기에 생각할 시간을 주기로 했다.
복잡하게 뒤엉켜 있을 생각들을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결론이 나오리라.
원망하고 미워한 만큼.
죽을 걸 각오하고 밤바다에 뛰어들 만큼.
내가 너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정확히 오전 9시, 객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인호가 들어왔다. 도준의 연락을 받자마자 만사 제쳐두고 부산으로 내려온 것이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감히 어떤 자식이 한 사장을?”
씩씩거리는 인호에게 진정하라는 눈짓을 보내며 도준이 물었다.
“설마, 빈손으로 내려오진 않았겠지?”
“나를 뭘로 보고.”
인호는 그제야 표정을 싹 바꾸면서 도준에게 파일을 내밀었다.
주어진 시간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서울에서 몇 시간 만에 내려온 인호의 업무 처리 능력은 탁월했다.
사건에 대한 걸 간단히 알려주었을 뿐, 특별한 지시를 내리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척척 일처리를 했고, 남은 건 그의 결정뿐.
도준이 파일을 덮자 인호가 씩 웃으며 묻는다.
“그 건물, 매입하러 갈 거지?”
도준은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산 경찰서 근처의 커피숍 안, 남자는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눈앞의 도준을 바라보았다.
오토바이로 위협을 한 자신까지 옆구리에 꿰차고 물 위로 솟아오른 도준이 꽤 두려운 모양이었다.
게다가 멱살을 잡고 달려들어도 모자랄 판에 오후 늦게 나타난 여유로움까지 남자를 두렵게 만들었다.
“왜 데리고 나왔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시간 끌어도 자백한 내용은 변함없습니다. 술 먹고 홧김에 저지른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대로 해요. 합의금 같은 거 낼 능력도 안 되는 거지니까.”
에스프레소를 음미하던 도준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자, 남자는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남자가 봐도 숨이 탁 막힐 정도로 완벽하게 아름다운 얼굴에 말문이 막힌 것이다.
도준의 새하얀 뺨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긁힌 자국, 그걸 본 남자는 명작 그림에 스크래치를 낸 것 같아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아름다운 얼굴과 달리 범접할 수 없는 광포한 아우라가 흘러나오는 도준의 모습에 남자는 생각했다. 내가 뭔가를 잘못 건드렸구나.
길고 우아한 손동작으로 짙은 커피를 입에 머금은 도준이 남자를 단번에 끌어내릴 한마디를 무심하게 내뱉었다.
“주영 플라워.”
그 한마디에 남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내가 오늘 사들인 건물 1층에 있더군. 서류 처리가 되지 않았으니, 정확히는 내일부터 일 테지만.”
남자의 앞에 계약서를 내민 인호는 유유히 커피숍을 나갔다. 저 남자가 한 사장에게 술술 부는 시간은 5분이라고 생각하면서.
“꽤 착하더군. 여자의 부모 수술비도 마련해주고 꽃 집 보증금까지 마련해주고.”
“이, 이봐요!”
순간 서늘하게 돌변한 도준의 눈빛.
“내 말 아직 안 끝났으니 입 다물어.”
“……!”
“돈의 힘은 굉장해. 깊숙하게 꼭꼭 숨겨놓은 약점을 몇 시간 만에 찾아낼 수 있으니 말이야. 네가 돈 몇 푼에 날 해치려 했던 것처럼.”
고집스럽던 남자는 도준이 틀어쥔 약점 때문에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주영 플라워가 옮겨가는 건물마다 내가 다 사드릴 작정이야. 아주 저렴하게 사서, 아주 비싼 보증금을 요구할 생각이고. 이주영이란 여자의 소박한 꿈인 꽃집이 절대 이루어지지 못하게 말이야.”
“주영인 이 일이랑 상관없어! 고소하라고 하잖아! 나한테 콩밥 먹이라고 하잖아!”
무너져 내린 남자에게 도준은 그제야 느긋하게, 그리고 짧고 간결하게 물었다.
“그럼 이번엔 내가 묻지.”
“……?”
“나는 그렇다 치고, 내 여자는, 너랑 상관있었나?”
“……!”
“생판 모르는 나를 오토바이에 갈아버리려 했으면, 나 혼자 있을 때를 노렸어야지.”
“여, 여자는 다치게 할 생각이 없었어요! 정말입니다!”
냉랭한 눈빛과 달리 붉은 입술 끝에 희미한 비소가 어렸다.
“네 앞날은 궁금하지 않아. 삶에 힘들어하는 네 여자를 지켜보는 심정은 똑같을 테니 말이야.”
도준이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의 예상대로 남자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제, 제발! 주영인 건들지 말아요! 부탁합니다! 다 말할게요!”
도준이 커피숍을 나온 순간 젊은 여자가 경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달려들어 그의 바지자락을 움켜잡고 늘어졌다.
“우리 오빠, 한 번만 봐주세요! 오빠한테 받은 돈 다 돌려드릴게요! 그러니까 제발 우리 오빠 좀 봐주세요, 흑흑흑!”
“아가씨, 이러지 말라니까요? 이분은!”
그때 도준이 손을 들어 무슨 말을 하려는 경찰을 저지했다. 여자를 향해 몸을 숙인 도준이 나직하게 말을 했다.
“더 애달프게 사정해.”
“……네?”
후드득 눈물을 쏟아내던 여자는 가까이 다가선 도준의 얼굴에 넋이 나가버렸다.
“그래야 네 남자가 자백할 테니까.”
커피숍을 박차고 나온 남자가 도준에게 달려든 여자를 움켜잡고 뜯어냈다. 차마 말을 못하는 주영이란 여자를 품에 안은 남자는 독기 어린 눈으로 도준을 노려보았다.
“돈이 급했어! 그것도 엄청! 그쪽한테는 얼마 안 될 액수겠지만! 그 돈 때문에 내 인생을 팔았어. 됐어, 이 자식아? 오토바이 잘 타는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오토바이 타는 것도 자신 있고, 배신하지 않을 자신도 있어서! 그래서 내가 한다고 했다고!”
분노에 몸을 떨며 받은 돈의 배를 줘도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남자가 모든 걸 술술 토해내고 있었다. 정확히 맞아떨어진 예상이었다.
도준이 남자에게 지시했다. 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맙게 생각하면, 내게 증거를 가져와.”
대기하고 있던 차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던 인호가 스르륵 다가와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남자에게 골드 명함 한 장을 쥐여주었다.
“주저 말고 편하게 연락하십시오.”
그제야 남자에게 다가선 경찰이 혀를 끌끌 차며 진실을 말해주었다.
“좋은 분 만난 줄 알아요. 돈 많은 사람 치고 저런 사람 드무니까. 저분이 고소할 생각은 없다고, 커피나 한잔하고 헤어지겠다고 했으니.”
“그럼 왜, 커피숍을 지킨…… 겁니까?”
“10분만 시간 내주면, 경찰서 전체에 커피랑 와플을 돌린다고 하니 겸사겸사 나왔지.”
남자는 뭔가에 단단히 홀린 표정이었다. 커피숍에 들어선 순간부터 저 남자에게 술술 불어버린 지금까지 정확히 소요된 시간이 딱 10분이었다.
남자는 차에 올라타려는 도준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갔다. 격하게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왜죠? 대체 왜, 고소하지 않는 거죠?”
“1초의 판단력이 널 구했다고 생각해.”
잔뜩 애가 타도록, 두려움에 떨도록 몰아붙인 건 고소를 하지 않는 대신 그가 내린 마음의 벌이었다.
고마워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도준은 기꺼이 그 답을 알려주었다.
“내 여자를 피해서, 오토바이를 몬 것 말이야.”
남자는 돈을 받고 사주 받은 대로 남자만 다치게 하려고 했을 뿐, 관련이 없는 여자는 다치게 할 생각이 없었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떨어진 걸 보고 안심했는데. 그런데 여자가 갑자기 오토바이 앞으로 달려드는 바람에 당황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여자를 피해 오토바이를 틀었을 뿐인데.
“감사합니다. 다시는, 나쁜 짓 안 하고 열심히 살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차 문을 열고 차에 오르기 전 도준은 남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툭, 내던졌다.
“그렇게 오토바이를 몰아서는, 위협을 주지 못해.”
“……네?”
상체를 살짝 기울여 남자에게 나직하게 뭔가를 말해준 도준은 차에 올라탔다. 서서히 멀어지는 수입 검은 세단을 바라보며 남자는 어젯밤에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오토바이에 대해 아주 잘 아는 남자이니, 오토바이를 아주 잘 모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저런 남자가 세단이 아닌 오토바이를 모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도준이 차에 오르자마자 인호가 물었다.
“한 이사님은, 그냥 둘 거야?”
딱 봐도 강훈의 짓이었다. 부산 컨벤션에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강훈이 벌인 옹졸한 위협 따위, 먹히지도 않았지만.
“일 크게 키울 필요 없어. 한강훈이 노리는 게 그거니까. 내가 다치거나, 아니면 한 회장님이나 어머니에게 내가 통제를 당하거나.”
“그래도 너무 괘씸한데?”
“지금 당장 조일 생각이 없을 뿐이야. 느긋하게 기다렸다가 방심했을 때, 확 조여야지.”
“아까 그 남자한테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해?”
주영 플라워의 보증금을 아예 없애라고 지시해준 상태였다. 주영 플라워는 거저먹는, 세입자나 마찬가지였다.
받은 고통의 배로 돌려주었다. 자비라는 이름을 띤 무언가로 말이다. 그 대신, 건물주라는 이름으로 언제든지 숨통을 틀어쥘 끈도 놓지 않았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연락 올 거야.”
작은 것 하나까지도 철저하게 파악하고 계산해서 움직이는 도준이었다. 그런 도준의 판단을 인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받은 것의 몇 배로 돌려주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저 모난 성격이 웬 오지랖? 자비?
“피도 눈물도 없는 한 사장이 웬일이실까. 동병상련이라도 느낀 거야?”
“그럴지도.”
돈에 인생을 팔아 하나뿐인 의붓동생을,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려고 했던 남자.
그 남자의 얼굴 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그 시절의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거기가 무슨 걸어 들어가는 얄팍한 바닷가야? 죽이려고 달려든 오토바이도 아니라면서 뛰어들긴 왜 뛰어들어? 죽고 싶어 환장한 놈처럼.”
“죽을 마음 없어, 조금도.”
“거친 파도까지 너한테 반해서 네 명령에 껌뻑하는 줄 알아? 제발 무모한 짓 좀 하지 마.”
“부두 쪽으로 바람이 부니, 바다 쪽으로 밀려 나갈 확률은 적겠지. 파도에 쓸리지 않고 매달릴 위치도 파악했고.”
“그래, 너 잘났다! 잘난 너야 그렇다고 치고. 그럼 제아 씨는 왜 뛰어든 거야? 설마 제아 씨도 그런 거 계산할 줄 알아?”
대답은 당연히 노우.
하지만 도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제아는 자신처럼 냉철하지도 계산적이지도 않다. 순수하게, 어떻게든 그를 구해보겠다고 뛰어들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자였다. 내가 살아 있음을, 내가 살아야 함을 깨닫게 해주는 유일무이한 존재이니까.
“이런 거 보면 남매 맞네. 아주 둘 다 미쳤어!”
지극히 정상적인 인호의 멘탈로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수다스러운 인호의 입이 닫히자, 그제야 도준은 피곤한 눈을 잠시 감았다.
밤바다에 빠져든 이후로 뜨거운 피가 그의 몸에서 아직까지 잔류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
집요하게 들리는 벨 소리와 노크 소리에 제아가 잠에서 깨어났을 땐 벌써 늦은 오후였다.
푹신한 침대에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아침이 밝아오는 걸 본 후에야 잠이 든 것도 같다.
찾아올 사람이 도준밖에 없기에 쉽사리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심호흡을 내쉬고 문을 연 순간 제아는 제 눈을 의심했다. 그녈 잠에서 깨운 사람은 도준이 아닌 인호였다.
“한 사장이 바빠서 내가 대신 왔습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호의 손엔 도준이 알려줬는지 그녀가 좋아하는 달달한 복숭아 아이스티가 들려 있었다.
갑작스러운 인호의 등장이 당혹스럽긴 했지만 도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했던 제아로선 차라리 다행이었다.
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 인호가 생글거리며 부럽다는 듯 말을 했다.
“문 비서, 내일부터 일주일 간 포상 휴가입니다.”
“포상 휴가라니요? 한 것도 없는데.”
“비서 업무부터 메일로 보내준 보고서까지 아주 완벽했어요. 초짜 비서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척척 아주 잘 해냈습니다. 나 빈말하는 사람 아니니 믿어도 돼요.”
인호의 솔직한 칭찬에 제아는 배시시 웃었다.
“원래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뭐. 휴가 없어도 되니 그냥 출근할게요.”
“한 사장 지시예요. 한 사장 구하겠다고 밤바다까지 뛰어들었으니, 포상휴가 받을 만합니다.”
제아는 문득 새벽에 도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12월은 꽤 고달플 거야. 그러니까 푹 쉬어.
12월이 되기까지 남은 일주일, 도준의 선전포고 중 하나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인호가 제아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딱 봐도 새 거, 그것도 최신형이었다.
“한 사장이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문 비서 핸드폰, 본인이 박살 내서 사주는 거라고. 문 비서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대단해요, 어떻게 그 여리여리한 몸으로 바다에 뛰어들 생각을 했습니까?”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난 왜 무모하게 바다에 뛰어들었을까. 그때는 오로지 도준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대답 대신 머쓱한 웃음을 흘리며 제아는 창밖으로 시선을 틀었다. 빨대를 쪽 빨자 시원하고 달달한 복숭아 맛이 입 안을 감돌았다.
“그나저나 문 비서는 압니까?”
“뭐를요?”
제아는 빨대로 아이스티를 쪽쪽 빨며 인호에게 시선을 틀었다.
“한 사장이 마음에 둔 여자 있다고 하던대.”
“……!”
“오늘 한 회장님한테 아주 딱 잘라 말을 하더라구요. 그러면서 약혼 생각 없다고. 근데 내가 10년 동안 지켜본 바로 한 사장이 여자를 만나는 꼴을 못 봤거든.”
죄라도 지은 것처럼, 제아는 저절로 눈을 내리깔았다.
설마, 아닐 거야.
당혹스러움을 숨기려 애꿎은 아이스티만 쪽쪽 빨아마실 뿐. 그런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림에 가까운 인호의 말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아무래도 그 여자 같단 말이야, 한 사장 첫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