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널 미치도록 자극할 생각이거든.
2016.12.05.
도준이 완벽하게 품에 가두는 바람에 제아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오히려 다친 건 그였다.
바닥에 긁혔는지 새하얀 뺨에 붉은 줄이 죽 그어져 있었다. 손등에도 여기저기 긁힌 흔적이 역력했다.
몸을 반쯤 일으킨 도준이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반대쪽 부둣가 출구에서 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오토바이를 본 순간, 동물적인 육감이 곤두선 것이다.
오른쪽은 바다, 왼쪽은 높은 시멘트벽으로 막혀 있었다. 인적은 드물었고, 부두의 끝이었지만 나가는 통로는 꽤 멀었다.
결론은 제아가 안전하게 몸을 피할 곳이 없다는 것.
‘빌어먹을!’
욕지거리가 새어 나왔다. 그사이 멀어졌던 오토바이가 다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우선은 맨몸으로 저 오토바이를 어떻게든 상대해야 한다.
빠르게 트레이닝 점퍼를 벗으며 도준이 말을 했다.
“핸드폰 줘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아가 내미는 핸드폰을 도준은 벗은 점퍼로 감싸서 손에 돌돌 말아 쥐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은.’
그 생각만이 도준의 머릿속을 꽉 메웠다.
“저 새끼 넘어지면.”
제아를 뒤로 보낸 도준의 꽉 다물린 잇새 사이로 빠르게 말이 흘러 나왔다.
“바로 저쪽 벽으로 뛰어가는 거야. 알았지?”
“오, 오빠는!”
혼비백산한 제아와 달리 도준은 지극히 차분하고 냉철한 모습이었다. 우선은 누구를 노리는지 알 수 없기에 제아와 떨어질 수도, 노출시킬 수도 없다.
그것 먼저 파악해야 한다. 저 오토바이가 노리는 게 누구인지.
“네가 다치면, 내가 못 버텨.”
내 유일한 아킬레스건이 너니까. 아킬레스건이 끊기면, 차분한 이성도, 냉철한 본능도 모두 사라져버린다.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은 채 낮게 몸을 숙인 도준은 빠르게 다가오는 오토바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먹잇감을 단번에 낚아채려는 독수리가 낮게 하강하는 것처럼.
제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도준의 옷자락을 꼭 움켜잡았다. 오토바이가 어디까지 왔는지는 모른다. 그저 귀에 들려오는 소리로 가늠할 뿐. 조심히 그의 뒤에서 고개를 내미는 순간 도준이 외쳤다.
“뛰어!”
자신과 붙어 있으면 도준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제아는 죽어라고 달렸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달리면서 돌아보는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녀는 뜀박질을 멈추었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오토바이를 아슬하게 피한 도준이 점퍼로 오토바이를 탄 남자의 헬멧에 휘두른 것이다.
타악!
단단한 핸드폰을 감싸서 그런지 어딘가가 깨지는 소리가 난 것도 같다. 도준을 비껴나간 오토바이는 조금 달리다가 이내 쭉, 미끄러져버렸다.
그런데 비틀거리며 일어난 남자가 금이 간 헬멧을 고쳐 쓴 채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그리고 아주 정확하게, 그녀가 아닌 도준을 향해 다시 속도를 냈다.
그걸 깨닫는 순간 더 생각하고 말 것도 없었다. 지극히 평범한 본능이 민감하게 반응을 하며 그녀의 뇌에 명령을 내렸다.
‘달려. 벽이 아닌, 그에게로.’
풀렸던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도준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거의 본능이었다.
어떻게든지 도준에게로 달려드는 오토바이의 진로를 방해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시간을 벌면, 똑똑한 오빠가 어떤 수를 내겠지.
그에 대한 믿음이 없지 않는 한, 절대 생각해낼 수 없는 방법이었다.
제아는 사선으로 달려 도준과 오토바이의 중간쯤에 딱 멈추고 서서 손을 양 옆으로 활짝 벌렸다.
“문제아!”
다급한 도준의 부름이 아득하게 귓가를 스쳤지만, 제아는 요지부동이었다.
죄 없는 여자에게 돌진하면 저놈은 미친 놈, 오늘 재수 더럽게 없는 날로 쳐야지. 하지만 그 정도 양심은 있는 놈이라면 그녀를 피해갈 것이다. 피해서 다시 도준에게 가겠지만, 그래도 속도는 좀 더뎌지겠지.
돌아가지 않는 평범한 두뇌를 최대한 쥐어짜서 그녀가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오토바이가 다가오자 그녀는 두려움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다행히도…… 양심은 있는 놈인가 보다. 눈을 감고 있어도 홱 틀어버린 오토바이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걸 보니.
슬며시 눈을 뜨자 예상대로 그녀를 피하느라 오토바이의 속력이 조금 느려진 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토바이는 집요할 정도로 도준을 향해 다시 돌진했다.
위험천만한 상황에 제아는 바짝 입안이 타들어갔다. 급격하게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기분 나쁜 예감에 제대로 숨조차 쉬는 게 힘들어졌다.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 도준이 빠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달려드는 오토바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오토바이와 함께, 오토바이를 탄 남자와 함께.
도준은 부둣가 밑 바다로 떨어졌다.
풍덩―.
밤바다가 오토바이와 도준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소름끼치도록 그녀의 귀를 파고들었다.
“도준 오빠!”
울음 섞인 제아의 비명이 부둣가를 울렸다.
제아가 아는 도준은 물을 싫어했다. 비 오는 날도, 목욕탕도, 수영장도.
그건 도준이 수영을 하지 못한다는 뜻.
흩날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미친 듯이 정착해 있는 배를 향해 내달렸다. 그나마 오르기 쉬운 덩치가 작은 배 위로 힘겹게 오른 제아의 시선이 정처 없이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조끼, 튜브! 뭐든지 있을 거야!’
제아의 머릿속은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새까만 밤바다 밑으로 가라앉기 전에, 도준을 구해야 한다는 것.
이제 막 빠졌으니 아무리 수영을 못해도 아주 잠깐은 물 위에서 허우적거리며 떠 있으리라. 아니, 제발 그러기를 간절히 바랐다.
구해줄 인력을 기다리다간 도준이 물속으로 깊이 가라앉을 것이다. 그리고 가라앉는 순간, 도준도 끝이겠지.
마음이 급해서 그런지 잘 보이는 것들까지 흐릿하게 초점이 빗나갔다. 똑같은 곳을 몇 번이나 눈으로 더듬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드디어 배 구석에 대충 처박혀 있는 튜브와 조끼가 보였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아는 조끼를 몸에 걸치고 튜브에 달린 끈을 팔에 단단히 끼웠다.
그때까지도 멍하게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야속한 커플을 향해 제아는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그만 좀 부둥켜안고 신고 좀 해줘요! 119든, 112든! 아무거나 다 불러줘요!”
커플들도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은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그렇게 멍 때리고 있다가 나 죽으면, 물귀신 되어서 쫓아다닐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커플들을 향한 협박을 마지막으로, 제아는 도준이 빠졌을 지점을 어림짐작해서 내려다보았다.
깊이조차 가늠이 안 되는 바다의 어둠은 오싹할 정도로 공포를 자아냈지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다를 향해 몸을 던졌다.
바다 속으로 잠깐 빨려들었던 몸이 다시 수면 위로 솟아올랐지만 마음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바닷물이 들어간 눈은 따끔거려서 눈조차 제대로 뜨기 힘들었고, 파도 때문에 이리저리 몸이 휩쓸렸다.
미약해지긴 했어도 파도는 파도였다. 파도에 다시 휩쓸리는 순간, 강인한 팔이 나타나 제아의 몸을 휘감아 끌어당겼다.
어둡고 흐릿한 시야에 화가 난 듯한 도준의 젖은 얼굴이 보였다. 끔찍이도 싫어하는 밤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줄 알았던 그는 너무도 차분하게 제 살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해하려고 했던 남자까지 건져 올려서 말이다.
제아를 한쪽 팔로 꼭 붙잡은 채 큰 배가 내린 닻의 사슬 쪽으로 헤엄쳐 가는 도준의 모습에 제아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수영을…… 하잖아?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
닻의 사슬에 매달리고 나서야 도준의 화난 눈빛이 제아의 얼굴에 닿았다.
“문제아, 너 정말.”
얼굴만큼이나 잔뜩 화가 난 그의 음성이 파도 소리에 실려 귀를 파고들었다.
“그, 그러니까 뛰어내리긴 왜 뛰어내려! 난 오빠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그제야 제아의 눈에서 바닷물이 섞인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너무 긴장해서, 너무 두려워서, 너무 무서워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참고 있던 눈물이 봇물 터지듯이 터져버린 것이다.
“수영할 줄 안다고…… 말이라도 해주든가. 씨이…….”
“…….”
“착각하지 마! 억울하고 열 받아서…… 우는 거니까!”
멀쩡하게 살아 있는 걸 봤는데도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제아를 도준은 뚫어지게 응시했다.
‘도준 오빠!’
그와 동시에 ‘풍덩’ 소리가 나는 순간, 그는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두려움이라는 걸 느꼈다.
단연코 최악의 끔찍한 경험이었다. 물론 몇 초 사이에 구명조끼를 입은 제아가 다시 둥실 떠오르긴 했지만.
화가 나는데도,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를 위해 이런 무모한 짓을 할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로지 제아뿐이니까.
손을 뻗어 제아의 눈물을 어루만지며, 도준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나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죽을 놈 아니야.”
내 목숨, 꽤 질기거든. 독한 놈일수록, 끈질긴 법이니.
“그러니까 울지 마.”
독한 놈이라도, 사랑하는 여자 눈물엔 약하거든.
아득하게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연희에게 도준은 데리고 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아들이었다. 도무지 제어가 되지 않는다.
반듯하게 자라주었기에 보란 듯이 한 회장과 한 부회장에게 소개를 했건만, 재벌 3세들보다도 더한, 미쳐 날뛰는 망나니 같은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은 노발대발 화를 내며 한 회장이 미국으로 쫓아내버렸다.
반항하고 싶은 건지, 살기 싫은 건지, 이유야 어찌되었건 미국에서도 한동안 미친 망나니짓은 계속되었다.
느긋하게 웃음 짓는 한태영을 본 연희는 도준에게 최후의 카드를 꺼냈다.
―계속 그 꼴이면 그 돈 회수할 거야. 계약 위반으로.
―계약서 어디에도 그런 사항은 없습니다.
―너와의 계약서엔 없지. 하지만 최윤영 씨와의 계약서엔 존재해. 내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계약 위반으로 이 거래는 없었던 걸로 하기로 말이야.
한 회장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아들은 필요 없기에, 만일을 대비해서 넣은 사항이었다.
―2년 안에 하버드대 입학해. 그 정돈 되어야 내 아버지가 널 인정해주지 않겠니.
이제 곧이곧대로 말을 듣나 싶었다. 그런데 말도 없이 한 회장과 작당을 하고는 그녀에겐 상의도 없이 한국으로 들어와버렸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녀는 그럴수록 냉철하게 생각했다.
너무도 잘 커버린 아들을 다시 손안에 틀어쥐어야 한다. 어떻게든, 약점을 찾아내서. 그래서 사람을 붙였다.
그리고, 약점을 찾은 것도 같다. 아직은 심증일 뿐이지만.
평창동 자택, 이른 새벽인데도 갑자기 들이닥친 김 비서의 보고를 연희는 듣고 있었다. 다행히도 한 부회장은 오늘 못 들어올 것 같다고 연락이 왔다.
“바다에 빠지자마자 저희 쪽 사람이 신고를 바로 해서 출동이 빨랐습니다. 한 사장님도, 그리고 문제아 씨도 모두 무사합니다.”
“배후는?”
“파악해보겠습니다.”
“그냥 내버려 둬. 경미한 사고였으니 도준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한태영 또는 한강훈, 둘 중 하나의 짓일 테니까. 어설픈 걸 보면 강훈이 유력할 테고.
“그 여자랑은, 별일 없었고?”
“문제아 씨가, 한 사장님 뺨을 때렸습니다. 대화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연인들이 다투듯이 평범한 사랑싸움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앞으로도 쭉, 지켜보기만 해. 도준이 녀석 눈치가 보통이 아니니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고.”
“네 알겠습니다.”
김 비서가 나가자마자 연희는 위스키 잔을 들고 창가로 다가갔다. 황량한 잿빛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연희의 입술 사이로 싸늘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재경 씨, 하늘에서 잘 보고 있어요? 당신 아들이 그 여자 딸이랑 연애라도 하려나 봐요.”
***
부둣가 근처에 경찰서와 해양 구조대가 있었는지 몰라도 그들의 출동은 전광석화였다.
빠르게 출동한 덕분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시커먼 밤바다에서 무사히 구조가 되었다. 밤바다가 집어삼킨 건 오토바이뿐. 도준도 제아도, 그리고 오토바이를 탄 남자도 모두 무사했다.
하지만 제아와 도준은 경찰서도 병원도 아닌 호텔로 돌아왔다. 정밀 검사고 뭐고 따뜻한 물로 깨끗하게 몸을 씻고 쉬고 싶은 생각에 그녀가 고집을 부린 것이다. 태어난 이래 오늘처럼 파란만장했던 하루는 처음이니까.
무사히 호텔에 도착했는데도 제아의 마음은 역대급 폭풍이 쓸고 간 것처럼 난장판이었다. 게다가 이 날씨에 밤바다에 다이빙이라니. 늘어진 파김치처럼 몸에 힘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만신창이가 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버린 것이다.
카드키를 대기 위해 몸을 트는 순간, 뒤에서 도준의 한마디가 또다시 심장을 들쑤셔 놓았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넌 빚에서 해방이야.”
이자까지 따박따박 받으려 했던 도준이란 걸 알기에 제아는 제 귀를 의심하며 돌아섰다.
“내 목숨 값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오빨 구한 건 내가 아니야. 난 그냥 짐처럼 뛰어들었을 뿐이지.”
뛰어내려서 오히려 그에게 짐이 되어버렸다. 그냥 부두 위에서 얌전하게 기다릴걸.
“혹시, 보상을 더 원하나?”
“날 뭘로 보고! 그런 의도로 뛰어내린 거 아니거든? 나는! 그러니까 나는!”
오빠가 걱정이 돼서, 오빠가 죽을까 봐. 무서웠단 말이야! 눈에 뵈는 게 없었단 말이야!
그런데 차마 말을 이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말을 맺지 못하고 아랫입술만 깨무는 제아를 도준이 미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말을 했다.
“알아.”
“뭐……를?”
제아는 순간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설마, 또 내 속을 들여다본 건 아니겠지?
“나 때문에 뛰어들었잖아. 내가 걱정이 돼서. 나를 살리려고.”
입으로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표정으로 그렇다는 대답을 그대로 해줘버렸다. 그걸 놓치지 않은 도준이 말을 이었다.
“고백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건가?”
“그래서 뛰어내린 거 아니야! 오빠도 내 성격 잘 알잖아, 오지랖이 태평양인 거. 내 오빠라서 뛰어내린 거지, 진짜 별다른 의미는 없어.”
나도 정말, 별다른 의미가 없었으면 좋겠어. 그게 지금 제아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도준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모든 게 혼란스러워져버렸다. 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던 둘 사이의 균형이 깨져버린 느낌이었다.
뒤죽박죽 엉켜버린 두려우면서도 묘한 감정들, 저돌적으로 아찔하게 치고 들어오는 도준, 그리고 자꾸만 떠오르는 부모님의 얼굴.
미쳐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금의 혼란이라도 내비친다면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올 도준이었다. 그래서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데 살짝 틀어진 옆얼굴이 데일 듯이 뜨거웠다. 짙게 타들어가는 도준의 눈빛이 와 닿은 것이다.
“내가 아직, 오빠라…….”
자존심이 상했는지 나직하게 되뇌는 음성이 서늘했다. 도준이 한걸음 바짝 다가서자 제아는 문에 바짝 붙었다. 손에 들고 있던 카드키가 찍히는 바람에 ‘찰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지만 그가 손을 뻗어 열린 문을 다시 닫아버렸다.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문 양쪽에 손을 짚는 바람에 갇혀버렸다. 서로가 비릿한 바다 냄새를 풀풀 풍기며 흠뻑 젖은 상태인데도 이상하게도 심장은 떨려온다. 그래서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감정을 그에게 들킬까 봐.
내리깐 제아의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걸 눈에 담으며 도준이 말을 했다.
“그럼 더 버텨보든지.”
“……?”
“나를 남자로 느낄 때까지, 내가 널 미치도록 자극할 생각이거든.”
도준의 도발에 제아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 순간 도준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스르륵, 젖은 머리칼과 젖은 눈빛을 한 치명적인 얼굴이, 오묘하게 고개를 비틀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있어도 도준은 완벽하게 매력적인 남자였다. 그런데 자신의 매력을 정확히 알고 있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도준의 얼굴은 반칙이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문제아.”
그의 음성은 더 이상 무심하지도, 냉랭하지도 않았다. 지면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나직하게 울리는 부드러운 음성이 이름을 머금는 순간, 제아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그때, 귓가에 바짝 붙은 숨결이 아찔하게 속삭임을 이었다.
“나란 남잘 사랑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