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본능에 사로잡힌 남자는 폭주하는 짐승일 뿐
2016.12.01.
처음엔 그저 순수한 의도로 머리칼을 쓸어 올려준 도준이었다.
그런데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칼에서 흘러나온 달달한 복숭아향이 은근하게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감질나게 손끝에 스치는 보드라운 피부는 그의 촉각을 자극했다.
쓸어 올린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몽롱하게 풀린 고양이 눈과 살짝 벌어진 입술을 보는 순간, 본능이 이성을 앞질렀다.
머릿속에서 잠깐 떠올린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그 말을 주워 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금 내가 키스하면…….”
도준이 뻗은 손끝이 제아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또 나한테 미쳤다고 할 건가.”
짜악―.
날카로운 소리가 둘 사이를 가르고, 도준의 고개가 옆으로 틀어졌다.
제아의 손이 닿았던 뺨을 손등으로 대충 쓸어내리며 도준이 다시 고개를 틀었다. 온몸으로 격렬하게 그를 거부하고 있는 제아가 보였다.
“오빤 내가 그렇게 쉬운 여자로 보여?”
보드라운 입술 틈으로 쌔근거리는 숨이 꽤 거칠었다.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도준의 눈과 잔뜩 날이 선 제아의 눈이 거센 충돌을 일으켰다.
그 눈을 꿰뚫듯이 깊숙이 응시하는 도준의 입술 사이로 씹어뱉듯이 나직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대체 누가, 쉬운 여자라는 건데.”
넌 내게 유일무이하게 어려운 여자라는 거.
너에게만큼은 내가 유일무이하게 쉬운 남자라는 거.
문제아, 너는 알잖아.
10년이 넘은 지금까지, 너에게 닿는 작은 손짓 하나에도 내 심장이 이렇게 뛰는데. 하다못해 네게 닿는 눈빛조차.
그때 제아의 다음 말이 순식간에 도준을 다시 현실로 끄집어 올렸다.
“장어 효과가 좋다는 건 인정해, 근데 이건 아니잖아.”
“……뭐?”
제아는 지금 도준보다 스스로에게 더 화가 났다. 그의 눈빛 한 번에 스스로 안겨드는 쉬운 여자 취급을 한 도준에게 바보같이 심장이 떨려버렸으니까.
“힘이 솟아나는 장어를 먹고, 키스하는 연인들까지 보니까 모, 몸이 반응을 한 것 같은데 그건 이해해줄게. 그런데 다른 남자는 몰라도 오빠는!”
몸이 반응을 한다는 부분에서 도준은 기가 막힌다는 눈빛과 표정으로 제아를 바라보았다.
“그럼 남자로 봐.”
“……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 이제 완벽하게 남남이야. 뭐가 문제지?”
처음 만났던 그날, 하고 싶은 말이었다.
오빠가 아닌 남자로 봐줘.
아무것도 모른 채 그를 향한 원망과 분노만 쏟아내는 제아를 상대하기란 그도 결코 쉽지 않았다.
10년 만에 나타나서 ‘난 여전히 너에게 미쳐 있어.’라고 고백하면 도망가겠지. 보려고 하지도 않겠지. 미친놈 취급하며 피하기 바빴겠지.
하지만 눈으로 봐버린 이상, 더 이상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오빠 노릇이라는 구차한 핑계를 대서라도 우선 곁에 두려 했다. 강압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치사한 방법을 써서라도.
어둡게 가라앉은 도준의 짙은 눈빛이 제아에게 꽂혔다.
“자유분방한 미국에 오래 있어서 오빤 쉬운 남자가 됐을지 몰라도, 난 아니야! 내가 아무리 남자를 못 만났어도 내 오빠였던 사람이랑 놀아날 만큼 나 그렇게 궁하지 않거든? 그러니까 쉬운 여자 취급하지 마!”
절실히 후회한다는 눈빛으로 휙 돌아서는 제아의 손목을 틀어잡아 돌려세웠다.
치켜뜬 눈매는 섹시했지만, 깨끗한 눈동자는 순수했다. 그래서, 더 그를 미치게 한다.
여우처럼 유혹해놓고, 곰처럼 천진난만하게 나 몰라라 하는 그녀.
섹시한 눈꼬리를 파들거리게 자극하고 싶다. 순수한 저 눈동자에 그를 온전하게 새겨놓고 싶다.
“인정하지. 내가 쉬운 남자라는 거, 말이야.”
순순히 인정하는 도준의 한마디에 잡다한 감정들이 그녀의 마음에서 난잡하게 뒤엉켰다. 그 감정들을 내보이기 싫어 제아는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자존심에 피하기는 싫지만 그의 눈을 마주해서 지금의 감정을 까발릴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쉬운 남자라는 거, 너한테만 해당되는 거 알지 않나?”
푹 떨어진 시야로 도준의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치고 들어와 턱 끝을 잡아 올렸다.
“난 네게 쉬운 남자, 넌 내게 어려운 여자.”
그는 앙증맞은 턱을 잡은 손끝에 힘을 주어 강제로라도 눈을 마주 보게 했다.
“기억해내. 그걸 정해준 게 바로 너잖아.”
이제 조금은, 제아가 알아주었으면 한다. 그의 마음을, 진심을, 심장을.
“그 약속, 난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거든.”
신체 건강한 남자가 음심을 참는다는 게, 본능을 억누른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제아가 알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는 미친놈처럼 참아냈다. 오로지 제아를 떠올리고 또 떠올리면서.
지금 이렇게 눈앞에 두고도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참기 힘든 고통인지.
어린 시절, 타월만 두른 제아를 거실에서 맞닥뜨리고 심장이 쿵쾅거린 그다음부터는 특히 더더욱 말이다.
***
마냥 어렸던 동생에게서 여자의 향기를 맡은 그날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스스럼없이 안겨드는 제아가, 정확히는 제아의 보드랍고 따스한 몸이 지독히도 의식이 되었다.
심장은 자꾸 쿵쾅거리고, 온몸의 감각은 민감하게 곤두섰다. 처음 느껴보는 낯설고 어색한 감정 때문에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결국 그는 이 혼란스러운 감정이 깨끗하게 정리가 될 때까지 제아를 피하기로 했다.
더러운 음심을 품은 채 동생을 보는 건, 오빠로서 최악이니까.
제아를 피해 늦은 밤에 들어간 게 벌써 일주일째였다.
그런데도 수그러들기는커녕 점점 더 또렷하게 형체를 갖추어가는 제아를 향한 감정.
‘빌어먹을.’
하필이면 오늘, 세찬 비까지 쏟아져 내렸다.
버림받은 그날을 떠올리게 하는 날씨, 그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날씨였다.
도준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런데 기분 나쁠 정도로 귓가를 파고드는 빗소리가 어김없이 악몽을 불러왔다.
‘죽어 버려, 죽어 버려, 차라리…… 죽어버려.’
악몽도 모자라 가위에 눌린 그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오는 그때…….
“오빠? 이준 오빠!”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간절한 속삭임에, 이준은 끔찍한 악몽에서 서서히 눈을 떴다. 가슴에서부터 퍼지는 따스한 체온에 옴짝달싹하지 못했던 몸이 자유를 되찾았다.
시선을 내리자, 품에 안겨 걱정스럽게 올려다보는 제아가 보였다.
“또 악몽 꿨어?”
샤워를 했는지 몸에 와닿는 제아의 피부는 촉촉하고 서늘했다. 젖은 머리칼과 몸에서 흘러나오는 농밀한 복숭아향이 그의 후각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또다시 쿵쾅거리는 심장, 후끈 달아오르는 몸.
낯선 감각들이 그의 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런 줄도 모른 채 제아는 소매를 손으로 죽 잡아당겨 땀에 젖은 이마를 닦아주고 있었다. 그 손을 툭, 쳐내면서 이준이 퉁명스럽게 말을 했다.
“어머니가 밤에는 내 방에 들어오지 말랬잖아. 기억 안 나?”
“부모님, 잠귀 어두우시잖아. 그리고 오빠가 끙끙거리는데 내가 어떻게 모른 체해?”
걱정 말라는 듯, 잿빛 어둠 속에서도 제아는 말갛게 웃어 보였다.
그래, 넌 그런 아이니까. 죽으려고 결심한 소년도 모른 체 하지 못하고. 버림받은 강아지도 모른 체 하지 못하고. 죄다 주어오는 게 너니까.
덕분에 세 식구는 네 식구가 되었고, 벼룩이라는 유기견까지 포함해서 결국은 다섯 식구가 되었으니까.
“들키면 맞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그거 몰라?”
“알아. 근데 우리 엄마 진짜 너무한 거 같아. 어떻게 아들을 안 때리고 이렇게 예쁜 딸을 때릴 수가 있어? 오빠 같으면 나같이 예쁜 소녀를 때릴 수 있어? 응?”
알긴 아나 보다. 내 눈에, 네가 미치도록 예뻐 보인다는 거. 너만 예뻐 보인다는 거.
“그래도 어머니가 하신 말씀은 들어야지. 얼른 네 방으로 가.”
“오빤 부모님 말을 너무 잘 들어! 그러니까 만날 나만 나쁜 딸이고, 나만 맞는 거잖아!”
냉정한 도준의 말에 제아는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입술을 삐죽이며 커다란 눈을 또르르 굴리는 제아의 모습은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그의 시야를 파고들었다.
“문제아, 화났어?”
“…….”
“화 풀어. 내가 잘못했으니까.”
잘못한 게 없는데도, 무조건 그는 잘못했다고 한다. 그의 사랑스러운 소녀를 위해서라면. 그제야 다시 웃음을 되찾은 제아는 무방비하게 드러난 그의 품을 다시 파고들었다.
“화 푸는 대신, 오빠가 내 말 잘 들어주기!”
앙큼하게 올라간 고양이 눈매에 담긴 눈동자는 티 없이 깨끗하고 맑았다. 어떻게든 그를 꼬시려고 유혹을 하는 여자들의 눈빛과는 확연히 다른, 범하고 싶은 깨끗함, 맑음.
산뜻한 복숭아향이 났다. 짙은 향수와 화장품 냄새를 풍기는 여자들과는 너무도 다른 깨끗한 체향. 몸과 입술, 하다못해 숨결에도 배여 있는 그 향에 취할 것만 같다.
극히 순수한 의도로 그에게 파고드는 가녀린 체형. 이 몸이 얼마나 아름다운 선을 가지고 있는지, 눈이 아닌 손으로 느껴보고 싶다.
그 모든 게, 이제야 의식이 되었다.
닿기만 해도 쿵쾅거리는 심장. 몸 깊숙한 곳에서 피어나는 열기.
가까스로 제아를 품에서 떼어낸 도준은 동생을 피해 벽에 바짝 몸을 붙였다.
“지금까지 그랬잖아.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고.”
끔찍한 어머니와의 기억 때문일까. 여자들이 끔찍하게 싫은 그였다. 목적을 위해서는 아들조차도 냉정하게 버리고 죽어버리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그가 기억하는 여자였으니까.
그런데 너만은, 달라.
잘 알지도 못하는 그를 살리기 위해 끌어안고 입술 박치기까지 했던 소녀가 어느 순간부터 그의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습관은 그도 자각하지 못한 사이 심각한 중독으로 이어졌다.
어떤 여자를 봐도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 스스로를 남자로서 문제가 있나 심각하게 고민까지 했었다.
그런데 이제야 이유를 깨달았다.
일주일 전, 여자의 몸을 하고 있는 제아를 본 순간 말이다. 어린 동생이 이제 여자가 되어가고 있구나 의식하는 순간, 그의 인생에 오로지 여자는 한 명뿐이라는 걸.
뒤늦게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들어버린 습관, 헤어 나올 수 없는 중독.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이미 미쳐 있는 상태였다.
이래선 안 되는데.
갑자기 밀려오는 짜증스러움에 눈살을 구기는 순간, 제아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향수도 안 쓰는데 오빠한테 참 좋은 냄새 나는 거, 오빤 모르지?”
그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제아는 다시 조금씩 그의 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걸 뭐라고 하는지 알아?”
목을 휘어감은 팔이 조심히 그를 끌어당긴다.
“체향, 체향이라고 한대.”
아찔한 복숭아 향기가 후각을 자극하고 달달한 숨결이 귀를 간질였다. 저릿한 감각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순식간에 맴돌자 그는 눈을 감아버렸다.
“나도 오빠처럼 나만의 향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이미 가지고 있잖아. 너에게서 나는 달달한 복숭아향이, 나를 미치게 하니까. 달달한 속삭임으로 그를 점령한 제아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오늘 아침까지 비 온대. 그러니까 비가 그칠 때까지, 내가 오빠 지켜줄 거야.”
“문제아.”
“내 말 잘 듣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그 입 다물라!”
야무지게 일갈하는 제아의 한마디에, 그의 입술 사이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가 한숨을 내쉬든 말든, 제아는 귀여운 수다를 속살거리기 시작했다.
“애들이랑 놀고 있는데 비가 오는 거 있지? 그것도 세차게 죽죽. 오빠 이런 날씨면 악몽 꾸잖아. 그래서 내가 오빠 이렇게 안아주려고 달려왔어. 난 오빠 수호천사니까, 잘했지?”
말하는 것조차 예쁜 소녀를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그는 절대 이길 수가 없다.
“오늘 또 3학년 선배들이 오빠 선물 잔뜩 주고 갔어. 오빠가 너무 어려워서 말도 못 붙이겠다나 뭐라나. 그래도 난 어려운 오빠가 좋아. 그래야 다른 여자들이 우리 오빠 안 넘보니까. 그러니깐 오빤 앞으로도 항상 어려운 남자가 되어야 해. 알았지?”
그런데 갑자기 고개를 든 제아가 그의 귓가에 바짝 입술을 붙였다. 귀를 간질이는 복숭아 향기의 속삭임에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는지도 모른 채, 제아는 천진난만하게 속살거린다.
“그래도 나한테만은 쉬운 남자여야 돼.”
이미, 쉬운 남자잖아. 너를 보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고, 너랑 닿기만 해도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데. 대체 얼마나 더 쉬운 남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 대신 난, 오빠한테 가장 어려운 여자 할 거야. 오빤 나한테 가장 쉬운 남자, 난 오빠에게 가장 어려운 여자.”
지극히 이기적이고 욕심 가득한 제아의 말, 그는 절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미 발을 뺄 수 없을 정도로 그 말은 지독한 현실이 되어버렸다.
난 네게 쉬운 남자, 넌 내게 어려운 여자.
해맑은 웃음으로 제멋대로 그의 뇌와 심장에 각인해버린 제아는 너무도 쉽게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런 제아를 그는 예전처럼 꼭 안아줄 수 없었다. 그저 둘 데 없는 손을 허우적거리면서 어색하게 굳어 있을 뿐.
닿는 순간 주책없이 쿵쾅거리는 그의 심장과 달리, 일정하게 뛰는 제아의 심장은 너무도 차분했다.
***
제아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한마디에 뇌리를 꽉 채운 어떤 기억 때문에 말이다.
오빤 나한테 가장 쉬운 남자, 난 오빠에게 가장 어려운 여자.
……기억났다. 오래 전 어느 날, 그녀가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아주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말을 갑자기 왜.
혼란스러운 눈을 드는 순간, 아찔한 얼굴이 공격하듯이 훅 다가왔다. 뜨거운 숨결이 소름 돋게 코끝에 와 닿는 순간, 제아는 두 눈을 감아버렸다.
그런데도 도준의 다음 말은 예고 없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래서 생각이 바뀌었어. 키스, 네가 해.”
키스를, 나보고 하라고? 번쩍 눈을 뜨자 이글이글 타오르는 도준의 눈이 바로 있다.
헉, 하고 숨을 급하게 들이마시며 뒤로 몸을 빼는 순간, 도준이 손목을 확 잡아끌었다.
“난 쉬운 남자고, 넌 어려운 여자니까.”
너한테는 쉽게 당해줄 테니까, 나를 한번 유혹해봐.
그 선전포고를 기가 막히게 알아들은 제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눈빛을 여유롭게 받아친 도준이 비스듬히 고개의 각도를 틀었다.
코끝을 떠난 아찔한 숨결이 귓가에 달라붙었다.
“내가 너에게 미친 것처럼.”
내가 미친 듯이 널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나한테 미쳐줘.”
너도 날 사랑해줘.
감정이 메마르고 심장이 얼어붙은 남자의 괴상한 고백이었다. 그런데 그 괴상한 고백을 제아는 찰떡같이도 알아들었다.
서로 한번 미쳐보자.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미친 연놈이라고 했을지 몰라도 적어도 그녀의 귀엔 그렇게 들렸다.
태연한 척하려 해도, 입술이 달달 떨려온다.
예고 없는 고백에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폭주를 하고, 숨도 못 쉴 정도로 폐에 뜨거운 숨이 가득 차올랐다.
“설마, 지, 지금 한 말…… 아니지.”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참 뭣같이도 주어를 생략했다. 그런데 그 말을 도준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나 지금, 고백하는 중이야. 너한테.”
TV를 너무 많이 봤나? 그녀가 아는 고백은 달콤하고 다정하고 부드럽고 간질간질한 설렘이 피어오르는 그런 건데. 하지만 지금 그의 고백은 엄연한 선전포고였다.
고백하는 사람이 아쉬운 게 아니라 고백을 받는 사람이 아쉬워야 한다는 듯. 도준의 모습은 오만했고 조금의 굽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태산처럼 흔들림 없이 솟아서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절은, 용납할 수 없다는 포스로.
도준의 느닷없는 고백을 받은 제아는 문득 그의 몸을 뒤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닝페이퍼처럼 숨겨놓은 쪽지를 들고 읽는 것처럼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고백이라니.
“무, 무슨 고백이 이래?”
제아가 하는 말의 의미를 도준은 안다. 고백답지 않은 고백이란 것.
하지만 제아가 없는 사이 더욱더 피폐해져 감정표현을 잊어버린 뇌가 그의 마음을 온전히 표현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안다. 제아가 알고 있는 고백처럼 그의 고백이 부드럽지도, 다정하지도, 달콤하지도 못 하다는 걸.
“내 고백이 뭣 같다는 거 알아.”
순순히 인정한다.
“그런데, 진심이야.”
그러니까 받아줘.
그의 마지막 한마디가 예리하게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어 깊숙이 박혀버렸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숨이 가빠오고, 얼굴은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온몸은 간질간질, 손과 발이 주책없이 꼼지락거려졌다.
도망가고…… 싶어.
“부드럽고 다정하고 달콤한 고백을 원한다면.”
말을 멈춘 도준이 손을 뻗어 제아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심장이 있는 가슴에 가져다 댔다.
펼쳐진 손바닥 안으로 스며드는 그의 체온과 강인한 심장 박동, 그리고 코끝을 맴도는 아릿한 체향.
“얼어붙은 내 심장, 네가 녹여줘.”
그의 가슴에 올리고 있는 손바닥이 불에 덴 듯 뜨거워졌다.
잡힌 손을 틀어보지만 도준이 더욱더 꼭 움켜잡아 잔뜩 화가 나 있는 가슴 근육을 누르게 했다.
“너만 할 수 있어, 문제아.”
만년설처럼 바짝 메말라버린 내 얼음 심장을 녹여줄 수 있는 건.
제아가 이제 조금 마음을 연 것뿐인데, 그런데 도준은 조바심이 나고 애가 달았다. 제아란 존재가 더욱더 절실해졌다.
내게 너무 어려운 널 범하고 싶어. 그러니까 허락해줘.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는 제아의 입술 사이로 들릴 듯 말 듯한 혼잣말이 흘러 나왔다.
“장어, 괜히 사줬어…….”
쿡, 도준의 한쪽 입 꼬리 끝에 희미한 웃음이 배였다. 그가 장어에 자극 받아서 고백한다고 생각하다니. 이런 걸 보면 아직도 마냥 어린 소녀 같기도 하다.
장어의 효과가 이렇게 크다면, 세상의 모든 장어는 씨가 말라버렸으리라. 남자란 존재는 태어나서 생각이란 걸 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오로지 그 생각밖에 안 하는 짐승이니까.
도발적으로 섹시하다가도 순진무구하고, 또 이럴 땐 귀엽기도 하고. 정말 미치겠다, 너란 여자 때문에.
도준은 상체를 기울이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제아에게 나직하게 일러주었다.
“문제아, 장어의 힘은 입술에서 나오는 게 아니야.”
무슨 소리냐는 듯 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릇한 바다 빛 어둠에 이젠 눈에 착시현상까지 나타났다. 지금 도준의 표정은 야릇하면서도 꽤 심술 맞아 보였으니까.
“궁금하면 밤을 새워서라도 몸소 보여줄 의향 있는데.”
“……?”
“궁금하나?”
그의 눈빛과 표정 말투는 너무도 노골적이고 너무도 짓궂었다. 그런데도 아름다운 얼굴과 웃음이 번진 나른한 눈매는 너무도 매혹적이었다.
화끈 달아오른 얼굴, 터질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간질거리는 묘한 감각들이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관통했다.
“아, 아니! 안 궁금해! 하나도 안 궁금해! 그러니까 나 갈래!”
머릿속이 새하얘져버린 그녀는 도준과 함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때 도준이 갑자기 제아의 손목과 허리를 단번에 낚아채 품으로 끌어당겼다.
고백하는 순간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도준의 무데뽀에 제아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난 아직, 내 감정을……? 오빠를 아직 남자로……?
그때였다.
부릉! 부르르릉!
요란한 굉음이 제아의 고막을 터질 듯이 두드렸다.
순식간이었다. 제아를 와락 품에 안은 채 도준이 옆으로 몸을 날린 것은.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오토바이가 그들이 있던 자리를 짓밟고 지나갔다.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제멋대로 몸이 뒹굴었다.
제아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시멘트 바닥 위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넋을 잃은 표정으로 방금 서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저 자리에 있었다면, 저 바닥이 아닌 우리의 몸이 짓밟혔겠지.
시선을 틀어서 올리자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훑어 내리는 도준의 눈빛이 느껴졌다. 다친 곳이 없는지 상태를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