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키스, 할까?
2016.11.28.
도준은 문득 궁금해졌다. ‘밤 운동’이란 말이 생각하기에 따라 얼마나 아찔하고 은밀한 단어인지, 정말 모르는 걸까? 게다가 리드를 하겠다니.
그때 제아가 손을 뻗어 도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뭐 하는, 짓이야.”
“궁금해?”
이 상황을 즐기는 듯, 제아는 생긋 웃음 지었다.
“내가 리드 한댔잖아. 그래서 납치란 거, 한번 해보려고.”
“……!”
“그러니까 오빤 잔말 말고 나만 따라와.”
지갑도, 차키도 핸드폰도 없이 도준은 말 그대로 옷만 겨우 걸치고 제아에게 납치당해버렸다.
***
30여 분 후, 도준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갈치 시장의 장어 식당에 앉아 있었다.
아찔한 모습으로 유혹해서 당차게 납치한 밤운동의 종착점이 장어 식당일 줄이야.
“이모 연탄불 장어구이 대(大)자 주세요!”
“문제아, 도대체.”
“잔소리할 생각이라면, 그 입 다물라!”
고양이 눈을 뾰족하게 치켜뜨며 제아가 매섭게 일갈하자, 도준은 정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장어에 대한 거부감을 느꼈는지 제아가 달래듯이 말을 했다.
“오빠 하루 종일 굶었잖아. 배 안 고파?”
“굶은 적 없어.”
“아, 그 수두룩한 영양제?”
도준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제아가 그를 향해 픽, 실소를 흘린 것이다.
“그건 밥이 아니라 보충제거든요? 사람이 어떻게 영양제로만 버텨? 밥을 먹어야지, 밥을!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도 안 들어봤어?”
“입맛이 없어서 그래.”
“이건 양념 맛이 진짜 끝내준다고 했다니까? 한 입 먹어보고 별로면 내가 다 먹을 테니까 우선 먹어보는 시늉이라도 해봐. 응?”
“…….”
“설마, 이제 한식 싫어? 미국에 오래 있었다고 양식에 맛 들인 거야?”
“한식, 좋아해.”
시선을 내리자 젓가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 시선을 눈치 챈 제아가 얼른 말을 했다.
“에잇, 까짓 거 오늘 내가 풀 서비스 해줄게! 젓가락질도 할 필요 없어. 내가 먹여줄 테니까 오빤 받아먹기만 해!”
생글생글 웃고, 부드럽게 어르고, 비위를 맞추고. 그에게 장어 한 조각 먹여보겠다고 제아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 제아를 도준은 말없이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사람 뻘쭘하게.”
“오랜만이라서.”
“뭐가?”
“누가 나 걱정해주는 거.”
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오로지 나를 위해, 조금의 사심도 없이 걱정해주는 거.
그가 가장 못하는 것 중 하나인 젓가락질을 해본 게 무려 10년 전이었다.
***
연희의 자택에 들어간 첫 날 아침, 식탁에 모여 앉은 이들은 가벼운 아침 인사조차 없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식탁에 앉아 있지만 분위기는 냉랭했다.
“김 비서가 모두 처리해놓았으니 학교는 갈 필요 없다. 대학도 다 알아보고 있으니, 대학 다니면서 실무 배울 준비나 착실히 하고 있으렴.”
연희의 말에 살짝 인상을 찌푸린 한 부회장이 참견을 했다.
“강훈이처럼 대학은 졸업하고 실무에 뛰어들게 해야지. 경영은 학교 공부랑 달라. 당신은 여자라서 경영에 대해 잘 모르고 있겠지만.”
하지만 그걸 얌전하게 듣고 있을 연희가 아니었다. 그의 말을 중간에 탁, 끊어버렸다.
“아버지랑 끝낸 이야기니 당신은 왈가왈부하지 말아요. 그리고 나, 경영에 참여는 못하지만 제일 그룹 대주주라는 사실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가 익숙한 듯 강훈은 태연하게 아침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이들 앞에서 어설픈 젓가락질을 보이는 건 더 싫었다.
잠깐 들었던 젓가락은 1초도 되지 않아서 다시 식탁 위에 버려졌다.
그가 일어나자, 연희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아침 원래 안 먹니?”
“한식, 좋아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젓가락질을 해야 하는 한식을 그들 앞에서 먹기 싫었다.
“아주머니, 도준이 줄 샌드위치랑.”
“됐습니다. 제가 알아서 챙겨먹을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절대, 이들과 한 식탁에 앉는 일은 없으리라 다짐했다. 영양제만 먹고 버티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러든지.”
그게 끝이었다.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는.
그전에 살던 집보다도 넓은 방,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가구들. 그런데도 그는 심장이 무겁게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학교를 가지 않는다. 대학 진학까지 알아서 척척 진행되고 있었다.
당장 그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마음대로 쓰라며 연희가 손에 쥐어준 한도 없는 골드 카드 한 장뿐.
“넌 아버지 눈에만 들면 돼. 이후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알았니?”
여자는 경영에 참여할 수 없다면, 연희는 아들을 그녀의 아바타로 쓸 생각이었다.
제아의 가족들을 위해 눈을 뜬 순간부터 감는 순간까지 하루를 바쁘게 지내던 그에게 그건 곤욕이었다.
삶의 목적을 잃고 갈피를 잃어버린 방랑자가 된 기분이었다.
다시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기분은 엿 같고, 제아를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다시 벼랑 끝에 몰린 것 기분이었다.
노크도 없이 연희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들어와도 꿈쩍도 하지 않는 아들을 힐긋 노려본 연희의 시선이 협탁 위에 쌓인 영양제로 향했다.
호리호리한 도준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 회장이 비서를 시켜 보낸 영양제였다.
“건강은 끔찍이도 챙기는구나.”
그걸 오해한 연희의 조롱에 도준은 깨달았다. 내가 이렇게 움츠러들면 이 여자는 나를 더 비웃고 조롱하겠구나.
어머니라는 여자를 보며 도준은 결심했다. 보란 듯이 비틀어지고 어긋나주리라. 절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아들이라는 걸, 보여주리라.
***
암울했던 10년 전의 기억을 애써 떨쳐버린 도준은 현실에 치중하기로 했다. 영양제는 보충제일 뿐이라며 한국인의 힘은 밥심이라고 외치는 제아에게 말이다.
이제 나한텐, 제아 네가 있으니까.
그 사이 양념된 새빨간 장어는 불 판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었다.
“왜 하필, 장어지?”
“부산 하면 장어지! 이게 피로 회복에도 좋고, 남자 정…… 흠흠, 여튼 몸에 엄청 좋대.”
뱀의 몸통처럼 생긴 걸 입에 넣고 씹어야 하다니,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다.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도저히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도준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천천히 열었다.
“제아야, 나 장어 못…….”
“웬만한 남자들은 장어 없어서 못 먹는다면서? 지로도 이거 엄청 잘 먹어. 지로야 뭐 가리는 음식이 없다는 말이 정답이만, 그래서 걔가 체력도 좋고 건강하나 봐. 근데 오빠 무슨 말 하려고 했어?”
제아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순진하게 묻자, 장어를 못 먹는다고 말을 하려던 도준의 말은 다시 목구멍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하필이면 한지로를 들먹이다니.
우연이라면 몰라도 고의라면 제아는 꼬리 아홉 달린 곰이나 마찬가지였다. 제아의 입에서 한지로가 언급되는 순간, 빌어먹을 남자의 자존심이 고개를 들어버렸으니.
“맛있어…… 보인다고.”
“오빠가 봐도 그렇지? 초벌구이 한 거라 금방 익어서 이제 먹어도 돼.”
방어할 틈도 없이 무언가가 입으로 쑥 들어오자 도준의 사고가 순간, 정지되었다.
씹지도 못하고 입만 겨우 벌린 채 동상이 되어버린 도준의 모습에 제아는 친절하게도 도움의 손길을 뻗쳤다. 살짝 벌어진 도준의 턱을 손으로 탁 하니, 닫아준 것이다.
“오빠, 그건 그냥 머금고 있는 게 아니라 씹는 거야.”
안다, 너무도 잘 안다. 그래서 더 입이 움직이지 않는다. 뱉어내고 싶은데, 반짝이는 눈으로 제아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준은 하는 수 없이 천천히 입을 닫고 입 안의 장어를 씹기 시작했다.
도준이 첫 장어 시식을 힘겹게 마치자,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제아가 물었다.
“맛이 어때?”
“먹을 만하……군.”
진심이었다. 우선은 매콤하면서도 달달 짭짜름한 양념의 맛이 느껴졌고, 미끄덩거릴 줄 알았던 식감은 꽤 부드럽고 씹는 맛도 괜찮았다.
그래도 한입 이상은 먹고 싶지 않은 메뉴였다.
하지만 제아에게 실망감을 주느니. 욕실에서 변기를 잡고 넘기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장어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치, 맛있지?”
옳지, 우리 오빠 착해라.
장어를 씹는 도준의 표정을 세심하게 지켜보던 제아는 그제야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사실 도준이 비위가 약하다는 것, 징그럽게 생긴 재료로 만든 음식은 먹지 못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물론 그의 식성이 변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그런데도 장어를 고른 이유는 지금 도준에게 가장 필요한 영양소가 장어에 있기 때문이었다.
양념도 매콥 달달 짭짜름한 게 그가 좋아하는 맛이었고. 게다가 장어는 매끈하고 길쭉하게 생긴 게 나름 귀엽기도 하잖아?
피로회복에도 좋을 뿐 아니라, 남자의 힘도 불끈불끈 솟아난다는 장어는 지금 그에게 딱 맞는 음식이었다.
너무 여자를 밝혀도 문제지만 너무 밝히지 않아도 문제니까.
―우리 심쿵 이사, 남자 좋아한다는 소문도 있어.
―말도 안 돼!
―원래 여자보다 더 예쁜 남자들이 잘 그러잖아.
―내로라하는 재벌가 여식들이랑 유명 여자 연예인들 대시도 다 거절했다는데? 그런 남자가 어디 있어?
그 소문을 회사에서 들었을 땐 그러려니 넘겼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조금 찜찜하기도 했다.
체력회복, 남자의 기운 회복! 도준에게 장어를 먹이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 마음도 몰라주고 반찬투정 하는 아이처럼 질색해하는 저 표정이라니.
젓가락을 보았다가, 불판 위의 장어를 보았다가, 뭔가를 고민하는 듯한 심각한 도준의 표정이 또 왜 이렇게 귀여운지.
제아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집어 삼키며 젓가락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렇게 고민이 된다면, 이 동생이 기꺼이 해결해드리지요.
“아, 하세요. 오라버니.”
한쪽 보조개가 깊이 들어가는 눈웃음을 살살 흘리며 오라버니라고까지 부르니, 어떻게 그가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있을까?
두 번째 장어를 받아먹은 도준이 갑자기 어설픈 젓가락질로 장어를 짚었다.
“같이 먹어야지. 너도 아, 해봐.”
예상치 못한 도준의 행동에 당황하긴 했지만, 제아는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그런데 먹여준다는 도준은 미묘한 눈빛으로 제아의 입술을 바라본다.
“붕어가 아니라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갑자기 붕어는 왜 찾으실까. 제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붕어 한 마리가 여기 있는지 몰랐군.”
나도 붕어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 말뜻을 이해를 못한 제아의 표정에, 도준이 피식 웃으면서 말을 했다.
“아, 하라고 했는데,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다니.”
그제야 붕어의 의미를 알아차린 제아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설마, 나한테 내숭 떠는 건 아니겠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아는 입 안의 목젖이 다 보이도록 입을 쩍 벌려버렸다.
“아아아!”
옜다, 내 목젖이나 실컷 봐라!
붕어처럼, 뻐끔했다는 건 인정.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콕 집어서 얄밉게 말을 할 필요까진 없는 거 아닌가?
치솟은 민망함만큼 크게 벌어진 제아의 입 안으로 큼지막한 장어가 쑥 들어왔다. 서로에게 먹이고 먹다보니, 어느새 불판위의 장어는 깨끗이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귀하디귀한 장어 꼬리!
제아의 입맛엔 장어 몸통이나 꼬리나 맛이 거기서 거기였다.
그런데 윤식과 지로가 장어 꼬리에 집착하는 걸 보니 남자들 입맛엔 장어 꼬리가 맛있나 보구나, 라고 단순히 생각했다. 그래서 장어 꼬리를 젓가락으로 들어서 입 앞에 대령해준 건데.
장어 꼬리를 보는 도준의 표정이 미묘했다.
장어 꼬리는, 먹기 싫나?
“먹기 싫어? 이게 가장 맛있는 거랬는데.”
“이거 먹이면, 후회할 텐데.”
“응?”
무슨 말이냐는 듯 도준을 응시하는 고양이 눈은 티 없이 맑고 순수했다. 제아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에게 꼬리를 내미는 것이었다.
이걸 받아먹어, 말아?
깊게 한숨을 내쉰 도준은 제아가 내민 장어 꼬리를 마지못해 받아먹었다.
오늘 밤도 잠자기는 글렀군.
볶음밥까지 두 그릇 뚝딱 한 후에야, 제아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도준이 깨끗하게 비어진 불판을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순간…….
찰칵, 찰칵―.
신경에 거슬리는 소리가 그의 귓가를 민감하게 건드렸다.
비스듬히 고개를 틀자, 옆 테이블에 앉아 그의 사진을 핸드폰으로 몰래 찍고 있는 여고생들이 보였다.
살짝 가늘어진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에 여고생 중 한 명은 놀라서 딸꾹질까지 했다. 그래도 제일 당찬 여고생이 해실해실 웃으며 도준에게 다가왔다.
“서울 오빠야가 너무 잘생겨서 찍은 건데, 괜찮죠?”
다른 남자들이라면 사투리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여고생의 말투가 귀여워서 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도준에겐 여고생의 풋풋함도 소용없었다.
“전혀 괜찮지 않아.”
그가 일어날수록 점점 드러나는 훤칠한 키와 완벽한 신체 비율.
전깃줄에 주르륵 앉은 참새마냥 여고생들의 입에서 ‘어어어’가 터져 나왔다.
“어어어어?”
앉아 있는 옆모습만 몰래 훔쳐보던 여고생들은 정면으로 돌아선 도준의 얼굴을 보자마자 넋이 나가버렸다.
그가 내뿜는 냉기에 덜덜 떨던 여고생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수다가 폭발했다.
“오빠야 완전 잘생겼단 거 아이가! 피부가, 피부가, 완전 우윳빛이다!”
“키도 완전 크데이! 꺄악, 난 몰라. 난 모른다!”
남자들을 사르르 녹인다는 사투리와 ‘오빠야’라는 호칭마저 도준은 거슬렸다.
그에게 오빠라고 부를 수 있는 여잔 단 한 명뿐이니까.
“나는 너희들 오빠가 아니…….”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당찬 목소리가 그의 1차 경고를 툭, 끊어버렸다.
“오빠라고 부를 수도 있지!”
여고생들을 구해줄 유일한 흑장미가 나타난 것이다.
화장실에서 나온 제아는 풋풋한 여고생들에게조차 냉기를 풀풀 풍기는 도준의 모습에 혀를 찼다.
하여튼 이럴 때 보면 성격 참 별로라니까.
무엇보다 여고생들의 마음이 그녀는 백 번 천 번 이해가 갔다. 저토록 아름답고 완벽한 피사체가 눈앞에 있는데 어느 누가 사진을 찍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 오빠야가 좀 많이 잘생기긴 했지?”
제아가 살갑게 묻자 도준의 포스에 눌려 잔뜩 움츠려있던 여고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네! 이 오빠야 겁나 잘생겼어요!”
이렇게 깜찍하고 귀여운 여고생들을 겁주다니.
살짝 고개를 튼 제아는 도준을 찌릿 노려보았다.
그런데도 도준은 별다른 말은커녕 어깨를 으쓱할 뿐, 요지부동이었다.
“근데 저 오빠야가 생긴 것만 저러지 성격 무지 까칠하다? 함부로 사진 찍으면 초상권 침해로 저 오빠야가 돈을 요구할 수도 있어.”
“도, 돈이요? 얼마나요?”
잠자코 뒤에서 지켜보던 도준의 한쪽 눈썹이 억울함에 꿈틀, 했다.
30만 원 사건이야 따지고 보면 그의 잘못도 아니었다. 게다가 제아를 옭아매기 위해 치사해 보여도 빌미로 삼은 것뿐, 사진을 찍는다고 무조건 돈을 요구하는 그런 파렴치한이 절대 아니었다.
“농담이야. 그 정도로 남의 사진은 함부로 찍으면 안 된다는 뜻이야.”
사람을 들었다 놨다하는 제아의 언변에 도준은 살짝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당사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여고생들과의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근데 언니야도 너무 예뻐요! 그니까 저 오빠야랑 나란히 사진 찍어주면 안 돼요?”
여고생들의 의도를 알아차린 도준은 한마디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제아도 이제 어른이니, 어련히 한 귀로 듣고 흘리고 해결하겠지 하는 마음에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제아가 얼른 여고생들과의 대화를 끝내고 돌아와주기를 바랐다. 정말 오랜만에 서로가 함께하는 오붓한 시간을 방해받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별안간 들려오는 제아의 해맑은 음성에 그는 흠칫했다.
“너희들 눈엔, 언니야도 예뻐?”
도준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여고생들의 아부가 마음에 드는 듯 제아의 입술에 미소가 어렸다.
세상 어느 여자도 예쁘다는 말을 싫어할 여자는 없다고 하지만, 갑자기 제아가 그를 향해 홱 몸을 틀었다.
장화 신은 고양이의 캐릭터처럼 그에게 뭔가를 바라는 듯, 제아의 눈동자 속에 뿌려진 은하수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오빠야, 자라나는 새싹들이 부탁하는데 사진 한번 찍어주자! 응?”
여고생들과 함께 볼에 주먹까지 갖다 대고 뿌잉뿌잉 제스처를 날리는 제아의 애교에 도준은 기가 찼다.
맙소사, 제아의 애교에도 도준의 결심은 흔들림이 없었다. 생판 모르는 여고생들에게 제 사진이 있는 건 생각 자체도 싫었으니.
그런데 이어지는 여고생의 말이 냉랭한 그의 마음을 단번에 돌려놓았다.
“오빠야 언니야, 연인 사이 맞지요? 커플 트레이닝도 예쁘고, 둘이 너무 잘 어울려요!”
연인, 사이라. 미소 짓는 도준과 달리 제아는 당황한 기색으로 열심히 변명을 하려는 중이었다.
“저기 얘들아, 미안하지만 저 오빠야랑 나는?”
그 때 소리 없이 슥 다가온 도준이 제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휘감았다.
“찍어도 좋아.”
너무도 쉽게 도준이 허락을 하자 오히려 당황한 건 그녀였다. 바짝 치솟은 제아의 가녀린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도준은 달콤살벌하게 속삭였다.
“문제아, 오빠야한테 확 안겨야지.”
***
완벽한 연인 포즈로 찍은 사진을 여고생들에게 헌납한 후에야, 제아는 식사값을 계산하고 식당을 나왔다.
등을 진 채 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도준의 시선을 따라 그녀의 시선도 밤바다로 향했다. 비록 모래사장과 수평성이 있는 바다는 아니었지만 밤바다는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저 밤바다를 눈에 담으며 걷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제아는 과감히 욕심을 접었다. 진정한 비서라면, 빡빡한 내일 일정을 위해서라도 사장님을 호텔로 모시고 가야 하니 말이다.
때마침 인기척을 느꼈는지 돌아선 도준이 제아에게 다가왔다.
“서울 언니 오빠야!”
돌아서니 장어 식당 입구에 고개만 내민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여고생들이 그들을 향해 손을 휘젓고 있었다.
그래,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여고생들 중 한명이 바로 앞까지 쪼르르, 달려와 어딘가를 손가락질했다.
“깜빡하고 말 안 해준 게 있어서요. 조오기가 명당이에요.”
본능적으로 제아의 시선이 여고생의 손끝을 따라갔다. 손끝이 닿은 곳의 위치는 대충 가늠이 되었지만, 어두워서 그런지 딱히 형태가 도드라지게 보이지는 않았다.
“명당, 이라니?”
제아가 되묻자 갑자기 여고생이 키득키득 웃으며 말을 했다.
“키스하기 좋은, 명당이라구요. 그럼 데이트 잘하세요오!”
여고생의 눈물겨운 제보에 제아는 밤바다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오빠, 그냥 호텔로 돌아가자.”
“싫은데.”
“시간이 너무 늦었어.”
“나랑 하기로 하지 않았나? 그것도 먼저 제안한 걸로 아는데.”
무슨 말이냐는 듯 제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도준이 말을 이었다.
“밤 운동.”
“아........”
“뛰든지, 걷든지, 네가 선택해. 나는 밤 운동, 꼭 해야겠으니까.”
입이 방정이라고, 제아는 걸을 수밖에 없었다. 아침처럼 저 긴 거리를 뛰기 싫으면 말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여고생들이 알려준 명당자리가 가까워지자, 제아는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했다.
명당인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연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빼곡하게 늘어선 뱃머리 사이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결국 참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어 버렸다.
“오빠 이제 걸을 만큼 걸었으니 돌아가자.”
“싫은데.”
“저기가 키스 명당이야.”
“그래서.”
“그래서……라니? 오빠도 봤잖아. 커플들이 저기 들어가는 거. 그런 거 보면 민망하잖아.”
특히 오빠랑 보는 거라면 더더욱. 그런 제아의 속도 모르고 도준은 얄미울 정도로 덤덤히 물었다.
“안 보면 되지.”
“그게 맘대로 돼?”
“관심이 없는데, 눈이 안 가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묘하게 신경에 거슬리는 말이었다.
‘그럼 나는, 남이 키스하는 거 관심 많다는 뜻이야?’
도준에게 확 쏘아붙이려는 순간,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제아의 풍성한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고 시야를 가렸다.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린 머리카락 사이사이, 헛것이 보이는 듯했다. 그녀를 향해 손을 뻗는 도준이 보인다.
곧이어 그의 손끝이 부드럽게 피부를 스치고, 섬세한 손짓이 시야를 엉클어트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드러난 시야 속, 밤바다의 어둠을 머금은 도준의 모습이 성큼 파고들었다.
어스름한 어둠을 품은 도준의 얼굴은 또 다른 매혹이었다. 그 매혹에 시선이 꽉 붙잡혀버렸다. 지독히도 섹시하고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머금은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일시적인 현기증이 일어났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사이, 순식간에 다가온 도준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드센 바람이 둘 사이의 공백을 흔드는 그 때, 도준의 숨결이 제아의 귀에 바짝 붙었다.
“키스,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