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그 밤 운동, 나랑 같이 해.
2016.11.24.
휘둥그레진 제아의 눈동자 속으로 도준이 점점 스며들었다.
밀착되기 직전의 몸 사이에 생긴 짧은 공백.
그 공백 속, 서로의 심장 소리가 뒤엉키고 서로의 입술 사이로 숨결이 교차가 되었다.
경련하는 심장처럼, 속눈썹도 파르르 떨려오면서 타들어가는 긴장감으로 온몸이 바짝 조여왔다.
방금…… 뭐라고? 뭘…… 하고 싶다는……?
심장처럼 제대로 타격을 받은 뇌마저 얼얼했다.
지극히 단순한 말인데도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그 말은 지독히도 야한 말이 되버렸으니까.
그 충격에 급하게 들이마신 공기가 입 밖으로 제대로 흘러나오지 못했다.
“숨 쉬어.”
그제야 자비로운 한 사장님은 제아에게 숨 쉬는 걸 허락하며 기꺼이 뒤로 물러나주었다. 그 순간 제아의 입에서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에, 에취이이! 에취, 에취!”
기침이 아닌 ‘재채기’ 말이다. 상상은 자유이니까, 제멋대로 몹쓸 상상력이 총동원 되어버렸다.
“뭐, 뭐를 하고 싶다는 거야?”
제아의 손이 방어하듯 저절로 입술로 향했다. 우선 방어부터 하고 보는 거다.
“네가 방금 떠올린, 그 시뮬레이션.”
역시나 그는 제아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잊었다면, 다시 해줄 의향 있는데.”
시뮬레이션이고 뭐고, 제아는 갑자기 짜증이 치솟았다. 왠지 도준의 장난에 놀아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그럼 그 말을 먼저 하면 될 것을! 왜 말의 순서를 바꾸어서 사람 헷갈리게 하는 건데!
헛기침을 몇 번 흘린 후에야 제아는 입술을 가렸던 민망한 손을 내렸다. 화는 나는데, 마땅히 따지고 들 말이 없었다.
진짜 이런 상황, 정말 싫어.
혼자서만 긴장하고 떨리고 짜증나고.
그렇게 강렬한 교육법으로 알려주었는데 어떤 여자가 잊을 수 있을까.
“당연히 안 잊었지! 내가 무슨 붕어야?”
톡 쏘아붙인 제아는 무엄하게도 사장님을 확 밀치면서 회의실로 들어가 버렸다.
또각거리는 제아의 힐 소리가 산뜻하게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제법, 앙칼지단 말이야.”
그런 제아가 귀여운 듯, 도준의 눈매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잠깐의 휴식이 끝나고 도준의 프레젠테이션이 다시 이어졌다. 회의실 안이 다시 어둠에 잠기고 오직 도준이 올라가 있는 단상만이 밝게 빛이 나고 있었다.
도준은 슈트 재킷을 벗고 넥타이까지 풀어버린 상태였다. 핏이 되는 새하얀 와이셔츠가 유려하게 떨어지는 그의 상체를 매끈하게 드러내주었다.
색기 줄줄 흐르던 나른한 눈매는 날카로웠고, 나직하게 깔린 말투에는 적당한 강약 조절이 들어가 있었다.
설득을 하려는 적극적인 태도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덤덤하고 무심한 듯 일관하고 있지만, 그의 눈빛과 말투에는 묘한 설득력이 배어 있었다.
제아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서류를 보고 명령하는 것만 봤지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낯설면서도 경이로웠다.
열심히 일하는 남자가 멋있다고 하더니, 지금 도준의 모습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멋있었다. 심장이 두근두근할 정도로.
심장의 두근거림을 깨닫는 순간, 불현듯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캄캄한 어둠 속, 유일하게 빛이 나는 도준을 바라보며 제아는 머쓱한 웃음을 입가에 잔잔히 머금었다. 아마도 그때였던 것 같다.
마냥 예쁜 오빠가 처음으로 멋져 보였던 날.
처음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던 게.
오빠가 아닌 남자구나, 라고 조금은 의식이 되었던 게.
***
오늘은 이준의 중학교 입학식이 있는 날이었다.
학교에 절대 빠지면 안 된다는 윤영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제아는 이준의 학교로 향했다. 저금통을 털어서 산 꽃다발을 품에 꼭 안은 채.
“이준 오빠가 좋아하겠지?”
깜짝 등장에 놀랄 이준을 떠올리니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교문을 통과하자마자 제아는 당황했다.
드넓은 운동장은 학생들과 다른 관계자들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어도 학생들은 저들끼리 수다를 떠느라 정신없었고, 어른들은 그런 학생들을 통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마디로 아수라장이라는 말이 옳았다.
결국은 혼자의 힘으로 이준을 찾아야 한다는 뜻.
오빠를 위한 서프라이즈 이벤트인 만큼 이준은 그녀가 온 줄 꿈에도 모르고 있다.
‘오빠한테 그냥 말하고 올걸.’
뒤늦은 후회감이 밀려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준을 어떻게 찾아야할지 막막하기만 한 그때…….
“1학년 입학생 대표 문이준 군의 입학 선서가 있겠습니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 그의 이름에 제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준 오빠다!’
꽤 먼 거리감이었지만, 단상 위를 오르는 남학생은 단연 돋보였다.
“꺄악, 문이준이다!”
“재수 없는 새끼.”
“또 저 녀석이야?”
“문이준이랑 같은 중학교라니, 말도 안 돼!”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하지만 이준이 나직하고 일정한 톤으로 입학 선서를 시작하는 순간, 시끌벅적했던 아수라장은 어느새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의 이목이 오로지 어린 남학생에게 집중이 되었다. 만화에나 나올 법한 단정하고 섬세한 외모와 단연 돋보이는 훤칠한 키는 중학생같지 않았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완벽한 복장과 자세의 이준은 모범생의 정석이었고 모두가 우러러 보는 존재였다.
어른들조차 숨을 죽이고 어린 남학생의 독보적인 존재감에 빠져들어 버렸다.
오직 제아만이 지독히도 낯선 눈빛으로 이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냥 예쁜 오빠였는데. 그런데 지금 이준은 너무도 멋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우리 오빠, 멋지다.”
날마다 이준을 봐온 제아조차 홀딱 반해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질투심이 치솟았다. 오로지 나만의 이준이었는데, 모든 이들에게 활짝 공개해버린 느낌이었다.
이준의 입학 선서가 끝나자 갈채가 쏟아졌다. 그 갈채의 중심에 서 있는 이준이 보였다. 그리고 유난히도 이준에게 열광하는 여중생들 언니들이 보였다.
자신보다 키도 크고 예쁜, 훨씬 어른스러운 언니들이 이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난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는데.’
여중생 언니들은 가슴도 볼록하고 몸매도 예뻤다. 볼품없이 깡마른 자신과 달리 여중생 언니들은 한결 어른스러운 여자 느낌이었다.
그 언니들 중 누군가에게 이준을 빼앗길 것 같은 불안감이 강렬하게 엄습했다. 손에 들린 꽃다발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제아는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원으로 내달렸다. 좁고 가파른 산책로를 오르고 올라서 아지트인 오두막에 도착했다.
그대로 오두막의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 모른다.
톡, 톡톡톡, 톡, 톡톡톡, 톡, 톡톡톡.
그들만의 암호가 좁은 오두막을 울리고, 곧이어 부드럽고 나직한 이준의 음성이 들려왔다.
“열려라, 참깨.”
“…….”
“거기 있는 거 알아, 나 들어간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오두막의 문이 열리고, 이준이 좁은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제아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준의 잘못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냥 이준이 원망스럽고 미웠다.
이준은 제아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이준이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흘렸다.
“향기가 좋아.”
아주 조금, 궁금해졌다. 어떤 향기가 오빠를 사로잡은 건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향기야.”
도저히 못 참겠다. 고개를 번쩍 드는 순간, 새하얀 꽃다발이 눈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바로 제아가 이준에게 주려고 샀던 꽃다발이었다.
“이 꽃이 왜?”
“고집스러운 꼬맹이가 교문 옆에 버리고 간 거, 내가 주웠을 뿐이야.”
“……나 온 거 봤어?”
“교문에 들어섰을 때부터.”
꽃다발이 내려가고, 꽃다발보다 향기로운 이준이 보였다. 부드럽게 휘어진 이준의 눈은 오로지 제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말이다.
제아는 아주 잠시, 눈앞의 이준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예쁘고, 멋진 내 오빠. 어린 소녀의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오빠를 향한 집착과 소유욕이 지독하게 피어오른 것이다.
“나랑 결혼해.”
“……뭐?”
어린 동생의 당찬 프러포즈에 이준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이준에게 제아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이담에 커서 어른이 되면 나랑 결혼하겠다고 약속해줘!”
이준은 묘한 눈빛으로 제아가 내민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제아, 너 결혼이 뭔지 알고 하는 말이야?”
“나도 어린 애 아니거든? 서로 다른 사람 안 보고, 항상 같이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오빠 나랑 결혼해!”
무시하지 말라는 듯, 제아는 앙증맞은 턱을 고집스럽게 치켜들었다.
“문제아 잘 들어. 결혼은 말이야.”
반짝이는 눈으로 뚫어지게 응시하는 동생의 눈빛에 이준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조금은 막막해 하는 눈치였다. 뭐든지 잘 알고 잘 하는 문이준이 말이다.
“오빠와 동생이 하는 게 아니야.”
“그럼?
“여자랑 남자가 하는 게 결혼이야.”
“알아. 난 오빠 동생이고 또 여자잖아. 그럼 되는 거 아니야?”
머리가 아픈지, 이준은 긴 손가락을 들어 잠시 눈매 끝을 어루만졌다.
“난 네가 여자로 안 보이는데, 넌 내가 남자로 보여?”
“……응.”
이준이 말한 남자의 의미를 제아는 정확히 몰랐다.
그런데 우선은 무조건 그렇다고 대답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다른 언니들에게 이준을 빼앗기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야 이준이 프러포즈를 받아들일 것 같았으니까.
“제아 넌, 내가 다른 여자들이랑 어울리는 게 싫은 거야?”
마음속을 꿰뚫어본 이준의 한마디에 제아의 고양이 눈이 앙큼하게 치켜 올라갔다.
거짓말은 할 줄 모르는 제아였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이준의 뺨을 감싸고 야무지게 끌어당겨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코끝을 마주하고 두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야무지게 경고했다.
“나보다 키도 크고 가슴도 빵빵하고, 얼굴도 예쁜 언니들이랑 놀지 마. 나만 봐.”
아름다운 적갈색 눈동자가 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처럼, 오빠 눈에 나만 담아줘. 어린 소녀의 바람이었다. 울먹이듯 물기 어린 제아의 커다란 눈에 마음이 움직인 걸까?
침묵하던 이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 눈엔 너만 보여.”
“……?”
“네가 제일 예뻐.”
“거짓말!”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제아는 볼을 빵빵하게 불린 채 이준을 보았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구? 내가 그렇게 어린 줄 알아?
이준이 손을 올려 뺨을 감싸고 있던 제아의 손을 내렸다. 그리고 그 손으로 제아를 가만히 끌어당겨 품에 안아주었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제아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이준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제아 네가 날 살렸잖아.”
“…….”
“결혼 같은 거 안 해도, 나는 항상 너만 보며 살 거야.”
***
프레젠테이션이 끝났는지 회의실 안에 환한 불이 들어왔다. 귀를 울리는 박수 소리에 제아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느릿하게 눈을 몇 번 깜빡이자 그때처럼 갈채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도준이 보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독보적이고 눈에 띄는 존재라는 건.
불현듯 떠오른 옛 기억에서 제아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만큼은 도준이 자신을 여자로 보지 않았다는 것.
“하긴, 초등학생을 여자로 보면 그건 변태지.”
작게 중얼거리던 제아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럼, 대체 언제부터지? 내가…… 여자로 보인 게.
도준에게 차마 물어볼 수도 없고. 그저 혼자만의 궁금증으로 끝내는 수밖에. 어차피 지금의 도준에게 그녀는 옛날 그때처럼 동생일 뿐이니.
세차게 고개를 내저은 제아는 강훈을 눈으로 찾았다. 박수를 치는 사람들 속, 오로지 강훈만이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흥, 쌤통이다!’
그녀가 봐도 도준의 기획안에 설득이 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기업의 이익 창출에 대해선 쥐뿔도 모르는 경영인일 것이다.
도준이 손을 들자 박수가 멈추었다. 그의 말대로 완벽한 초이스만 남은 상태.
‘제일 어패럴과 함께 프로젝트를 함께할 백화점 있습니까?’라고 도준은 묻지도 않았다.
“제일 어패럴과 프로젝트를 같이 할 백화점은, 제 비서가 별도로 연락을 드릴 겁니다.”
선택권을 쥐고 있는 건 오로지 도준뿐.
“한 사장! 내가 조만간 연락하지!”
“한 사장님! 지금 바로 점심이나 같이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한 사장님, 지금 잠깐 시간 좀 내주십시오!”
백화점의 사장, 혹은 사장 다음으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이들은 애달프게 도준을 뒤쫓아 나왔다. 한번 돌아봐줄 법도 한데 도준은 매정했다.
컨벤션을 빠져 나와 차에 오르고 나서야 제아는 조심히 도준에게 물었다.
“이런 거 물어도 될지 모르지만, 어느 백화점이랑 같이할 거야?”
“누구와도 같이할 생각 없어.”
칼같이 떨어진 도준의 대답에 제아는 순간, 멍해졌다.
두산 백화점, 라이온 백화점, DK 백화점 등등…… 전국에서 알아주는 백화점이란 백화점은 모두 모인 자리인데.
그녀 나름대로 추측까지 했었다. 부산까지 내려온 걸 보면 두산 백화점과 같이 하려나 보구나, 하고 말이다.
룸미러로 제아의 의문스러운 표정을 보았는지 도준이 깔끔하게 정리를 해주었다.
“제일 어패럴에서 이미 단독으로 비밀리에 진행 중이야. 회장님 승인도 받은 상태이고.”
“그럼 오늘 회의는 왜 한 건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걸 그들에게 직접 느끼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회의가 끝나고 도준의 뒤를 따라 나온 순간, 그들의 동맹은 무너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돈독한 그들 사이에 생긴 작은 틈은, 곧 커다란 벽에 균열을 가져오리라. 철저하게 이기적인 기업 이득을 위해 동맹이라는 것도 생긴 거니.
“제일 어패럴을 망하게 하려고 결탁한 족속들 얼굴이 궁금하기도 했고.”
물론 그들이 망하길 원한 건 제일 어패럴이 아니라 도준 자신이었겠지만.
도준이 취임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오늘 참석한 백화점들은 일방적인 통보를 해왔다.
제일 어패럴의 브랜드의 반 이상을 백화점에서 철수시키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도준은 자신의 한국행에 불안함을 느낀 서부회장이 백화점 대표들과 결탁해서 벌인 일이라는 걸 꿰뚫고 있었다.
시장 경기가 침체되어 있는 지금 상황에서 아울렛은 재고 떨이하느라 적은 마진으로 판매하느라 바빴고, 그나마 매출이 나오는 건 백화점이었다.
그런데 모든 백화점들이 제일 어패럴의 매장을 반 이상 철수시킨다면, 제일 어패럴이 망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물론 그렇게 바짝 몰아붙이면 그러마하고 포기하고 돌아갈 줄 알았겠지.
그게 아니면 사정을 하거나.
하지만 그건 그들만의 철저한 착각이었다. 도준의 선택은 바로 미국행이었다.
자신의 작품이 대중화되는 걸 극히 꺼려하는, 명품 브랜드에서도 탐내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의 핫한 브랜드의 독점 계약을 감행했다.
“그래도 그 사람들 다 참석 안 했으면 어쩌려구.”
“백화점 협회 회장인 한강훈이 참석하는데, 그들이 참석 안 할 리가 없지.”
“한 이사님 오실 줄 알았으면, 차라리 서울에서 하지 왜 부산까지 내려와?”
“한강훈이 가장 믿고 있는 이가 바로 두산 백화점 전무니까.”
사실 그녀도 당연히 두산 백화점과 함께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맙소사.
제아는 한척의 배로 수많은 적군의 배를 물리친 이순신 장군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물론 이런 일과는 비교도 안 되게 이순신 장군이 더 위대하긴 하지만.
여하튼 머리 쓰는 거 하나는 최고라니까.
제아는 불현듯 김 부장이 떠올랐다. 도준이 내게 이런 말을 할 줄 알고 스파이 제안을 한 걸까.
물론 회사에서 잘리는 한이 있어도, 김 부장에게 이런 말을 해줄 생각이 없었다.
“방금 한 말들, 모두 회사 기밀 같은데. 나한테 말해줘도…… 돼?”
조심히 묻는 말에 도준은 시선도 틀지 않은 채 대답했다.
“네가 날 믿는 것처럼, 나도 널 믿으니까.”
***
빡빡했던 하루 일정을 끝내고 호텔 룸에 돌아온 제아는 그대로 침대로 쓰러져 버렸다.
샤워를 해서인지 나른한 몸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런데도 잠이 오기는커녕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널찍한 침대를 아련하게 맴돌았다. 이 기분, 뭐지? 도대체 뭐가…….
“도준 오빠.”
본능적으로 흘러나온 그의 이름, 허전함의 정체였다.
불과 아침까지만 해도 이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던 도준이었는데.
침실의 문만 열면, 주변을 어지럽힌 채 일에 빠져 있는 도준이 있을 것만 같았다. 겨우 하루 붙어 있었던 것뿐인데.
그때 눈치 없게도 꼬르륵, 뱃속에서 신호가 왔다. 분명 레스토랑에서 거하게 저녁을 먹었는데도 이놈의 위와 장은 왜 이렇게 혈기왕성한지.
허기진 배를 탁탁 두드리던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건, 도준이었다.
오늘 아침 호텔 조식도 깨작깨작, 점심과 저녁에 갔던 레스토랑에서도 깨작깨작, 포크로 푹푹 몇 번 쑤시기만 할 뿐 거의 입도 대지 않은 도준이 떠오른 것이다.
어젯밤 도준의 짐을 차곡차곡 정리하다 본 수많은 영양제들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생각났다.
“한도준 바보, 헛똑똑이!”
어떻게 사람이 영양제로만 버틴단 말인가! 직접 입으로 음식을 넣고 씹어서 영양소를 섭취해야지!
키만 훌쩍 컸지, 하는 짓만 보면 아직도 손이 많이 가는 똑똑한 어른 아이 문이준이었다.
급하게 부산 맛집을 폭풍 검색한 제아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침에 빨아놓았던 트레이닝을 입고 체크카드를 손에 든 순간, 아주 잠깐 망설여졌다.
이번 달 식비 15만 원을 써버리면 점심을 쫄쫄 굶어야 하는데.
하지만 핏발 선 도준의 눈과 날렵하다 못해 메마른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망설임은 이내 사라졌다.
아주 조금, 헤어진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도준이 보고 싶기도 하고.
“에라, 모르겠다!”
점심이야 도시락을 싸서 다니면 되는 일이니.
제아는 룸을 박차고 나와서 도준이 쉬고 있는 룸으로 돌진했다.
그 시각 도준도 샤워를 마치고 잠시 침대에 누웠다. 오늘 결국 승리의 깃발을 손에 쥐었지만, 그에게도 오늘 하루는 꽤 피곤한 하루였다.
그런데 비어 있는 침대의 옆부분이 허전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제아가 있었는데.
그 순간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유혹적인 눈빛과 몸짓을 남발하던 제아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굴곡진 몸매를 여실히 드러내는 은밀한 실루엣, 아찔한 머스크 향, 침대 위로 폭포수 쏟아지듯 흘러내린 풍성한 머리칼.
뇌리를 꽉 채우는 실루엣에 잔잔한 호수처럼 잠들어 있던 오감이 바짝 곤두섰다. 눈이 저절로 문으로 향했다.
아주 잠깐, 얼굴만 보고 다시 오는 거야.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다시 오는 거야.
급하게 옷을 걸치고 문을 여는 순간, 도준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환영이 보였다.
코끝을 휘감는 은은한 바디워시 향, 촉촉이 젖은 복숭아 빛 피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당황한 듯 커다란 고양이 눈을 깜빡이고 있는 제아는, 분명 환영일 거야.
도준은 조심히 손을 뻗어 그 환영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촉촉하면서도 보드라운 피부의 촉감이 기분 좋게 손바닥을 타고 흘러들었다.
뺨을 스친 손이 입술로 향했다.
산뜻한 바디 워시향에 섞인 복숭아 향은 입술에서 나는 거겠지.
“저기…… 그만 좀 만지면 안 될까?”
귓가에 닿는 현실적인 목소리에 도준은 움찔하며 눈을 떴다. 급하게 거둔 손은 정처 없이 허공으로 떨어졌다.
환영이, 아니었구나.
무슨 말을 하려는지, 복숭아 립밤에 물든 제아의 입술이 조그맣게 달싹였다.
“……파서.”
보고파서?
들리지 않는 말을 제멋대로 해석해버렸다. 묘한 기대감에 그가 사로잡히는 순간, 제아가 눈을 질끈 감더니, 버럭 소리쳤다.
“나, 배고프다고!”
이렇게 아찔한 모습으로 야밤중에 남자 혼자 있는 룸에 찾아온 이유가.
보고파서가 아니라, 배고파서라니.
쓰디쓴 입 안을 느끼며 도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네가 고프다.’
도준의 속도 모른 채, 제아가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그런데 어디 가려는 거였어?”
너한테, 가려는 거였어. 대답 대신 침묵하는 도준의 옷차림을 제아가 조심히 훑어보았다.
“추리닝 차림이네, 밤 운동이라도 하려는 거야?”
밤운동은 무슨. 하지만 추리닝 차림으로 일 하러 간다고 할 수도 없으니, 도준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갑자기 제아가 환하게 웃음 지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순간…….
“마침 잘됐다. 그 밤 운동, 나랑 같이 해.”
기가 막힌 제아의 말에 도준은 숨이 탁, 막혀왔다.
‘지금 너, 뭐라고.’
폐 깊숙한 곳에 뜨거운 호흡이 차올랐다. 그답지 않게 도준은 되물었다.
“……뭐라고?”
“그 밤 운동, 나랑 같이 하자구. 내가 리드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