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23화 (23/104)

23. 그런 눈빛 하지 마. 하고 싶어지니까.

2016.11.21.

제아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도준의 눈.

길게 늘어진 눈매는 섬세했지만, 그 눈매가 품고 있는 눈동자는 거칠었다. 데일 듯이 뜨겁고, 부셔버릴 듯이 잔인했다.

감당할 수 없는 그 눈빛에 깜짝 놀란 제아가 차 문의 손잡이에 매달리는 순간,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꺄아악!”

발레파킹 맨이 아주 친절하게도 문을 열어주는 매너를 보인 것이다. 문에 매달리듯이 딸려 나온 제아의 몸이 차 밑으로 기우뚱 순간, 도준이 손목을 낚아채 다시 차 안으로 확 끌어당겼다.

한 뼘 거리로 바싹 다가온 얼굴이 나직한 속삭임을 흘렸다.

“다신, 떠나지 않아.”

뜨겁고 거칠었던 도준의 눈동자는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 열린 차 문 밖에서 조심스러운 한마디가 들려왔다.

“고객님, 안 내리십니까?”

“내, 내려요!”

후다닥 차에서 내린 제아는 바짝 올라간 치마를 얼른 내리고 돌아섰다.

다신 떠나지 않아라는 말에 담긴 메시지는 바로, 한 번만 더 나를 믿어줘.

발레파킹 맨에게 차 키를 건네는 도준을 제아는 복잡 미묘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도준을 떠올리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건 바로 부모님의 얼굴이었으니까.

차에서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태연하게 다가온 도준이 제아에게 묻는다.

“준비됐나, 문 비서.”

날카로운 눈빛과 서늘한 표정을 한 그는 지금 제일 어패럴의 사장 한도준. 그가 사장이 된 순간, 제아도 완벽한 비서가 되어야 한다.

“네, 사장님.”

사적인 감정은 최대한 배제한 채, 제아는 심호흡을 크게 내쉬며 그의 뒤를 따라 컨벤션 내부로 들어갔다.

컨벤션의 최상층에 위치한 회의실에 들어가려는 순간…….

“어이, 한 사장.”

뒤에서 굵직한 음성이 도준을 불러 세웠다. 돌아서자 훤칠한 키에 잘 그을린 피부 톤, 시원한 이목구비가 꽤 매력적인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 이사님은 오늘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아는데, 아닙니까?”

도준은 여전히 포커페이스였지만, 제아는 느낄 수 있었다. 도준이 저 남자를 무척이나 싫어한다는 것을.

“형이 되어서 동생의 첫 프로젝트 발표회를 놓칠 수가 있나? 그것도 국내 1위인 제일 백화점 사장으로서 말이야. 그리고 때마침 스케줄이 비었으니 정 아니다 싶으면 나라도 네 프로젝트에 참여해줘야 하지 않겠나? 물론 그 프로젝트가 그나마 괜찮은 수준이어야 하겠지만.”

형이라니, 동생이라니. 그럼 저 남자가 제일 그룹 손자인 한강훈 이사?

커다래진 제아의 눈이 저절로 강훈에게로 향했다.

이사라는 직책을 설명해주는 듯, 강훈이 뒤에 대동한 비서만 3명이었다. 그에 반해 도준은 초보 비서인 그녀만 달랑 대동한 상태였다.

극과 극의 비교 체험 같은 상황, 하지만 제아는 허리를 더 꼿꼿히 세우고 어깨를 폈다. 이럴 때일수록 더 완벽하게 도준의 비서 노릇을 해주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비아냥거리는 말을 하는 강훈에게 도준이 한걸음 바짝 다가섰다.

대치하듯 서 있는 상황.

강훈의 얼굴이 먼저 미세하게 구겨졌다.

강훈도 키가 큰 편이었지만 미세한 키 차이로 도준이 그를 거만하게 내려다본 것이다.

강훈의 오만함을 단번에 깔아뭉개는 태초의 오만함이 도준의 눈빛에서 강렬하게 흘러나왔다.

“뭔가 착각을 하고 온 것 같은데.”

“……?”

“난 설득하러 온 게 아니라 내 파트너를 초이스 하러 온 겁니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강훈은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초이스라, 하하! 뭐 그렇다면 내가 지켜봐주지. 아, 참고로 오늘 참석한 백화점 대표들이 모두 나와 절친한 사이라는 건 알고 있나?”

그 말인즉슨, ‘나한테 잘 보이지 않으면 파트너를 구할 수 없을 거야.’라는 은밀한 협박을 내포하고 있었다.

도준은 잔잔한 호수처럼 조금의 동요도 없었지만, 정작 자극받은 건 제아였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이 강훈에게 향했다.

‘형이 되어서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제일 그룹 손자이자 제일 백화점 한강훈 이사.

남자다운 외모와 재력까지 겸비한 강훈은 여성 최고의 잡지, 페이퍼에서 뽑은 올해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게다가 도준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제일 그룹의 차기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도준의 뒤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강훈이 제아를 바라보았다.

“여비서로군.”

그것도 제일 어패럴에 들렸을 때 보지 못했던 뉴 페이스, 여 비서.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강훈은 능글맞게 웃었다. 김 부장이 비서과에 스파이를 밀어 넣었다고 올린 보고가 떠오른 것이다. 기존 제일 어패럴 직원에 스펙도 별 볼일이 없어서 절대 의심받지 않을 스파이라고.

강훈의 눈에 옅은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청순해 보이지만 살짝 올라간 눈 꼬리가 꽤 앙칼져 보이기도 하고, 얼굴보다 볼륨 있는 몸매가 더 봐줄 만한 여자였다.

딱 봐도 남자의 음심을 자극하는 외모였다. 본능적으로 걸음을 내딛으며 다가가는 순간, 여 비서가 사라졌다. 달이 태양을 가리는 일식처럼, 도준이 몸으로 여비서를 완벽하게 가려버린 것이다.

“쓸데없는 관심 끄시죠.”

불쾌한 표정이 역력한 얼굴로 도준이 강훈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준이 네가 여자 비서를 대동하다니, 관심이 안갈 수가 있나.”

그것도 내 스파이인데 말이야.

“우리 한 사장이 워낙 깐깐해서 같이 일하기 힘들 텐데, 그래도 잘 부탁합니다. 혹시 한 사장이 괴롭히면 저한테 이르십시오.”

들으라는 듯 말을 하자, 도준의 뒤에서 여 비서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깍듯한 자세이지만 시선도 마주치지 않는 게 강훈은 은근히 기분 나빴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여 비서의 입에서 건방진 대답까지 흘러나오자 강훈은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별 볼일 없는 여비서 주제에, 감히 나를.

그런데 강훈은 이내 여비서의 반응이 이해가 되었다.

의심 받지 않고 한도준의 곁을 지키려면, 저 정도는 내게 발톱을 세워야겠지.

그제야 느긋한 미소가 다시 강훈의 입가에 어렸다.

“그렇다면야 다행이고. 그럼 나중에 봅시다, 여비서.”

기분 나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회의실로 향하는 강훈의 뒤통수를 제아는 찌릿찌릿 노려보았다.

아무리 피가 반 밖에 섞이지 않았다고 해도 어떻게 동생한테 저럴 수가 있지?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는 우리 가족도 절대 도준에게 그러지 않았는데.

물론 제아는 두 형제가 그녀와 도준처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형제 사이란 걸 모르고 있었다.

그때 쌀쌀맞은 도준의 음성이 귓가를 스쳤다.

“문 비서, 그만 보지 그래.”

뒤를 돌아보자 단단히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그녈 바라보고 있는 도준이 보였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은데. 그런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

강훈의 협박에도 요지부동이던 도준이었다.

제아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퉁명스러운 음성이 도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한강훈 이사한테 반하기라도 했나?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도준은 강훈의 도움을 받은 걸 지켜본 게 분명했다.

도움 받은 건 인정, 겉보기 식 매너도 인정.

하지만 지금 상황을 저 똑똑한 머리가 뭔가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찌릿찌릿 째려보는 거랑 하트 뿅뿅 발사하는 거랑 그렇게 구분이 안 되나? 이럴 때 보면 정말 헛똑똑이라니까?

그의 말이 하도 기가 막혀 제아는 톡, 쏘아붙였다.

“시력 검사 좀 해보시는 게 어때요?”

“양쪽 시력 1.0이야.”

“저는 지금 우리 사장님을 무시한 못된 남자를 째려본 거랍니다.”

서로 다독이기는커녕 오히려 칼을 들이대는 형제의 모습은 제아에게 꽤 충격이었다. 그녀가 아는 가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으니까.

그 모습을 본 순간, 마음 깊이 숨겨진 도준에 대한 마음이 제대로 자극 당해버렸다.

지금 그에게 유일한 편은 비서인 그녀뿐, 어떻게든 그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다.

주위를 두리번거린 제아는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에야 그에게 조심히 다가섰다.

아직까지도 그녀가 뭘 하려는지 모르는 도준은 그저 무심하게 다가온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꽤 건방져 보일 수도 있지만 제아는 도준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이른 아침 로비에서 그 여자가 했던 것처럼.

설마, 나한테도 쌩 하는 건 아니겠지?

그 걱정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제아의 손짓 한 번에 너무도 순순히 도준이 몸을 기울여준 것이다.

그의 작은 행동 하나에 용기가 솟아났다. 깊게 잠들어 있던 문이준만을 위한 애교가 다시 눈을 떴다.

발꿈치를 살짝 들고 소리 없이 다가온 제아의 얼굴이 아슬하게 얼굴을 스치는 순간, 도준은 숨이 탁 막혀왔다.

“그리고 내 눈엔 한강훈 이사님보다 우리 오빠가 백 배 천 배 멋있거든요?”

그의 귀에 가까이 가져간 손을 앙증맞게 오므린 제아가 사랑스러운 속삭임을 흘린 것이다.

우, 리, 오, 빠.

그 한마디가 귓가를 메아리치더니 도준의 심장에 콕, 박혀버렸다.

온통 새하얘진 머릿속, 새하얀 도화지에 수없이 무한 반복되는 한마디는 바로 ‘우리 오빠’.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제아는 단단히 작정한 게 틀림없었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복숭아사탕처럼 달달한 향기가 다시 한 번 훅, 콧속으로 들이닥쳤다.

“난 우리 오빠 믿어. 그러니까 저런 못된 형한테 절대 쫄지 마, 파이팅!”

어느새 뒤로 물러선 제아는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앙큼한 고양이 눈을 한 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천진난만하게 말이다.

맙소사. 너, 지금…….

하룻고양이 애교에, 사나운 흑표범의 차가운 심장이 사정없이 녹아내렸다. 너무 놀라고 너무 행복해서, 도준은 10년 만에, 넋이 나가버렸다.

***

회의실에 들어가자마자 그들을 맞이한 건, 노골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내며 심드렁하게 앉아 있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강훈이 얄밉도록 미소 짓고 있었다.

딱 봐도 1대 100의 불리한 싸움.

큰 용기를 내서 그에게 파이팅을 해준 게 그녀는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이 큰 회의실 안, 그래도 그의 편이 한 명은 있다는 걸 상기해준 거니까.

도준이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할수록 뛰어난 그의 언변과 치밀한 전략에 회의실 안 사람들은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설득을 하고자 하는 상세한 부연설명도 기타 설명도 없었다. 정확한 요점만 집어내서 일목요연하게 발표했다. 그런데도 도준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그 말은 확신이 되었다.

잠깐 쉬는 타임.

회의실 안은 확실히 뭔가 달라져 있었다.

살짝 일그러진 강훈의 얼굴, 술렁이는 회의실 안의 사람들.

이어질 프레젠테이션을 완벽하게 세팅한 제아는 도준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는 듯 바라보는 도준의 매무새를 한 번 더 체크해주고 넥타이까지 매만져주었다.

모호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도준에게 생긋 웃어준 후에야 회의실을 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완벽해!’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흘린 제아는 화장실을 나왔다. 그런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한 사장 비서.”

휙 돌아서자 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강훈이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지만, 아무리 봐도 강훈을 제외한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강훈이 가까이 다가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 손짓이 기분이 나빴지만,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조심히 다가서자 강훈이 피식, 비소를 머금었다.

“이번에 새로 뽑힌 여비서, 맞지?”

말과 동시에 강훈의 느끼한 눈빛이 음미하듯 제아의 얼굴을 타고 천천히 밑으로 흘러내렸다.

“나쁘지 않단 말이야.”

“네?”

“비서고 뭐고. 그냥 나한테 오는 건 어때?”

제아는 그 뜻을 단순한 스카우트 제의로 알아들었다. 그런데도 기쁘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 어린 은밀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그 눈빛이 아니어도 그 제의를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죄송하지만 못 들은 말로 하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그에게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고 미련 없이 돌아서는 순간…….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말과 동시에 강훈이 거칠게 제아의 뒷목을 움켜잡아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다행히도 발끝에 힘을 바짝 줘서 강훈의 가슴에 얼굴을 박을 뻔한 상황은 모면했다.

하지만 그의 무례한 행동에 결국 제아도 폭발해버렸다.

“한 이사님, 대체?”

“경고했을 텐데. 내 여비서한테 다신 손대지 말라고.”

긴 다리로 빠르게 다가온 도준이 강훈의 손을 쳐냈다. 아플 정도로 잡혀 있던 목이 자유로워지는 순간, 강훈이 손목을 잡아챘다.

그런데 방금 전처럼 강훈에게 확 끌려가진 않았다. 다른 쫀 손목을 도준이 틀어잡은 것이다.

제아는 두 남자에게 손목이 잡혀 움직이지도 못하게 된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그냥 매무새를 확인하려고 화장실에 잠깐 왔을 뿐인데.

그녀의 성난 눈빛이 강훈에게 향했다.

이 남자는 오늘 처음 본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하지만 강훈은 제아가 아닌 도준을 보고 있었다. 얄미울 정도로 능글맞게 웃으며 도준을 도발하는 중이었다.

‘한도준, 이 여자 손을 놓지 않으면 어쩔 건데.’

명백한 강훈의 도발은 제아도 짜증나게 했다. 손목을 확 뿌리치고 돌아서려는데, 어림도 없다는 듯 강훈이 다시 제 쪽으로 확 손목을 끌어당겼다.

그 힘을 느꼈는지 도준도 본능적으로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실으려는 순간이었다.

“흐윽.”

제아의 입술 사이로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도준은 불에 덴 듯 잡고 있던 손목을 놔버렸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제아의 손목을 놔준 강훈이 여유롭게 웃었다.

“한 사장,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 아닌가?”

도준은 터질 듯이 솟아오르는 분노를 기민하게 숨겼다. 흔들리는 순간, 약점이라고 잡아챌 하이에나 같은 강훈이니까.

겉치레적인 존칭 따위도 벗어던져버린 채, 도준이 입을 열었다.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쳤나. 나도 한 회장님께 보고할 일이 생겼군.”

“워워, 진정하라구. 나는 단지 네 여비서 목에 뭐가 묻어서 떼어주려 한 것뿐이야. 그렇지 않나, 여비서?”

강훈이 쏜 갑작스러운 화살에 제아는 당혹스럽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다.

무례한 행동을 해놓고도 그녀가 제 편이라도 되는 것처럼 뻔뻔하게 묻다니! 이 남자가 보자보자 하니까 내가 정말 보자기로 보이나!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고 했다. 아주 제대로 반박해줘야지!

“이보세요, 한 이사님!”

발끈하며 조금 앞으로 걸어나온 제아는 얼른 입을 꾹, 다물었다. 도준의 뒤에 서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상황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가장 걱정이 되는 건 바로 도준이었다. 지금 도준의 모습은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함을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강훈을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듯한, 짙은 어둠의 아우라를 흘리는 도준의 모습에 제아는 결국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장님, 한 이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거짓말이 익숙하지 않은 그녀의 음성이 어색한 떨림을 품었다. 그리고 제아의 뼛속까지 꿰뚫고 있는 도준은 그 거짓말을 감지했다.

그런데도 그가 참아야 하는 이유.

거짓말은 절대 싫어하는 제아가 이 상황에서 거짓말을 한다는 건 제발 조용히 넘어가고 싶다는 그녀의 의지이기도 했다.

‘오빠 없는 동안 꽤 편하게 살아서. 이런 일에 일일이 반응하고 상대하는 거, 이제 귀찮기도 하고 지쳐.’

차 안에서 제아가 했던 말이 그의 귓가를 또렷하게 맴돌았다.

제아의 말에 거보라는 듯, 강훈이 비소를 흘렸다.

‘넌 절대 날 못 이겨.’

대수롭지 않은 일인데도 짜릿한 승리의 기쁨이 강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했다.

“그럼 난 먼저 들어갈 테니 천천히 들어오라고.”

의기양양해진 눈빛으로 도준을 보며 강훈은 회의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서로의 어깨가 스치는 순간, 도준이 강훈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계집애처럼 가늘고 긴 저 손가락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아나는지.

“으윽!”

강훈의 입에서 단말마로 짧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제아가 느꼈던 아픔을 배로 돌려주려는 듯, 도준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가자 강훈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내려간 강훈의 어깨만큼, 도준의 고개가 숙여졌다.

“내 거에 손대지 말라는 경고, 뼛속에라도 박아놔.”

그때 회의실의 문이 열리면서 사람이 몇 명 나왔다. 이번 회의의 가장 핵심 인물인 도준과 강훈의 공석이 길어지자 확인 차 사람들이 나온 것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도준은 강훈의 어깨를 놔주고 깍듯하게 예를 갖추었다.

“곧 따라 들어갈 테니 먼저 들어가시죠, 한 이사님.”

도준이 얼마나 세게 쥔 건지 강훈은 아주 잠깐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도준을 힘껏 노려본 강훈은 씩씩거리면서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회의실의 문은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뭐 저딴 놈이 다 있어?’

씩씩거리는 제아의 시야에 도준의 길고 곧은 손이 밀려들어왔다.

“손.”

소, 손? 손은 갑자기 왜? 그런데도 말 잘 듣는 고양이처럼 이미 그의 손 위에 손을 올린 후였다.

“그 손 말고.”

그런데 도준이 아니란다.

그럼, 왼손. 왼손이요?

뭔가에 홀린 듯 왼손을 올리자마자 도준이 기다렸다는 듯 재킷 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소중한 애장품을 닦듯이 그녀의 손목을 손수건으로 세심하게 톡톡 두드리는 그의 섬세한 손짓.

대체, 뭐 하는 거지?

왼손이 자유로워지는 순간, 도준이 다시 짧은 명령어를 내렸다.

“돌아.”

돌아서자마자 그녀의 뒷목에 닿는 도준의 손길.

톡톡톡, 쓱쓱쓱. 두드리고 문지르고.

“만족스럽진 않지만 이 정도로 우선 끝내지.”

꽤 불만족스러운 도준의 음성에 제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돌아섰다.

“지금, 뭐 한 거야?”

“소독.”

제 물건에는 결벽증 같은 성격이 도지는 도준이란 걸 알고는 있었다.

흠집, 흔적은 물론 절대 남의 손을 타는 걸 싫어한다. 남의 손이 닿는 순간, 소독 또 소독.

그런데 중요한 건, 난 물건이 아닌데? 그것도 오빠 물건은 더더욱 아닌데?

멍하니 서 있는 그녀의 앞까지 바짝 다가온 도준이 진지하게 말을 했다.

“이후부터 다른 남자가 너한테 손대려고 하면.”

“……?”

“숨통을 확, 조여 버려.”

휘몰아치는 도준의 눈동자 속에 깊은 웜홀이 형성되었다. 얼른 눈을 감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제아는 순식간에 웜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입술이 쥐어터져 울먹거리는 소녀를 바라보는 소년이 보인다.

‘걔가 나보다 덩치가 두 배는 더 컸단 말이야!’

말 한마디 없이 분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소녀를 이준은 순식간에 벽으로 몰아세웠다.

‘뭐, 뭐 하는 거야?’

‘시뮬레이션.’

‘……?’

‘대답해봐.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모, 몰라!’

그의 긴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제아의 긴 목을 타고 올라 서서히 휘어 감았다.

‘힘이 중요한 게 아니야, 정확하게 어딜 짚느냐가 중요한 거지.’

이준의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득해지는 정신, 흐릿한 시야, 두근거리는 심장.

‘여기를 누르면 잠시 정신을 잃고.’

그곳에 닿으면 호흡이 가빠지고.

‘여길 누르면 고통을 느끼지.’

그곳에 닿으면 심장이 뛴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이준의 손끝은 민감한 목 부분을 자꾸만 지분거렸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제아는 움찔거렸다. 그 반응을 즐기는 듯 이준의 눈이 야릇하게 반짝이고.

‘그때, 숨통을 확 조여버려.’

나직한 속삭임과 함께 점점 가까워지는 이준의 얼굴.

키, 키스. 키스할 것 같아!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빠진 순간, 아슬하게 비껴간 이준의 입술이 귀가에 바짝 달라붙었다.

‘내 교육법이야. 절대, 잊지 말도록.’

오래 전 기억인데도 이준의 그 야릇한 눈빛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의 몸 속 곳곳에서 은밀한 설렘과 심장의 두근거림을 안겨주었다.

지금 눈앞의 도준처럼 말이다.

과거의 이준과 현실의 도준, 그 흐릿한 경계에서 혼동이 일어났다.

혼몽하게 풀린 눈으로 제아가 그를 바라보는 순간, 도준의 얼굴이 치고 들어왔다.

깜짝 놀랄 틈도 없이 손목이 틀어 잡혀 벽으로 밀리고 비껴나간 그의 얼굴이 귓가에 바짝 붙어 있다.

“그런 눈빛 하지 마. 하고 싶어지니까.”

지독히도 낮은 도준의 저음이 서슴없이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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