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오빠가 아닌 남자로 다가가도 될까.
2016.11.17.
앙큼하게 올라간 고양이 눈이 서슴없이 그에게 눈을 부딪혀왔다.
허공에서 방황하던 한 손마저 도준의 목을 야무지게 감싼 후에야 내려오는 제아의 아찔한 향기, 그리고 눈빛.
곧이어 달달한 복숭아 향을 품은 숨결이 그의 귀를 간질였다.
“약속이나 지키시죠, 한도준 씨.”
가늘고 긴 손가락이 어루만진 그의 뺨에 촉촉한 입술이 스치듯이 지나갔다. 감질맛 나는 복숭아 빛 흔적을 뇌리에 각인하며 도준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10년 전 모습 그대로, 당차고 아름다웠던 제아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야 그의 제아다운 모습이 나온 것이다. 겁을 먹고 숨는 건 제아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으니까. 못된 놈이라고 욕해도 좋다. 움츠러들어버린 그녀의 원래 모습을 끄집어낼 수만 있다면야.
소파에서 일어난 도준이 팔을 내밀자 제아는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당당하게 그의 옆구리를 꿰찬 채 로비를 벗어났다.
호텔 소속 발레파킹 맨이 내민 차 키를 받아 든 도준이 매너 있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 쏟아지는 여자들의 적대적인 시선을 즐기는 듯, 제아는 우아하게 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조수석 문이 탁, 닫히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 지금, 뭐 한 거지?’
뭔가에 홀린 듯, 저질러버린 것이다. 고개를 휙 돌리자, 로비 쪽에서 그녀를 노려보는 여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맙소사, 저 눈빛이 모두 총알이었다면 온몸에 구멍이 송송 났으리라.
이제 겨우 하루가 시작된 건데, 그녀는 벌써 피곤함이 느껴졌다. 이게 모두 도준의 탓이었다.
조용히 좀 살아보려 했건만.
백발백중 도준의 도발에 홀딱 넘어가서, 또다시 총알받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호텔에서 지내야 할 남은 하루 동안, 도준은 접근하는 여자 없이 편하게 지낼 것이다. 그에 반해 그녀는 가는 곳마다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는 여자들을 상대하느라 지치겠지.
공짜로 총알받이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억울했다.
제아는 느긋하게 차에 올라타는 도준을 찌릿, 노려보았다.
“혀에 독 품은 건 여전하나 봐.”
“…….”
“좀 살살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 내린다는 속담 몰라?”
“좋게 말하면 포기를 안 하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좋게 말하면, 여자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집요하게 귀찮게 구니, 그로선 어쩔 수 없는 방법인지도 몰랐다.
너무 잘나서 피곤한 인생을 사는 도준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제아는 다시 물었다.
“오빠 눈 무지 높지? 그렇게 예쁜 여자한테도 그렇게 독하게 말한 거 보니까.”
“내 눈엔 별로야.”
“저 여자가 별로라고? 대박! 오빠 눈이 아주……?”
“제아 네가 더 예뻐.”
대수롭지 않은 듯 덤덤히 흘린 도준의 한마디에 제아는 말문이 탁, 막혀버렸다.
순식간에 달아오른 얼굴을 한 제아의 입술 사이로 횡설수설한 말들이 새어 나왔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봐도 그 여자가 훨씬 더 예쁜데, 사람 놀려?”
흔히 연인들은 거짓말을 한다지. ‘김태희가 예뻐, 내가 예뻐?’ 물으면 김태희라고 대답하듯이.
그런데 도준과 그녀는 연인 사이가 아닌데, 믿지도 않을 거짓말을 했다. 분명 제아 자신보다 그 여자가 더 예뻤는데.
“왜 말이 안 된다는 거지?”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함과 동시에 도준은 조금의 거짓도 없는 진지한 눈빛을 기울여왔다.
복숭아 향이 담긴 립밥 이외에 어떤 화장도 하지 않은 제아였다. 그런데도 야무지게 틀어 올린 헤어스타일에 드러난 작고 갸름한 얼굴, 꽉 들어찬 이목구비는 오밀조밀 앙증맞았다.
“오늘 너, 예쁜데.”
진심이었다. 단 한 번도 그의 눈에 예뻐 보이지 않은 적이 없는 제아였다.
오늘 새벽, 그를 놀라게 한 귀신같은 모습조차도. 물론 놀랐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 사랑스러웠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제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러는 거…… 반칙이야.”
항상 최소한의 말로 최소한의 의사를 표현하는 냉철한 성격의 도준이었다. 그런 도준을 잘 알고 있기에, 제아는 반칙이라고 생각했다.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도준은 그녀가 정말 예뻐 보여서 한 말일 테니까.
그걸 알기에 그의 무덤덤한 한마디가 심장 깊숙이 파고들어 치명타를 입혀버렸다. 제대로 뚫려버린 갑옷 안은, 여리고 여린 심장이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뭐가 반칙인데.”
그런데 그 속도 모르고 되묻는 도준을 제아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무조건 오냐오냐 해주는 거. 나 또…… 버릇 나빠진단 말이야.”
철없이 끝났을지도 모를 어린 소녀의 마음.
그 마음에 어마어마한 집착과 소유욕을 키워준 건 모두, 오냐오냐 해준 오빠 이준이었다.
그가 그렇게 떠난 후 오랜 방황 끝에, 그 감정들을 겨우 마음 깊숙한 곳에 쑤셔 박았다.
그런데 도준이 또다시 그 감정들을 끄집어내려 하고 있었다.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이준이 부모님의 손을 잡고 초록색 대문을 넘어 다시 나타난 순간부터 시작된 집착과 소유욕.
철없이 어렸던 동생이라도 차라리 현실적으로 대답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준은 그럴 때마다 진지하게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내 눈엔 너만 보여.
―네가 제일 예뻐.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
―내가 널 지켜줄게.
오직 제아만을 담은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며, 이준은 달콤하게 속삭여주었다.
그래서 믿었는데, 결국은 변명 한마디 하지 않고 떠났잖아.
머릿속을 채우는 옛 잔상을 애써 지우며, 제아는 대화의 주제를 바꾸려고 했다.
“서면이든 메시지든, 한 달 줄여주겠다는 거 증명해줘.”
“원한다면야.”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도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
“화분 뒤에 숨은 거.”
“……?”
“너답지 않았어. 문제아가 무서워서 숨다니.”
“무서워한 거 아니야! 오빠 없는 동안, 꽤 편하게 살아서…….”
문이준 동생이 아닌 순간, 편함과 동시에 힘들었다는 걸.
“그래서 이런 일에 일일이 반응하고 상대하는 거 이제 귀찮기도 하고, 지쳐.”
문이준이 없는 일상에 적응하려다가 지쳐버렸다는 걸.
“조금만 참으면 피할 수 있는 상황이면 참는 게 낫잖아? 쓸데없는 일에 힘을 뺄 이유도 없고.”
나도 모르게 본모습을 잃어버린 채 움츠러들고 참고 피하게 되어버렸다는 걸.
“가족이란 울타리, 이젠 내가 지켜야 하거든. 오빠가 떠난 순간부터…… 내가 우리 집 가장이니까.”
그 모든 걸 오빠가 알 리 없잖아.
제아의 말끝에 감출 수 없는 희미한 원망이 어렸다.
그 원망을 느낀 걸까? 도준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제아도 입을 꾹 다문 채 창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미동조차 없는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 속, 서로가 떠올리고 있는 기억이 미묘하게 얽혀들었다.
***
남매의 키스를 목격한 윤식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업무 택시를 몰고 나가다가 큰 사고를 냈고 그 사고는 일방적인 윤식의 과실로 사망자가 2명이나 나왔다.
병원비에 합의금은 ‘억’ 소리가 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윤식이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집에는 차압 딱지가 날아들었다.
최악의 상황 속, 유일하게 침착함을 유지하는 건 이준뿐이었다. 윤영과 제아를 돌보기 위해서라도 그는 버틸 수밖에 없었다.
병원 앞 커피숍, 3일 만에 정신을 차린 윤영이 잔뜩 부은 눈으로 이준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자꾸만 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이준이 차분하게 용기를 실어주자,
“이준아, 엄마가........돈이 필요해. 그것도 너무 많이.”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그 빚, 대학 진학 포기하고 스카우트 제의한 기업으로 들어가서.”
“이준아.”
“……?”
“우리 집 상황을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한연희 씨가…… 날 찾아왔어.”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몰랐다. 윤영이 무슨 말을 할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분한테 갈 일은 없습니다. 제 진짜 가족은?”
떨리는 윤영의 음성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연희 씨에게 가주면, 안 되겠니?”
이준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준이 네 마음만 돌아서게 도와주면, 물심양면으로 돕겠다는구나. 얼마나 부자인 줄은 모르지만, 지금 이 상황, 해결할 능력 정도는 된다고. 아들을 찾게, 도와달라고 말이야.”
“그분이, 아들을 찾고 싶다고 하던가요?”
무릎 위에 올리고 있는 이준의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윤영은 연희가 꽤 잘 사는 집안의 딸이라고만 알고 있지, 국내에서 손꼽히는 그룹의 외동딸이라는 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무정하고 독한 여자인지도.
“염치없다는 거 알아. 그래도 피는 못 속이는 법이야. 옛날엔 그랬어도 네 엄마도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으니 찾아온 거 아니겠니. 이 상황에서 똑똑한 널 우리가 붙잡아두는 것도 욕심이고.”
“어머니, 다른 방법이.”
“부탁한다. 제발…….”
그의 손을 잡고 갑자기 흐느끼는 윤영의 얼굴은 가슴이 아프도록 누군가를 떠오르게 한다.
……나의 제아.
……제아야.
“제아를, 한 번만 보고 왔으면 합니다. ……기다려 주실래요?”
병실의 문을 살짝 여니 윤식의 침대 옆에 곤히 잠이 든 제아가 보였다. 그런데도 차마, 발을 들일 수가 없는 이준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서로의 존재를 느끼는 만큼, 기척도 내지 않은 그의 존재를 느낀 걸까. 감겨 있던 제아의 얇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졸음 가득한 몽롱한 눈동자가 이준을 발견했다.
“이준 오빠…….”
병실의 문을 조용히 닫고 나온 제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배시시 웃으며 그의 품에 조심히 안겨들었다.
“아빠 수술 성공적이래. 좀 전에 의사랑 간호사 언니들 다녀갔어. 다행이지?”
“그래.”
“오빠는, 안 기뻐?”
“기뻐.”
“근데 표정이 왜 그래? 하나도 안 기뻐 보여.”
그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고양이 눈이 그를 조심히 올려다보았다. 그 눈을 깊숙이 마주하며 이준이 물었다.
“문제아, 내가 완벽한 남이 되면.”
그때 다시……
나, 너에게 오빠가 아닌 남자로 다가가도 될까?
하지만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제아가 입을 열었다.
“나한테는, 가족이 가장 소중해.”
어느새 그의 품에서 떨어진 제아는 고개를 푹 숙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그가 아닌 스스로에게 되뇌듯이.
“가족이란 울타리, 깨고 싶지 않아.”
그는 손끝으로 제아의 턱을 조심히 들어올렸다. 커다란 두 눈에 가득한 건 바로 죄책감, 그리고 긴 속눈썹 사이사이 스며든 건 바로 눈물이었다.
“그러니까 오빠가 지켜 줘, 제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에, 이준은 심장이 너덜너덜해져버렸다. 그런데도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렇다면…….
“네게 가장 소중한 그 가족이란 울타리.”
‘네가 그렇게 원하는 거라면.’
“내가 꼭 지켜줄게.”
‘내 인생을 팔아서라도.’
“그러니까 울지 마.”
제아의 턱을 잡고 있던 그의 손끝은 어느새 속눈썹에 맺힌 눈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제아를 뒤로한 채, 이준은 매정하게 몸을 틀었다.
커피숍으로 다시 돌아가자 불안한 듯 창밖을 바라보는 윤영이 보였다.
“가겠습니다.”
“이준아…….”
“지금까지 사랑으로 키워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친자식처럼 키워주신 고마운 분. 이준은 윤영을 향해 큰 절을 한 번 올렸다. 커피숍 안의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정확히 30분 후 이준은 같은 커피숍,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는 윤영이 아닌 연희가 앉아 있었다. 미세한 주름 하나 없이 우아하고 고운 얼굴은 이준이 연락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표정이다.
“내가 찾아갈 땐 꿈쩍도 안 하더니, 그 여자가 사정하니 마음이 바뀌었나 보구나.”
“본론만 간단히 하십시오. 저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아들이 필요해.”
“어떤 목적의 아들입니까?”
의도를 꿰뚫는 이준의 한마디에 윤영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어렸다. 기업가의 후계자가 갖추어야 할 냉철함과 예리함이 보인 것이다.
“제일 그룹에서 내 남편과 남편의 아들을 밀어낼, 내 진짜 아들. 대답이 되었니?”
“네.”
“그럼 이번엔 내가 물을 차례지? 1년에 1억, 나와 몇 년을 계약하겠니?”
그녀의 한마디는 서슴없었고, 가차 없었다. 조금이라도 엄마의 정을 기대했던 그가 바보였다. 아물어졌던 상처가 다시 벌어지고 피가 다시 나려고 한다.
하지만 이준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나에겐, 제아가 있으니까.
“네가 끔찍하게 아끼는 그 여자 식구들, 대충 12억 정도면 상황이 해결된다고 하더구나.”
이준의 앞으로 계약서 한 장을 내밀며 연희가 말을 이었다.
“강요는 없어. 네 손으로 직접, 원하는 금액을 기재해.”
새하얀 종이에 새겨진 까만 글씨.
수도 없이 봐온 건데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찢어발겨 버리고 싶다.
그럼에도 이준은 펜을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에겐 그들을 지켜줄 돈이란 힘이, 없었으니까.
어차피 제아를 위해 사려고 했던 인생.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을 위해 인생을 저당 잡혀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이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계약서에 금액을 기재하고, 사인을 했다. 계약서를 던지듯이 내밀고 돌아서는데 연희가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네 손으로 계약 날짜를 오늘이라고 적지 않았니?”
“하지만 가족들에게 인사라도.”
“계약금 일부는 이미 이틀 전에 그 여자 통장으로 입금이 되었어. 계약서의 효력은, 네가 사인을 한 지금 이 순간부터라는 뜻이지.”
윤영이 이미 돈을 받았다는 말에 굳어버린 아들을 보며 연희가 생긋, 웃었다.
“이의 있니?”
이준은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연희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윤식의 큰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제아는 일주일 만에 학교에 갔다. 그런데 학교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묘했다.
“정화야, 나 없는 동안 무슨 일 있었어?”
친구인 정화에게 묻자 정화마저도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그게…….”
그때 대놓고 들으라는 듯, 제아의 귀에 속살거리는 말들이 들려왔다.
“쟤네 아빠 교통사고 엄청 크게 냈다면서? 택시 기사가 맨 정신으로 사고를 낸다는 게 말이 돼? 애꿎은 사람이 2명이나 죽었대.”
“그래서 문이준, 유학 간대잖아. 아는 오빠한테 들었는데 원래 쟤네 친남매 아니래. 그러니까 집이 쫄딱 망하니 버리고 도망가지.”
오빠가 유학, 유학이라니?
제아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런데도 속살거리는 말들은 멈추지 않았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 꼴이지. 기껏 없는 살림에 잘 키워놨더니 혼자 살겠다고 친엄마한테 가는 거래잖아.”
“쟤 어쩌니? 쥐뿔도 없으면서 오빠 하나 믿고 설쳤는데. 문이준 없어지면, 선배들이 쟤 가만 안 놔둘걸?”
발끈해서 덤벼드려는 제아를 정화가 말렸다.
“제아야, 그냥 소문일 뿐이야. 너희 오빠 어디 안 가잖아? 그치? 그러니까 무시해.”
제아는 무시하고 가려고 했다. 반응하면 정말 그 말이 사실이란 걸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근데 문이준, 친엄마가 아니라 돈 많은 여자 꼬셔서 유학 간다는 말도 있던데?”
“에이, 설마.”
“문이준 걔가 만나는 여자들 다, 재벌가 딸들 아니면 유명한 여자 연예인들인 거 몰라? 그렇게 사고 쳐도 잠잠한 게 다 그 여자들이 막아준 거잖아. 그 여자들이랑 잠도 꽤 많이 잤을걸?”
“말도 안 돼! 그 도도한 문이준이 여자한테 몸을 팔았다고?”
그 순간이었다. 빛의 속도로 달려간 제아가 속살거리던 여고생들에게 악에 받치듯이 소리 질렀다.
“우리 오빠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
오로지 가족밖에 모르고, 오로지 가족만을 위해 살았던 이준이었다.
“그 말 당장 취소해. 당장 취소하라구!”
그런데 너희들이, 우리 오빠에 대해서 뭘 안다고 멋대로 지껄여!
평소라면 찍 소리 못 할 여고생들은 이제 무서울 게 없다는 듯 제아를 비웃었다.
“진짜 오빠도 아니라면서? 키워준 정도 모르고 떠난 오빠 뭐가 좋다고 편들어?”
“누가 그래, 우리 오빠 아니라구! 네가 뭘 아는데? 얼마나 아는데! 동생인 나보다 더 잘 알아? 누가 뭐래도 문이준은 내 오빠란 말이야!”
삼일 밤을 지새우며 그들의 곁을 떠나지 않던 이준의 갑작스러운 공백.
불안했던 제아의 마음은 속살거리는 별 볼일 없는 소문에 봇물 터지듯이 터져버렸다.
제아는 입방정을 떤 여고생들의 머리채를 단번에 휘어잡아버렸다.
“꺄악! 야 이 계집애야! 이거 안 놔?”
“그딴 소문 누가 냈어? 다 가만 안 둘 거야, 내가!”
뒤엉켜 싸웠다. 서로 머리채를 잡고 잡혔다. 뜯기고 뜯고, 긁히고 긁었다.
‘이준 오빠,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제아가 애타게 이준을 찾는 그 때, 그는 평창동 연희의 자택이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노발대발하는 한 회장과 이를 말리는 연희, 그리고 흐뭇하게 바라보는 강훈 부자도 함께였다.
한도준이란 이름으로 이 집의 가족이 된 순간, 제아의 가족을 위해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사라진 순간, 억눌려 있던 난폭한 본능은 폭발해버렸다.
여기저기서 버림받은 인생, 될 대로 대라. 인생 뭐 있나.
눈에 거슬리는 건 모조리 쓸어버리고 부셔버렸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그리고 그걸 목격한 그의 형이라는 겁쟁이는 냉큼 한 회장에게 보고를 올린 것이다.
더 난도질당할 것도 없는 그의 인생이 다시 한 번 생선처럼 도마 위에 올려졌다.
“학생회장은 무슨! 깡패처럼 사람이나 줘패고 다니는 이딴 망나니 놈은 필요 없다! 당장 쫓아내 버려!”
“아버지! 정말 이러기예요? 이준이 넌 뭐 하니? 할아버지한테 다신 안 그런다고 당장 빌지 않고!”
고집스럽게 침묵하는 이준을 본 한 회장은 화가 폭발해버렸다. 휘두르는 지팡이에 여기저기 맞았는데도 참 이상했다. 윤영이 휘두른 파리채보다도 아프지 않으니 말이다.
“경영이고 뭐고 도준이 이 녀석, 지금 당장 미국으로 유학 보내라! 정신 차릴 때까지 돈 한 푼도 주지 말고, 한국에 발 들일 생각도 하지 마!”
“아버지, 말이 틀리잖아요! 제일 그룹에서 실무 좀 익히고 미국 유학 보내기로 한? 도준아, 한도준!”
그의 인생을 허락도 없이 멋대로 휘두르려는 인간들 틈에 있으니, 탁 막혀오는 숨통.
연희의 부름에도 이준은 집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때마침 재킷 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어이, 표범. 네 동생 오늘은 학교 여자애들한테 제대로 뜯겼다더라. 애들 시켜서 손 좀 봐놓을까?]
잠시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지금 이 순간부터.”
지금부터, 스스로 이겨내야 할 제아를 위해.
“무슨 일이 있어도, 신경 쓰지 마.”
두 눈과 귀를 철저하게 닫아야 한다.
그가 매정하게 끊어버린 핸드폰은 곧 그의 발아래 처참히 짓밟혀서 망가졌다. 그리고 감은 눈 사이로 아른거리는 애틋한 얼굴마저도 애써 지워버렸다. 이제 더 이상 지켜줄 수 없으니까, 곁에 있어줄 수 없으니까.
딱 한 번만, 목소리를 들으면 안 될까? 먼발치에서라도 얼굴만 한 번 보면 안 될까?
하지만, 윤영의 애절한 마지막 부탁이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이준아, 제아에겐 비밀로 해주렴. 부탁이다.
그게 최선의 방법이라면. 모든 원망과 미움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제아가 보란 듯이 잘 버텨주기를 바랐다.
***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기억은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그 기억 속, 제아는 지켜주겠다고 하고 떠나버린 이준을 원망하고 있었다. 이준이 그렇게 떠나버린 후, 그의 공백을 독하게 버티던 시절. 날마다 치고 박고 싸웠다. 그러다 지쳐갔다.
하지만 오빤 모르겠지. 내가 왜 지쳤는지.
그 기억 속, 도준은 모든 걸 홀로 감당한 채 아파하고 있었다. 철저하게 이용만 당한 스스로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하지만 넌 모르겠지. 인생을 팔아서라도 그 약속, 철저하게 지켰다는 걸.
밀폐된 공간 속을 가득 메운 침묵을 못 견디고 입을 연 건 제아였다.
“나 가장 노릇 잘 하고 있어! 그러니까 혹시라도.”
이제 더 이상, 그녀는 오빠밖에 모르던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우리 가족한테 아직도 책임감 같은 거 느끼는 거라면, 이제 그러지 않아도 돼.”
“나, 너 때문에 돌아왔어.”
“……?”
“책임감 같은 거, 아니라고.”
“책임감이 아니면, 뭔데?”
때마침 컨벤션에 도착한 차가 멈추어 섰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지는 않고, 여전히 한 손은 핸들을 잡은 채 도준이 제아 쪽으로 몸을 확 틀어 숙여왔다.
깜짝 놀라 차 문 쪽에 바짝 붙어선 제아에게 정면으로 서슴없이 찔러드는 그의 시선.
“내 대답, 들을 자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