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내 여자인 척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2016.11.14.
억겁의 시간처럼 더디게 흐르는 짧은 침묵. 미세한 떨림조차 없었다.
도준의 시선이 좀 더 밑으로 미끄러졌다. 그리고 제아의 시선도 그의 시선을 따라 미끄러졌다.
이번엔 다리였다. 아슬하게 힙라인을 가리고 있는 타월 밑으로 쭉 뻗은 매끈하게 빠진 다리.
그의 시선이 닿는 순간, 피부가 데일 듯이 뜨거움을 품었다. 순간적으로 타월을 밑으로 내려 허벅지를 가릴 뻔했다.
위로 더 올릴 수도, 밑으로 더 내릴 수도 없는, 큰 키에 비해 턱없이 짧은 타월이 이 순간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런데 도준조차 말이 없다. 그녀라도 뭐라고 해야 하는데, 들러붙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장이기 이전에 오빠다. 그래서 ‘꺄악!’이라고 소리 지를 수도 없었다.
오빠이기 이전에 완벽한 남이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갈 수도 없었다.
소리를 지를 수도, 지르지 않을 수도 없는 기묘한 관계.
그게 지금 둘의 관계였다.
갑자기 도준이 거리를 바짝 좁혀왔다. 가슴 쪽에 두른 타월을 꼭 잡고 있는 제아의 손끝이 야릇하게 떨렸다.
제발, 오빠가 눈치채지 않기를!
스윽, 무심하게 제아를 지나친 도준은 침대 위에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수선 맡겼던 옷이야.”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그의 한마디에 투명한 유리벽에 감싸인 듯 갇혀 있던 공기가 마침내 해방되었다.
“이 옷 입고 9시까지 로비로 내려오도록.”
“……응.”
바짝 긴장한 그녀와 달리 도준은 얄미울 정도로 무심했고 태연했다.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반라의 몸을 가까이서 봤는데도 말이다.
아무리 동생이라지만, 서로가 엄연히 남이고 엄연히 어른인데.
도준이 그러니 제아도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긴장감은 늦추지 않았다. 그가 지금 바로 몸만 틀면 바짝 붙어버릴 거리였으니까.
“마침, 비어 있는 룸이 있다고 해서 내 짐은 옮겼으니 그렇게 알고.”
“……응.”
아슬한 그 거리감을 그도 의식하는 걸까. 도준은 끝까지 돌아서지 않았다. 침실을 나갈 때까지 제아에게 단 한 번의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렇게 도준이 사라진 후, 제아는 스르륵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그녀도 모르게 새어 나온 중얼거림이었다. 도준의 시선이 닿았던 가슴 언저리와 다리 부근에서 미세한 미열이 감돌았다.
얼마나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었는지 모른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제아는 도준이 놔두고 간 쇼핑백에서 옷을 꺼냈다. 심플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블랙 원피스였다.
영혼 없이 기계적인 동작으로 그 옷을 입는 순간, 제아는 다시 한 번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팔다리는 길고 가늘지만 가슴과 힙 사이즈가 꽤 큰 편이라서 기성복은 항상 한 사이즈씩 크게 입는 그녀였다. 그래서 항상 볼품없이 한 사이즈씩 큰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데 지금 입고 있는 원피스는 맞춤복인 듯 조금의 오차도 없이 딱 떨어졌다.
제아의 넘치는 볼륨감과 날씬한 실루엣이 여지없이 매혹적으로 드러났다. 이 옷을 쇼핑한 도준이 그녀의 신체사이즈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깡말랐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신체의 변화가 너무 많이 일어났는데.
제아의 시선이 저절로 쇼핑백으로 향했다.
수선, 맡겼다고 했는데.
급한 손길로 쇼핑백 안에 든 옷 영수증과 수선 영수증을 확인했다.
옷 사이즈는 분명 한 치수 큰 사이즈였고, 수선 영수증엔 정확히 줄여야 할 옷 위치와 센티까지 정확히 기재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르륵 달아올랐다. 들킨 건 반라인데도 샤워를 하다 알몸을 들킨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
수선이 끝난 옷을 직접 전해주기 위해 제아가 있는 룸을 찾은 도준이었다.
룸을 옮겼다는 것도 알릴 겸 안으로 들어가 침실 문을 노크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침실 문을 살짝 열자 물소리가 들린다.
제아가 샤워를 오래 하는 걸 알고 있기에, 쇼핑백만 살짝 올려놓고 다시 나올 생각이었는데. 하필이도 제아가 샤워를 끝낸 타이밍에 딱 맞아떨어져 버렸다.
제아에겐 턱없이 짧은 타월.
그 밖으로 아슬아슬하게 드러낸 몸매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휘몰아치는 욕망을 기민하게 숨기고, 도준은 침대 위에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무심한 척했지만, 끈적이는 유혹의 손길이 뒤에서 뻗어 나와 그의 온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돌아서라고, 제발 돌아서서 나를 봐달라고.
하지만 도준은 독하게 버텨냈다.
룸으로 돌아오자마자 닫힌 문에 기대어 선 채 도준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당혹스러운 듯 그의 긴 손가락이 감긴 눈매 근처를 어루만졌다.
감은 시야 속, 뽀얗고 풍만한 실루엣이 아른거렸다. 무언가에 세차게 얻어맞은 듯 뻐근해지는 뒤통수, 얼얼한 심장.
깡말랐던 옛날의 소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직접 눈으로 목격하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빌어먹을.”
그의 입에서 나직한 욕지거리가 흘러 나왔다.
그의 완벽함을 대변해주는 듯 그는 조금의 틀어짐도 없이 매어진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겨버렸다. 그리고 풀어헤친 넥타이를 침대 위에 던진 채 욕실로 향했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오감과 박동수를 올리는 심장, 온몸을 잠식하는 뜨거운 열기.
몸이 흥분했다는 증거였다.
제멋대로 반응해버린 몸은 뇌의 컨트롤을 벗어나버렸다. 옛날 그때처럼 어리숙했던 소년이 아닌데도 말이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찬물이 그의 얼굴을 타고 온몸을 적시면서 흘러내렸다. 그런데도 머릿속을 꽉 채우는 잔상은 점점 거대해졌다.
조금의 오차도 없이 틀에 맞게 돌아가는 하루 일상에서 조금 틀어진 하루였다.
생각보다 집에 빨리 도착한 이준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얼어붙어버렸다.
젖은 머리칼을 가냘픈 어깨 위로 늘어뜨린 채 몸에 타월만을 두르고 있는 제아가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오늘 일찍 왔네?’
멋쩍은 듯 웃는 발그레한 미소부터, 타월을 꼭 움켜쥐고 있는 가냘픈 손과 치솟은 어깨, 민망한 듯 꼼지락거리는 새하얀 발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흘러내리는 선이 곧고 아름다웠다.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샤워하는데 입을 옷을 또 깜빡하고 안 가지고 들어가서.’
‘…….’
‘방에 들어가면 안 될까.’
제 방으로 들어가는 건 자유인데도 제아는 조심히 묻고 있었다. 그의 허락을 기다리는 듯. 목이 꽉 메어버렸다.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쪼르르 달려가서 방 안으로 사라져버린 가녀린 실루엣. 그 방문에서 한참동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코끝에 희미하게 감도는 상큼한 복숭아 향.
머릿속을 꽉 채워버린 섬세한 선으로 이루어진 가냘픈 실루엣.
쿵쾅쿵쾅―.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선 소리가 그의 귀를 울렸다. 뻐근해지는 뒷골, 얼얼한 심장, 피어오르는 열기. 그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지금처럼.
샤워기의 물을 얼마나 맞고 있었을까.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뜨거웠던 몸의 열기가 송장처럼 식어갔다. 그제야 도준은 샤워기의 물을 잠갔다.
다시 눈을 뜨자 긴 속눈썹 사이로 어려 있던 물기가 톡톡 떨어졌다. 물안개가 낀 듯 뿌연 시야처럼 머릿속도 뿌연 상태였다.
그에게 제아란 존재는 포기하려 했던 삶을 다시 살아가게 해준 원동력이자 유일한 삶의 이유였다.
하지만 그건 오로지 은혜를 갚기 위함이었지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감정은 절대 아니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말이다.
어디를 가나, 지겨울 만큼 그를 귀찮게 하는 존재가 바로 여자들이었다.
한 미모 하는 여자들이, 농염하게 무르익은 성숙한 여자들이 수도 없이 옷을 벗고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맹세코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옛 기억들을 떠올리던 도준은 문득 궁금해졌다.
방금 전 보았던 제아의 육감적인 몸매는 확실히 치명적인 매혹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왜, 심장이 뛰었던 걸까. 이제 겨우 중학생이었던 제아는 소녀티를 벗지 못한 어린 동생이었을 뿐인데. 왜 하필, 밋밋한 동생의 몸에 심장이 뛰고 몸이 반응을 해버린 걸까.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렇게 지독하게 미쳐버릴 정도로.
***
‘비서는 곧 사장의 또 다른 얼굴이다!’
그 말을 되새기며 제아는 매무새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깊게 파인 브이넥 목선이 돋보이는 블랙 원피스. 한 올의 빠짐도 없이 깨끗하게 틀어 올린 헤어스타일 때문에 도드라지는 길고 새하얀 목선.
서류와 태블릿 PC가 든 서류가방까지 손에 드니 완벽한 여비서의 모습이었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제아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너무 타이트하게 달라붙은 원피스를 자꾸만 손으로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로비도 넓던데, 어디서 만나자는 거지?”
그런 걱정과 달리 도준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부산에서 5성급 호텔인 크루즈 호텔의 로비는 축구장처럼 드넓었지만 독보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도준은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매혹적인 그 존재에 벌써 현혹된 여자들은 그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 매혹적인 존재는 영광스럽게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제아는 도준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사뿐한 걸음으로 도준에게 다가서는 여자가 보인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앞에 있는 여자들의 대화가 제아의 귀를 파고들었다.
“벌써 4명째야. 저 여자도 당연히 거절하겠지?”
“미쳤니? 저런 미인을 거절하는 남자가 어디 있어? 몸매는 섹시한데 얼굴은 청순하잖아.”
긴 생머리, 갸름하게 새하얀 얼굴, 육감적인 몸을 감싸고 있는 새하얀 원피스.
도준에게 다가간 여자는 만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청순한 미인상에 섹시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뭐, 예쁘긴 하다. 그래도 당연히 거절해야지! 우리가 갖지 못하면, 저 여자도 못 갖는 거지. 안 그래?”
“당연하지! 저런 남잘 건드리는 건 범죄야. 범죄자는 당연히 힘을 합쳐서 응징해줘야지!”
도준이 받아들이는 순간 여자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쁨을 느낄 것이다.
그와 동시에 로비에 있는 여자들의 공공의 적이 될 것이다. 하다못해 데스크를 지키고 있는 호텔 여직원에게조차.
그리고 방금 한 여자들의 말에 도준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들 또한 적극 동참할 것이다.
어떤 여자도 절대 가져서는 안 되는, 오로지 눈으로만 구경해야 하는 만인의 남자가 그이니까.
그 규칙을 깨는 순간, 그 여자는 모든 여자들의 공공의 적이 되니까.
10년 전 그때는, 흑표범 보호 법칙이라고 우스갯소리까지 했었다. 이준이든 도준이든.
그를 보는 여자들에게 자동적으로 효력이 발생하는 흑표범 보호법칙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이글거리는 다른 여자들의 눈빛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자는 수줍은 미소를 잔잔히 머금으며 도준을 올려다보았다.
옛날 같았으면 한걸음에 달려갔을 텐데.
하지만 제아는 달려가는 대신 조용히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겐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그런데도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옛날, 이준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을 별의별 방법으로 떼어놓았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그와 남매였던 시절, 가는 곳마다 여자가 끊이지 않는 이준을 관리하는 건 어린 소녀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야아! 우리 오빠한테서 당장 안 떨어져!?’
라는 협박으로 여자들을 쫓아내는 건 한계가 있었다. 동생을 보는 순간 따스한 봄볕처럼 나른해지는 이준의 눈빛에 여자들은 제아를 이용하려고 했다.
귀찮을 정도로 신경 쓰고 잘해주다가 그래도 이준을 차지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돌변했다.
이준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고스란히 제아에게 쏟아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묘책을 생각해냈다. 바로 이준의 여자인 척하는 것. 그 묘책은 꽤 효과가 있었고 이준도 만족해하며 적극 동참했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다가서는 여자들 때문에 이준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으니까.
여자는 키가 큰 도준에게 조금 몸을 숙여달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런데도 꼼짝하지 않는 냉랭한 도준의 반응에 지켜보던 여자들은 신이 났다.
“반응 봐! 저렇게 예뻐도 거절하려는 게 분명해!”
“그럼 그렇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살짝 까치발을 든 여자가 도준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그 여자를 빤히 바라보던 도준이 갑자기 상체를 가까이 숙였다. 그 모습에 지켜보던 여자들 사이에서 질투어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악! 안 돼!”
“설마 오케이 한 건 아니겠지?”
도준의 미세한 행동 하나에 자극당한 건 제아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묘한 기분이 온몸을 서서히 잠식해나갔다.
두근두근.
도준에게 다가선 건 그 여자인데도, 심장이 뛰는 건 바로 제아였다.
여자를 받아들이는 듯한 도준의 행동이, 그 옛날 이준을 향한 지독한 집착과 소유욕을 자극한 것이다. 마음 깊이 꼭꼭 숨겨놓았던, 이제 없어진 줄 알았던 감정을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뛰어왔다.
터질 것처럼 빨개진 얼굴에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달려온 여자는 이미 위로 올라가고 있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신 눌러댔다.
공공의 적으로 몰아서 응징을 한다고 다짐하던 여자들은 어느새 여자에게 다가가 걱정스럽게 묻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그쪽도 거절당했어요?”
“흑흑흑!!!!”
끄덕이는 여자의 고개짓에 공공의 적은 공공의 편이 되었다.
“아휴, 괜찮아요. 이걸로 눈물 좀 닦으세요.”
여자들은 이제 막 거절당한 여자에게 손수건을 내밀고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근데 그쪽은 저 남자가 뭐라고 거절했어요?”
걱정을 가장한 호기심이었다.
“저 남자가, 흑…… 흑흑! 내숭 떠는 여자는 딱 질색이라고, 꺼지래요.”
“어머, 나한테는 먼저 다가오는 여자는 매력 없다고 했는데!”
“나한테는 귀찮게 하는 여자 질색이라고 했어요!”
“아니, 뭐 저런 싸가지 없는 자식이 다 있어? 싫음 싫다고 하지 변명도 가지각색이네!”
공공의 편이 된 여자들은 찬양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도준을 신랄하게 씹어대기 시작했다.
여자들의 대화를 듣던 제아는 살짝 눈살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혀에 독 품은 건 여전하네.”
그때 도준이 갑자기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틀었다. 지은 죄도 없는데, 제아는 반사적으로 커다란 화분 뒤에 확 쭈그리고 앉아 몸을 숨겼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은신술이었다. 연인이든 비서이든.
지금 이 분위기로 보건대 어떤 이유로든 도준이 허락하는 여자가 되는 순간, 공공의 적이 될 건 분명했으니까.
다행히도 도준은 다가오지는 않았다.
“휴우.”
제아의 입술 사이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받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는 수 없이 제아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그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9시야.]
“정말 미안! 아주 조금 늦을 것 같은데, 그냥 주차장에서 만나면 안 될까?”
[…….]
“굳이 로비에서 만날 필요는 없잖아.”
나 좀 살려줘요, 한도준 씨. 지금 여기 있는 수많은 공공의 편들에게 나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지 말아 달라구!
제아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 간절하게 빌었다.
[지금 어디지?]
확실하게 느껴지는 냉랭한 음성. 잠시 고민하던 제아는 거짓말을 했다.
“이, 이제 막 방에서 나가려구.”
[방이.]
“……?”
[화분 뒤인가 보지?]
“……!”
[숨어서 지켜보는 취미라도 생겼나.]
알짤 없는 돌직구에 제아는 목구멍이 탁 막혀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화분 뒤에서 슬쩍 고개를 내밀자, 아주 정확하게 그녈 바라보고 있는 도준이 보였다. 정면으로 제대로 얽혀버린 시선.
지금 이 행동을, 이 상황을 설명할 만한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런데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숨은 건 사실이니 너무 구차한 변명이 될 것 같았으니까.
물론 마음만 먹는다면 수많은 공공의 편들 따위 얼마든지 상대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10년 사이 그녀는 너무 지쳐 있었다.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쉰 제아는 자포자기한 듯 입을 열었다.
“저기 사실은…….”
[한 달].
“……한 달이라니?”
[지금 걸어오는 여자를 포함해서.]
도준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의 말대로 또 다른 여자가 도준에게 접근하는 게 보였다. 여자를 연달아 거절하는 도준의 곧은 절개가 여자들의 승부욕을 자극한 것이다.
[지금 나를 노리는 여자들, 깔끔하게 처리해.]
“.......?”
[그러면 1년 계약 중에서 한 달을 줄여주지.]
“내, 내가 그런 걸 어떻게 해?”
[그쪽 방면으론, 프로 아닌가?]
“.......?”
[내가 기억하는, 문제아라면 말이야.]
그의 한마디는 마음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자존심이라는 걸 수면 위로 단번에 끌어올렸다.
도준이 내건 한 달, 돈으로 따지자면 무려 200만 원이었다. 몇 분의 투자로 200만 원을 갚을 수 있다는데, 어떻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도 잠시 망설여지기는 했다. 어렸을 때야 많이 했던 수법이긴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그에게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게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다.
[싫으면 말든가.]
역시나 도준답게 길게 생각할 여유도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두 번 물어보지도 않았다. 정말 매정한 남자 같으니라고!
“하, 할게! 하면 되잖아!”
전화를 끊은 제아는 화분 뒤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리 없이 화분 뒤에서 나타난 제아 때문에 엘리베이터에 모여 있던 여자들이 화들짝 놀라 바라보았다.
“스타킹이 나간 것 같아서, 확인 좀 했어요.”
약 1분 후에 그녀를 공공의 적으로 몰아세울 여자들을 향해 제아는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전화를 끊은 도준은 로비에 마련된 소파에 있었긴 다리를 꼬고 앉았다.
왼쪽 팔로 턱을 괸 채, 지극히 나른하고 오만한 모습으로 제게로 걸어오는 제아를 음미하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뒤에 서서 바라보는 여자들에게, 어떻게 할지 두고 보겠다는 듯이 바라보는 도준에게.
제아는 보란 듯이 모델 워킹하듯 당당하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그에게 다가갔다. 200만 원의 빚 탕감을 위하여. 그에게서 멀어질 한 달을 위하여.
또각또각―.
제아가 신은 스틸레토 힐의 가늘고 긴 구두굽이 로비의 대리석 바닥을 명쾌하게 울렸다.
드디어 도준 앞에 도착했다.
지그시 내리깐 눈 그대로, 도준이 오만하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유난히도 짙은 그의 나른한 적갈색 눈동자가 서슴없이 심장을 찔러들었다.
쿵쾅쿵쾅―.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눈빛 한 번에 심장이 격하게 뛰고 온몸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200만 원이고 뭐고, 도저히 못 하겠어! 뒷걸음질 치려는 순간, 어림도 없다는 듯 도준이 제아의 손목을 틀어잡고 확 끌어당겼다.
앞으로 확 꺾인 몸이 순식간에 기울어졌다.
‘엄마야!’
균형을 잃은 제아의 허리를 도준이 단번에 낚아챘다. 그리곤 아주 정확하게 그의 무릎 위에 안착시켰다.
확 당겨진 서로의 거리감, 제아는 저도 모르게 도준의 목에 한쪽 팔을 두르고 있었다.
느릿하게 허리를 타고 오른 그의 손이 제아의 뒷목을 천천히 거머쥐고 끌어당겼다.
곧이어 들려오는, 오직 제아만이 들을 수 있는 나직한 속삭임.
“내 여자인 척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돌아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적대적인 시선과 귓속을 어지르는 여자들의 작은 비명들. 그런데도 제아는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엉덩이 밑으로 화가 난 듯 단단한 도준의 허벅지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얼떨결에 그의 무릎에 앉은 채 안겨들긴 했지만 내리깐 시선은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고 있었다.
제아의 미세한 반응조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던 도준이 노골적으로 물어왔다.
“설마, 나를 남자로 의식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럼 하던 대로 해.”
“……?”
“내가 기억하는,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문제아라면 말이야.”
도준의 마지막 말은 은밀한 도발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가차 없이 휘두르는 채찍과도 같았다.
그가 휘두른 채찍에 정통으로 맞아버린 자존심은 내면 깊숙이 숨겨놓았던 제아의 본모습을 단숨에 끄집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