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이만큼, 오빠 입술이 닿았어.
2016.11.10.
두 팔이 날개라도 되는 것처럼 활짝 펼쳐서 더 격하게 날아간 걸까.
새처럼 날아서 먹잇감을 낚아채듯이 덮친 건 제아인데도 둔탁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럼…… 내 밑에 깔린 오빠는?
지금 당장 눈을 뜨고 날벼락을 맞은 도준의 상태를 확인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녀는 차마 눈을 뜰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허리와 어깨를 감싸고 있는 이 든든한 팔은 분명 도준의 팔이겠지. 양손으로 지탱을 하고 있는 이 탄탄한 가슴은 도준의 가슴이겠지.
그래,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입술을 꾹 누르고 있는, 정확히 따지면 그녀의 입술이 누르고 있는 이건, 뭐지?
젤리처럼 말캉하면서도 탱글탱글하고 보들보들한 감촉이 기가 막혔다. 신체 일부 중에서 굳이 찾자면 그런 감촉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딱 한 곳뿐인데.
그러니까 지구인들은 그걸 입술……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은데.
제아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밑에 깔린 존재는 미세한 움직임조차 없었다.
‘설마…… 뇌진탕?’
덜컥 겁이 난 제아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조심히 들어 올렸다.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은 채 조심히 시선을 내리자 살짝 어긋난 채 맞물린 서로의 입술이 보였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녀의 입술은 도준의 입술을 반 정도만 머금고 있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은 것도 잠시뿐, 지금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나른한 눈동자는 긴 속눈썹과 실핏줄이 비치는 얇은 눈꺼풀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밀랍 인형처럼 매끈하고 새하얀 얼굴은 숨 쉬고 있는 게 의심스러울 정도로 고요했다.
“……오빠?”
그의 몸 위에서 내려와 조심히 불러보지만 대답이 없다.
밤늦게 비가 와서 그런지 땅은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손으로 그의 머리 뒤를 더듬어보지만 돌같이 툭 튀어나온 것도 없었다.
그런데 왜 정신을 못 차리지?
“제발 정신 좀 차려봐. 응?”
찰싹찰싹, 빠르게 휘두르는 제아의 손이 도준의 새하얀 뺨에 달라붙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어떻게든 도준이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한다는 생각뿐. 그의 눈꺼풀이 파릇하게 떨리는 걸 알 리 없는 제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급기야 커다란 두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지고 울먹이는 음성이 떨리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오빠, 도준 오빠아아아! 흐어어엉! 나 때문이야! 119…… 119!”
제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웠다.
그런데 새하얀 손이 불쑥 나타나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가늘게 눈을 뜬 도준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입술 박치기 당한 것도 억울한데, 뺨까지 얻어맞다니. 고소라도 해야겠어.”
“박치기라니! 바, 반밖에 안 닿았거든?”
그의 말에 제아는 찔끔했다.
박치기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는 건 인정.
하지만 성난 황소처럼 머리로 그의 가슴을 들이받으려고 했지 하늘에 맹세코 ‘입술 대 입술’은 아니었다.
정신 차리자마자 대놓고 입술 박치기라고 표현하는 그가 얄미웠지만, 우선 먼저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제아는 그의 눈앞에 몇 개 접은 손가락을 열심히 흔들었다.
“이거, 이거 몇 개야?”
“두 개.”
“그럼 이건? 뇌진탕인지 아닌지 확인해봐야 해!”
다시 손가락을 흔들어대는 제아의 손을 도준은 가만히 쥐었다.
“문제아. 정신도, 몸도 난 아주 멀쩡해.”
도준의 서늘한 음성이 나직하게 가라앉았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제아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잃었던 현실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는지 제아는 커다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눈을 가득히 채우고 있던 마지막 눈물이 발그레한 뺨을 타고 또르륵,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그의 긴 손가락 끝으로 흘러내렸다. 손끝으로 눈물을 어루만지며 몸을 일으키던 그는 갑자기 느껴지는 현기증에 잠시 눈을 감았다.
눈도 감은 김에 도준은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어디서 그런 스피드가 났는지, 우사인 볼트처럼 뛰어오는 제아의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
저게 정말, 죽도록 달리기를 싫어하는 문제아?
그런데 그것도 잠시뿐, 뜀박질에 익숙하지도 않으면서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에 한눈까지 파는 모습에 도준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설마, 툭 튀어나온 저 돌부리를 못 보지는 않겠지.
시력이 정상인 이상 절대 보지 못할 리가 없는, 눈에 확 띄는 돌이었다.
그래도 다른 누구도 아닌 문제아이니까,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고를 해주려고 했다.
“문제아, 발밑 좀 보면서 조심히!”
그의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무서운 속도로 달려온 제아의 발은 그 돌부리를 미처 피하지 못했다.
그걸 본 순간, 도준은 본능적으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양 팔을 하늘로 뻗으며 비상하는 제아를 향해 도준도 양팔을 활짝 벌렸다. 반사적인 운동 신경으로 붕 뜬 제아의 몸을 받아내긴 했다.
하지만 얼마나 속도를 내서 달려온 건지 제아를 받아낸 그의 몸이 뒤로 확 넘어갔다.
제아를 품에 안은 채 축축한 바닥에 몸이 떨어지는 순간, 아주 잠깐 눈앞이 깜깜해지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하지만 입술에 반쯤 와 닿은 달콤한 촉감은 그가 정신을 잃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내가 항상 그랬지. 뛰어오다가 넘어지지 말라고.”
“앞으론…… 조심할게.”
그래도 지은 죄가 있는지 웬일로 얌전하게 대답을 하는 제아를 향해, 도준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옛날처럼 부드럽게 머리를 어루만지며 대수롭지 않은 말해주었다.
“그럼 됐어.”
두 명의 체중에 더해진 달리기의 스피드함, 그 모든 걸 떠안은 채 뒤로 넘어졌을 땐 도준도 아찔했다.
그래도 덕분에 복숭아 사탕을 어설프게 맛보았으니, 그 아찔함에 대한 보상은 받은 셈 치기로 했다.
“많이, 놀랐나 보지?”
정신을 잃은 건 불과 1, 2초였다. 정신을 차렸음에도 도준이 바로 움직이지 않은 건 입술에 와 닿은 제아의 입술 감촉을 음미하기 위함이었다.
움직이는 순간, 달콤한 복숭아 사탕은 미련 없이 떠나버릴 테니까.
어쨌거나 이건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그럼 안 놀라? 오빠가 시체처럼 누워서 꼼짝도 안 하니까 심장 터져버리는 줄 알았단 말이야!”
생각만 해도 아찔한지 제아의 눈가가 다시 촉촉해졌다.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그가 뚫어지게 바라보자 민망했는지 제아는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내리깐 촘촘한 속눈썹에 키스를 퍼부으며 그는 속삭이고 싶었다.
난 오늘 심장이 아니라, 온몸이 터져버리는 줄 알았다고.
***
새처럼 날아서 도준을 와락 덮쳐버린 제아 때문에 빨리 끝나버린 조깅. 호텔 룸으로 돌아왔을 때 두 사람의 옷은 온통 흙범벅이었다.
제아가 침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컨시어지에서 급하게 룸을 찾아왔다.
“죄송합니다, 손님.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조깅 코스는 바로 조치를 취하라고 했습니다.”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사죄를 한 후에야 돌아가려는 직원을 도준이 갑자기 불러 세웠다.
“어젯밤에 말했던 룸, 지금도 있습니까?”
“원하시면 구해드릴 수 있습니다. 언제 필요하십니까?”
마음을 굳히고 직원을 불러 세웠던 도준이었다. 그런데 막상 직원이 물어보니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이 미련은 뭔지.
그의 눈이 제아가 머물고 있는 침실에 잠시 머물렀다.
제대로 닫지도 않은 문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제아의 콧노래, 그리고 아른거리는 가녀린 실루엣.
샤워를 하려는지 트레이닝 점퍼를 벗어버리고 달라붙은 민소매 차림을 하고 있는 제아의 옆모습이 언뜻 비쳤다.
가늘고 새하얀 목을 타고 흐르는 선은 갑자기 경사가 급해졌다. 아찔할 정도로 부드럽고, 풍만하게.
그리고 다시 경사를 타고 가늘어지는 허리 라인.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을 강렬하게 훑어 내리는 뜨거운 열기.
오늘 새벽도 그리고 아침도, 도준으로선 꽤 파란만장했다.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제아와 같은 룸을 쓴다는 건 인생 최대의 인내심 테스트에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대로라면, 절대 오늘 밤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예측불허 문제아에게 또 언제 어떻게 공격당할지 모르기에 대비도 할 수가 없다. 한 번 더 당한다면 버틸 자신도 없다.
결국 도준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준비해주세요.”
도준이 룸을 옮겼다는 것도 모른 채 제아는 자쿠지 욕조 안에서 거품 목욕을 즐기는 중이었다.
향긋한 아로마 향이 후각을 나른하게 만들었고, 새하얀 거품 곳곳에 번진 붉은 장미 꽃잎은 시각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빨리 끝나버린 조깅 때문에 생긴 여유로움이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반신욕을 즐기던 제아는 자신도 모르게 손끝으로 가만히 입술을 더듬었다.
“이만큼.”
입술의 중간쯤에서 손가락이 멈추고.
“오빠 입술이 닿았어.”
심장이 두근거렸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도준이 뇌진탕인 줄 알고 너무 당황해서 그때의 아찔한 상황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것이다.
피식, 웃음을 흘린 제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나 또, 오빠한테 입술 박치기를 해버렸네.”
도준이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엄밀히 따지면 도준과 입술 박치기를 한 게 벌써 두 번째였다.
20년 전, 이준을 처음 본 그때도 그를 덮쳐서 입술 박치기를 했으니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지르는 건 항상 그녀였고, 도준은 항상 당하는 쪽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조차.
***
어김없이 돌아오는 일요일마다 제아의 부모님은 이른 아침부터 외출을 했다. 꼼꼼하게 반찬을 챙겼고, 깨끗하게 세탁한 옷가지를 챙겨서 말이다.
어린 제아의 눈에도 그 모습은 참 이상하게 보였다. 맛있는 반찬은 어디로 가져가는 거고, 남자 아이의 옷은 대체 누구의 것인지.
“으앙, 나도 갈래! 으아앙, 혼자 있기 싫어!”
급기야 일요일 아침, 제아는 윤영의 품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윤영이 윤식을 바라보았다. ‘어쩌죠, 여보?’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데 어쩔 수 없지. 데리고 갑시다.”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하는 제아는 마냥 신이 났다. 그런데 좁고 가파른 언덕길에서 제아는 멈추어 섰다.
지금 살고 있는 집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허름한 판잣집이 빽빽하게 들어찬 달동네.
그 모습이 어린 소녀의 눈에도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빠, 나 안 갈래, 여기 무서워.”
따라간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젠 가기 싫다고 제아는 엉덩이를 뒤로 쭉 뺐다.
그래도 딸을 혼자 둘 순 없기에 윤식은 제아를 번쩍 안아들고 비좁은 비탈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판잣집 중에서도 가장 작고 허름한 판잣집은 대문조차 없었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좁고 허름한 공간으로 윤영이 먼저 들어갔다.
“어휴, 또 음식은 손도 대지 않았어요, 여보.”
윤영의 뒤를 따라 들어간 윤식의 눈빛은 암울했다.
“야옹.”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제아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귀가 솔깃했다.
엄마 아빠는 들리지 않게 저 안에서 속닥거리고 있으니, 이때다!
살금살금 걸어서 고양이에게 다가갔지만 제아를 본 아기 고양이는 바짝 털을 세우며 도망가 버렸다.
“야옹아!”
아기 고양이의 뒤를 얼마나 쫓아갔는지 모른다.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 치면서 세찬 소낙비가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굵은 빗줄기에 몸이 흠뻑 젖고 싸늘한 한기가 들자 그제야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었다.
빽빽한 미로처럼 생긴 동네 지리가 어린 소녀에겐 너무도 어려웠던 것이다.
“으아아앙, 엄마아아!”
비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어디를 어떻게 얼마나 헤매고 다녔는지 모른다.
그때 아득한 비탈길 옆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서 있는 소년이 보였다.
도깨비가 나올 것 같은 무서운 동네에서 사람을 보았다는 게 제아는 마냥 기뻤다.
그 세찬 비를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소년은 미동조차 없었다. 소년에게 다가가 살짝 내다보니 소년의 발밑은 까마득하기만 했다.
그때 소년이 그 절벽을 향해 발을 내딛으려 하는 게 보였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제아는 다짜고짜 소년의 허리를 와락 껴안아버렸다.
“으아아앙! 뛰어내리면 안 돼. 울 엄마가 높은 곳은 위험하다고 했단 말이야!”
갑자기 나타난 어린 소녀의 존재에 소년도 잠시 당황한 듯싶었다. 하지만 잠깐뿐이었다.
“놔! 나 같은 건 차라리 죽어버려야 돼!”
“죽지마아! 으아앙, 죽지 마아!”
“놔. 이거 안 놔!?”
소년이 거칠게 손을 쳐내는 바람에 제아는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그런데도 다시 절벽 밑으로 발을 대딛는 소년을 향해 제아는 머리부터 들이대며 돌진했다.
소년의 가슴팍을 머리로 들이박는 순간,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코뿔소처럼 들이박은 제아의 힘에 소년은 제아를 품에 안은 채 뒤로 넘어졌다.
쪽―.
둔탁한 충격에 소년은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소년을 쿠션 삼아 떨어진 제아는 입술에 와 닿는 말캉한 눈빛에 반짝, 눈을 떴다.
‘젤리? 젤리다!’
그런데 젤리가 아니었다. 탱글거리면서도 말캉하고 촉촉했던 그건, 바로 소년의 입술이었다.
사람 입술도 젤리처럼 달콤할 수가 있구나. 제아는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생각하며 큰 눈을 깜빡였다.
“으으음.”
정신이 드는 듯 맞닿은 입술 사이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입술 사이로 스며드는 더운 숨결에 놀란 제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또렷해지는 시야 속, 느릿하게 눈을 뜨는 소년의 얼굴을 본 순간 제아의 눈은 황홀한 듯 멍하니 풀렸다. 비에 젖은 소년의 얼굴이,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심장이 뛴다는 표현을, 처음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너, 내 입술 덮쳤어.”
더러운 거라도 닿았다는 듯 소매로 입술을 스윽 닦아내며 뱉어낸 소년의 첫마디.
짜증스럽다는 듯 내리뜬 소년의 눈빛과 표정마저 제아의 눈엔 그저 아름다웠다.
“오빠…… 왕자님이야?”
밤마다 아빠가 읽어주던 동화책 속에 나오던 아름다운 왕자님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예쁠 수 있지?
소년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제아는 다시 와락 소년의 가슴팍으로 뛰어들며 허리를 껴안았다.
“으아아앙! 안 돼! 뛰어내리면 안 돼!”
딱딱한 아스팔트 위에서 둘은 뒹굴었다.
악착같이 떼어내려는 소년과 죽어라고 달라붙는 소녀. 고집불통과 고집불통의 만남이었다.
하지만 승리는 결국 제아의 것이었다.
어린애를 발로 차버릴 수도 없었는지 결국 소년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뛰어내리지 않을 테니까, 좀 놔봐.”
내가 믿을 줄 알고?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제아는 소년의 품으로 꼭 파고들었다.
“뛰어내리지 않는다고.”
흥이다! 소년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손에 단단히 깍지까지 꼈다.
“……약속할게.”
마지못한 듯, 새어 나온 소년의 말에 제아는 감고 있던 두 눈을 반짝 뜨고 고개를 들었다.
약속? 손가락 걸고, 꼭 지켜야 하는 약속?
이겼다는 기쁨도 잠시뿐, 제아는 웃을 수 없었다. 어린 제아의 눈에 비친 소년이 무척 슬퍼보였다. 빗물에 젖어버린 아름다운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도 같았다.
“오빠…… 울어?”
“누가 네 오빠야. 죽을래?”
“울지 마. 응?”
고사리 같은 손이 눈가에 닿기도 전에 소년은 매정하게 쳐내버렸다.
“겨우 용기 내서 내디딘 건데, 죽지 못했어. 너 때문이야!”
“……?”
“모두 날 버렸는데. 나 같은 건 아무도 원하지 않는데…… 차라리, 죽어버려야 했는데.”
눈물과 빗물이 범벅이 된 아름다운 얼굴로 소년이 자조적인 중얼거림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 중얼거림조차 제아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소원이 이루어졌으니까. 갖고 싶은 왕자님이 눈앞에 나타나주었으니까.
온몸에서 열이 펄펄 끓어올랐지만, 상관없었다. 인형보다 아름다운 왕자님을 어떻게든 갖고 말겠다는 의지가 그녀의 작은 몸에서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럼, 내가 가질래.”
“……뭘 갖겠다는 거야.”
고사리 같은 손이 소년을 가리켰다.
“오빠. 제아 거 해. 우리 오빠 해.”
“…….”
“난 절대 우리 오빠 안 버려, 내가 오빠 책임질게! 약속!”
펄펄 끓어오르는 작은 손이 소년의 손을 꼭 잡았다. 하도 기가 막혀서 눈물조차 나지 않는지, 흠뻑 젖은 소년의 아름다운 눈이 한껏 커다래졌다.
“너…… 뭐야.”
“나? 제아. 오빠 동생, 문제아.”
빗물 섞인 눈물을 젖은 소매로 쓱 닦은 제아는 왕자님을 향해 활짝 웃었다.
“아이쿠. 제아야? 너는…….”
그때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타난 윤식과 윤영이 같이 있는 둘을 보고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차가운 빗줄기에도 터질 듯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건데, 제아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이 오빠랑 우리 집 갈 거야. 제아 오빠 하기로 했단 말이야! 오빠랑 같이 안 가면 나도 집 안 가!”
처음 본 소년이 뭐가 좋다고 제아는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제아의 행동에 윤식과 윤영은 당황하는 눈치였다.
“이 오빠랑 같이 살 거야. 으아아앙, 같이 살게 해줘. 제아 오빠 하게 해줘!”
부모님이 보이니 이제야 긴장이 서서히 풀렸다. 끄억끄억, 소리를 내며 서럽게 울던 제아는 점점 시야가 흐릿해지고 정신이 몽롱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소년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 오빠야……. 제아 오빠. 오빠랑…… 살 거야.”
그러곤, 정신을 잃었다. 며칠 만에 깨어났는지 모른다. 눈을 뜨자마자 제아는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아앙! 오빠, 제아 오빠 어디 갔어?”
윤영이 달래보지만 제아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몇날 며칠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하루 종일 울면서 소년만 찾았다.
일주일째 되던 날, 윤영이 제아에게 물었다.
“제아 너, 오빠 갖고 싶어?”
“응! 그 오빠! 그때 그 오빠!”
눈물 가득한 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윤영은 결국 짙은 한숨을 내쉬며 윤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졌어요. 제아가…… 이준이를 찾네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윤영은 제아의 손을 잡고 마당으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제아는 울음을 그치지 않은 채, 소년을 찾고 있었다.
“훌쩍, 제아 오빠 어디 있어? 약속했단 말이야, 으아아앙! 오빠아아!”
그때 초록색 대문이 열리면서 윤식이 들어왔다. 그리고 윤식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 소년을 발견한 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아야, 인사해라. 앞으로 네 오빠가 될 문이준이다.”
***
무려 20년이나 지난 기억이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절벽에서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던 이준의 뒷모습도, 젤리 같던 이준의 입술 감촉도. 대문을 넘어서 들어오던 이준의 모습도.
그땐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렸던 걸까.
친한 친구의 아들이라고 알뜰하게 보살피긴 했지만, 호적에 올릴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던 그녀의 부모님이었다.
하지만 이준을 처음 본 순간 시작되어버린 집착과 소유욕이었다.
그땐 정말 철없이도 단순하게 아름다웠던 이준을 갖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물론 그 이후는 달랐지만.
결국 제아의 고집에 윤식이 결심을 했고, 윤영을 설득해서 이준은 그녀의 오빠가 되었다.
좁은 판잣집에서 벗어나 초록색 대문을 넘어서 그녀의 가족이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준이 바로 마음의 문을 열었던 건 아니었다.
얼마나 쌀쌀맞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찬바람이 쌩하니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조금 괘씸하기까지 했다.
“귀여운 소녀를 찐드기 취급했겠다.”
그때 정말 내가 그렇게 귀찮았냐고 물어봐야지!
반신욕을 끝낸 제아는 욕실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문득 옷도, 그리고 베스 가운도 침대 위에 올려놓은 게 떠올랐다.
머리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풀고 급한 대로 타월을 몸에 두른 채 욕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침대에 도착하기도 전에 제아는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치렁치렁 늘어뜨린 젖은 머리칼 사이사이로 아른거리는 늘씬한 실루엣. 그녀와 마찬가지로 한 손에 쇼핑백을 든 채 동상처럼 서 있는 도준이 보였다.
반라의 모습으로 서 있는 제아의 모습에도 도준은 미동조차 없었다. 변화가 있는 거라곤 미세하게 가늘어진 도준의 나른한 눈매.
그 눈매가 품은 짙은 갈색 눈동자가 돌연 툭, 떨어졌다.
그 시선이 와 닿는 어딘가는…….
도준의 시선을 따라 눈을 내린 순간, 제아는 격하게 숨을 들이셨다.
“헉!”
우유처럼 뽀얀 가슴 부근에서 야무지게 매듭진 타월. 그 위로 터질 듯이 넘쳐흐르는 가슴 둔덕이 아찔한 굴곡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