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이제 그만, 내 몸에서 내려와줬으면 하는데.
2016.11.07.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돌아선 도준의 눈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서 있는 제아가 보였다.
“지금, 뭐라고 했지?”
“오해는 하지 마! 정말 순수하게, 잠만 같이 자자는 거니까.”
제아는 그게 가능할지 몰라도 도준은 아니었다. 순수하게 잠만 자는 거, 그는 절대 자신이 없었다.
“됐어, 난 소파에서 잘 테니 신경 쓰…….”
“오빠 노릇하고 싶다면서!”
“…….”
“오빠라면, 옛날처럼 같은 침대에서 잠만 잘 수 있는 거잖아……. 아니야?”
거절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바짝 경계를 하던 제아가 조금은 마음을 열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
“……그러든지.”
그의 승낙이 마침내 떨어지자 제아는 뭐가 그리 기쁜지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미소의 의미가 도준은 도무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와 같은 침대에서 잔다는 게 기쁜 건지, 잠을 조금이라도 잘 수 있다는 게 기쁜 건지.
하지만 몇 분 후 도준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부지런히 움직이는 제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침대 위에 있는 베개와 소파의 쿠션까지 죄다 끌어와서 침대 가운데에 38선을 열심히 쌓고 있는 제아를 보다 못한 도준이 입을 열었다.
“문제아, 괜한 짓 그만해.”
“다 됐어. 오빤 왼쪽, 나는 오른쪽. 오케이?”
제아는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지금 이 행동은 자신을 완벽하게 남자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건, 남자를 넘어서서 거의 늑대 취급하는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그의 마음속, 깊은 잠에서 깨어난 늑대 한 마리가 하울링하고 있다는 건 인정한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싶었다.
드디어 침대 위에 38선이 완공되었다. 오른쪽 침대에 옆으로 누운 그녀는 뿌듯한 표정으로 도준을 바라보며 침대를 팡팡 두드렸다.
“이제 자자! 오빠도 얼른 와!”
한쪽 팔로 비스듬히 상체를 세우고 누운 덕에 티셔츠와 반바지가 달라붙어 굴곡진 제아의 몸이 여실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하얀 침대 위로 쏟아져 내린 풍성한 머리카락마저 은밀한 실루엣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도준의 눈이 열기로 짙어진 걸 모르는 제아는 얼른 오라는 손짓까지 했다.
유혹적인 눈빛과 몸짓을 무책임하게 남발하는 제아 때문에 도준은 이제 현기증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문제아, 너란 여자 정말.
이 새벽에 운동을 하러 나갈 수도 없고. 그는 결국 찬물 샤워를 택했다.
“샤워 좀, 다시 하고 올 테니 먼저 자.”
“나 몰래 일할 생각은 하지 마. 안 자고 기다릴 거야!”
끓어오른 열기를 찬물로 겨우 식히고 욕실에서 나왔을 때, 제아는 정말 침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잔뜩 내려앉은 눈꺼풀과 씨름을 하면서 말이다.
결국 그의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제아가 잠이 들면 다시 나오는 수밖에.
침실의 불을 끈 그는 제아가 지정해준 왼쪽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런데 자꾸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의 귀를 예민하게 자극했다.
“오빠, 자?”
“…….”
“자냐구.”
“…….”
“안 자면 대답 좀 해주지.”
‘38선도 넘어오지 못하게 하면서 왜 자꾸 부르는 건데.’
그렇게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 싶은 도준이었다.
“……왜.”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자다가 일어나서…… 넘어오면 안 돼.”
도준은 하마터면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기껏 대답해줬더니, 넘어오지 말라니.
지금 이렇게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것만으로 그가 얼마나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믿지 못하겠으면, 소파에서 잘 테니 나가게 해주든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제아는 생각에 잠긴 듯 잠시 침묵했다.
고개를 틀었지만, 층층이 쌓인 베개와 쿠션이 그의 시야를 가로막아 제아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나가려는 소리로 착각했는지 제아가 속삭이듯이 얼른 말했다.
“……오빠 믿어. 잘 자!”
10년 만에 듣는 그 말에 도준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느끼며, 진심을 다해 마음으로 대답해주었다.
‘나는 지금도, 너만 믿어.’
지금 그에게 38선 너머에 있는 존재는 이브의 사과와도 같은 금단의 열매였다.
금단이라서 더욱더 매혹적인 그 열매에, 말초신경까지 바짝 곤두서버렸다.
그런데 38선을 넘어오는 어떤 소리도,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는다.
설마 정말, 이대로 잠든 건가.
손만 뻗으면 서로가 닿을 곳에 있는데도, 잠이 오냔 말이다.
대체 뭘 바랐던 걸까.
도준은 결국 알 수 없는 기대감을 깨끗하게 버려 버리고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빛 한 점 없이 새까맣게 닫혀버린 시야,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빗소리가 그의 귀를 민감하게 자극했다.
천둥번개는 치지 않지만 거친 바람을 머금고 쏟아지는 빗소리였다.
기분 나쁜 빗소리가 마음 깊숙한 곳에 꾹꾹 눌러놓은 날카로운 기억의 편린을 자꾸만 툭툭 건드렸다.
감은 두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도준은 잠깐 잠에 들었다.
비스듬히 열린 창문 너머로 새어 들어오는 비바람에 커튼이 춤을 추듯 나부꼈다.
그 틈으로 새어 들어온 천둥번개가 겨우 잠이 든 그의 귓가를 툭툭, 기분 나쁘게 건들며 스며들었다.
***
천둥번개가 치던 그날, 소년을 바라보는 여자의 고운 얼굴은 비에 젖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엄마…….”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촘촘한 속눈썹 사이를 파고드는 차가운 빗줄기에도 소년은 눈을 감지 않았다.
어떻게든, 엄마라는 여자에게서 버림받기 않기 위해서 여자의 치맛자락을 작은 손에 꼭 움켜쥐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모질게도 소년의 손을 내쳐버렸다.
“너 따위…… 낳는 게 아니었어! 너만 없었어도 이렇게까지 비참하지 않았을 텐데. 흐흑!”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잠시 흐느끼던 여자는 갑자기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소년을 노려보더니 앙상한 어깨를 움켜잡았다.
“너, 엄마가 필요하니? 그래, 필요할 거야.”
소년은 엄마라는 여자의 눈빛이 너무도 무서워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럼 지금 당장 네 아빠를 내게 데려와. 그 아름다운 얼굴로 다른 여자에게 미소 짓고 있을…… 너랑 똑 닮은 네 아빠 박재경 말이야! 그 얼굴로 나를 유혹해 놓고…… 너만 있으면 내게 올 줄 알았는데. 그래서 꾹 참고 기다렸는데…… 그런데 다른 여자랑…… 흑흑.’
여자는 횡설수설했다. 그럼에도 소년은 여자에게 버림받는 게 무서워 다시 용기를 냈다.
하지만 소년의 작은 손이 닿기도 전에 여자는 소년을 거칠게 밀어버렸다.
언제 울었냐는 듯 여자의 얼굴은 어느새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물기 머금은 백합처럼 청소한 여자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리면서 작은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바보같이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니. 난 이제…… 원래 내 자리로 돌아갈 거야. 제일 그룹의 하나뿐인 외동딸 한연희로. 너만 없으면, 난 돌아갈 수 있으니까. 이런 거지같은 생활…… 더는 안 해.”
여자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어린 나이에도 버림받는 걸 직감한 어린 소년은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를 불렀다.
“으아아앙. 엄마, 엄마아아!”
애절한 그 울음소리에 여자가 서서히 돌아서자, 때마침 천둥번개가 쳤다.
어둠 속, 하늘을 가르는 천둥번개 소리와 함께 여자의 싸늘한 음성이 소년의 귀를 세차게 두드렸다.
“차라리 죽어버려. 넌 태어나선 안 되는…… 존재거든. 그 사람이 널 지우라고 했을 때, 너를…… 지웠어야 했어.”
여자는 마지막으로 희미한 비소를 아들에게 남겼다.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비좁은 골목, 소년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로 얼어붙어버렸다. 마음도, 심장도.
차가운 비가 세차게 소년의 온몸을 때리고, 천둥번개 소리가 귀를 울리고, 죽어버리라는 엄마의 말이 뇌리를 울렸다.
―죽어 버려, 죽어 버려, 차라리…… 죽어 버려.
***
얇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눈을 번쩍 뜬 도준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처음 잠들었던 자세로 그대로 깨어났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가위에 눌릴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손가락 끝에 힘을 줘보지만, 어림도 없었다.
다물린 잇새 사이로 미약한 신음만 조금씩 흘리는 게 전부일뿐.
“으음…… 으윽.”
빌어먹을. 어린 시절 연희에게 버림받았던 그때의 악몽이 또다시 그의 몸을 좀먹어버린 것이다.
기분 나쁠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서 차가워지는 몸을 느끼는 순간, 다리 쪽에서 무언가 느껴졌다.
자꾸만 뭔가가 곰지락거리는 그 느낌에 얼어붙었던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굳어버렸던 손끝에 힘이 들어가고, 조금씩 움직여진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상체를 벌떡 반쯤 일으킨 도준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푸르스름한 어둠 속, 링에서 나오는 귀신처럼 긴 머리를 산발한 여자가 그의 다리 밑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섬뜩함에 잠시 거칠게 뛰었던 심장이 가라앉은 후에야 도준은 살짝 시선을 틀었다.
어둠 속, 제아가 열심히 쌓아놓았던 38선은 무너진 지 오래였다.
그사이 잠에 취해 그의 긴 몸을 더듬고 올라온 제아는 가슴에 다다르자마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으음, 우리 곰순이. 언니…… 왔어.”
곰순이라……. 제아가 잠결에 흘린 중얼거림에 그의 머릿속을 꽉 채우던 악몽은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적은 용돈을 모으고 모아서 제아의 15번째 생일 선물로 그가 사준 커다란 곰 인형의 이름이 ‘곰순이’였다.
대문도 겨우 통과할 정도로 커다란 곰 인형을 받고 ‘오빠 최고.’라고 외치며 제아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가족들이 제아를 깨우러 갈 때마다 사람처럼 커다란 곰 인형 위로 올라가 엎어져서 잠을 자는 제아의 모습에 얼마나 웃었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으음, 우리 곰순이 무서워하지 말고…… 자…… 자…… 언니랑.”
푹신한 곰인형이 아닌 단단한 도준의 가슴이 조금은 불편했는지 제아는 조금 뒤척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의 몸 위로 나무늘보처럼 몸을 편하게 늘어뜨리고 깊은 잠에 빠졌다.
이불처럼 그를 덮는 따스한 체온이 어둠 속에서 그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가 가위에 눌려 신음하는 소리를 제아가 잠결에 들은 게 분명했다.
그 소리에 잠결에 반응을 해서 본인이 애지중지 쌓아놓은 38선을 무너뜨리고 넘어왔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도준은 제아 덕분에 또다시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이러니 내가 어떻게 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까.
서로의 본능으로 서로를 느끼고 지켜주는 너와 나.
어렸을 때 서로 다른 방을 썼지만 그가 어김없이 악몽을 꿀 때면, 또는 가위에 눌릴 때면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방문을 열고 몰래 들어오던 제아였다.
그건 도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끈으로 서로의 영혼이 묶여 있는 것처럼.
물론 아침에 일어나서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둘을 본 윤영이 노발대발하면서 파리채를 휘둘렀지만 말이다.
도준은 그의 가슴 위에서 편안하게 잠이 든 제아의 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문제아, 넌 나의 수호천사야.”
그를 지켜주는, 그를 존재하게 하는, 그만의 수호천사.
귀를 간질이는 그 속삭임이 좋았는지, 빙그레 웃음을 머금은 제아는 더욱더 그의 가슴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가위에서 벗어난 건 다행이었지만, 더한 난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아의 편한 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 한 몸 희생할 자신은 있지만, 문제는 혈기왕성한 그의 몸이 보드랍고 따스한 제아의 몸 밑에서 반응을 한다는 것.
빌어먹을, 너 때문에 잠이 안 와.
제아가 잠결에 몸을 꿈틀거릴 때마다, 도준은 몸을 움찔했다.
어둠 속 커다란 벽시계의 촉이 점점 7시로 향하는데도 잠은커녕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지고, 온몸의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 무덤을 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 자는 걸 포기한 도준은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며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처음부터, 같은 룸을 쓰는 게 아니었어.
***
따뜻하고 편하긴 한데, 푹신하지가 않았다. 나의 곰순이가, 살이 빠졌나 보다.
손으로 더듬더듬 만져보자 보드라운 털 대신에 따스하고 단단한 매끄러운 감촉이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그래, 이 감촉이 묘하게 잠을 불러왔다.
그래서 제아는 아직까지도 몽롱하기도 하고 나른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의 곰순이가 이제 심장도 생겼나?
귀를 파고드는 강인한 심장 박동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더 자라고, 더 자도 된다고.
그런데 자꾸만 배를 자극하는 단단한 무언가에 제아는 눈살을 구기면서 슬그머니 눈을 떴다.
게슴츠레 눈을 뜨자 지독히도 낯선 풍경이 그녀의 시야를 파고들었다.
딱 봐도 최고급을 자랑하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방의 넓이가 호텔의 VIP 룸 같은데.
나,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흐음.”
이게 꿈이라면, 더 잘래.
기분 좋은 콧소리를 흘리며 제아는 더욱더 날씬해진 곰순이를 품에 끌어안았다.
단단하고 따스한 품에 얼굴을 부비며 사랑스럽게 파고들었다.
“그만 좀 더듬지.”
무심하듯 나른한 남자의 음성에 제아의 몸 안을 간질이듯이 감돌던 나른한 잠기운은 단번에 날아갔다.
조심히 고개를 들자, 비스듬하게 상체를 일으킨 도준이 나른한 색기를 은밀하게 흘리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주 잠시, 사고가 정지되고 숨마저 멈추어버렸다.
그사이 팔꿈치를 침대에 대고 상체를 반쯤 일으킨 도준은 흐트러진 머리칼을 느릿하게 쓸어 올렸다.
벌어진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어스름한 빛에 물든 그 모습이 왜 이렇게 또 몽환적인지.
제아는 지금 상황도 잊어버리고, 멍한 눈빛으로 그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 내 몸에서 내려와줬으면 하는데.”
“헉!”
제아는 정말 한 번에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침대는 너무 푹신했고 눈을 뜨자마자 닥친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녀의 정신은 혼비백산이었다.
일어나기는커녕 자꾸만 그의 몸 위에서 허우적거리는 걸 지켜보던 도준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몸을 일으키려 했다.
“못 일어나겠으면 내가 일으켜줄…….”
“돼, 됐어!”
그 한마디에 더욱더 당황한 제아는 벌떡 몸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너무 허둥거리는 바람에 제아는 침대에 푹 파묻히는 손발을 이겨내지 못하고 몸의 균형을 잃어버렸다.
너무도 격하게, 그리고 거칠게, 도준을 확 덮쳐버렸다.
그와 동시에 도준이 끄응, 하며 목 깊숙한 곳에서 신음을 내뱉었다.
“미안! 진짜 미안!”
뭐가 미안한지 몰라도 입에서 연신 미안하다는 말이 터져 나왔다. 도준의 가슴을 지지대 삼아 상체만 일으킨 채 제아는 울상을 지었다.
“그만 좀 더듬어.”
더, 더듬은 게 아닌데. 그냥 난 일어나려고…….
제아는 그저 억울한 눈빛으로 도준을 올려다보지만, 위험하게 소용돌이치는 그의 짙은 눈빛에 입을 꾹, 다물었다.
“나도 내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시선을 조심히 내린 제아는 하이 톤의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입을 얼른 손으로 막았다.
그녀의 눈도, 입을 막고 있는 손도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꺄아, 흐읍! 난 몰라!
벌어진 도준의 다리 사이로 그녀의 몸이 안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준은 이 위험한 상황을 얼른 끝내야만 했다. 재충전을 하고 일어난 지극히 정상적인 남자가 어떻게 변하는지, 제아에게 아직 알려주고 싶진 않으니까.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의 다리 사이에 있는 제아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산발이 된 짙은 머리칼이 제아의 새하얀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가슴에 엎어진 채 조심히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하는 고양이 눈에 깃든 나른한 기운.
그 모습이 남자의 심장을 뒤흔들 정도로 얼마나 자극적인지, 제아 본인은 절대 모를 것이다.
그는 제아의 어깨를 양손으로 감싸 쥐고 빙글, 돌았다.
순식간에 역전된 위치.
새하얀 시트에 푹 파묻힌 제아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독하게 몸을 일으킨 도준은 온몸을 가득 채운 이 뜨거운 기운을 아침 조깅으로 소진할 생각이다.
물론 뜨겁게 달아오르게 한 장본인인 제아와 함께.
“어제 쇼핑한 옷 중에서 운동복이랑 조깅화도 있을 거야. 갈아입고 나와.”
***
조금밖에 자지 않았는데도, 도준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푹 자서일까?
간단히 세수만 하고 트레이닝을 갈아입은 제아는 의외로 몸의 컨디션이 꽤 괜찮았다.
그런데 침실에서 나오자마자 도준을 본 그녀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입고 있는 트레이닝이 색깔만 다를 뿐, 그녀가 입고 있는 옷과 디자인이 똑같았던 것이다.
“옷이…….”
차마 커플 같다는 말은 못하고, 제아는 말끝을 흐렸다.
“유 실장 것도 샀으니 오해하지 마. 그냥 회사 단체복이라고 생각해.”
반박할 틈도 없이 도준이 룸을 나서자 제아는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밤에 도착해서 몰랐는데, 국내에서 손꼽히는 호텔이니만큼 바다를 배경으로 작은 공원처럼 풍성하게 이루어진 조경이 뛰어났다.
―뛰어난 아침 풍경 구경하러 나가자고 한 거구나? 근데 발코니에서 봐도 충분한데 굳이…….
착각은 자유라고 했던가.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채 담기도 전에 도준의 서늘한 음성이 그녀의 상상을 무참히 깨버렸다.
“문 비서, 뛸 준비됐나?”
뛰, 뛴다니? 누가? 어디를? 왜?
그가 한 말을 제대로 이해도 하기 전에 제아는 조깅 코스로 뛰어드는 도준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불가항력의 힘을 가지고 있는, 빚에 얽매인 ‘문 비서’라는 그 한마디에 말이다.
운동은 곧 죽어도 싫은 제아였다. 그런데 왜, 왜 하필 조깅이냐고!
속도는 또 왜 이렇게 빠른지, 쫓아가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그녀가 뒤처질 때마다 도준은 제자리에서 뛰면서 기다려주는 매너를 보였다. 지나가는 개한테 던져줘도 될 매너 말이다.
아침부터 무슨 힘이 그렇게 불끈불끈 넘쳐나는지, 헉헉거리는 그녀와 달리 도준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로봇, 한도준은 로봇이 분명해!
그가 기다려주어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순간 정신을 차리면 그는 어느새 또 멀리 가 있었다. 사람 미치고, 환장하게 말이다.
거짓말하지 않고, 아주 잠깐만 한눈팔면 그는 어느새 저 멀리 가 있었다.
체력 단련하러 온 것도 아니고, 아침부터 이게 무슨 짓인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제아는 모든 걸 포기하고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헉, 헉헉…… 헉.”
입술 사이로 끊어질 듯한 숨소리가 격하게 터져 나왔다.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앞을 보니, 조금 떨어진 벤치 앞에 서서 뛰고 있는 도준이 보였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그녀를 본 도준이 손가락 제스처를 보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제아를 한 번 가리키고,
그가 서 있는 자리를 한 번 가리키고,
그다음에 그의 목을 가로로 한번 짧고 굵게 확, 그었다.
그리고 제아는 정말 짜증나게도 그가 보낸 제스처를 알아들어버렸다.
‘문제아, 지금 당장 여기로 뛰어와. 거부하면 넌 오늘, 지옥을 맛보게 될 거야.’
울며 겨자 먹기로 일어서는 그녀의 입술 사이로 작은 욕지거리가 새어 나왔다.
‘젠장! 제기랄! 망하아아알!’
일어나서 달리기를 시작하자마자 주머니 안에 있는 핸드폰이 울렸다.
‘대체 이 아침에 누구야?’
달리면서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은 제아의 눈이 ‘여보세요’를 하기도 전에 휘둥그레졌다.
어어어어라? 점점 가까워져야 할 도준이 다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헉헉! 제발…… 오빠. 천천히……. 너무 빨……라, 한도준. 죽을 것 같다구……. 하아…… 그만…….”
핸드폰을 받은 줄도 모른 채 제아의 입술 사이로 흐느끼는 듯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제발 살려달라는 뜻으로 애처롭게 손까지 들어 올렸지만, 소용없었다.
조금도 봐주지 않는 도준의 모습에 그녀의 가슴속에서 불끈, 오기가 치솟았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했으니. 또다시 제자리 달리기를 하며 그녀를 향해 손짓하는 얄미운 저 가슴에, 꼭 박치기를 하고 말리라.
독하게 결심하는 순간, 제아는 몸 안에 남아 있는 힘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눈 딱 감고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달리기가 마지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번엔 정말 제대로 기다려주는 건지, 점점 가까워지는 도준이 보였다.
[문제아 씨?]
미친 듯이 질주하던 제아는 어디선가 작게 들리는 그녀의 이름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맞다, 전화!
손에 들린 핸드폰을 확인하고 귀에 대려는 순간, 탁하니 그녀의 발가락 끝에 단단한 무언가가 걸렸다.
몸이 잠깐 붕 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두 발이 잠시 허공에 뜨고, 휘둥그레진 시야로 짙은 새벽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처럼 살짝 눈이 커진 듯한 도준의 얼굴이 보이면서, 꽈당…….
오늘로써만 벌써 두 번째, 그를 격하게 덮쳐버렸다.
“여보세……? 흐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