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18화 (18/104)

18. 그럼 침대에서 같이 자!

2016.11.03.

제아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스포츠카에 삐딱하게 기대고 있는 지로에게 두 손으로 싹싹 빌고 있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5분.

“그러니까 제아 네 말은, 퇴근하는 길에 사장이랑 마주쳐서 비서실장 대신 2박 3일 출장을 따라가게 됐다?”

“응.”

“그리고 네가 단기 비서로 임시 발령 나서 거절할 수가 없고?”

“그렇지!”

또렷한 입술 선에 야릇한 비소를 머금은 지로가 드디어 폭발했다.

“문제아, 너 지금 그런 엿 같은 핑곌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내가 여기서 3시간이나 널 기다렸는데?”

“엿 같긴 한데 진짜라니까?”

기다린 지로도 화가 나겠지만, 이런 황당함을 겪은 그녀는 오죽할까. 믿어주지 않는 지로가 답답할 뿐이었다.

“뭐 그런 개새끼가 다 있어? 이거 완전 슈퍼 갑질이잖아! 내가 쫓아가서 아주…….”

“한지로, 너 죽을래? 감히 누구한테 욕지거리야!”

싹싹 빌던 제아가 갑자기 도끼눈으로 앙칼지게 대들자, 당황한 건 지로였다.

“문제아, 너 왜 그렇게 화를 내냐.”

“……어?”

제아도 아차, 싶었다. 지로가 한 ‘슈퍼 갑질 개새끼’란 욕이 도준에게 한 거란 걸 깨닫는 순간, 그녀 자신도 모르게 발끈해버린 것이다.

“아, 아니, 그래도 그런 욕 하는 건 좀 아니잖아. 우리 사장님, 절대 그런 분 아닌데 네가 너무 심하게 오해를 한 것 같아서.”

“그래서 나한테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었다고?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 사장 새끼 때문에, 10년도 넘게 네 곁에 있는 나한테?”

지로의 눈이 더욱더 날카롭게 빛났다.

하지만 슈퍼 갑질하는 그 개새끼 사장님이 도준이라는 걸 말할 순 없으니 제아는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지로의 말대로 10년 동안 곁을 묵묵히 지켜준 지로보다 10년 동안 그녈 버렸던 도준을 더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기도 했다.

“저기 지로야, 사실은…….”

그때 제아가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드르륵 울렸다.

-4분-

조금 떨어진 차 안에서 칼같이 시간을 체크하고 있는 도준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지로야, 우선 내가 갔다 와서 연락할게. 꼭! 알았지?”

돌아서려는 제아의 손목을 지로가 낚아챘다.

“그딴 새끼한테, 나 너 못 보내.”

“한지로, 이거 엄연히 일이거든? 진짜 너 왜 그래!”

“넌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남자들 시선을 끈다니까? 그 새끼 분명 너한테 다른 속셈 있다!  내가 다른 데 알아봐 줄 테니까, 그러니까 여기 당장 때려치워.”

“한지로!”

아플 정도로 거칠게 움켜잡힌 손목보다 제아를 더 신경 쓰이게 하는 건, 상처받은 듯한 지로의 짙어진 눈빛이었다.

‘휴, 진짜 첩첩산중이네!’

제아는 지금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녀의 눈앞엔 화가 난 늑대 한 마리가 상처받은 눈빛으로 달래주라고 포효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뒤엔 위험한 흑표범 한 마리가 언제든지 덤벼들 태세로 차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이건 마치, 10년 전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가지 마, 이 바보 같은 계집애야! 문이준 그 새끼, 너희 식구 버리고 떠났다잖아!

―그럴 리 없어! 무슨 사정이 있을 거야! 내가 직접 오빠 만나서 들을 거야!

그때도 지로는 제아를 잡았지만, 그녀는 끝끝내 인천공항으로 향했고 끝끝내 이준을 만날 수 없었다.

그때의 그녀에게 상처를 준 건 이준이었고, 주저앉아 흐느끼는 제아를 안아준 건 지로였다.

그런데도, 제아는 지금 또 똑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엄연히, 일이니까.

그리고 때마침 다시 도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5분-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분명 도준이 차에서 내릴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앙숙 같은 두 남자가 만날 때는 아니기에 제아는 손목을 꼭 쥐고 있는 지로의 손을 조심히 떼어냈다.

“지로야, 나 이제 남의 도움받으면서 회사 옮겨 다니는 거, 지긋지긋해.”

그래서 회사에서 그런 무시를 당해도 제아는 악착같이 버틴 거였다. 여기서도 버티지 못하면, 스스로의 인생을 포기하는 것만 같아서.

“출장 갔다 와서 꼭 연락할게. 알았지? 지로야, 미안해!”

이게 다 널 위해서야, 한지로!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표범과 늑대가 싸워봤자 무참하게 짓밟히는 건 항상 늑대였으니까.

지로의 손길을 뿌리친 제아는 뭐가 그리 급한지 후다닥 달려가서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 세워진 검은 차에 올라탔다.

거칠게 산산조각 난 지로의 눈빛이 운전석으로 향했지만, 선팅이 진하게 되어 있어서인지 사장이란 남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부우우웅!

그런 지로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제아를 태운 차는 고급 세단임에도 불구하고 거친 소음을 일으키며 그의 앞을 휙 지나쳤다.

“나 오늘 너한테 줄 거 있다고!”

지로는 빠르게 사라지는 차의 뒤꽁무니를 노려보며 악에 받친 듯 소리를 질렀다.

커피숍에서 잡지를 보며 네가 예쁘다고 무심코 말했던 그 반지, 지금 내 재킷 안에 있다고!

한정판이라 구하기 힘들다는 그 반지를 구하려고, 가족 여행이란 핑계를 대고 해외여행까지 혼자 간 지로였다.

버리고 간 오빠가 뭐가 좋다고, 제아는 아직까지도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항상 목숨처럼 소중하게 걸고 다니는 목걸이에 걸린, 헤질 대로 해져 빛을 잃은 반지.

그 반지가 이준이 준 거라는 걸 지로는 알고 있었다.

과할 정도로 서로밖에 몰랐던 남매.

지로는 그 그늘에서 제아를 끄집어내주려 하지만 그럴수록 제아는 자꾸만 그의 손에서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갔다.

오랜 고민 끝에 고백하려고 준비를 할 때마다 자꾸만 나타나는 거지 같은 방해꾼들은 왜 이렇게 많은지!

가면무도회에선 돈 터진 미친 새끼가 채가더니, 이번에는 슈퍼 갑질하는 사장 새끼라니!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

백화점을 경유해서 3시간 만에 부산의 호텔에 도착한 제아는 예약된 룸이 하나뿐이라는 크루즈 호텔 프런트 직원의 안내에 격하게 당황했다.

“죄송하지만 예약되어 있는 프레지덴셜 룸은 하나뿐입니다.”

“예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제아와 달리 도준은 놀라기는커녕 태연하기만 했다.

감히 무엄하게도, 어떻게든 좀 해보라고 하늘 높은 사장님의 옆구리까지 쿡쿡 찔렀지만 도준은 요지부동, 짧게 고개만 끄덕이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을 동동 구르며 도준과 함께 벨보이를 따라가는 제아의 속은 애간장이 바짝 타들어갔다.

이제 엄연히 남남이고, 엄연한 남녀인데 어떻게 한 방에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1층과 달리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의 복도가 그들을 맞이했다.

벨보이가 문을 열어주고 짐을 룸 안으로 옮겨놓자 도준이 팁을 건넸다.

팁을 받은 벨보이가 사라지자마자 제아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절대 같은 방에서 잘 수…… 없……어.”

하지만 제아는 가로막고 있던 입구에서 도준이 비켜 서자 시야를 파고드는 룸 안의 내부에  넋이 나가버렸다.

두 개의 발코니 너머로 보이는 탁 트인 바다는 한 폭의 그림 같았고, 룸의 내부는 앤티크한 가구와 소품, 세련된 인테리어에 빌트인 주방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곳은 룸이 아니라 그냥 집이었다. 그것도 아주아주 고급스러운.

휘둥그레진 눈으로 방을 둘러보는 그녀를 향해 도준이 다가섰다.

“제아 넌, 침실에서 자면 돼.”

“오빠……는?”

“난 여기.”

도준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건 침대만큼 길고 푹신해 보이기는 했지만 엄연히 그건 침대가 아니라 소파였다.

이준이었다면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겠지만, 도준은 지금 하늘같은 사장님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오늘 동생이 아닌 비서의 자격으로 동행했다.

“그냥 방 하나 더 달라고 하면 안 돼? 이 방처럼 좋은 데 아니어도 되니까.”

“비어 있는 룸 없다는 말, 같이 들은 것 같은데.”

“그럼 내가 소파에서 잘게!”

“고작 한두 시간 자려고 침대를 차지하고 싶진 않아.”

“그래도 침대에서 자. 오빤 사장님이고, 난 비서잖아. 사장님이 소파에서 자는데 비서가 어떻게 침대에서 잠을 자?”

분명 까다로운 그 성격도 그대로일 텐데, 밤을 새웠으면 새웠지 절대 소파에서 잘 그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기에 제아는 더욱더 침대에서 잘 수 없었다.

도저히 제아가 고집을 꺾을 틈을 보이지 않자, 마지못한 듯 도준이 입을 열었다.

“문제아, 난 사장이기 전에 네 오빠인 걸로 알고 있는데.”

“오, 오빠라고 인정한 적 없거든?”

“인정한 적 없으면서, 반말은 왜 하는 거지?”

“그, 그건!”

또 말문이 탁, 막히게 도준이 유려한 말솜씨를 뿜어냈다.

“그러니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침대에서 자.”

그의 말솜씨를 이겨낼 수도, 황소고집을 이겨낼 수도 없으니.

“대신, 비어 있는 룸 있다고 연락이 오면 바로 알려줘야 해.”

몇 번이나 도준에게 확답을 듣고 나서야 제아는 침실로 들어갔다.

그제야 도준은 인호의 부재로 인해 산더미처럼 불어버린 일거리를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도준이 문을 열자, 컨시어지 직원이 예의 바른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고객님, 프런트에서 추가로 원하셨던 룸을 바로 구해드리지 못 해서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다른 프레지덴셜 룸을 바로 준비해드릴까요?”

도준의 시선이 제아가 있는 침실의 문을 잠시 바라보긴 했지만, 조금의 고민도 없이 그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필요 없습니다.”

도준이 컨시어지 직원을 그냥 돌려보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제아는 푹신한 침대의 매력에 푹 빠져 몇 번이나 몸을 던지고 나서야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까지 하고 나왔을 땐 밤 11시가 다 되어 있었다.

“자, 이제 비서 노릇 좀 하러 가볼까?”

벌써부터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오지만, 제아는 눈에 바짝 힘을 주고 미닫이문을 열었다.

도준도 샤워를 마쳤는지 촉촉이 젖은 모습으로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과 서류를 번갈아가면서 확인하고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는 서류들과 자질구레한 물건들.

너저분한 주변 환경에 지독한 정리벽이 있는 제아의 눈살이 단번에 구겨졌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도준이 힐긋 제아를 잠깐 바라보았다.

“제아 넌 피곤할 테니, 들어가서 쉬어.”

제아는 대답 대신 서류에 열중하고 있는 도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수북하게 쌓인 서류의 양도 어마어마했고, 태블릿 PC도 두 대나 놓여 있었다.

딱 봐도 인호의 몫까지 그가 하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그녀도 잘 알고 있다. 능력 좋은 인호의 빈자리를 자신이 채워줄 수 없음을.

그렇다면 일적인 도움 대신, 할 수 있는 걸로 도와주는 수밖에.

그녀는 최대한 방해가 되지 않게, 도준의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성격과 외모만 변했지 옛 버릇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나 보다. 지저분한 것 못 참으면서 정리 못 하는 건 여전한 걸 보니.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변하지 않는 그의 모습들이 차근차근 마음속으로 스며들어와 심장을 톡톡 두드렸다.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모습조차도.

소리 없이 작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조용히 주변을 정리하는 제아가 신경 쓰였는지 도준이 마침내 서류에서 시선을 뗐다.

“제아야, 괜찮으…….”

“먼저 자라는 말하지 마. 끝까지 같이 일하다 잘 거니까.”

이번만큼은 절대 양보할 생각이 없었기에 제아는 도준의 말투를 흉내 내어 단호하게 말했다.

“밤새야 되니까 들어가서 먼저 자.”

“그럼 같이 밤새면 되잖아. 비서라고 데리고 왔으면 부려먹어야지.”

“문제아.”

“배우라면서. 배울 준비 완벽하게 됐으니까 한 번만 알려줘. 응?”

벽시계를 확인하며 고민하는 도준의 모습에 제아는 애교스럽게 생긋, 웃어 보였다.

샤워를 막 하고 나온 듯 촉촉이 젖은 얼굴로 그렇게 청초하게 웃어버리니, 어떤 남자가 버틸 수 있을까?

이번에도 져주는 수밖에.

옅은 한숨을 내쉰 도준은 자신의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라는 듯 툭툭, 두드렸다.

그의 마음이 변할까 싶어 착한 아이처럼 냉큼 의자에 앉은 제아는 졸린 눈을 들키지 않기 위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마침내 도준의 나른한 눈매에 흐릿한 웃음이 배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아만은 알 수 있었다. 그의 진짜 미소는 입이 아니라 눈이라는 것을.

그의 눈웃음에 심장은 기분 좋게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알 수 없는 따스한 온기에 제아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배었다.

그때 도준이 의자를 가까이 당기며 바짝 붙어 앉았다.

본격적으로 일을 가르쳐주려는 행동이었지만, 가까이 다가온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에 그녀의 후각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청량한 그만의 체취에 섞인 향은 바로, 자신의 몸에서도 나는 바디 워시 향과 같았다.

서로의 몸에서 같은 향기가 난다는 게 이렇게 심장이 터지도록 두근거리는 일인지 오늘 절실히 깨달았다.

제아가 터질 것 같은 심장을 품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대신, 졸리면 들어가서 자는 거야.”

도준은 그제야 노트북을 끌어당기면서 설명을 시작했고, 제아는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경청했다.

하지만 잠깐의 노력으로 안 되는 일도 있는 법.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

준비해야 할 것도, 체크해야 할 것도 많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너무 많다.

제아가 그럴 때마다 기가 막히게 눈치챈 도준은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똑같은 걸 몇 번씩 설명하고 도와주었다.

새벽 4시가 되자, 정말 독하게 버텨보려던 제아의 눈꺼풀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끄덕끄덕, 도리도리. 끄덕끄덕, 도리도리.

몇 번을 반복하다가 순식간에 눈앞이 깜깜해지고…….

쾅―.

정신을 차렸을 땐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창피하고 부끄럽고 민망하고, 도저히 고개를 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머리를 박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제아는 괜찮은 듯 웃어 보였다. 하지만 도준의 눈은 제아의 이마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꽤 아플 것 같은데.”

“하나도 안 아파! 내가 피부가 약해서 금방 빨개지는 거, 오빠도 잘 알잖아.”

그녀를 바라보는 도준의 눈빛의 의미를 알아챈 제아는 얼른 선수를 쳤다.

“자, 잠깐 존 것뿐이야! 사람이 12시가 넘으면 워, 원래 그래! 잠 깼으니까 자라는 말 절대 하지 마!”

“문제아, 너까지 무리할 필요 없어. 지금 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와줬으니까. 지금 자도 7시에 일어나야 돼.”

도준은 정말 괜찮다는 듯 말을 했지만, 그녀가 괜찮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데!

휘황찬란한 자쿠지 욕조가 거품 목욕하라고 손짓하는데도 그 유혹마저 뿌리치고,

냉장고에 가득 차 있는 맛있는 음료수와 간식들도 마다하고,

발코니 너머로 보이는 눈부신 야경까지 마다하고,

11시면 곯아떨어지는 저질 체력에도 불구하고 도와주겠다고 버티고 앉아 있었다.

“나보다 더 무리한 건 오빠잖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자?”

“난 괜찮아.”

“오빠가 무슨 강철 로봇이야? 사람이 어떻게 한숨도 안 자고 버텨?”

“10년 동안,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잔 적 없어. 그래서 난 익숙해.”

“말도 안 돼!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10년을 버텨? 그러다 잘못하면 죽어!”

주말을 거의 잠을 자는 걸로 흘려보내는 제아로선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그녀를 바라보는 도준의 눈동자는 깊고 또렷했다.

정말 강철 로봇이라도 되나?

한숨을 내쉬는 순간, 제아의 기가 막힌 시력이 도준의 깨끗한 흰자위에 피가 바짝 몰려 있는 걸 발견했다.

요런, 요망한 오빠 같으니라고! 이젠 나한테 거짓말도 하신다, 이 말씀이지?

악착같이 안 자려고 버티는 제아를 바라보는 도준의 가슴은 먹먹했다.

한국을 떠난 이후, 꿈에서 제아가 나타날 때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달려가고 싶었다.

그래서 잠을 잘 수 없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너한테 달려가 버릴 것만 같아서.

미국에서의 살벌했던 생활을 떠올리자 가슴이 아려왔지만, 도준은 포커페이스를 잃지 않고 덤덤하게 대답했다.

“살았으니, 돌아왔겠지.”

그런데 제아가 갑자기 의자를 그의 옆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오빠는 정말 피곤하지도 않고 잠이 안 온다구?”

“그래, 피곤하지도 않고 잠도 안……!”

순식간이었다. 제아의 얼굴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온 것은.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조심히 감싼 제아가 조심히 도준의 얼굴을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뭐 하는, 짓이지?”

항상 그가 먼저 하기만 했지, 제아에게 당한 건 처음인지라 도준은 지금 당혹스러웠다.

“눈이 이렇게 충혈되어 있는데. 그런데도 오빠는 피곤하지 않다구? 잠이 안 온다구?”

훅 다가온 제아에게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향기는 참기 힘든 유혹이었다. 장난스럽게 반짝이는 새까만 눈동자마저.

그래서 도준은 급하게 시선을 떨어뜨렸지만 그게 더 실수였다.

벌어진 브이넥 셔츠로 보일 듯 말 듯 드러난 새하얀 굴곡에 도준은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랐다.

또다시 급하게 시선을 옆으로 틀었지만, 이미 그의 시야를 점령해버린 제아의 새하얀 굴곡.

‘빌어먹을!’

10년 동안 그렇게 잘 참았건만, 눈앞에 있는 참기 힘든 유혹 앞에 무너져버렸다.

온몸의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면서 은밀한 곳으로 열기가 몰리기 시작했다.

백자처럼 티 없이 새하얀 도준의 피부가 점점 붉은빛을 머금었다.

“이것 봐! 얼굴도 빨갛잖아! 어라, 식은땀도…… 나네?”

어떻게든 제아와의 스킨십을 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앙증맞은 이 손 먼저 뿌리쳐야 했다.

보드라운 이 느낌이 좋은데, 따스한 이 체온이 너무 좋은데도 말이다.

도준은 우선 끓어오르는 열기를 식히기 위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손을 떼기 위해 제아의 손 위에 자신의 큰 손을 포갰다.

그런데 행동에 옮기기도 전에 숨이 탁, 막혀왔다.

아주 바짝, 가까이 다가든 제아가 도준의 이마에 이마를 댄 것이다.

맞닿은 이마를 통해 포개진 손.

맞닿은 서로의 살결.

전해지는 서로의 온기.

어린 시절, 서로가 아플 때 열을 확인했던 그때처럼 제아는 그의 열을 이마로 체크하고 있었다.

활화산처럼 터지기 일보 직전인 그의 몸 상태도 모른 채 말이다.

“봐봐, 진짜 열도 있잖아!”

남자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는 제아의 순진한 오해에 도준은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안 되겠어. 오빠가 오늘 침대에서 자. 그것도 당장!”

벌떡 일어나 도준의 손을 옆구리에 낀 제아가 침실로 이끌자 도준은 더 죽을 맛이었다.

손을 타고 스며드는 보들보들 여린 허리살의 촉감이 이렇게나 아찔할 줄이야.

이성의 회로가 정지되기 전에 단호하게 거절을 해야 하지만, 입 밖으로 말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순한 양처럼 제아에게 이끌려 침실로 끌려가기야 하지만, 그도 양보할 수 없는 게 있었다.

“침대에선 네가 자. 나는 소파에서 잘 테니.”

단호하게 말을 하고 돌아서서 침실을 나서는 순간, 다급한 제아의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 그럼 침대에서 같이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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