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같은 룸에서 잔다고, 무슨 일 나겠어?
2016.10.31.
긴장감에 어깨가 바짝 올라가긴 했지만, 모른 척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얄밉게도 그걸 또 딱 짚어내는 도준의 옆모습을 제아는 앙큼한 고양이 눈으로 흘겨보았다.
때마침 수정을 마친 도준도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살짝 고개를 튼 순간이었다.
내리깐 도준의 눈과 치켜든 제아의 시선이, 묘한 각도에서 만나 얽혀버렸다.
긴 속눈썹의 그늘에 물들어서일까. 짙어진 그의 눈동자만큼 농밀한 색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와 심장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다녀왔어, 문 비서.”
따스한 숨결이 키스하듯이 코끝을 어루만지는 야릇한 느낌에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감각에 깜짝 놀란 제아는 온 힘을 다해 발을 굴렀다.
도르르, 소리를 내며 뒤로 밀린 그녀의 의자가 다른 이의 의자에 부딪혀 멈추는 걸 도준은 차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와의 안전거리가 어느 정도 확보된 후에야 빠르게 뛰던 그녀의 심장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런데 문 비서, 문 비서라니? 설마.
“오빠 특별비서, 내가 된 거 알고 있었어?”
도준이 다가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제아는 얼른 손을 들어 저지했다.
“다, 다가오지 말고 거기서 말해!”
제아의 저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도준의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그래도 다가오지는 않고 제아의 책상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도준이 입을 열었다.
“내 비서인데, 나한테 먼저 보고가 들어오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과 살짝 벌어진 입술을 보니, 제아는 꽤 놀란 것도 같았다.
“오빠가 점심시간에 나를 찾아온 이유, 알 것 같아.”
문제아, 대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우선 들어줄 의향은 있다는 뜻으로, 도준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나는 비서로 안 된다고 김 부장님한테 말할 거잖아. 김 부장님한테 말하기 전에 나한테 미안해서 들른 거야, 그렇지? 그런 거라면 난 괜찮아! 나도 비서 노릇 같은 거, 할 자신 없거든.”
제발 그렇다고 대답해달라는 듯, 그와는 또 다른 색을 머금은 갈색 눈동자가 애틋하게 젖어들었다.
제아가 말하는 의도를 정확히 알아차린 도준은 그녀에게 정확한 대답을 해주기 위해 책상에 기대었던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할 말이 있어서 들른 건, 맞아.”
“그, 그렇지?”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친 제아는 이제야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지?
나는 네 상상의 나래를 완벽하게 꺾어버리려고 왔는데.
“다음 주까지는 푹 쉬라는 말을 해주러 왔어.”
“푹…… 쉬라니? 무슨 뜻이야?”
“그 이후부턴 꽤 바쁜, 특별비서 일정이 시작될 테니까.”
도준은 ‘특별비서’라는 말에 악센트를 강하게 주었다.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 한 듯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제아의 얼굴이 점점 더 새하얘졌고, 그다음에는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나를, 특별비서로 쓰겠다고? 오빠 미쳤어?”
제아에게서 10년 만에 듣는, ‘미쳤다’는 표현은 꽤 반갑기까지 했다.
나야 항상, 너에게 미쳐 있으니까.
도준은 태연하게 인정까지 했다.
“김 부장이 합법적으로 채용한 비서를 내가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김 부장님이 날 스……!”
거기까지 말을 한 제아는 아차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김 부장은 ‘스파이’란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저 종종 물어볼 게 있으니, 대답을 잘해달라고 했을 뿐.
어림짐작만 했을 뿐, 정확하지도 않은 사실을 그에게 멋대로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빠, 난 제대로 된 기획도 해본 적 없고, 비서 노릇은 더더욱 해본 적도 없어.”
“배워.”
정말 용기 내서 한 말인데, 그는 너무도 간단하게 끝내버렸다.
배우는 게 쉬운 줄 아나!? 내가 자기처럼 슈퍼 두뇌도 아니고!!
그녀가 생각하는 도준의 비서는 배우면서 업무를 처리하는 그런 레벨이 아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회사 최고 보스의 비서 자리.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단기간에 그걸 다 어떻게 배워? 나는 자신이 없……?”
“1년 동안 제자리걸음, 지겹지도 않나? 이젠 벗어날 때도 됐는데 말이야.”
싸늘한 그의 한마디가 제아의 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도준의 말대로 허울만 직원일 뿐, 인턴 취급 당한 지가 벌써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제대로 된 일은커녕, 심부름에 잡일에 물류센터 지원까지…… 제대로 된 기획은 배워보지도 못 했다.
기획이라곤 김 부장의 말대로 누가 맡았어도 성공했을 모나무흐 기획전이 전부 일뿐이었다.
그런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그가, 어떻게 가장 낮은 곳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는 걸까?
“난 길만 마련해줄 뿐이야. 그 길을 걸어오는 건 제아 네 몫이고.”
도준의 마지막 말에 제아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상황이 예견된 것처럼 딱딱 떨어지는 기분……. 꽤 묘했다.
쟁쟁한 제일 그룹의 다른 계열사를 모두 마다한 채, 굳이 제일 어패럴을 선택한 도준.
그리고 클럽에서의 우연한 만남 이후 악연처럼 반복되는 우연.
이 모든 게 철저하게 그의 계획하에 시작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너무 갑자기 쫓겨나듯이 사라진, 이 회사에 뼈를 묻겠다고 했었던 조 과장과 김 대리.
이상할 정도로 길었던 직속 상사의 공백.
할 일 없이 하루하루를 버텨왔던 회사에서의 시간.
MD 겸 비서 업무까지 소화해야 하는 비서 채용 공지.
그리고 눈앞의 도준은 지금, 그녀에게 또 다른 제안을 하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단호한 눈빛 속에 파묻힌 속삭임이 귓가에서 아른아른 맴도는 것 같았다.
‘나를 믿고 따라와.’
우연 같지 않은 우연이 물레방아처럼 자꾸 반복되고 있었다.
직접 듣지 못하고 보지 못했을 뿐, 그런데도 그에게 보호받는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제아가 잠깐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사이, 도준은 안전거리를 넘어와 버렸다.
서늘한 그의 손끝이 제아의 턱을 잡아 올려 눈을 마주 보게 했다. 미쳐 피해버리지 못한 제아의 눈이 그의 눈빛에 꽁꽁 묶어버렸다.
휘몰아치는 짙은 갈색 동공에서 흘러나온 묘한 기운에 잠식당하는 가련한 영혼.
“그 길, 거부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무서운 건 그 길이 아니라, 바로 오빠인데.
하지만 머릿속으로만 생각할 뿐, 제아는 어느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마음 깊이 숨겨놓았던 그에 대한 마음을 저도 모르게 드러내버린 줄도 모른 채 말이다.
‘나는 오빨 믿어.’
그를 멍하니 바라보는 제아의 눈동자 속에 숨겨진 그 메시지를 정확하게 캐치해낸 도준의 얼굴에 정말 드물게 진짜 미소가 어렸다.
도준의 나른한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고, 잘생긴 양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 미소에 제아의 영혼은 다시 한 번 송두리째 흔들려 버렸다.
배경과 재력이 없어 대우받지 못한다면, 그 배경과 재력은 그가 만들어주면 된다.
너를 생각하면서, 너를 위해서 이렇게 독하게 10년을 달려온 나야.
널 위해 달려온 나를, 넌 이용만 하면 돼.
도준은 그가 없는 힘든 상황에서도 악착같이 버텨준 제아가 기특했고, 또 사랑스러웠다.
사랑스러운 내 복숭아 사탕 같으니라고.
제아를 향한 애틋함이 순간적으로 폭발해버렸다.
꼭꼭 억눌러 놓았던 10년 전의 버릇이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턱을 잡은 손끝에 좀 더 힘을 주고, 그는 얼굴을 내렸다.
서로의 이마가 맞닿으려는 거리는 이제 겨우 1센티미터.
그 순간, 그의 입안으로 동그란 무언가가 불쑥, 무단 침입을 했다.
곧이어 입안에서 서서히 퍼지는 달달한 복숭아 사탕 맛.
이게 대체, 무슨.
당혹스러움에 도준의 새하얀 미간이 좁아졌다.
“다, 담배 냄새나는 거 보니까 담배 피우고 왔구나? 말보로 내가 독하다고 했잖아! 사탕 줬으니까 오늘은 담배 그만 피워. 알았지?”
제아는 속사포처럼 제 할 말만 우르르 쏟아낸 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도준은 입안에 사탕을 머금은 채, 죽어라 내달리는 가녀린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무엄하게도 하늘같은 사장님을 뒤로한 채 사무실을 뛰쳐나온 제아는 비상계단에 몸을 숨겼다.
살짝 벌어진 문틈으로 도준이 사무실에서 나오는 걸 본 후에야 그녀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휴…….”
의자에 앉자마자 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심장이 터져버리는 줄 알았다.
가까이 다가온 도준의 얼굴에 심장이 무차별 폭격을 당해버린 것이다.
눈, 코, 입, 모두 매끈하게 잘생겼건만 왜 유독 그의 입술만 크게 확대되어 시야를 공격하는지.
급기야 눈앞까지 다가온 붉은 입술이 뻥! 하고 터지는 순간, 제아는 그의 입술 안으로 사탕을 쏙, 넣어버렸다.
어떻게든 다가오는 입술은 막아야만 했으니까.
“아주 잘했어, 문제아. 공격에 방어하는 건 당연한 거지.”
스스로를 다독이던 제아는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다시 발끈했다.
“아니, 왜 그렇게 불쑥불쑥 얼굴을 들이대는 거야? 사람 심장 터져 죽는 꼴 보고 싶나?”
발끈했다가, 시무룩했다가, 눈이 멍하게 풀렸다가, 이글이글 불꽃이 튀었다가, 제아의 기분은 퇴근할 때까지 들쑥날쑥 뒤죽박죽이었다.
USB 안의 자료 정리를 모두 끝마쳐서인지 퇴근 시간이 됐을 때 제아의 기분도 꽤 풀어진 상태였다.
흐뭇한 마음으로 기지개를 쭉 펴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는 제아의 입술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한지로! 가족 여행에서 드디어 돌아온 거야?”
***
막상 회사에 오자 도준을 기다리고 있는 일들이 많았다.
제아만 잠깐 보고 가려고 했던 그는 하는 수 없이 예상보다 꽤 오랜 시간을 회사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통유리 너머로 비치는 하늘이 어둑해지고 나서야 대충 업무를 마무리한 도준은 인호와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웬만해선 야근을 하지 말라고 도준이 새롭게 지시한 회사의 방침에 따라 세 명의 여비서들도 이미 퇴근한 상태였다.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가 아닌 일반 직원들이 이용하는 엘리베이터로 향하면서 인호가 설명했다.
“직원들 다 퇴근했을 거라서 차는 지하 1층에 대 놨어.”
지하 1층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인호가 탄성을 내질렀다.
“이야, 네 차 못지않게 쌔끈한데? 뭐, 차 주인도 멋지네.”
인호의 시선을 쫓아간 도준의 얼굴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의 심기를 건드린 건 차가 아닌, 차 주인이었다.
주차장인데도 불구하고 인호가 말한 검은 스포츠카에 몸을 기대고 있는 젊은 남자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검은 라이더 재킷에 블랙 진을 매치한 남자의 전신에선 반항아 포스가 물씬 느껴졌다.
잘 그을린 피부색에 선글라스 아래로 드러난 날렵한 코와 턱선, 비웃는 듯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남자는 바로 한지로였다.
그리고 한지로가 이 회사 주차장에 와 있다는 건…….
문, 제, 아.
도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틀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깜짝 놀란 인호가 허겁지겁 다시 그의 뒤를 쫓았다.
“또 어디 가는데? 바로 부산 내려가야 하는 거 몰라?”
“잠깐 회사에 볼일이 있어.”
더 이상 어떤 말도 듣지 않겠다는 듯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노려보듯이 쳐다보는 도준의 모습은 단호했다.
사장이 그렇다면야 비서는 따를 수밖에.
인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작게 투덜거렸다.
“저 고집 누가 꺾어.”
지하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그런데 안에 탄 사람도, 밖에 서 있는 사람도 움직이지 않았다.
깜짝 놀란 듯 작게 입을 벌리고 큰 눈만 깜빡이는 제아.
그런 제아를 딱딱하게 굳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도준.
그리고 두 사람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번갈아보는 인호.
무거운 침묵을 깨고 먼저 움직인 건 도준이었다.
입구를 가로막듯이 당당하게 도준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인호도 얼떨결에 같이 올라탔다. 안에 있는 사람이 내리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인호가 타자마자 도준은 기다렸다는 듯 닫힘 버튼을 눌러버렸다.
“사장님, 저 안 내렸어요!”
당황한 제아가 열림 버튼을 누르고 내리려 하자 도준은 심술궂게도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딱 버틴 채 닫힘 버튼을 눌러버렸다.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본 제아의 눈꼬리가 앙칼지게 올라가더니, 인호를 힐긋 바라본 후에 다시 도준을 바라보았다.
도준이 15층을 누르자 제아가 얼른 다시 취소 버튼을 눌렀다.
그래도 꿋꿋하게 도준이 다시 15층을 누르자 제아도 지지 않고 취소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을 반복하고 나서야 참다못한 제아가 15층 버튼에서 손가락을 떼지 않은 채 경직된 웃음을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원래 내린 사람이 먼저라고 알고 있습니다. 사장님은 죄송하지만, 제가 내리고 나서 15층 올라가셔야 해요.”
야무진 제아의 말과 당찬 모습에 인호는 감탄했다.
살얼음판 같은 저 녀석의 표정을 보고도 야무지게 말을 하다니, 역시 도준의 동생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호는 지금 이 상황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오빠와 여동생의 유치찬란한 신경전이라.
무엇보다 10년 동안 도준을 지켜봐왔던 인호로서는 굉장히 생소한 모습이었다.
저 녀석이 저런 심술궂은 표정을 지을 수도 있구나.
저렇게 유치한 짓을 꿋꿋이 참고 할 수도 있구나.
완벽한 로봇 같던 도준의 새로운 모습이 인호는 신기하기만 했다.
이제 조금, 사람 냄새 나네.
그나저나 유치한 엘리베이터 대전은 누구의 승리로 끝나려나?
이왕 이렇게 된 거 인호는 팔짱을 끼고 뒤에서 느긋하게 관전하기로 했다.
우선 엘리베이터 승리는 당연히 황소고집 한도준의 승리였다.
그리고 제아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한마디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의 특별비서, 문제아.”
그 한마디에 버튼으로 향하던 제아의 손가락이 멈추고, 우왕좌왕 고생하던 엘리베이터는 드디어 상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지금 가려고 하는 2박 3일 부산 출장, 유 실장 대신에 문 비서가 가줘야겠어.”
“네?”
“뭐?”
도준의 폭탄선언에 제아뿐만 아니라 인호마저도 깜짝 놀라 도준을 바라봤다.
하지만 둘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도준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보시다시피 유 실장이 워낙 몸이 허약해서, 과도한 업무에 지금 무척 피곤한 상태거든.”
내가? 언제?
인호는 무슨 소리냐는 듯, 축 처진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도준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신체 건강하다 못해 펄펄 끓는 피를 가진 남자를 순식간에 허약한 놈으로 만들다니!
다른 건 몰라도 남자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일이기에 인호는 이번만큼은 참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사장님, 저는 조금도 피곤……?”
“그래서, 유 실장한테 일주일 휴가를 주려고 하거든.”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인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한국에 온 이후로 단 하루도 쉰 적이 없었는데 일주일이나 휴가를 준다고?
앞뒤 사정은 궁금하지도 않았다. 도준의 그 한마디에 인호는 즉시 연기에 몰입했다.
인호는 눈에 힘을 잔뜩 빼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제아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넌지시 속삭였다.
“제아 씨, 고집불통 오빠 좀 아주 잘 부탁합니다.”
오, 오빠?
쏟아질 듯 커다란 제아의 눈이 인호에게 향하는 순간, 엘리베이터가 15층에 도착했다.
으르렁거리는 두 남매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지하 1층 버튼을 누르던 인호는 흠칫했다.
부산 호텔. 예약한 룸이 하나뿐인데.
물 좋기로 소문난 부산에 내려가는데, 굳이 자신의 룸은 예약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인호는 그게 아주 잠깐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뭐 남매지간이니, 같은 룸에서 잔다고 무슨 일이 나겠어?
일주일의 휴가를 떠올린 인호는 그저 즐겁기만 했다.
***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제아가 도준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무슨 출장이야? 너무 갑작스럽잖아! 그리고 이번 주까지는 푹 쉬라면서!”
“유 실장이 몸 상태가 안 좋아. 그래서 혼자 출장을 가야 해서 꽤 곤란한 상황이었어.”
아픈 사람처럼 힘없이 늘어진 인호를 떠올리니 제아는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이 입술만 꾹, 다물었다.
“그런데 때마침, 나의 새로운 비서가 구세주처럼 나타나주었거든.”
너무도 태연하게, 물 흐르듯이 말하는 도준의 모습은 조금의 흠도 잡을 수 없었다.
인호가 아파 보인 것도 사실인 것 같았고, 의도치는 않았지만 스스로 도준의 눈앞에 나타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뭔가 분명 미심쩍은데, 딱 꼬집어서 말을 할 수가 없으니, 제아는 속이 답답했다.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따르기엔 무리가 있었다.
여자들이 1박만 해도 얼마나 많은 짐이 생겨나는지 남자인 그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게다가 외박한다고 했다가는 집에 들어가는 순간, 윤영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기다리다가 파리채를 현란하게 휘두르겠지.
게다가 지하 주차장에선 2주간의 가족여행에서 돌아온 지로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제아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잔뜩 썼다.
“나 약속 있어. 오늘 당장 스케줄이 있는 거 아니면 내일 일찍 내가 짐 챙겨서 내려가면 안 될까?”
제아는 나름대로의 중간 협상안을 내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도준은 그녀가 왜 그런 협상안을 내놓았는지 알기에 절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10년 동안 떨어져 있던 그는 그렇게 피하려고 하면서 한지로는 봐야겠다 이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유치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마음속에서 질투심이 솟아올랐다.
절대,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한지로에게 보내지 않으리라.
“아침 일찍 일정이 시작돼서 곤란해. 어차피 백화점에 잠깐 들를 계획이었으니 필요한 건 백화점에서 사면 되고, 집에는 유 실장이 바로 연락해놓을 거야. 문제 있나?”
기가 막히게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딱딱 집어서 도준이 해결을 해버리니, 제아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5분 후에 출발할 예정이니, 그 약속 취소하는 게 좋을 거야.”
집무 책상에 장신의 몸을 비스듬히 기대서서, 큰 인심 쓰듯 제아에게 5분이라는 시간을 허한 그의 나른한 눈동자엔 만족스러운 희열이 감돌았다.
‘그러니까 문제아, 얼른 한지로한테 같이 못 간다고 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