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16화 (16/104)

16. 긴장하지 마. 닿지 않았으니까.

2016.10.27.

도준은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이렇게 힘들어할 거면서, 감당하지 못할 거면서, 넌 왜 한 번도 내게 그런 말을 안 하는 거지?

떠나라는 말만 아니라면, 나는 어떤 부탁도 들어줄 수 있는데.

억울할 법한데도, 제아는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니까.

계산대를 넘어 소리 없이 다가와 버린 도준을 피해 등을 뒤로 바짝 뺀 제아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의 입술이 있는 그 시점에서 잠시 방황하던 제아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홱, 고개를 틀어버렸다.

“한두 푼도 아니고, 그 돈을 다 어떻게 없애달라고 해? 내가 그렇게 염치없는 앤 줄 알아? 우리 엄마 아빠가 나 그렇게 안 가르쳤거든?”

다시 상체를 세운 도준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잠시 눈을 감았다.

너무 곧아서 절대 휘어질 줄 모르는 제아.

하아, 널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다시 눈을 뜨자 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제아가 기다렸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빚 없애달라고 하면, 그래서 빚이 완전히 없어지면. 이제 더 이상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 완벽한 남인 척, 모른 척해 줄 거야?”

진심을 담은 제아의 눈빛이, 말투가 그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었다.

질질 피가 흐르는 심장에서 느껴지는 통증.

그럼에도 도준은 내색하지 않고 덤덤하게 물었다.

“내가 영원히,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나 보지?”

잠시 방황하던 눈이 도준의 손에 쥐어진 담배로 향하더니 질문에 대한 대답을 피했다.

“오빠가 원래 피우는 담배, 그거 아니잖아. 그 담배, 냄새도 엄청 독하던데.”

타들어가는 그의 속마음도 모른 채 제아의 시선은 담배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래서, 바꿨어.”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너무 애가 타서 미칠 것만 같아서. 이젠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데도 닿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는 더 독한 게 필요했다.

그때, 편의점 문이 열리면서 젊은 남자 2명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뭐가 그리 반가운지 손님을 향해 미소까지 날리며 인사하는 제아를 바라보는 도준의 눈살이 옅게 구겨졌다.

온몸에서 철철 흘러나오는 제아의 메시지.

‘이제 그만 나가줘.’

뭔가 할 말이 더 남은 듯, 도준은 제아를 바라보았지만 제아는 고집스럽게 시선을 틀고 있었다.

“이만 가보지.”

편의점을 나온 도준은 차체에 몸을 기댄 채 담배를 입에 물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가락과 달리 그의 시선은 집요할 정도로 편의점 안에 있는 제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일분일초라도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면, 그만큼 더 곁에 두는 수밖에.

입 안을 감도는 독한 쓴맛이 그를 한 번 더 독하게 만들었다.

제아가 벗어나려고 몸부림칠수록 더 강하게, 숨도 못 쉬도록, 그의 품안에 가두고 싶은 욕구가 불타올랐다.

계산을 마친 제아는 계산대에서 나와서 음료수 냉장고 뒤에 있는 창고로 향했다.

남자 두 명은 컵라면에 물을 받은 채 창고로 향하는 제아의 뒷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

평범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육감적으로 빠진 제아의 늘씬한 뒤태를 남자들은 노골적인 시선으로 감상하고 있었다.

그걸 본 도준은 몇 번 빨지도 않은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구두 굽으로 짓이겨 버린 후 다시 편의점으로 돌진했다.

잠깐 나타난 것뿐인데도, 도준은 제아의 마음을 엉망진창으로 휘저어버렸다.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해서 그런지 도준만 보면 자꾸 그때의 상황이 떠올랐다.

눈뿐만이 아니라 이젠 그의 입술에도 반응해버리는 격한 심장을 지그시 손으로 누르며 그녀는 음료수 냉장고 창고 뒤로 향했다.

몸을 혹사시켜야 도준 때문에 쿵쾅거리는 심장이 제자리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무거운 술 상자를 번쩍 드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두 손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으차차?”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위로 드니, 그녀의 연봉보다 비싼 시계가 다시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보다 고개가 더 솟은 도준이 손을 뻗어 제아가 들려는 술 상자를 번쩍 든 것이다.

무심한 듯, 신경질이 난 듯 도준의 섬세한 눈꼬리에 바짝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디로 옮기면 되지?”

“괜찮아, 내가 할 수 있어!”

“이것만 도와주고 갈 거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인호는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저 늑대들이 사라지면, 그때 갈 거야.’

그게 도준의 본심이었다.

열심히 술 상자를 나르면서 도준은 바랐다. 저 늑대들이 라면을 다 먹고 사라질 때까지, 그가 옮길 술 상자가 잔뜩 쌓여 있기를.

“진짜, 괜찮은데…….”

조그맣게 중얼거린 제아는 도준에게 손가락으로 술 상자를 놔둘 위치를 가리켰다.

딱 봐도 비싼 슈트에 비싼 시계를 찬 잘생긴 남자가 무거운 술 상자를 번쩍 들어 옮기는걸, 두 남자는 컵라면을 먹으면서 얼떨떨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술 상자를 쾅, 하고 바닥에 내려놓은 도준은 그런 남자들을 향해 찌릿, 살벌한 눈빛을 날렸다.

‘얼른 라면이나 먹고, 꺼져.’

***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한 도준은 코스모 스위트석에 긴 다리를 쭉 펴고 앉아 턱을 괸 채 잠시 눈을 감았다.

도준은 결국 그녀의 지시하에 편의점 창고 안을 깨끗하게 정리해버렸다.

덕분에 온몸은 먼지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늑대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머슴 부리듯이 그를 부려먹은 제아의 모습에선 조금의 경계심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창고 정리를 마치고 손을 탈탈 털며 나가려는 그의 옷깃을 제아가 슬며시 잡았다.

“유통 기한 지나서 못 파는 삼각 김밥 있는데, 그거라도 먹고 갈래?”

주머니 속의 핸드폰은 자꾸만 울리는데도 그는 그만 고개를 끄덕여버리고 말았다.

입에 맞지도 않는 삼각 김밥을 먹는데도 그는 마냥 좋았다.

옛날 그때처럼 소박하게 컵라면에 김밥을 먹으면서, 서로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물론 덕분에 공항에 조금 늦게 도착한 그에게 인호가 온갖 신경질을 다 부렸지만 말이다.

몇 시간 전의 일을 회상한 후, 다시 뜬 그의 시야에 살짝 튀어나온 재킷 주머니가 눈에 띄었다.

손을 넣어보니 바스락거리며 동그란 무언가가 만져졌다.

살짝 주머니 안을 들추어보니, 노랑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복숭아 사탕이 보였다.

-말보로는 너무 독하니, 이 사탕 먹고 참아보는 게 어때?-

피식, 도준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보일 듯 말 듯 피어올랐다.

무거운 걸 드느라 더워서 잠깐 벗어놓은 재킷에 제아가 몰래 넣어놓은 게 분명했다.

가슴에서 잔잔하게 퍼지는 행복감은 갈기갈기 찢어놨던 심장의 상처를 씻은 듯이 낫게 했다.

왜 이렇게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지.

문제아, 너란 여자 정말…….

도준의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인호는 긴 손가락에 반쯤 가려진 도준의 희미한 미소를 기가 막히게 발견했다.

“한 사장, 너 미쳤지. 왜 혼자 실실 웃어?”

불쑥 끼어든 인호의 음성에 도준은 감았던 눈을 느릿하게 뜨고 비스듬히 시선을 틀었다.

매끈하게 빠진 손가락은 길지만, 그 손이 감싸고 있는 얼굴은 작아도 너무 작았다.

그 작은 얼굴에 꽉 들어찬 도준의 이목구비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하며 인호는 냅다 짜증을 부렸다.

“그렇게 유혹하는 것처럼 끈적거리게 보지 말랬지. 한 사장 네가 그렇게 보면 내 성 정체성에 혼란이 온다니까?”

“쓸데없는 트집은 그만 잡고, 할 말이나 해.”

“흠흠, 우리의 한 이사님이 제일 어패럴 내부에 있는 심복들이 하나씩 사라지니 은근히 애가 타나 보더라구.”

한 회장이 아직은 잘 버텨주고 있지만, 그가 없는 10년 동안 제일 그룹 내 한 부회장의 힘은 상상 이상으로 커져 있었다.

하다못해 매각 위기에 처한 제일 어패럴 내부에도 그의 사람이 그렇게 많을 줄이야.

한꺼번에 인사 조정을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기 때문에 도준은 천천히 한 부회장의 잔가지들을 쳐내고 있는 중이었다.

“해나 씨 추측이긴 한데, 비서실 쪽에 어떻게든 한 부회장 쪽 사람을 찔러 넣으라고 김 부장을 자꾸 닦달하는 것 같다고 보고가 들어왔어. 우리 해나 씨가 천리안 귀거든.”

해나 씨라면 그들이 인사과 쪽에 심어놓은 스파이이기도 했다.

도준과 인호는 대책 없이 한국으로 돌아온 게 아니었다.

한 회장과의 담판으로 한국 귀국을 결정한 후, 1년이라는 기간 동안 그들도 치밀하게 준비를 했다.

굵은 가지는 건드리지 않되, 전혀 의심하지 못할 잔가지들을 곳곳에 뿌려놓은 것이다.

“유 실장은, 그게 가능하다고 보나?”

“어림도 없는 소리지. 감히 어디를, 내가 버티고 있는데.”

“김 부장이 채용한 특별비서는, 마지못한 척 받아줘야겠지.”

“그건 걱정 말라고. 한 사장 네 말대로 김 부장한테 지시해 놨으니까. 게다가 내가 또 한 연기하잖아? 명목은 MD 겸 비서이지만 은근하게 막 부려먹을 비서를 뽑아놓으라는 뉘앙스를 내가 팍팍 풍겨줬지.”

GK몰 초기 판매 이후 온라인에서 본격적으로 선보일 모나무흐 판매를 잠시 멈춘 것도, 모나무흐 기획전을 성공적으로 끝냈음에도 제아가 한가하도록 놔둔 것도 바로 그 이유였다.

그리고 김 부장이 가장 결정적으로 제아를 뽑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잠시 말을 멈춘 인호는 씨익,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하게도 우리 한 이사님이 자신이 힘써서 넣어준 사촌 동생 친구가 제아 씨라는 걸 모르고 있는 상황이잖아? 찔러만 넣어주고 버려둔 그 카드를 김 부장은 다시 쓰려고 할 테고.”

“결론은.”

“기존 직원 중에서 확실하게 제 사람이 되어서 우리에게 흡수가 되지 않을 비서. 김 부장 입장에선 한 이사가 추천해서 들어온 제아 씨를 당연히 비서로 뽑아서 올리겠지. 안 그래?”

말을 마침과 동시에 인호는 도준을 향해 태블릿 PC 화면을 돌려서 보여주었다.

태블릿 PC 화면 안, 크게 확대된 김 부장이 보낸 메일이 열려 있었다.

-최종 합격자는 온라인 기획팀 문제아 여사원입니다. 모나무흐 첫 판매도 성공적으로 치러서 MD로서의 능력도 증명해 보였고, 현재 사수가 공석인 이유로 비서실로 바로 발령을 내도 업무에 지장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잦은 야근과 물류 센터 지원을 나갈 만큼 열정이 넘치는 여직원입니다.-

“미션 완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만족스럽나, 한 사장?”

한강훈이 버린 카드를 그들은 역이용해서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풀어버린 꼴이었다.

“자, 이제 우리의 문 비서를 언제쯤 네 옆에 착 붙여줄까?”

“우선 놔둬. 김 부장이 안달이 나서 먼저 밀어 넣을 때까지.”

수긍한다는 듯 인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도준은 자신의 앞에 있는 태블릿 PC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까지는 한 부회장 쪽에서 그의 옛 가족에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지만, 그게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오늘을 위해서, 10년 동안 독할 정도로 참아내면서 제아에게 연락하지 않고 버텨냈다.

진짜 약점일수록 드러내면 안 되는 법이니까.

문제아라는 그의 유일무이한, 치명적인 약점을 말이다.

***

‘도준 오빠, 지금쯤이면 사탕이랑 메시지 봤겠지?’

침대에 눕자마자 제아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이었다.

더러운 건 딱 질색인 도준이 재킷까지 벗어던지고 창고 정리를 도와주던 게 떠올랐다.

청소하는 데 도가 튼 그녀인지라 꽤 귀찮은 요구 사항이 많았는데도 그는 불평 한마디 없이 정리를 도와주었다.

고생한 그를 그냥 보내는 게 민망해서, 예의상 권한 삼각 김밥.

거절할 줄 알았는데, 도준은 흔쾌히 오케이를 했다.

그와 함께 편의점 밖을 내다보면서 컵라면과 삼각 김밥을 먹었던 걸 떠올리니 잠잠해졌던 그녀의 심장이 다시 조심스러운 떨림을 머금었다.

그걸 잊으려고 세차게 고개를 젓자 이번엔 도준의 매끈한 상체가 떠올랐다.

“바쁘다면서, 운동은 또 언제 그렇게 한 거야?”

도준이 움직일 때마다 타이트하게 휘감긴 하얀 셔츠 너머로 드러난 상체는 마른 듯했지만 탄탄하고 균형 잡혀 있었다.

남자로 의식을 해서인지, 이제 그의 모든 것들이 야릇하게 그녀를 자극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정말 큰일 나는데.

“아, 몰라, 몰라! 잠이나 자자!”

어차피 도준은 일주일 후에야 돌아올 테니, 우선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역시나 피곤을 이기는 사람은 없는 법.

정말 오랜만에 그녀는 바로 곯아떨어졌다.

***

다음 날 아침, 제아는 출근을 하자마자 인사과로 향했다.

입사한 날 이후로 김 부장님과 대면한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왜 호출한 거지?

김 부장의 갑작스러운 호출에 제아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도준이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제일 어패럴의 주가는 급격히 상승하고 있었고, 그만큼 회사 직원들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물론 그녀 자신만 제외하고 말이다.

이틀 만에 완판을 한 모나무흐 기획전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그 기획전을 마지막으로 또다시 할 일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직속 상사인 조 과장과 김 대리까지 사표를 내서 사수 자리까지 비어 있는 상황에서 하필이면 인사과 호출이라니.

혹시 나한테도 사표를 내라고 하면 어쩌지?

복잡한 마음으로 인사과에 도착하자 김해나라는 여직원이 안내를 해주었다.

“부장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제아가 들어가자 해나는 문까지 닫아주는 친절함을 보였다. 물론 그 문이 비스듬히 틈을 보이고 있다는 건 제아도, 그리고 김 부장도 알지 못 했다.

김 부장 앞에 앉은 제아는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괜히 마른침만 꼴깍 삼켰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묻지. 우리 회사에 제아씨를 추천해준 분이랑, 연락은 하고 지내나?”

1년 가까이 단 한 번도 묻지 않더니, 김 부장이 갑자기 왜 그걸 묻는지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마, 왜 나 같은 직원을 추천해줬냐고 전화해서 뭐라고 하려는 건 아니겠지?

직장을 소개해준 지로의 친척 형에게 그런 민폐까지 끼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연락 안 합니다! 그러니까 그분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저한테는 너무 고마운……?”

“그럼 됐네.”

“네?”

뭐가 불만인지 굳어 있던 김 부장의 표정은 어느새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사장님 특별비서 채용하고 있다는 건, 제아 씨도 알고 있지?”

제아는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영 때문에 신청서까지 작성하긴 했지만 제출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지내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 떨어졌다.

“사장님 특별비서, 제아 씨로 결정했네.”

“예에? 저는 신청서도 낸 적 없는데요?”

그럴 리가, 절대 그럴 리 없었다.

새하얗게 질린 제아의 눈앞으로 김 부장이 종이 한 장을 흔들었다.

“그럼, 이건 다른 사람이 자네 이름을 도용해서 낸 거란 말인가?”

눈앞에 흔들리는 종이는 분명 그녀가 작성한 신청서가 분명했다.

“왜 하필, 저인 거죠? 저는 그럴 자격이…… 안 되는데.”

회사에서 가장 무시당하는 자신을 회사에서 가장 높은 보스인 사장의 비서로 채용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뽑힌 거야.”

“……네?”

“비서가 된다고 기존 업무에서 제외되는 게 아니야. 같이 병행해야 한다는 뜻이지. 한 사장님이 원하는 건 기획 MD 겸 비서 역할을 할 직원이고. 그런데 한창 바쁜 우리 회사에서 지금, 한가한 MD가 제아 씨 말고 더 있나?”

무릎 위에 있는 제아의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한가하고 싶어서 한가한 게 아니었다. 직속 상사가 잘리고, 부서에서 사수를 정해주지 않아서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는 게 올바른 표현이었다.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깨문 제아의 반응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김 부장은 말을 이었다.

“모나무흐야 누가 팔아도 잘 팔릴 상품이었으니, 우쭐할 필요는 없어. 뭐 그래도 성공은 했으니 내가 자넬 비서로 뽑아도 트집 잡힐 건 없지.”

“죄송하지만 부장님, 저는 그냥 이대로 있는 게 좋습니다.”

“자네 지금, 특별비서 자리를 거절하겠다는 건가?”

“거절이 아니라 능력이 안 돼서 다른 직원에게 양보를 하려는 거예요.”

제아의 거절은 생각도 못한지라 김 부장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럼, 사표를 제출하든지.”

“예? 사, 사표라니요?”

“할 일 없이 놀고 있는 직원에게 업무를 줬는데도 거절했으니, 그건 당연히 사표감 아닌가?”

너무 기가 막혀 제아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사표를 김 부장의 얼굴에 던져 버리고 나와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회사를 그만두면 안 되는 수많은 이유가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중 하나엔 도준의 빚도 해당이 되었다.

그녀는 그제야 어젯밤 도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빚, 나한테 모두 없애달라고 말이야.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그냥 없애달라고 할걸 그랬나?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잠깐뿐이었다.

자존심을 세우는 건 이상일 뿐, 지금은 지독한 현실을 헤쳐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비록 지금은 돈 앞에서 그 자존심을 잠시 접어야 하지만, 거만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김 부장을 바라보며 그녀는 마음속으로 선언했다.

‘저 얼굴에 당당히 사표 던지고, 내 발로 걸어 나가고 말 거야.’

제아는 그렇게 다짐하면서 고집이고 자존심이고 과감하게 꺾어버렸다.

“사장님 특별비서…… 할게요. 제가 잠시 겁을 먹어서.”

“진작 그랬어야지.”

“단기로 하는 거…… 맞죠?”

“그거야 제아 씨 능력에 달렸지. 공식적으로 업무가 추가되는 거라 월급도 30% 이상 인상될 거네.”

“월급도 오른다구요?”

“그럼, 그것도 다 내가 힘을 써준 덕분이지.”

‘월급 인상’이란 말에 눈이 커지는 제아를 바라보는 김 부장의 얼굴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월급 인상 건은 인호가 지시를 내렸을 때 진작 책정이 되어서 나온 조건이었지만, 김 부장은 자신이 인심이라도 쓴 것처럼 생색을 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네.”

“감사……합니다.”

하나도 고맙지 않았지만, 우선은 눈치라는 게 있기에 제아는 마지못한 척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했다.

“그래서 말인데.”

그런데 갑자기 김 부장이 은근히 몸을 기울여왔다.

그 은근한 눈빛과 미소가 소름이 돋아 제아는 옆으로 슬슬 의자를 움직였지만, 두툼한 그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 위에 안착을 했다.

“앞으로 내가 종종 제아 씨를 불러서 이것저것 물어볼 거야. 대답만 잘해주면, 내가 사장 비서 노릇이 끝나도 제일 어패럴 내에서의 입지, 튼튼하게 굳혀주지.”

제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니까 김 부장 말은, 지금 나보고…… 오빠의 스파이를 하라는 거야?

***

―사장님은 다음 주 정도에 오실 예정이에요. USB 안에 있는 자료 파워포인트로 정리하고 그 내용도 파악해놓으라고 하셨어요.

제아가 특별 비서로 뽑힌 게 못마땅한지, USB를 건네는 여비서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나도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니거든요? 마음 같아선 그 여비서에게 확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제아는 가까스로 참았다.

그리고 벌써 5일째, 야근도 모자라 점심시간까지 반납하며 제아는 USB 안의 자료들을 컴퓨터로 작업하는 중이었다.

내용은 왜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지, 양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일주일 안에 방대한 양을 끝내기 위해선 힘들게 구한 아르바이트마저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니 제아는 도준이 돌아온 이후의 일상을 조곤조곤 되짚어보았다.

수많은 생각들이 났지만, 정확한 건 그가 돌아온 이후로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는 것.

어마어마한 빚이 생기질 않나, 적금 통장을 빼앗기질 않나, 운동복 차림에 영화를 보러 가질 않나. 게다가 성격에 맞지도 않는 비서에, 팔자에도 없는 스파이 노릇까지!

스파이 노릇을 하라는 김 부장의 말에 우선은 알았다고 하고 회의실을 나오긴 했지만, 그녀는 도준의 비서 노릇도, 김 부장의 스파이 노릇도 절대 할 생각이 없었다.

내 인생이 팍팍해 죽겠는데!

어쩌면 도준이 먼저 비서 채용 건을 취소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공과 사는 정확히 구분하는 도준이니, 능력 있는 여비서를 뽑고 싶은 욕심은 당연할 테니까.

점심을 굶어서인지 배에서 슬슬 배고프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주린 배를 달래줄 복숭아 사탕을 까서 입에 넣으려는 순간, 그녀의 뒤에서 검은 팔이 슥 튀어나왔다.

“서식이 틀렸어.”

닿을 듯 말 듯 백허그를 한 팔에 몸이 갇히고, 길고 새하얀 손가락이 그녀 대신 능숙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제아의 얼굴 옆으로 스윽, 나타난 도준의 얼굴.

꼼짝없이 그의 품안에 갇힌 제아는 얼음이 되어 그와 함께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긴장하지 마. 닿지 않았으니까.”

나른하게 귀를 쓸어내리는 부드러운 음성과 콧속으로 스며드는 익숙한 향에 제아의 오감이 바짝 곤두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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