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왜 자꾸, 입술이 내려오는 것 같지?
2016.10.24.
목 깊숙한 곳에서 으르렁거리듯 토해내는 도준의 목소리가 이상했는지, 품에 안긴 제아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가 뭘 꿈틀거린……?”
하지만 고개를 든 순간 제아는 숨이 탁, 막혀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하필이면 도준은 왜, 바짝 끌어안은 자세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건지.
치켜뜬 속눈썹 끝에 도준의 붉은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미, 미치겠네!’
고개를 내리면 그만인 것을, 이상하게도 단순한 고개의 움직임 하나마저 제아는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리게 하는 도준의 뜨거운 숨결과 내리깐 눈에서 농밀하게 흘러나오는 짙은 색기에 온몸이 꽁꽁 묶여버린 기분이었다.
그래서 제아는 간절히 바랐다.
‘제발, 고개 좀 들어줘, 오빠!’
제아의 간절한 바람을 알 리 없는 도준은 그 나름대로 심각한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하필이면 왜 이때 고개를 들어서 묘한 각도에서 시선이 얽혀버렸는지,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면서 그의 입술을 감질나게 간질이는지.
고개를 들면 그만인 것을, 고양이처럼 끝이 살짝 올라간 눈이 그의 온몸을 꽁꽁 옭아매버렸다.
입술의 각도를 조금만 틀면 닿을, 미치도록 그리워했던 복숭아 사탕과의 거리는 단 10센티미터.
강한 박동을 하고 있던 심장이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순진한 듯 요염함을 머금은 갈색 눈동자.
닿은 눈빛만으로도 그는 이성이 송두리째 뽑힐 정도로 강렬한 유혹을 느끼고 있었다.
‘문제아, 고개를 내려.’
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제아는 바짝 타오르는 긴장감에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축였다.
집어삼킬 듯 내려다보는 도준의 짙은 눈빛에 그녀 자신도 모르게 나와 버린 버릇이었다.
하지만 꿈에도 몰랐다. 그 버릇이, 먹고 싶은 사탕을 눈앞에 둔 남자의 마음에 확, 불을 지피는지 말이다.
앙증맞은 혀의 부드러운 움직임에, 촉촉이 젖은 채 달달한 향기를 흘리는 입술의 미세한 벌어짐에 도준의 눈에서 강렬한 섬광이 번쩍, 했다.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제아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도준의 심장 박동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것 같았으니까.
덩달아서 그녀의 심장도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머릿속은 점점 하얘지고, 자꾸만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이게 된다.
게다가 이젠 몹쓸 눈에 착시현상까지 일어나는 것 같았다.
왜 오빠 입술이 자꾸, 내려오는 것 같지?
그 생각만으로도 그녀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달뜬 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얇은 살결 위를 뜨거운 무언가가 간질이듯 순식간에 훑고 지나갔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묘한 기대감에 사로잡힌 제아는 그만 두 눈을 감아버렸다.
‘난 몰라!’
“왈! 왈왈왈!”
시끄러운 개 짖는 소리에 제아가 다시 눈을 뜨는 순간, 커다란 흰 개 한 마리가 와락 달려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아닌 도준을 향해서.
당황스러운 건 도준도 마찬가지였다.
복숭아 사탕이 아닌, 개의 축축한 혀가 그의 얼굴과 입술에 닿았으니.
도준이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그를 알아본 벼룩이의 뽀뽀 세례는 끝이 없었다.
“이놈의 자식! 벼룩아, 어디 갔니?”
덩달아 윤영의 목소리까지 들리자, 제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맙소사, 나 눈은 왜 감은 거야!
하지만 그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도준을 알아보고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벼룩이의 목줄을 간신히 휘어잡은 제아는 앞으로 뛰어나갔다.
윤영이 오기 전에 먼저 자진 납세해야 엄마와 오빠가 만날 일은 없을 테니.
아슬한 타이밍으로 윤영이 수거함 쪽으로 오기 전에 제아는 그 앞을 막아섰다.
“짜잔! 나야, 엄마!”
“제아 넌 아침부터 그 차림으로 나가더니, 거긴 왜 숨어 있어?”
“치, 친구들 좀 만나고 왔어. 벼룩이 보고 숨바꼭질 좀 해볼 랬더니, 우리 벼룩이 아직 죽지 않았네! 바로 나를 찾아냈어! 기특한 것! 아고, 기특해! 우리 할마마마 벼룩이!”
제아는 몸을 숙여 고마운 벼룩이의 얼굴과 목덜미를 거칠게 어루만져 주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벼룩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 이후의 일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다행히도 도준은 잘 숨어 있었다.
그제야 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얼른 윤영에게 팔짱을 꼈다.
“엄마, 나 배고파. 밥 먹자!”
“나갔으면 밥도 먹고 올 것이지, 귀찮게.”
말과 달리 윤영은 곱게 눈을 흘기며 별 의심 없이 제아와 함께 몸을 틀어 집으로 향했다.
애틋한 두 모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도준은 천천히 일어났다.
그래도 똥개라고 그가 괴롭혔던 벼룩이만은 그를 잊지 않고 있었다. 너무 격하게 반겨서 탈이었지만.
도준은 재킷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오늘 취소된 스케줄 때문에 골치 아프게 생겼지만, 조금의 후회도 없었다.
오늘 완벽하게, 제아의 경계심이 무너졌으니까.
자신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각도를 틀어버린 입술.
그런데 제아는 그의 입술을 피하기는커녕 기다렸다는 듯 눈을 감았다.
10년 전과 달리 두려워하지도, 겁을 먹지도 않은 채 말이다.
아주 조금씩, 그녀 자신도 모르게 제아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도준은 주머니에서 꺼낸 담배에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새하얀 연기가 새어 나왔다.
한차례 비를 쏟아낼 듯 어둑해진 하늘로 연기가 올라가는 걸 보는 도준의 입에서 나직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담배 끊을 날도 멀지 않았군.”
***
제일 어패럴에 있던 한태영 부회장의 수족들이 한 명씩 사라지고 있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게 트집을 잡아서 쫓아내버리니 속수무책이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김 부장 자신이었다.
지금까지 그를 이 자리까지 올려놓은 ‘아부’라는 게 먹히지 않는 상황이 드디어 온 것이다.
꼬장꼬장한 한도준 사장과 유인호 실장 때문에 말이다.
일주일 전 강훈과의 통화 내용을 떠올리는 제일 어패럴 인사과 김 부장의 반들반들한 이마에 식은땀이 배였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한 사장님 비서 채용은 유 실장이 직접 한다고 해서 손을 쓰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제대로 뽑아서 보냈어야 할 거 아니야!
―이사님, 지금까지 비서실로 보낸 이들은 학벌, 스펙, 외모까지 모두 완벽합니다. 그런데도 보내는 족족 사장님과 유 실장이 끝끝내 트집을 잡아서 내쳐버리니 저도 아주 죽을 맛이었습니다!
‘돈은 돈대로 다 깨졌단 말입니다!’라는 말까지 김 부장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럼 한 사장 쪽에서 채용한 비서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든지.
―그건 아무래도 무리가…….
―그럼 도대체, 김 부장이 하는 일이 뭐지?
―예?
―그런 일 하라고 인사과에 널 앉혀놓은 거야. 그 정도 능력도 없으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지.
그 통화 이후 김 부장은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가장 밑에 있는, 제일 어패럴에서 내쳐진 사람들이 지금 어떤 꼴로 지내고 있는지 떠오르자 그는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제일 어패럴에서 내쳐지는 순간 한 부회장에게도 버림을 받는 거나 마찬가지여서 그는 어떻게든지 공을 세워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그런데 하늘은 아직 그를 버리지 않았나 보다.
미국 출장을 가기 전 인호가 그에게 특별 비서를 채용하는 일을 맡기고 간 것이다.
―MD 겸 비서 역할을 수행할 한 사장님 단기 특별비서, 회사 내에서 채용해서 보고하세요.
―제, 제가요?
그렇지 않아도 다음에 이루어질 인사 조정 명단에 김 부장 자신이 있을까 봐 조마조마했었는데.
자신에게 일을 맡기는 걸 보면, 아직 도준 쪽에서 그가 한 부회장 쪽 사람이란 걸 모르는 게 분명했다.
―포인트를 주자면 야근도 좋아하고 체력까지 좋은 여직원으로 부탁합니다. 막 부려먹을 수 있는 여비서를 뽑아 올리는 건 어렵지 않겠죠?
―막 부려먹을 수 있는 여비서라고 하면…….
―한 사장님 성격 알고 있으리라고 보는데. 출장 갈 때마다 일일이 비서와 헬퍼를 달고 다닐 수 없지 않습니까?
인호의 말인즉슨 비서 겸 헬퍼 역할을 수행할 비서를 뽑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깐깐한 도준의 뒤치다꺼리를 남자인 인호가 하는 것 또한 쉽지 않았으리라.
뭐, 결론은 중요하지 않은 비서 채용 건이라서 귀찮다는 듯 넘긴 거겠지만, 김 부장으로선 이번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이번에 밀어 넣어야 해.”
이 기회마저 놓쳐버리면, 도준 쪽에서 움직이기도 전에 강훈이 그를 내쳐버릴 게 분명했다.
여직원들의 이력서를 번뜩이는 눈으로 훑어보던 김 부장의 눈에 신청서 한 장이 눈에 띄었다.
-온라인 기획팀 문제아-
“그래, 이 여자야!”
김 부장은 옳거니 했다.
인호의 요구대로 야근도 자주 하고 본사보다 물류센터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내는 체력 좋은 여사원이었다.
게다가 모나무흐 기획전을 성공적으로 진행한 걸 보면 능력도 나쁘진 않을 테고.
MD 겸 비서라고 했으니 그 조건에도 해당됐다.
어떻게 이 여자를 내가 생각 못 하고 있었지?
김 부장이 제아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
다른 직원들이라면 따로 불러서 새로운 사장의 스파이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말해줘야 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자신의 편으로 넘어오면 상관없지만 후자라면 오히려 도준 쪽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꼴이었다.
한 부회장 쪽 사람이라는 게 도준 쪽에 탄로 나는 순간, 그 또한 버림받으리라.
하지만 문제아 이 여자라면……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할 필요가 없지.
김 부장의 눈이 야비하게 빛이 났다.
자칫 도준 편에 서서 그를 배신하려 한다면 알려줘야겠지. 내 뒤에 있는 사람이 바로 널 이 회사에 넣어주신 분이라고.
1년 전 귀찮은 듯 아무 부서에나 넣어주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한 걸 보면 강훈과 중요한 관계도 아닌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무시를 당하면서도 버티고 있는 걸 보면 오히려 그의 제안을 황공하게 받아들일 테고.
결국은 어떻게 봐도 인호의 조건에 충족이 되고 자신의 조건에도 부합되는,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여자라는 것.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김 부장은 제아의 신청서만 빼놓은 후 나머지 신청서들은 모조리 휴지통에 버려버렸다.
***
“수고하셨습니다!”
동네 편의점 알바생과 교대를 하자마자 제아는 빠른 동작으로 편의점 내부를 청소하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쓰레기통까지 매끈하게 광이 날 정도로 깨끗하게 닦고 나니,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그러자 다시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떠오르는 어떤 장면에 제아는 진열대에 있는 과자 봉지를 덥석 잡았다.
‘과자 봉지를 일일이 하나씩 닦아 봐?’
하지만 제아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몸을 바쁘게 해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이건 아니지 싶었다.
계산대에 풀썩 앉은 그녀는 푸석푸석한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감은 눈꺼풀이 무겁고 눈꼬리 끝이 시큼시큼했다.
이렇게 잠을 제대로 못 잔 게 벌써 며칠째인지.
눈만 감으면 미칠 듯이 아른거리고 터질 것처럼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존재는 바로…… 도준이었다.
별짓을 다했는데도, 그녀의 뇌와 심장에 각인이라도 되어버렸는지 도준을 지우는 건 불가능했다.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의 눈을 그렇게 가까이서 들여다봐서는 안 되는 거였다.
옅어졌다 짙어졌다, 묘한 빛을 머금은 그의 적갈색 눈동자의 매혹.
그 눈을 깊숙이 바라보는 순간 거부할 수 없는 마성의 유혹에 빠져버린다는 걸 왜 잊고 있었던 걸까.
처음 만난 순간부터 너무 무방비하게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횟수를 손가락으로 세어보려고 해도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로 말이다.
치명적으로 그 눈빛에 홀려버린 건 바로 그와 영화를 본 날, 키스하듯 묘한 각도에서 도준과 시선이 얽혀버린 그때가 분명했다.
“하아…….”
갑자기 제아의 입술 사이로 자포자기하는 듯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려워하면서 피했는데, 또다시 그에게 중독되고 있음을.
지금의 한도준은 옛날처럼 그녀가 온전하게 차지했던 오빠 이준이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지갑을 가져오는 게 아니었어!”
이 모든 것들의 발단은 분명 지갑이었다.
뒤늦게 성질을 벌컥 내보지만, 단단히 쌓아놓았던 그에 대한 경계는 이미 와르르 무너져버린 후였다.
무엇보다 지금 그녀를 가장 미치게 하는 건, 도준의 입술이 가까워질 때 키스라도 기다리는 것처럼 눈을 감아버렸다는 것.
묘한 기대감에 사로잡힌 몸이 반응을 해버렸다는 것.
그의 말대로 변하지 않은 건 없었다.
도준도, 그리고 그녀 자신도 이렇게나 변해버렸으니 말이다.
머리는 그를 오빠로 대하는데, 낯설어도 너무 낯설게, 멋있어도 너무 멋있게 변해버린 도준을 그녀의 몸은 남자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의 의지마저도 무시한 채 말이다.
‘나 점점, 미쳐가고 있는 것 같아.’
이젠 정말 도준을 피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행복했던 옛 추억을 못 잊고 오빠 노릇을 하려는 그를 피했다면, 지금부터는 흔들리는 그녀 자신을 위해서라도 피해야 한다.
이제 겨우 멀쩡해졌는데, 10년 전의 일이 또다시 반복된다면…… 더 이상 버텨낼 자신이 없으니까.
멍하니 편의점 밖을 내다보던 제아는 갑자기 계산대 밑으로 급하게 몸을 숨겼다.
그녀의 어머니인 윤영이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공원을 지나쳐야 하는 이 길을 윤영이 가뭄에 콩 나듯이 지나다닌다는 걸 알기에 이쪽 편의점으로 구한 건데, 대체 왜?
그런 제아의 눈에 들어온 건 바로 윤영이 잡고 있는 목줄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공원 산책을 시켰나 보다. 그렇게 공원 근처엔 가기도 싫어하더니.
“우리 할마마마 벼룩이.”
벼룩이는 그녀에게 인생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벼룩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제아는 그 후의 일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정말 복잡하게 꼬여버렸을 그녀의 인생은 아주 암담했을 테니까.
윤영과 벼룩이가 사라진 후에야 제아는 계산대 위로 빼꼼히 내민 고개를 틀었다.
그런 그녀의 눈앞을 가득 채운 건 고급스러운 슈트의 일부분과 계산대를 짚고 있는 매끈하게 빠진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었다.
‘손가락이 예뻐도…… 너무 예쁘잖아.’
좀 더 위로 시선을 올리니 새하얀 옷깃에 매달린 고급스러운 커프스단추가 보이고, 아주 비싸 보이는 손목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기억이 맞는다면 잡지에서 봤던 저 시계의 브랜드가 파텍 필립이라고 몇천만 원하는 것 같은데.
계산대 위로 고개만 내민 채, 제아는 그저 큰 눈을 깜빡이면서 생각했다.
근데 저 비싼 시계가 우리 동네, 그것도 외진 곳에 있는 편의점에 나타난 이유가 뭘까.
비싼 시계와 아름다운 손가락의 실루엣에 홀린 그녀는 잠시 자신의 처지를 잊고 있었다.
기다리기 지루했는지 아름다운 손가락이 계산대를 툭툭, 일정하게 두드렸다.
톡, 톡톡톡, 톡, 톡톡톡, 톡, 톡톡톡.
그 소리는 홀려 있던 제아의 마음에 확, 찬물을 끼얹었다.
이 소리, 설마?
그제야 깜짝 놀라 번쩍 몸을 일으킨 그녀 앞으로 스윽 다가온 도준의 상체가 계산대를 넘어왔다.
나른함이 감도는 적갈색 눈동자가 마성의 유혹을 철철 흘리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놀랄 틈도 없었다.
또다시 무방비하게 쳐들어오는 그의 눈동자 공격에 제아는 한껏 놀라 몸을 뒤로 빼며 얼른 손으로 시야를 가렸다.
훠이, 훠이, 저리 물러나라! 악마의 눈동자야!
“저, 저리 가!”
손까지 들어 그를 향한 시야를 완전히 차단해버린 제아의 행동에 도준의 눈살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경계심이 무너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출장을 떠나야 할 정도로 일정이 빡빡한 도준이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로 이어지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가까스로 소화하고 있었다.
그래도 잠깐의 휴식을 포기하고 여기로 달려오는 동안 제아가 그를 반겨주지 않을까 기대감에 설레기까지 했는데. 그런데 그 기대감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말보로 레드, 한 갑.”
그의 눈빛처럼 나른함에 풍덩 빠졌다 나온 낮게 깔린 음성이 매혹적으로 제아의 귀를 두드렸다.
무슨 담배 주문도 이렇게 섹시하게 하는 건데.
그와 눈만 마주치지 않으면, 그의 얼굴만 보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다니,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시야는 막혔지만 들리는 음성만으로도, 은은하게 코를 자극하는 체향만으로도 제아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맙소사!
“4,500원……입니다.”
내리깐 시야로 쓱 들어오는 새하얀 수표 한 장.
10만 원도 아니고 100만 원권 수표를 보자마자 발끈한 제아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들었다.
“만 원도 없……?”
그 순간 딱, 도준과 눈이 마주쳐버렸다.
기다렸다는 듯, 부드럽게 휘어진 도준의 눈이 제아의 눈 깊숙이 파고들었다.
“대화는, 이렇게 하는 거야.”
“무슨…… 말이야?”
“사람의 눈을 보고해야 한다는 뜻이지.”
그제야 도준은 수표를 다시 넣고 만 원권을 내밀었다.
그의 말뜻을 알아차린 제아의 새하얀 뺨에 발그레한 기운이 감돌았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설마 나한테 사람 붙이고 그런 건 아니지?”
최악의 상황만 아니라면 사람 붙이는 짓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도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가 제아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다는 것, 그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더러워지니까.
“소고기 값으로 우연히 얻은 정보라고 해두지.”
“소고기 값? ……양정화? 그때 정화가 말해줬구나?”
돼지 껍데기로 시작해서 소고기로 끝났던 동창회 모임.
그녀가 화장실을 간 사이 정화 고것이 도준에게 술술 분 게 분명했다.
“친구 말로는 네가 갖고 싶은 게 있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거라고 하던데.”
제아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도준에게 잔돈을 거슬러주었다.
그 잔돈을 옆에 있는 불우 이웃 돕기 모금함에 넣은 도준이 다시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면, 나한테 빚 갚으려고 하는 건가?”
편의점에 있는 제아를 본 순간 도준은 씁쓸함을 느꼈다.
잠도 많은 그녀가 잠까지 줄여가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걸 보려고 빚이라는 명목으로 그녀를 옭아맨 게 아니었으니까.
“내 월급, 우리 엄마가 남은 빚 갚는다고 다 가져가. 아르바이트라도 하지 않으면 오빠한테 진 빚, 몇 년이 흘러도 못 갚는단 말이야.”
‘그 빚, 내가 다 갚아줬잖아.’
도준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힘겹게 삼켰다.
“1년이면 알아서 사라질 빚인데, 무리해서 아르바이트까지 하는 걸 보면.”
‘나는 너에게 조금이라도 다가가려고 치졸한 몸부림까지 치는데.’
“나한테서 일분일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나 보지?”
‘너는 왜 그렇게까지 도망가려고 하는 거지?’
얼어붙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그의 음성도 냉랭했다.
“빚은 빚이잖아! 얼른 갚아버려야 속이 편하지!”
‘빚을 갚고 오빠한테서 얼른 벗어나야 고장 난 내 심장이 원래대로 돌아온단 말이야!’
하지만 제아 또한 차마 입 밖으로 뱉어낼 수 없는 말이었다.
그나저나 눈을 피하면 입술이 눈에 들어오고, 입술을 피하면 눈이 마주치고…….
나른한 눈빛으로 입술을 내리던 그때의 도준이 떠올라서 제아는 미칠 것만 같았다.
“여기도 엄연히 내 직장이거든? 할 말 있으면 내일 회사에서 하든지 해.”
“출장 가기 전에 잠깐 들른 거야. 얼굴이나 볼까 하고.”
‘미치도록, 보고 싶어서. 잠깐이라도 보지 않으면, 숨조차 쉬기 힘들어서.’
그런데도 제아는 그를 밀어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도준의 눈이 피곤한 듯 제아의 눈가에 드리워진 그늘을 더듬었다가 핼쑥해져 있는 복숭앗빛 뺨에 닿았다.
“문제아, 빚 갚는 게 힘들면 차라리 말해.”
계산대 위로 스윽 넘어온 그의 상체, 짙게 가라앉은 도준의 눈빛이 서서히 제아에게 다시 기울어졌다.
“그 빚, 나한테 모두 없애달라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