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나도 안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정상적인 남자야.
2016.10.20.
벗어나려고 품에서 꿈틀거리는 따스하고 보드라운 몸을 도준은 더욱더 꼭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푹 파묻은 채 제아는 잘도 종알거렸다.
“약속 잊었어? 난 안아달라고 한 적 없어! 그러니까 얼른 놔줘!”
제아의 말대로 안아달라고 하진 않았다. 단지, 그가 안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을 뿐이지.
이렇게 사랑스럽게 나를 조련하는데, 어떻게 안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차가운 마음에 적셔지고 적셔지는 따스한 온기에 그는 그저 행복했다.
유일하게 그를 웃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드는 품안의 존재 때문에.
“내 지갑, 너 때문에 또 열렸으니까.”
향긋한 머스크향이 나는 제아의 정수리에 그는 코를 푹 파묻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이번 한 번만 봐줘, 문제아.”
***
영화관 로비에서 도준은 오빠로서 깊은 포옹을 한 거겠지만, 품에 안겼던 제아는 지금 기분이 복잡 미묘했다.
심장은 기분 좋을 정도로 잔잔한 두근거림을 전하고.
그래서 조금은 쑥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제아는 도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물론 그녀만 이렇게 신경 쓸 뿐, 허락 없이 포옹을 해서 신경 쓰이게 한 당사자는 지극히 태연하게 영화관 안, 그녀의 옆에 앉아 있었다.
잘생긴 그의 옆모습을 힐긋 훔쳐본 제아는 생각했다.
‘오빠도…… 그때가 그리운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눈빛으로 와락 끌어안을 이유가 없었다.
인생은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 있듯이, 그가 악착같이 오빠 노릇을 하려는 게 책임감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풍족한 지금 상황에선 절대 느낄 수 없는 옛날의 소박한 행복이 그리워서일지도 몰랐다.
깊은 상념에 빠져 있다가 영화가 시작되는 소리에 대형 스크린으로 무심코 시선을 돌린 제아에게서 갑자기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에, 에취이! 에취이이!”
먼지 알레르기였다면 ‘콜록콜록’ 기침 같은 재채기가 터져 나왔으리라.
하지만 지금 그녀의 입술 사이로 나오는 건 순수한 재채기였다.
무척 당황했을 때나 머릿속에 뭔가 엉큼한 장면이 떠올랐을 때 나오는 제아만의 비밀스러운 버릇이기도 했다. 물론 ‘콜록콜록’과 ‘에취’의 미묘한 차이를 그녀만의 방식대로 해석하자면 말이다.
다행히도 무척이나 비밀스럽고 은밀한 버릇이었기에 이것만큼은 절대 도준도 모를 거라 생각하니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흠, 에취이! 흠흠! 에, 에취이!”
진정을 하려고 해도 대형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야한 장면이 집어삼킬 듯 덮쳐오니 그녀의 재채기는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반나체인 모습으로 엉겨 붙어 진하게 키스를 하는 주인공들의 연기에 제아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어쩐지 제목이 이상하다 했어.
옆얼굴이 따가워서 살짝 고개를 트니, 도준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장면이 나오는데도 옅은 어둠 속 도준의 얼굴은 여전히 포커페이스였다.
맙소사! 방금 봤던 장면의 남자 주인공 얼굴이 도준의 얼굴로 서서히 체인지 되고 있었다.
그래,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왜, 왜! 여주인공 얼굴마저 내 얼굴로 바뀌어가는 거지?
그 순간, 잠시 멈추었던 재채기가 이젠 미친 듯이 그녀의 입 밖으로 밀려나왔다.
“에, 에취이! 에취, 에취!”
도준이 말없이 손수건을 내밀자 제아는 얼른 손수건을 받아들어 코를 막았다.
손수건에 배인 산뜻하고 청량한 그의 체취가 콧속으로 스며들자 다행히도 야한 장면으로 꽉 차 있던 머릿속이 정리가 되면서 재채기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제야 도준이 입을 열었다.
“네가 볼 영화는 아닌 것 같은데, 나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당장 나가야 한다! 아니,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를 어린애 취급하는 도준의 표정과 어투에 제아는 쓸데없는 오기를 부려 버렸다.
“이미 입장해서 환불도 안 되는데 그냥 봐. 그리고 나, 이제 이런 거 볼 줄 알거든?”
고집스럽게 턱을 치켜드는 제아를 도준이 묘한 눈빛으로 잠시 바라보았다.
“재채기, 멈추었군.”
“……뭐?”
“그럼, 그러든지.”
뭐, 뭐야? 이 의미심장한 말투는.
꼭 그녀가 재채기를 하는 이유를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도준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설마 그럴 리가.
고개를 내저은 제아는 영화관이 어둡다는 걸 감사하게 여기며 태연한 척 말했다.
“오빠가 예약했잖아. 그럼 보고 싶어서 한 거 아니야? 오랜만에 보고 싶은 영화가, 이런 장르인 줄은 미처 몰랐어.”
천하의 한도준도 야한 거 좋아하는, 정상적인 남자구나라고 제아는 지금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유 실장이 했어.”
덤덤히 흘러나온 도준의 대답과 함께 다시 한 번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좀 더 수위가 높아진 장면에 제아는 얼른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다.
도저히, 안 되겠어!
“아…… 그, 그래? 그럼 우리 그냥 나갈까……?”
“그냥 보지.”
“……?”
“나야 어떤 장르이건, 상관없으니까.”
“그, 그래! 그럼, 그러지…… 뭐. 나도 이제 이런 거…… 잘 보거든.”
혼자서 어른인 것처럼 태연하게 말을 하는 도준의 모습에 발끈한 제아는 들썩이는 엉덩이를 좌석에 다시 착석시켰다.
하지만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오기 부린 걸 절실하게 후회했다.
키스 신이 다일 줄 알았더니, 스크린을 온통 채우는 진한 베드신이 시각을 후끈하게 자극하고, 끈적이게 얽히는 주인공들의 숨소리가 아찔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태연한 척해 보지만, 처음 보는 농밀한 19금 장면에 그녀는 자꾸만 숨소리가 커지고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에에…… 취이!”
근질거리는 코가 재채기를 토해내려 할 때마다 제아는 얼른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다.
VIP 관인만큼 좌석 수는 적었지만 모두 커플들이었다.
진한 베드신 연출에 좌석이 꽤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자들의 거친 숨소리가 생생하게 귀를 파고들자, 정말 미칠 것 같았다.
꼭 붙어 앉아 있는 커플들이 있는가 하면, 스크린에서 눈을 못 떼는 남자의 눈을 가리는 여자와 침을 꼴깍 삼키며 스크린 안으로 들어갈 것처럼 몸을 앞으로 숙이는 남자까지…….
반응은 가지각색이었지만, 모두 미모가 뛰어난 여배우의 노출 장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옆에 있는 이 남자 보소! 뒤척이기는커녕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미국에서 10년 있었다더니, 이제 이 정도는 시시하다 이건가!
순간 도준이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세상 모든 남자는 늑대야.
이 아메리칸 늑대 같으니라고!
고양이 눈을 한껏 앙칼지게 치켜뜨고 도준을 향해 몸을 홱 트는 순간, 제아의 어깨 위로 스르륵 기분 좋은 무게감이 내려앉았다.
“뭐, 뭐 하는 거야?”
제아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도준이 반쯤 감긴 나른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녀의 심장은 다시금 뛰기 시작했다.
“어깨 좀 빌려줘.”
“……?”
“이틀 내내, 한숨도 못 잤거든.”
그때 장면이 바뀌어 환해진 스크린의 조명이 도준의 섬세한 얼굴을 비추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피가 바짝 몰린 그의 눈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제야 공원에서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밤새워서 인호가 대신 처리해줄 업무를 준비해줬다는 그의 말.
결국 또, 이 터질 듯이 핏발 선 눈도…… 내 탓이라는 거네. 휴우…….
“영화 보는…… 동안만이야.”
못 이기는 척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리며 제아는 그에게 어깨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방비한 손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서늘한 손의 감촉.
“손은 허락한 적 없……?”
발끈하며 다시 고개를 틀었을 때, 도준은 제아의 손에 꼭 깍지를 낀 채 이미 눈을 감은 후였다.
그답지 않게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며 제아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영화를 보려는 게 아니라…….
“또 자러 온 거였어.”
제아의 입술 사이로, 체념 어린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영화 보러 가자는 말에 아주 조금, 은근히 설레기까지 했는데.
갑자기 피식,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옛날에도 그러더니, 또 보기 좋게…… 당한 것이다!
그때도…… 이렇게 설렜었는데.
제아의 입에선 더 이상 재채기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야한 장면이 아닌,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던 작은 기억의 편린을 꺼내어 가만히 회상하는 중이었다.
시험 기간 내내 밤을 지새우며 공부를 하는 이준을 못 본 지 2주일째 됐을 때였을 것이다.
아무리 오빠가 보고 싶어도 시험이 있을 때면 그녀라도 이준을 건드릴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시험이 끝나는 날, 공원 입구 벤치에 앉아 이 길을 지나칠 오빠를 기다리는 것뿐.
그런데 그녀가 벤치에 앉아 아무리 기다려도 이준은 나타나지 않았다.
‘뭐야, 시험 끝났다고 친구들이랑 놀러 간 거야?’
괜히 서운한 마음에 투덜거리며 일어나려는 순간, 제아의 눈앞에 그가 서 있었다.
멋진 교복을 입고 웃음을 머금은 채 이준은 매혹적인 눈동자로 지그시 바라보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문제아, 오빠랑 영화 보러 갈까.
그 손을 잡았을 때, 내가 얼마나 설렜는지 오빤 절대 모를 거야.
제아는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잠이 든 도준을 내려다보면서 생각했다.
물론 그와 처음으로 영화를 보러 갔던 그때도, 설렘은 잠시뿐이었다.
영화관에 들어가기 무섭게 그는 지금처럼 제아의 어깨를 베고 손을 꼭 잡은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으니까.
그때 그가 왜 그랬는지 제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그는, 제아 자신의 곁이 아니면 절대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없는 문이준이었으니까.
애틋한 남매 사이라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엄연한 남이었기에 그녀의 부모님은 둘의 스킨십에 유난히도 민감한 반응을 보였었다.
깊이 잠이 든 그의 얼굴 가까이 고개를 숙인 제아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한도준 씨, 나도 이번만…… 봐주는 거야.”
드디어 곤욕과도 같았던 길고 긴 영화가 끝이 났다.
모든 커플들이 나가고 제아와 도준이 마지막으로 일어났을 때 환한 불이 들어오고 청소부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아주머니는 제아를 발견하곤 활짝 웃으며 다가오더니 손을 덥석 잡았다.
“아이구, 아가씨! 미처 고맙다는 인사도 못 했어요, 내가.”
아주머니는 제아의 옆에 장승처럼 버티고 있는 도준을 힐끔 바라보기는 했지만, 무서운지 말을 붙이진 않았다.
“아니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는데요.”
“요즘 그런 젊은이들이 흔하나? 다 나 몰라라 하지. 내가 줄 게 이것밖에 없네. 이거라도 가져가요, 응?”
아주머니는 제아의 손에 따스한 캔 커피를 하나 쥐여 주었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 그녀였지만 거절하면 아주머니가 민망해할까 봐 활짝 웃으며 받았다.
“잘 먹겠습니다!”
영화관을 나오자마자 제아는 캔 커피를 도준에게 내밀었다.
“도와준 건 오빠니까, 이거 오빠 거야.”
‘난 일만 크게 벌렸지.’
속으로 중얼거린 제아는 다시 캔 커피를 내밀었지만 도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난 널 도왔을 뿐이야.”
“……?”
“모르는 사람 일에 끼어들 만큼, 난 오지랖이 넓지 않거든.”
제아는 괜히 무뚝뚝하게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도준의 뒤를 쪼르르 쫓아가면서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그 남자한테 준 돈, 설마 갚으라고 할 건 아니지?”
“갚으라고 하면, 갚긴 할 건가?”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야무지게 대답한 제아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미소를 지었다.
꼭꼭 잠가놓았던 마음의 빗장이 그를 향해 조금은 열렸다고 해야 할까.
이번에도 그녀는 사고만 쳤을 뿐이고, 또 지갑을 열어서 도와준 건 도준이었으니까.
자꾸 그에게 미안한 일들만 생기니, 제아는 더 이상 사과를 미룰 수가 없었다.
“미안해. 다시는…….”
순간 도준이 몸을 틀어 상체를 숙여오는 바람에 제아는 놀란 나머지 입을 꾹, 다물었다.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 다신 하지 마.”
경고와도 같은 그의 나직한 음성이 주는 보이지 않는 압박에 제아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여버리고 말았다.
매혹적인 마성의 눈동자로 깊숙이 부딪혀오며 말하는데, 어떤 여자가 감히 거부할까.
얌전한 고양이처럼 말 잘 듣는 제아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도준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지랖 넓은 건 여전해, 문제아.”
사랑스러운 내 복숭아 사탕 같으니라고.
***
하루 종일 제아와 함께 있으려고 했던 도준의 계획은 끊임없이 걸려오는 인호의 전화 때문에 결국은 틀어져버렸다.
업무 능력이 뛰어난 인호가 전화를 계속할 정도라면,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라는 것. 그랬기에 더 이상은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동네 입구에 다다른 도준의 차가 멈추자마자 튕기듯이 차문을 열고 내리는 제아의 뒤를 도준이 따라 내렸다.
“마트 앞 골목까지만 데려다줄게.”
“얼른 가봐야 하잖아! 괜히 나 때문에, 미…….”
순간 제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불과 30분 전에 도준이 절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던 게 떠올라서.
그리고 어차피 그녀가 아무리 싫다고 해봤자, 고집불통 한도준이 마음먹은 이상 어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골목까지만이야.”
휙 돌아서서 걷는 제아의 바로 옆에 도준이 어느새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었다.
그녀와 보폭을 맞추느라 느릿하게 걷는 그의 발을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참 묘했다.
제아는 시선을 좀 더 들어서 도준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잘 자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훌륭하고 완벽하게 변했을 줄이야.
얼굴도, 몸매도, 기럭지도, 능력도. 이제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는 남자가 되었다.
무엇보다 그의 매력의 정점은 바로 분위기였다.
가만히 있어도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묘하면서도 신비한 분위기가 그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자유분방한 미국에서 10년 있었는데, 연애도 많이 해봤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묘하게 마음에 걸리는 건, 이렇게 완벽한 남자가 아는 여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성격상 입을 다물었으면 다물었지, 거짓말은 절대 못 하는 걸 아는데.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극히 정상적인 남자라면 눈을 못 뗄 그 영화를 보지도 않고 잠을 잔 것도 조금…… 그렇고.
설마……?
궁금한 건 또 절대 못 참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도준이 걱정이 되기도 한 제아는 이쯤 되니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놓고 물어보긴 좀 그러니까…….
“오빠, 연애해봤어?”
“그러는 넌, 연애를 해봤나 보지?”
하지만 대답은커녕 도준이 그 질문을 다시 돌려버리자 제아는 그를 찌릿, 노려보았다.
연애를 해봤냐고 묻는 건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귀에는 ‘너도 연애 안 해봤잖아.’라고 들렸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내 뒷조사, 했지?”
“너야말로 그냥 인정하지 그래. 연애 안 해본 게 창피한 일은 아니니까.”
“……!”
“애꿎은 사람 의심하지 말고.”
되로 주고 말로 받은 느낌에 제아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진짜 무슨 남자가 말을 저리 잘하는지, 도무지 이길 수가 없다!
“내, 내가 언제 창피해했다고 그래? 나, 연애 안 해봤어! 됐어? 근데 난 못 한 게 아니라 안한 거거든?”
제아는 자신도 모르게 실토하고 말았다. 역시 말로 그를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결국은 도준의 대답은 듣지도 못하고 연애 안 한 자신의 과거만 밝히고 말았다.
단단히 토라져서 앞만 보고 걷는 제아의 귀로 도준의 음성이 들렸다.
“물어보는 의도가 뭔데.”
분명 분위기로 보건대 물어보면 다 대답해줄 것 같은데…….
제아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이걸 말을 해, 말아? 어찌 보면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기도 한데.
고민하느라 침묵하는 제아의 모습에 조금 초조했는지, 도준이 나지막하게 과거를 실토했다.
“나도 연애 안 해봤어.”
“…….”
“그러니까 화 풀어.”
10년 만에 해보는 그 말이 어색한지 도준의 음성은 책 읽듯이 대본을 말하는 아마추어 배우 같았다.
그 모습에 제아는 속으로 슬그머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화난 건 아닌데…… 천하의 문이준, 아니 한도준 님께서 이렇게 쩔쩔매시다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당당하게 물어보자. 이건 정말 순수하게, 한때 오빠였던 그가 걱정돼서 확인하려는 거니까.
“아는 여자도 한 명도 없고, 그런 영화를 보고도 쿨쿨 잘만 자고. 그리고 연애도 한 번도 안 해봤고.”
여기까지는 순순히 말을 잘했는데, 그다음이 문제였다.
하지만 도저히 묻기가 민망해서 머뭇거리는 제아를 채근한 건 도준이었다.
“그래서.”
“그러니까…… 혹시, 몸에 이상이 있거나…… 남자를 좋아할 수도…… 있지 않나, 걱정이…… 되어서.”
제아의 말도 안 되는 상상력에 기가 막혔는지, 도준이 걸음을 멈추고 제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어. 그러니까…….”
“그만.”
제아의 말을 딱 잘라버린 도준의 미간은 잔뜩 좁아져 있었다.
아무래도 신경질이 잔뜩 난 것 같은데.
슬금슬금 눈치만 보고 있는 제아에게 바짝 다가선 도준이 어렸을 적 자주 했던 것처럼 그녀의 양쪽 귀를 쭉, 잡아당겼다.
“뭐 하는 짓이야?”
“두 번 말 안 할 테니까 잘 들어. 나, 여자 좋아해. 그것도 엄청.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도준은 제아의 무한한 상상력에 하도 기가 막혀 하마터면 헛웃음까지 흘릴 뻔했다.
제발 좀 알아들었으면 하는 간절함을 담고서 도준은 제아의 커다란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여자를 보면 나도 안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지극히 정상적인 남자야.”
‘그리고 그게 바로 너야.’
차마 그 말까지 할 수 없었던 도준은 다시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
너무도 적나라한 도준의 대답에 순간 멍해지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 제아는 쪼르륵 그의 뒤를 따르며 집요하게 캐물었다.
“아니면 다행이고. 그런데 어떻게 그런 영화 보고 잠을 잘 수가 있어?”
“…….”
“진짜 아는 여자 한 명도 없어?”
“……?”
“연애는 안 해봤어도 그래도 즐겨는 봤지, 응?”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하는 도준의 뒤를 제아는 쫄랑쫄랑 따라왔다.
옛날처럼 장난스럽게 눈을 빛내며, 옆에서 쫑알쫑알 투덜거리며.
그런 그녀의 모습에선 조금의 경계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항상 앙칼지게 발톱을 드러내던 고양이가 드디어 발톱을 숨긴 것이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저절로 손이 나가려는 걸 참기 위해 두 주먹을 꼭 쥔 채 도준은 모른 척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뭔가를 보고 깜짝 놀란 제아는 그를 길가 옆의 벽으로 무작정 밀어붙였다.
갑작스러운 육탄전에 당황하긴 했지만 가녀린 제아의 몸에 쉽게 밀릴 그가 아니었다.
“대체, 뭐 하는?”
제아의 손가락이 도준의 입술을 꾹, 눌렀다.
“쉿! 우선 좀 숨어줘. 응?”
간절함이 가득 담긴 제아의 눈빛에 그는 마지못한 척 벽까지 밀려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부족한지 제아는 그의 어깨를 꾹꾹 내리눌렀다.
그래도 그가 꿈쩍하지 않자, 제아는 연신 동태를 살피며 눈빛과 손짓으로 그에게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결국 그는 짙은 한숨을 뱉어내며 긴 다리를 접어 쭈그리고 앉았다.
지금 내가, 뭐 하는 짓인지.
쭈그리고 앉긴 앉았지만 도준은 자신이 왜 이렇게 볼썽사납게 쭈그리고 앉아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준이 쭈그리고 앉자 기다렸다는 듯 제아도 그의 앞에 쭈그리고 앉더니, 바짝 몸을 낮추고 고개만 빼꼼히 내민 채 동태를 살폈다.
야무지게 머리를 틀어 올린 제아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도준의 콧속으로 어디선가 스멀스멀 흘러나온 지독한 악취가 훅, 파고들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틀자, 바로 옆에 있는 초록색 쓰레기 수거함이 보였다.
하필이면 숨어도 왜 쓰레기 수거함 옆인지.
유난히도 후각에 민감한지라, 도준은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욱!”
손으로 코를 틀어막으며 그가 반쯤 일어나는 찰나, 깜짝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 제아가 다짜고짜 등으로 다시 밀어붙였다.
“아직 일어나면 안 돼!”
다급하게 속삭인 제아는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올라서 온 힘을 다해 그의 가슴에 눕다시피 드러누우며 밀어붙였다.
그럴수록 더욱더 그의 품으로 깊숙이 파고든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엄마 있단 말이야!”
울 것 같은 눈을 한 제아 때문에 결국 도준은 얌전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얌전하게 있는 것도 모르고 제아는 아직까지도 등으로 버티기를 하고 있었다.
제아야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열심히 밀어붙인다지만, 도준에겐 품에서 꿈틀거리는 복숭아 사탕일 뿐이었다.
제아가 밀어붙일수록 향긋한 샴푸 향과 함께 따스하고 보드라운 몸이 그의 오감을 생생하게 자극했다.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곤두서는 예민한 감각, 코를 찌르는 지독한 악취마저도 서서히 몸속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를 막진 못 했다.
10년 동안 내리눌러놨던 욕구가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 생기다니.
참다못한 도준이 제아의 어깨를 팔로 감싸 안으며 억눌린 음성을 내뱉었다.
“그만 좀 꿈틀거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