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13화 (13/104)

13. 확, 덮쳐버릴까 보다.

2016.10.17.

입술이 간질간질, 발끝까지 간질거리는 야릇한 느낌에 제아는 뒤로 물러나며 꽥, 소리를 질러버렸다.

“뭐, 뭘 해주라는 건데? 꿈도 꾸지 마!”

놀랐다가, 새하얗게 질렸다가,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소리를 지르는 제아의 다양한 반응을 지켜보는 도준의 눈에 즐거움이 어렸다.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니까.

“사탕이라도 사주고, 끊으라고 해야지.”

태연한 도준의 대답에 제아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녀의 입안에 있는 건 복숭아 사탕.

아마도 그래서 그가 입술을 쳐다봤나 보다.

오해는 풀렸는데도 왜 이렇게 심장은 제멋대로 뛰는지!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은 도무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아는 그런 자신이 창피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에게 화가 났다.

작은 것 하나에도 열렬하게 반응하는 자신과 달리 지독할 정도로 평정심을 유지하는 그를 보고 있으려니 또다시 제대로 휘말린 것 기분이 들었다.

그런 그가 괜히 얄미워 제아는 도끼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얄밉다! 너무 얄밉다! 미치도록 얄밉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복숭아 사탕이면 될 것 같은데.”

여전히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도준이 상체를 갑자기 숙여왔다.

제아는 깜짝 놀라 뒤로 등을 젖혔지만, 그만큼 몸을 기울인 도준의 숨결이 그녀의 입술 점막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네 입 안에 있는 그 사탕, 말이야.”

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제아는 격하게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도준은 이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달달한 복숭아 맛 숨결을 느낀 후였다.

막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촉촉이 젖은 피부에서 흘러나오는 산뜻한 향마저도 그에겐 자극적이었다.

뻐근해지는 심장을 느끼며 도준은 제아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빠르게 깜빡이는 눈을 보건대 분명 제아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지.

확…… 덮쳐버릴까 보다.

“네가 사탕을 주면, 담배 끊는 거 생각해보지.”

하지만 그는 덮치는 대신 물러나는 쪽을 택했다.

그랬다간 겨우 좁혀진 이 거리가 다시 멀어질 테니까.

10년 전 그때처럼 또 겁을 먹고 도망갈 게 뻔하니까.

그가 기울였던 몸을 세우자 제아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더듬더듬 말했다.

“보, 복숭아 사탕, 편의점 가면 흔하게 팔아.”

순진한 대답이었다.

그가 원하는 복숭아 사탕은 바로 그녀의 입술인데.

절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유일무이한 그의 복숭아 사탕.

도준이 빤히 쳐다보자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한 제아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사, 사탕 사줄게! 사주면 될 거 아냐!”

닿지도 않았는데 이젠 그의 눈빛만으로 이렇게 심장이 떨리고 온몸이 떨리니, 제아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에게 얼른 지갑을 주고 사라져야 한다. 좀 더 있다가는 그나마 유지하고 있는 이성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갈 것 같았으니까.

“이거. 고의는 아니었어, 진짜.”

도준은 지갑을 받으면서도 제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심장까지 뻐근하게 하는 달콤한 복숭아 사탕이 또다시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다.

도준은 그의 손 위에 얼른 지갑을 놓고 사라지려는 제아의 손목을 낚아채서 확 끌어당겼다.

“문제아, 우리 오랜만에 영화나 보러 갈까?”

“됐어, 내가 오빠랑 영화를 왜 봐?”

제아는 당연하다는 듯 거절했지만, 도준에게 먹힐 리가 없었다.

복숭아 사탕과 함께 오늘 하루를 달달하게 보내기 위해 아주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왔으니까. 뭐, 동의야 추후에 얻으면 되는 일이고.

물론 그녀는 그의 복숭아 사탕이 자신일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겠지.

“제아 네가 지갑을 가져간 덕분에, 오늘 내 출장이 무산되었어.”

“그, 그게 왜 내 탓이야?”

“현금이나 카드는 그렇다 쳐도, 신분증이 없으니 비행기를 탈 수가 있나?”

신분증이 없어도 비행기를 탈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는 제아는 그 사실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제아를 보며 도준은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침, 오늘 영화가 보고 싶어졌거든.”

“유 실장님이랑 봐! 아니면 딴 사람이랑 보든지!”

“유 실장은 출장 갔어. 그리고 난 밤을 꼬박 새우면서 유 실장이 나 대신 처리할 업무들을 준비해줬고.”

“그, 그럼 다른 사람이랑 봐! 아는 사람 많을 거 아냐. 그래, 여자! 여자랑 봐! 영화는 여자랑 봐야 제맛이지!”

제아는 어떻게든 빠져나가 보려 하지만 쓸데없는 반항일 뿐이었다.

“너밖에 없어.”

짤막한 대답이었지만, 그 한마디에 도준의 진심이 어려 있었다.

낳아준 부모조차 나를 등졌을 때도,

그래서 죽을 생각까지 했던 나를 구해준 것도,

그래서 다시 힘을 내서 살아가게 해준 것도,

그런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든 것도,

너밖에 없어, 문제아.

그러니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마.

이런 날 책임질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지독한 소유욕이라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어.

“그러니까 오늘 하루, 네가 날 책임져줘야겠어.”

제아는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려 봐도 능수능란한 도준의 손아귀에 있는 이상, 도저히 헤어 나올 수가 없다.

그저 도준의 손에 들린 영화 티켓 두 장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면서 힘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내가 또 한 건, 했구나…… 생각하면서.

***

제아는 지금, 지로의 빨간 스포츠카에 이어 생애 두 번째로 멋지고 비싼 스포츠카에 갇혀서 어딘가로 이동 중이었다.

선팅이 진하게 된 창문이 감옥의 철창이라도 되는 것처럼 차창 밖을 애처롭게 내다보는 그녀는 지금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결국은 본인이 그의 지갑을 가지고 온 덕에 생긴 일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연도 자꾸 생기면 인연이라는데.

10년 전처럼 하루하루가 도준에 의해 시작되고, 도준에 의해 끝나는 것 같았다.

만남이 반복될수록 그에게 익숙해지고, 또 그의 존재에 습관이 들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가슴은 행복하고 심장은 떨리는데, 마음은 불안하고 두려워졌다.

제아는 조심히 시선을 틀고 운전하면서 통화하는 도준의 옆모습을 훔쳐봤다.

차를 탄 순간부터 영화관에 도착할 때까지 도준의 핸드폰은 불이 나도록 전화가 왔다.

연신 짤막하게 지시를 내리고 전화를 끊는 그의 모습에 제아는 양심이 콕콕, 찔려왔다.

괜히 나 땜에. 지갑은 왜 가지고 가서는!

결국 영화관에 도착하자마자 도준은 영화 티켓을 그녀에게 주면서 먼저 올라가 있으라고 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영화관은 한산했다.

‘추락? 영화 제목 한 번 특이하네.’라고 생각하던 제아는 갑자기 일어나 매점으로 향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이틀 연속으로 도준에게 공짜로 얻어먹고 얻어 보기는 아무래도 양심에 찔린 것이다.

물론 둘 다 그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의 주머니 속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이 나왔다.

그 돈으로 콜라와 팝콘을 사서 의자에 앉아 도준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런 제아의 바로 뒤에서 날카로운 여자의 소리가 들려왔다.

“꺄악, 내 가방! 아주머니, 눈을 어디다 두고 일하는 거야? 이 가방이 얼마짜린 줄 알아?”

“아이고, 정말 미안해요, 아가씨. 이를 어쩌나? 그래도 많이 묻진 않은 것 같은데.”

“뭐가 어쩌고 어째요? 여기 가방 얼룩진 거 안 보여요?”

슬쩍 돌아보자마자 제아는 대충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되었다.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청소부 아주머니와 화장을 덕지덕지하고 있는 젊은 여자가 보였다. 딱 봐도 가방에 얼마 묻지도 않은 것 같은데, 여자가 너무 과민반응을 하는 것 같았다.

문제아, 오지랖 그만 펼치자. 제발, 제발!

곧 있으면 오빠 올 거야.

영화 보러 들어갈 때까지 제발 참자!

입은 근질근질, 엉덩이는 들썩들썩. 그래도 제아는 두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 참고 또 참았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고 끼어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오히려 덮어씌우거나 일이 커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문제아, 너 한 번만 더 남의 일에 참견해봐. 아주 그냥 가만히 안 둘 거야!

엄마인 윤영의 협박을 떠올리며 두 눈까지 꼭 감아보지만, 시각이 닫히니 더욱더 예리해지는 건 바로 청각이었다.

“아주머니, 사과는 됐으니까 돈으로 물어내. 이런 비싼 가방은 작은 얼룩에도 가치가 엄청 떨어지거든? 새로 사내라고. 똑같은 거!”

아니, 저 여자 보자 보자 하니까! 새파랗게 젊은 여자가 엄마뻘 되는 아주머니에게 너무하잖아!

누르고 눌렀던 그녀의 가슴속에서 폭죽 터지듯이 정의감이 빵! 하고 솟아올랐다.

“저기요!”

거의 본능이었다. 미사일이 발사되듯 의자에서 튕겨 나가 청소부 아주머니의 앞을 막아선 것은.

제아는 야무지게 눈앞의 여자를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슬쩍 시선을 내렸다.

여자의 가방에 콜라가 묻어 있긴 했지만, 에나멜 소재라서 닦으면 그만인 것을. 쯧쯧.

“그 가방 충분히 복구 가능해요.”

“넌 또 뭐야?”

마스카라를 얼마나 처발랐는지 분노에 파르르 떠는 여자의 속눈썹에서 숯가루가 우수수, 떨어질 것만 같았다.

여자는 위협하듯 바짝 다가섰지만, 높은 힐을 신었음에도 제아와 눈높이가 비슷하다는 게 또 분한 듯 이젠 몸까지 바르르 떨었다.

문제아,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이 상황을 해결하는 거야.

파리채를 휘두를 엄마를 생각하면서 절대 일을 크게 만들지 말자!

“그냥 영화 보러 온 사람이에요. 에나멜 소재는 원래 잘 안 스며들어요. 살짝 몇 방울 튄 거뿐이니까 마른 헝겊으로 잘 닦아주면 흔적도 안 남을 거예요.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제아는 여자를 보면서 생긋 웃었다. 자신의 친절한 미소에 스스로 감탄을 하면서 말이다.

“이분이 그래도 그쪽 엄마뻘은 되시는 것 같은데 사과하는 분한테 손가락질하면서 반말까지 하는 건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아서.”

“정말 기가 막혀서!”

그때 남자 화장실에서 한 덩치 하는 남자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덩치처럼 한 인상 하는 남자는 아마도 여자의 애인인 듯싶었다.

“오빠! 이 아주머니가 세상에 오빠가 사준 가방에 콜라를 쏟은 거 있지!”

아니, 이보세요! 쏟은 게 아니라 조금 튄 거 가지고!

독하게 눈을 치켜뜰 땐 언제고 남자에게 앵앵거리는 여자의 이중적인 모습에 제아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여자의 다음 말은 더욱더 가관이었다.

“그래서 이 아주머니한테 물어내라는데 이 여자가 끼어들어서 나한테 막 뭐라고 하는 거야. 둘이서 나를 막 몰아붙이는데……. 흑흑.”

아니, 누가 누구를 몰아붙였다고! 잡아먹을 듯 덤벼든 건 그쪽이거든?

“우리 자기, 울지 마.”

여자의 어깨를 토닥인 남자가 제아가 아닌 청소부 아주머니를 향해 눈을 부리부리 뜨면서 말했다.

“아주머니가 이 가방에 콜라 쏟았어? 그럼 당연히 물어내야지.”

“아이고,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남자까지 가세하자 아주머니는 더욱더 고개를 조아렸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제아는 다시 아주머니 앞을 막아섰다.

그래도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녀는 눈앞의 덩치를 최대한 순진무구한 눈망울로 올려다보았다.

“저기…… 아주머니가 이렇게까지 사과하시는데, 받아주시고 좋게 넘어가면 안 될까요?”

“넌 뭐야. 뭔데 우리 일에 끼어드느냐고. 네가 물어줄 거 아니면 당장 꺼지라고!”

남자가 갑자기 세차게 어깨를 밀치는 바람에 제아의 가녀린 몸이 뒤로 밀리면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이고, 아가씨! 이러다 큰일 나겠네. 그냥 가요, 응?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저는 괜찮아요.”

제아를 일으켜주는 아주머니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모습에 또다시 가슴속에서 빵하고 터진 정의감!

순진무구한 눈망울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제아는 눈꼬리를 팍, 치켜뜨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몇 방울 튀긴 거 가지고 물어내라고 하면, 저도 살짝 밀친 거 가지고 경찰에 신고할 수 있어요. 그리고 아무리 이분이 실수했다고 해도 엄마뻘인데 반말이 아니라 존댓말을 해야죠. 그 가방, 딱 봐도…….”

‘그 가방, 짝퉁인데요 뭘.’

상황이 악화될 것 같아 그녀는 뒷말은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제아가 야무지게 따져들자 남자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남자는 또다시 막무가내로 커다란 덩치를 무기 삼아 제아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신고? 해볼 테면 해보든지. 아주 제대로 신고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그러니까 남 일에 간섭하지 말고 좋은 말 할 때 꺼지라고. 다치기 싫으면.”

“그렇겐 못 하겠는데요. 저도 신고 안 할 테니까, 그쪽도 아주머니 사과 받아들이고 그냥 넘어가 주…….”

“아우,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확, 그냥!”

말에서 밀리니 남자는 결국 못 참겠다는 듯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야무지게 덤벼들긴 했지만, 움찔하면서 본능적으로 눈이 감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감은 눈 사이로 아른거리는 건 바로…….

‘이준 오빠!’

머릿속에서 본능적으로 터져 나온 이름이었다.

이제 더 이상 슈퍼맨처럼 나타날 리 없는 그리운 그 이름을 마음속에서 외치는 순간, 남자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그녀의 귓가를 울렸다.

“으아아아악!”

그 비명 뒤로 낮게 깔린 살벌한 음성이 들려왔다.

“감히, 어디다 손을 대려고 해.”

번쩍 눈을 뜨자 거짓말처럼 그녀의 눈앞에 도준이 있었다.

보호하듯이 그녀를 뒤로 보낸 도준의 손이 남자의 손목을 잡아 비틀고 있었다.

제아는 그저 멍하니 듬직한 그의 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준 오빠……. 이준 오빠……. 이준 오빠!

엘리베이터 쪽에서 인호와 통화를 하던 도준은 영화관 쪽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에 눈살을 찌푸렸다.

무시하고 통화를 하려 했지만 소란스러움 속에 익숙한 음성이 섞여 들렸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도준은 영화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덩치 큰 남자에게 겁을 먹기는커녕 고집스럽게 턱을 세우고 야무지게 따져대는 제아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청소부 아주머니가 보였다.

한산한 영화관, 그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고, 도준은 몇 마디만 들었을 뿐인데 단번에 상황이 파악되었다.

문제아, 대체 또 무슨 사고를.

남의 일에 지독할 정도로 무심한 그와 달리 지독할 정도로 오지랖 넓고 정의감 투철한 제아였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딱 봐도 문제아의 오지랖이 또다시 발동한 게 분명했다.

정말 잠시라도 눈을 떼면 이런 상황이니.

그의 입술에서 한숨이 다 나오기도 전에 제아를 밀치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전화하지.”

도준은 중요한 지시를 내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제아를 때리려는 듯 번쩍 들어 올린 남자의 손목을 잡아채서 비틀어버렸다.

너무도 소중하고 소중해서, 만지는 순간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서 손대는 것조차 두려워했는데. 그런데 감히 너 따위가.

“꺄악!”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남자는 단번에 벽으로 밀쳐졌다. 도준의 손에 목이 움켜잡힌 채.

“사과해.”

지극히 덤덤한 음성에 깃든 살벌함, 지극히 무심한 얼굴에 깃든 잔인함.

그나마 근처에 모여든 어떤 사람들조차 아무도 도준을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의 손에 힘이 좀 더 가해지자 숨통이 막히는지 컥컥거리는 남자의 얼굴이 점점 새하얘졌다.

그리고 그때까지 뒤에서 오빠 파이팅을 속으로 외치던 제아는 갑자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빠, 난 괜찮으니까 그만해. 응?”

뒤늦게 말려보지만 도준은 지금 제아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남자의 얼굴이 새하얘질수록 부드럽게 휘어지는 섬세한 눈매와 입술선.

괴로워하는 남자를 보며 홀리도록 매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저 남자는 지금 한도준이 아니었다.

미친 흑표범 문이준.

예전 그대로라면…… 그의 눈은 오로지 제아를 볼 때만 부드러워졌다.

그 부드러운 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볼 때면, 그건 그가 무척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제아는 온몸에 피를 묻히고도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미소를 짓던 이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제발 그만해! 무섭단 말이야!”

날카로운 제아의 비명이 도준의 귀가 아닌 심장을 예리하게 찔렀다.

남자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던 그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고, 겨우 숨통이 트인 남자는 덩치에 맞지 않게 벽에 기대고 숨을 헐떡였다.

여자의 것처럼 희고 매끈한 손.

방금 전까지 남자의 숨통을 쥐고 있던 잔인한 손이었다.

“돈도 있는 사람한테 뜯어내는 거야. 예를 들면, 나 같은 사람.”

그 손을 잠시 바라본 도준의 잇새로 씹어뱉듯이 흘러나온 소리와 함께 도준의 주먹이 남자의 얼굴을 강타했다.

어디 뼈라도 부러진 걸까. 둔탁한 소리가 났다.

얼굴을 손으로 감싼 채 풀썩 주저앉은 남자의 머리 위로 하얀 수표가 몇 장 뿌려졌다.

그리고 떨어진 수표 위로 떨어지는 남자의 붉은 피.

하지만 그 피를 내려다보는 도준의 눈은 지극히 무심했다.

살짝 기울어진 상체를 보고 도준은 남자의 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신고하고 싶으면 하든지. 기꺼이 응해줄 테니.”

약자만 골라 괴롭히는 놈일수록 강자는 알아보는 법.

겁에 잔뜩 질린 눈빛으로 도준을 보며 덜덜 떨던 남자는 액수를 확인하더니 허겁지겁 수표를 움켜쥐고 여자를 데리고 사라졌다.

남자와 여자가 사라지고, 구경하던 몇 안 되는 이들도 각자 제 갈 길을 갔다.

겁에 질린 청소부 아주머니마저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제아 너도.”

그제야 제아를 향해 천천히 돌아선 도준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저 새끼 미친 새끼야.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자식.

―넌 사람이 아니라 악마야.

한 번 폭주하면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질리도록 들었던 말이었고, 아직까지 듣는 말인데도 그는 항상 무덤덤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신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래도 제아 너만은,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보지 말아줘.

이런 날 유일하게 제어할 사람 또한 너뿐이니까.

“내가, 무서워?”

대답 없이 도준을 응시하는 제아의 커다란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울먹이고 있었다.

그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달싹거리는 도톰한 입술을 도준은 그저 망연자실하게 쳐다봤다.

그런데 갑자기 제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서워! 그것도 엄청!”

너도 결국은…….

그 한마디에 그의 가슴이 뻐근하게 저려왔다.

피가 잔뜩 묻을 뻔한 자신의 주먹을 도준이 말없이 내려다보는 순간, 이어지는 다음 말이 도준의 심장을 움켜쥐고 마구 흔들어버렸다.

“당연한 거 아냐? 그런 양아치 같은 놈 때려서 오빠가 경찰서 끌려갈까 봐 무서웠다고!”

나 때문에 또 오빠 주먹에 피를 묻힐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데!

제아는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은 채 야누스의 얼굴처럼 아름다운 얼굴 뒤에 숨겨진 그의 잔인함을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동네에서 소문난 효자 아들, 학교를 대표하는 모범생이 바로 문이준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른들의 세계에서 일 뿐이었다.

또래들의 세계에선 피를 좋아하는 미친 흑표범, 가장 두려운 존재이기도 했다.

워낙 철저하게 숨겨서, 그녀 자신도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이준의 모습을 뒤늦게 알았다.

지금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무심한 듯, 무미건조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안다. 깊숙이 부딪혀오는 눈동자 속에 숨어 있는 상처를.

그래서 그녀는 더 울분이 터졌다.

참으려고 했는데, 그냥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 속도 모르고, 상처받은 눈은 왜 하는 건데!

횡설수설, 그녀의 입 밖으로 원망스러움이 주르륵 쏟아져 나왔다.

“뭐가 예쁘다고 그런 놈한테 돈을 줘? 그것도 그렇게 큰돈을! 차라리 기부를 하든지!”

“문제아.”

착각일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도준의 음성이 살짝 떨리는 것도 같았다.

“그럴 돈 있으면 내 빚이나 좀 깎아주든지. 내 빚은 조금도 안 깎아주면서!”

조금은 진심이 담겨 있는 말이었다. 자신에게는 단돈 10원도 안 깎아주면서 어떻게 100만 원짜리 수표를 아무렇지 않게 던질 수가 있느냐 이 말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도 예의라곤 상실한 그 커플에게 간 돈이 미치도록 아까웠다.

사실 제아도 남자가 손을 들어 올렸을 땐 조금 무서웠다. 어떤 사람도, 몸의 고통 앞에서 두렵지 않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상황은 도준에 의해 마무리가 되었기에 제아는 그저 진상 커플에게 간 그 돈이 아깝고 또 아까워서, 분하고 또 분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

도준이 부르든 말든,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이다.

“문제아.”

“왜 자꾸 불러……?”

“한 번만, 안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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