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11화 (11/104)

11. 1년에 1억, 몇 년을 계약하겠니.

2016.10.10.

도준이 이곳에 와 있는지 꿈에도 모르는 제아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소주 두 잔에 얼굴이 터질 듯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으니.

“아, 몰라!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댔어!”

‘아자, 아자’를 외치며 화장실을 나가던 제아는 다시 화장실 안으로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맙소사!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심장이 튀어나올 듯 두근거렸다.

계산대에 서 있는 훤칠한 남자.

아무리 봐도 도준과 똑같이 생겼다.

절대 비슷한 얼굴이 존재할 수 없는데.

게다가 그 남자의 뒤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친구들.

아니야, 아닐 거야! 오빠가 여기 있을 리 없잖아? 한국이, 서울 땅이 얼마나 넓은데!

제아는 애써 현실을 부정했지만, 그와의 첫 만남도 따지고 보면 말도 안 되는 우연으로 시작되었다.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고 있는 제아의 앞에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정화가 불쑥 튀어나왔다.

“엄마야!”

“놀라기는, 화장실에 빠져 죽었나 확인하러 왔다. 근데 여기 숨어서 뭐 해?”

정화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제아는 다급하게 속삭였다.

“정화 너랑 다른 애들이랑, 왜 저 남자랑 같이 있어?”

“왜긴, 내가 불렀으니까 같이 있지.”

“오빠를…… 아니, 저 남자를 네가 어떻게 알고?”

정화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는 제아를 향해 갑자기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제아야, 진짜 미안! 사실은 내가 지로인 줄 알고, 네 핸드폰에서 ‘한 사장님’이란 사람한테 전화를 했지 뭐야? 네가 아는 남자가 한지로 말고 또 있을지 누가 알았겠어?”

“뭐어? 너 미쳤어? 저 남자가 누군지 알고!”

두 손 모아 싹싹 빌 때는 언제고, 정화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제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누구긴, 내가 사랑하는 친구 문제아의 아는 오빠지.”

“아는…… 오빠?”

“본인이 그러던데? 네 아는 오빠라고. 요게, 요게 남자는 안 만나는 척하더니, 저런 대어를 낚았으면 재깍재깍 언니들한테 보고를 해야지. 얌체 같으니라고!”

“정화야, 그게 아니라…….”

“너의 아는 오빠가 식사 값도 다 계산하고 우리들한테 소갈비 세트까지 다 챙겨줬거든? 싸가지 한지로보다 백 배 천 배 멋지고 매너도 좋고 잘생겼어! 우린 무조건 저 섹시남 오빠 편이다!”

제 할 말을 끝낸 정화는 반항할 틈도 없이 제아를 화장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

도준은 어느새 콜택시까지 불러서 미리 계산을 한 후 식당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을 줄줄이 사탕처럼 한 명씩 태워서 보내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택시에 냉큼 올라타는 정화를 제아는 애타게 불렀다.

“정화야! 야, 윤정화! 그냥 가면 어떻게 해?”

내달라고 한 소고기 값은 처리하고 가야지, 윤정화! 사고는 네가 치고, 그냥 가면 어떻게 하냐고!

하지만 택시의 차문 대신 열린 건 창문이었고, 열린 차창 문틈으로 빠져나온 건 정화의 몸이 아닌 얼굴뿐이었다.

“문제아, 우린 빠져줄 테니까 아는 오빠랑 즐거운 시간 보내!”

그렇게 정화를 태운 택시는 서서히 멀어졌고, 도준과 덩그러니 둘만 남아버렸다.

제아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그를 힐긋, 쳐다봤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손에 들린 영수증을 봤다는 게 옳은 표현이었다.

도준은 손에 들린 카드 영수증을 보며 제아가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여자 다섯 명이서 15인분이라.”

도준의 중얼거림은 마치 ‘네가 갚아야 할 빚이 더 늘었군.’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식겁한 제아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고기 값만큼은 절대 갚지 않으리라!

그녀는 이번만큼은 호락호락 당하지 않겠다는 듯 고집스럽게 작은 턱을 치켜들며 야무지게 말을 했다.

“소고기 값, 나한테 청구할 생각하지 마. 내가 갚을 이유, 절대! 없으니까.”

“갚지 않아도 돼.”

예상외로 너무도 쉽게 도준이 말을 하자 오히려 당황스러운 건 제아였다.

갚지 말라고 하니 오히려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 때문에 또다시 도준의 지갑이 열린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니 아니라고 말하면 될 것을, 오지 않았으면 될 것을 왜 굳이 와서는.

“그러니까 나는 한지로가 아니다! 전화 잘못 걸었다! 그렇게 하면 될 걸,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쓸데없이 돈을 써?”

“내가 왜 왔을 것 같아?”

되돌려 물어보는 도준의 말에 제아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오히려 궁금한 건 그녀 자신이었으니까. 그러다 갑자기 친구인 정화의 말이 떠올랐다.

―본인이 그러던데? 네 아는 오빠라고.

10년 전에 떠나버린 내 오빠 문이준라고는 차마 대답할 수 없어서 그렇게 대답했는지도 모른다.

제아 자신이 옛정에 휘둘려서 그를 제대로 밀어내지 못하는 거라면 도준은 아마도 책임감 때문에 그러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못한 책임감.

책임감 하나는 끝내주는 오빠였으니까.

“오늘 일은, 미안해.”

사실 이 말을 먼저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불려 나와서 돈이나 쓰고, 나한테 이런 취급이나 당하고. 지금 도준의 모습은 전혀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오빠 노릇, 안 해도 된다구.”

“남이라고 했던 건 내가 아닌 너라고 기억하는데.”

“그러니까 앞으론 이러지 않아도 된다구. 진짜 안 서운하고 안 섭섭해.”

“그런데 왜 내가 오빠로서 왔다고 생각하는 거지?”

“오빠가 아니면…… 왜 온 건데?”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내가 기껏 오빠 노릇이나 하려고 왔다고 생각하다니. 꼭, 말을 해줘야 아나.

게다가 이런 모습을 지금까지 한지로가 독식했다는 생각에 도준의 마음속에서 치졸한 질투심이 끓어올랐다.

더욱더 탐스럽게 달아오른 보드라운 뺨은 그의 손길을,

버릇처럼 깨물고 있는 도톰한 아랫입술은 그의 입술을,

대충 묶어 올린 머리에서 몇 가닥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문신처럼 물들이고 있는 새하얀 목덜미는 그의 시선을 유혹했다.

단언하건대, 10년 동안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었다.

그런데 제아 앞에만 서면 가차 없이 흔들려버리는 원초적 본능이라니.

그것도 모자라 흐릿하게 풀린 채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키스해 달라는 듯 바라보면, 나보고 어쩌라고.

“문제아, 조심해.”

꽃의 향기에 취해 날아든 나비처럼, 제아의 얼굴을 향해 도준은 저절로 고개가 기울어졌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아슬아슬한 거리감에서 도준의 얼굴이 딱 멈추자, 제아의 촉촉한 입술이 놀란 듯 살짝 벌어졌다.

10년 전 그때처럼, 마음 같아선 입술을 마음껏 유린하고 싶었다.

하지만 눈빛으로 그 입술을 어루만지는 걸로 만족하며 도준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세상 모든 남자는 늑대야.”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면서도 매혹적인 늑대가 날리는 경고에 제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 무슨 뜻이야?”

참 이상했다. 입술에 닿은 건 그의 입술이 아니라 눈빛인데 왜 이렇게 호흡조차 내쉬기 힘들 정도로 온몸이 달아오르는지.

경고를 해주는 건데도 오히려 늑대에게 잡아먹힐 것 같은 이 기분은 뭔지.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뒷걸음질 치며 본능적으로 방어 태세를 취한 제아는 괜히 애꿎은 도준의 눈을 탓했다.

색기 철철 흘려대는 저 눈, 저 눈 때문이야!

그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본 듯 그의 나른한 눈은 무례할 정도로 노골적인 색기를 발산했다.

하지만 그 눈빛과 달리 도준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야심한 밤에, 그것도 술까지 마신…… 그 모습으로 한지로는 부르지 말라는 말이야.”

“지로는 친구야!”

“한지로도 널 그렇게 생각할까?”

“그, 그건!”

대답할 자신이 없는지 제아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제아도 지로의 마음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도준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한지로,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안 든다 했더니. 결국은 어른 늑대가 새끼 늑대를 알아본 꼴이었다.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데려다주지.”

제아가 집으로 들어가는 걸 두 눈으로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통통볼 같은 여자니까.

도준이 재킷 안에서 차 키를 빼며 돌아서는 순간, 통통볼은 어김없이 튕겨 나갔다.

“버스 타고 갈 거야.”

도준이 돌아섰을 땐, 제아는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뭐 하나, 얌전하게 따라주는 게 없군.

결국 한숨을 깊게 내쉰 도준은 긴 다리를 뻗어 제아를 쫓아갔다.

“이 늦은 시간에, 버스를 타겠다고?”

“버스가 어때서? 저렴한 가격에 착실하고 안전하게 집까지 모셔다 주거든?”

도준의 시선이 볼을 퉁퉁하게 부풀린 채 톡 쏘아붙이는 제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 내렸다.

‘나 술 먹었어.’라고 말해주는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유혹적인 얼굴.

이 야심한 시간에 누굴 홀릴 일 있나.

짧은 치마 밑으로 드러난 제아의 다리는 아찔할 정도로 날씬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그를 가장 걱정스럽게 한 건 잠이 잔뜩 묻어나는 저 눈이었다.

벌써부터 졸음이 쏟아지는지 잔뜩 내려앉은 눈꺼풀 때문에 앙큼한 고양이 눈매가 순한 강아지 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야무지게 치켜든 턱의 각도.

어린 시절부터 그 턱의 각도를 수없이 봐왔던 그인지라 제아가 고집을 꺾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끝까지 버스를 타고 가겠다고?”

그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제아는 바로 자신의 고집을 실행에 옮겼다.

‘따라올 테면 따라오든지 말든지.’ 뒤돌아선 제아의 야무진 뒤통수가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도준은 하는 수 없이 제아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제아는 뒤에서 들려오는 도준의 굽 소리에 슬핏 웃음이 새어 나왔다.

흥, 나도 고집 있는 여자라구!

이제 정말 가을인지 얼굴을 스치는 밤바람이 꽤 차가웠다.

두 잔 마신 술도 술이라고 술이 깨려는지 조금씩 느껴지는 추위에 제아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 순간, 그녀의 어깨 위로 따스한 체온이 내려앉았다.

서늘한 밤공기를 비집고 코끝을 간질이는 산뜻한 향기.

도준의 재킷이 어깨 위에 걸쳐져 있었다.

“추위도 잘 타면서 옷은 좀 따뜻하게 입고 다니지 그래. 치마도 좀, 긴 걸로 입고.”

유난히 추위를 잘 타는 걸 그는 아직 잊지 않았나 보다.

그래도 좀 살갑게 말해주면 좋을 것을. 메마른 어투도 모자라서 치마가 짧다고 잔소리까지 하다니.

제아는 괜히 서운한 마음에 입을 삐죽거렸다.

“아직 가을이거든요? 그리고 치마도 표준 기장이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제 한창인 가을 공기는 기분 좋은 서늘함을 머금고 있었지만, 그녀 자신이 추위를 잘 타는 것뿐이고, 무릎까지 오는 치마 기장은 긴 다리 때문에 그 위로 올라간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톡 쏘아붙이는 말과 달리 제아는 어느새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의 재킷을 어깨에 걸치고 낙엽이 떨어진 거리를 나란히 걷고 있으려니 첫 만남을 마친 연인이 데이트를 하는 기분이었다.

스칠 듯 스치지 않는 서로의 팔이 이렇게 신경이 쓰일 줄이야.

심장은 두근두근, 손끝은 자꾸만 오그라들었다.

이런 감정, 느끼면 안 되는데.

절대, 빠져들어서는 감정에 스르륵 빠져드려는 순간, 제아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피 한 방울 안 섞였다고 해도 오랫동안 남매로 지내왔다.

그들을 유일하게 남매로 묶어놓았던 서류상의 관계에서도 이제 완벽하게 남이 되었다.

그런데도 남이 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남매가 될 수도 없다.

이 기묘한 관계가 바로 딱, 지금 둘의 관계였다.

이 야릇하고 간질간질한 분위기에서 당장 벗어나야 한다!

“우리 엄마 아빠는, 왜 만나러 안 와?”

“만나러 가면, 과연 나를 반겨주실까?”

“아……니.”

부모님 이야길 꺼낸 것도 실수였지만, 바보같이 되묻는 그의 물음에 진실로 답해버리다니!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굳이 정하지는 않았지만 부모님과 ‘문이준’란 이름이 금지어가 되었듯, 도준과는 부모님의 존재가 금지어가 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를 더 신경 쓰이게 하는 건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도준의 덤덤한 반응이었다.

그 덤덤함이 오히려 상처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오빨 너무 사랑해서, 그래서 그만큼 상처가 더 깊으신 거야! 그건…… 오빠가 이해해줘야 해.”

“이해해.”

“시간이 해결해줄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오빠가 우리 부모님 기다려줘.”

시간이 필요한 건 도준 자신이 아닌 제아의 부모님이었다.

미안함에, 그리고 민망함에,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을 것이다.

―이준아, 엄마가 돈이 필요해…… 그것도 너무 많이.

윤식의 교통사고 이후, 자책감에 시달리는 그의 손을 잡고 윤영이 울음과 함께 토해낸 첫 번째 부탁을 그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그를 친자식처럼 키워주었고, 그의 전부인 제아를 있게 해준 고마운 분의 부탁이었으니까.

―이왕 이렇게 떠나는 거, 제아에겐 비밀로 해줄래? 그리고 연락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 제아를 위해서라도 말이야. 염치없는 거 알지만, 이렇게 부탁할게.

그의 전부인 제아를 놔두고 떠나는 그에게 윤영은 두 번째 부탁을 해왔다.

그리고 도준은 윤영의 두 번째 부탁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 당시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으니까. 윤영과 도준 모두 제아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그랬기에 이렇게 깨끗하고 밝은 모습으로 자란 널, 볼 수 있는 거겠지.

하지만 그걸 모르는 제아는 다시 한 번 곪을 대로 곪아버린 마음 깊숙한 곳의 상처를 다시 한 번 툭, 건드렸다.

“그때 그렇게 간 거, 오빠 친엄마가 돈이 엄청 많아서 간 거지?”

“돈이 많아서라……. 그럴지도 모르지.”

제아 너 대신 내가 아플 수만 있다면,

그래서 네가 그 웃음을 잃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기꺼이 수십 번, 수백 번이고 내 심장이 찢어져도 괜찮아.

“피이, 무슨 대답이 그래? 그래도 오빠 어머님, 좋은 분이시잖아, 그치?”

도준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제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제아의 눈빛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 순진하기만 했다.

‘좋은 분이라…….’

피식, 그의 잘생긴 입꼬리에 흐릿한 비소가 어렸다.

―1년에 1억.

이미 윤영과 이야기가 끝난 걸까.

그가 찾아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친아들인 그를 본 연희의 첫마디였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네가 끔찍하게 아끼는 그 구질구질한 가족 빚이 대충 12억 정도로 알고 있는데, 몇 년을 계약하겠니?

여자라는 이유로 경영에 참여를 못하게 하는 한 회장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잔뜩 애가 달은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그녀의 남편과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편의 자식에게 제일 그룹을 통째로 넘겨야 할 상황이었으니까.

그랬기에 그의 어머니는 버렸던 아들을 20년 만에 다시 찾아온 것이다.

한 회장에게 그녀 대신 들이밀 핏줄이, 필요했던 것이다.

무늬만 어머니인 그녀에게 몸서리치도록 가기 싫었지만, 그 당시 어렸던 그에겐 힘이 없었다.

제아의 가족들을 지켜줄…… 돈이라는 힘.

그래서 그는, 친엄마라는 여자와 거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어찌되었건 어머니인 연희 덕에 제아의 가족들이 암흑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까.

깊숙이 들어가 봤자 서로에게 상처가 될 뿐인 과거, 도준은 그만하고 싶었다.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지.”

흠칫할 정도로 차가운 냉기를 내뿜으며 보이지 않는 선을 딱 그어버리는 도준의 모습에 제아는 괜히 서운함을 느꼈다.

옛날 일을 들추어내서 치사하게 뭐라고 하려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이제 그때의 오빠 선택을 이해한다고 말해주려고 한 건데…….’

때마침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 대기판에 그녀가 타야 할  버스가 ‘잠시 후 도착 예정’이라고 떴다.

막차는 놓치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제아는 그의 재킷을 내밀었다.

“입고 있어.”

“설마, 버스 타고 데려다 주려는 건 아니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제아에게 도준이 툭, 무심하게 말을 던졌다.

“잔돈 없으니 버스비나 대신 내줘.”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몰라서 물어?’

살짝 찌푸린 도준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장난기가 발동한 제아는 시치미를 뚝 떼고, 끝까지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마지못한 듯, 도준이 입을 열었다.

“너 데려다주는 거잖아.”

“그러니까 누가 데려다주랬어?”

제아는 새침하게 눈을 내리깔고 다가오는 버스를 보는 척했다.

대답은 없지만, 그가 초조해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도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제아는 이상하게도 즐거웠다.

마지못한 척 져주는 모습이,

어색하게 쩔쩔매는 모습이,

이제 조금은 10년 전의 이준 같다고 해야 할까?

처음이었다. 얼어붙어 있던 마음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이런 기분은.

제아는 웃음을 속으로 삼키며 태연한 척, 항상 자신이 받기만 했던 제안을 그에게 되돌렸다.

“일 년 중에서 한 달 줄여준다고 하면 버스비 내줄 의향 있는데, 어때?”

그녀에겐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었다.

이제 선택은 도준이 할 차례였다.

아, 즐거워라! 이래서 오빠가 자꾸만 선택을 하라고 나에게 제안한 거였구나!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도준이 순간 피식, 옅은 웃음을 흘렸다.

“사기꾼이 따로 없군.”

‘다 오빠한테 배운 거거든요?’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제아는 가까스로 참았다.

“내가 원하지도 않는 돈을 쓰고 2400만 원 갚으라는 오빠가 더 사기꾼이거든?”

도준은 인정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사이 버스가 도착했고, 도준이 제아의 어깨 위에 있는 재킷을 가져갔다.

설마, 여기서 끝?

이상하게도 그가 그냥 가려고 하는 모습에 제아는 묘한 실망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도준은 제아에게 보란 듯이 지갑을 꺼내 열었다.

얼핏 보이는 그의 지갑 속에는 초록색은커녕, 온통 하얀색뿐인데.

그걸 본 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버스비를 수표로 내려는 건 아니지?”

그래, 설마 그러진 않겠지. 미치지 않고서야.

하지만 제아의 바람은 도준이 나른한 미소를 짓는 순간 사라져버렸다.

“기, 기사 아저씨가 욕 한바가지 할 거야!”

“…….”

“잔돈도 못 받을걸?”

미쳤냐는 듯 바라보는 제아를 향해 그는 얄미울 정도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잔돈, 받을 생각 없어.”

“뭐어?”

미처 제아가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알뜰살뜰하게 얼마 되지 않는 용돈을 모아서 그녀에게 또 용돈을 주던 오빠는 이제 황금 수저를 입에 문, 돈 터지는 재벌3세라는 것을.

저 아까운 돈을! 땅 파서 백 원도 나오지 않는 이 세상에! 왕재수 같으니라고!

결국 제아는 씩씩거리면서 버스에 올라타려는 도준을 밀치고 수표를 꺼내려는 그의 지갑을 낚아챘다.

그리고 버스 카드를 대고, 버스 기사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기사님, 어른 두 명이요!”

***

막차라서 그런지 버스 안은 좌석이 거의 비어 있었다.

뭐가 그리 화가 난 건지, 제아의 눈은 어느새 고양이 눈으로 돌아와 있었다.

도준이 옆에 앉자 버스 안이 울리도록 콧방귀를 ‘흥!’ 하고 뀌더니 다른 자리로 가버렸다.

뒤에 앉은 그를 의식해서인지 가녀린 어깨가 잔뜩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제아의 고개가 서서히 돌아가더니, 급기야 창문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보고 있던 도준은 자신이 머리를 박은 듯 아픔이 느껴져 인상을 찌푸렸지만, 당사자인 제아는 아프지도 않은지 머리로 툭툭, 창문에 노크를 하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제아가 또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그는 망설여졌다.

그러다 피식, 웃음이 흘러 나왔다.

맙소사, 내가 눈치를 보고 있다니.

저렇게 무방비하게 잠이 들 걸 알고 차로 데려다 주려고 했건만, 끝까지 고집을 피우더니 결국은 이럴 줄 알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보고만 있어도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하지만 도준의 흐뭇함도 잠시뿐이었다.

바로 앞에 앉은 젊은 남자의 통화 내용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야, 내가 죽이는 동영상 하나 찍어서 갈 테니까 한 턱 단단히 쏠 준비해. 각선미 죽여주니까.”

동영상. 각선미.

도준의 한쪽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내가 한두 번 찍냐? 탈 때 보니까 술 냄새도 나고 창문에 머리를 세게 박는데도 완전 곯아떨어졌어. 내가 만지는 것도 아니고 지가 어떻게 알아? 넌 좀 이따 만나면 지갑 열 준비나 하라고.”

통화를 끊은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아의 옆에 바짝 붙어 앉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도준은 소리 없이 일어나 남자의 뒤로 바짝 다가갔다.

남자는 자신의 뒤에 저승사자가 서 있는지도 모른 채 제아의 치마 사이를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컥!”

순식간이었다. 도준이 남자의 목을 조름과 동시에 손에 들린 핸드폰까지 낚아챈 건.

남자의 목을 조르는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지만, 여전히 잠이 든 제아의 얼굴을 본 도준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 나갔다.

“이 여자가 잠든 걸 고맙게 생각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남자는 자신의 숨통을 한손에 움켜쥔 도준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고양이가, 손에 피 묻히는 걸 끔찍이 싫어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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