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그 심장 제대로 뛰게 해주지.
2016.10.06.
제아는 둔탁한 무언가로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내가 지로는 피하지 않고 오빠는…… 피한다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미약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난 그런 적이 없……!”
그런데 제아는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삐딱하게 눈을 내리깐 도준의 새하얀 얼굴이 무방비하게 풀려버린 그녀의 시야를 사정없이 파고든 것이다.
가로등 불빛 아래, 시야를 파고든 그의 아찔한 모습은 이제 심장을 뒤흔들었다.
두근두근두근, 세차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제아는 다시 한 번 몸부림을 쳤지만, 어림도 없다는 듯 허리를 감싸고 있는 도준의 팔에 더욱더 힘이 들어갔다.
바짝 밀착된 서로의 하체, 얇은 치마를 뚫고 단단한 그의 허벅지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세차게 뛰다 못해 폭발할 것처럼 부풀어 오른 심장 때문에 가슴이 아파올 정도였다.
낯선 그 통증에 제아의 얼굴이 절로 찡그러졌다.
이러니까…… 피할 수밖에 없잖아.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그걸 알 리 없는 도준의 눈엔 제아가 짜증나서 인상을 쓴 걸로 보일 뿐이었다.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그 전엔 절대 놔줄 생각이 없으니까.”
도준은 지금, 질투심에 눈이 먼 포악한 야수로 변해버리려는 걸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적갈색 눈동자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던 정제되지 않은 그의 잔인함이 조금씩 피어오르는 그때, 격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제아의 가슴이 보였다.
“심장이, 격하게 뛰는군.”
도준의 나직한 말에 제아는 정신이 번쩍, 했다.
절대,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
“다, 당연한 거 아니야? 오빠가 너무 바짝 끌어안아서 숨 쉬기가 힘들단 말이야!”
“……뛰나?”
“……뭐라구?”
“한지로였어도, 심장이 이렇게 뛰냐고.”
묘한 눈빛으로 제아를 바라본 도준은 그녀에게 물으면서 허리를 휘감고 있던 팔을 천천히 풀었다.
불에 덴 듯 그의 손길을 피해 뒤로 물러난 제아는 그와의 경계선을 딱 유지했다.
황공스럽게도 그 경계선을 기꺼이 허락해준 도준은 팔짱을 낀 채, 짧고 단호하게 말을 했다.
“대답.”
두 손 두발 다 들 정도로 그는 집요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한도준이란 남자는.
“또, 똑같이 안으면…… 뛰겠지.”
완벽하게 거짓말이었다.
지로가 가까이 다가와도 뛰지 않는 심장은, 도준이 근처에만 다가와도 반응을 했으니까.
그 이유는 그녀도 모른다.
아마도, 낯설고 어색해서 그러는 거겠지.
그녀는 그렇게 치부해버렸다.
제아는 대답과 동시에 조심히 그와 눈을 마주쳤다.
가로등을 등지고 있는데도 얼마나 강렬한지, 이글거리는 그 눈빛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대답……했으니까 들어갈게. 데려다줘서 고마워!”
어둠 속에서도 선연하게 파고드는 그의 눈빛에 제아는 도망치듯 몸을 틀어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
도준은 인천공항이 아닌 집으로 차를 몰았다.
―한 사장, 일정 변경! 출국 날짜 하루 뒤로 딜레이됐으니, 우선 네 집에서 보자고.
도준이 집에 도착했을 때 인호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샤워를 한 후 소파에 앉아 태블릿 PC로 자료를 확인하던 도준의 미간이 신경질적으로 좁아졌다.
제아가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똑같이 안으면 뛰겠지.
그 말인즉슨, 지로와 그가 별 차이 없다는 뜻이리라.
친밀해 보이던 둘의 모습까지 아른거리자 도준은 짜증이 솟구쳤다.
‘어떻게든, 내 곁에 두어야겠어.’
때마침 도어록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인호가 나타났다. 테이블 위에 서류를 왕창 올려놓으면서 인호는 연신 투덜거렸다.
“아니, 지네들만 바쁘나? 우리도 바쁘지! 안 그래, 한 사장? 연락 참 빨리도 줬어, 개새끼들. 준비해달라는 자료는 또 왜 이렇게 많고!”
그럼에도 반응이 없는 도준을 인호가 힐끗, 쳐다보았다.
“내가 그랬지! 그러니까 망해가는 이딴 회사 맡지 말자고! 왜 우리가 아쉬운 소리를 해야 되냐?”
“…….”
“출장도 많고, 회사 일도 많고, 스케줄도 나 혼자 관리 다 해야 하고, 한도준 뒤치다꺼리도 해야 하고! 진짜 몸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는다! 월급을 더 올려주든가!”
입도 까다롭고, 몸도 까다롭고. 한 성격 하는 저 성질 머리는 또 어쩌고.
까칠하다 못해 사회성 제로인 도준은 모르는 이들을 곁에 두는 걸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러니 도준의 집안 살림부터 식사까지, 작은 것 하나도 빠지지 않고 인호 자신이 챙겨야 했다.
인호야 알아달라고 투덜거린 거였지만, 그의 투덜거림에 도준의 머리에서 뭔가 번쩍, 했다.
“요즘 내가 널 너무 부려먹었어. 그렇지?”
“너 왜 이래?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음 돌리지 말고 말로 해라. 겁나니까.”
도준답지 않은 나긋한 음성에 인호는 잔뜩 경계를 했다.
저 녀석, 갑자기 왜 이러나. 밥을 잘못 먹었나?
그런 인호를 향해 도준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비서를 하나 뽑아야겠어.”
“문 하나만 열면 대기하고 있는 아리따운 김 비서, 섹시한 윤 비서, 똑똑한 신 비서는 뭔데? 회사 업무는 비서 세 명으로 충분하다고.”
“네 말이 맞아. 회사 업무는 지금 있는 비서들로 충분하지.”
“그런데?”
“지극히 사적인 업무까지 처리하는 나의 특별 비서를 뽑아야겠어. 물론 회사 내에서 말이야.”
“한 사장, 됐거든? 어차피 뽑아놓고 또 몇 시간 만에 그만두게 하려고. 그냥 내가 아무 소리 안 하고 알뜰살뜰하게 챙겨줄 테니까 그런 소리 마라.”
정리는 쥐뿔도 못하는 주제에 성격은 얼마나 까칠하고 깔끔한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인호 자신도 저 성격 맞추느라 몇 년이 걸렸는데.
모르는 사람을 뽑아서 입 아프게 설명해줘 봤자, 일주일도 안 되어 그만둔 게 수십 번이었다.
그래서 이제 자포자기. 입 아프게 설명만 하느니 내가 그냥 하는 게 빠르지.
“문제아.”
“뭐?”
뭔 소리냐는 듯 눈을 찌푸리는 인호를 바라보며 도준은 느긋하게 새로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절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문제아를 내 비서로 뽑아놔.”
인호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 자식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동생을…….
하지만 눈치 빠른 인호는 이내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동생이 비서 노릇을 한다면, 적어도 가정부 역할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아니, 생각 이상으로 훨씬 편하겠지.
인호는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무슨 일이 있어도 제아를 비서로 뽑아야겠다는 의지가 도준보다도 활활 타올랐다.
“괜찮은 생각이네.”
인호가 의미심장하게 웃자 도준은 고이 보관하고 있던 제아의 적금 통장을 찾아서 그에게 내밀었다.
“추가로 지급되는 월급은 그 통장으로 넣어주면 돼.”
“나만 믿어. 아주 완벽하게, 아무도 의심하지 못하도록 남의 손을 빌려서 문 비서를 옆에 딱 붙여줄 테니까.”
인호가 통장을 들고 사라지자 도준은 그제야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잠시 눈을 감았다.
―넌 완벽해야 해.
―기회는 두 번 주지 않아.
―실패는 용납 안 된다.
그의 어머니인 연희의 말이 끊임없이 뇌리를 공격하고, 그 자신을 향한 가혹한 채찍질을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은 게 벌써 10년째였다.
불면증도 모자라 관자놀이를 날카롭게 공격하는 두통에 숨이 탁, 막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아와 함께 있으면 막힌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제아가 아무리 앙칼지게 노려보고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도 말이다.
숨을 쉬기 위해서라도 제아를 꼭 곁에 두려고 했던 그에게 오늘 또 다른 이유가 생겼다.
곁에 두고서,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하게 옆에 꼭 끼고서. 한지로보다 더…….
“문제아. 그 심장, 제대로 뛰게 해주지.”
***
중학교 동창 모임 덕에 2주 동안의 빠듯한 야근을 잠시 접고 일찍 퇴근 준비를 하는 제아의 앞으로 현영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잠시 그 내용을 읽어보던 제아는 이내 흥미 없다는 듯 그 종이를 휙, 던져버렸다.
“야, 이게 얼마나 대박인데 이 소중한 종이를 던져?”
“그 대박, 너나 해. 나는 그렇지 않아도 할 일이 미어터지니까.”
“직속 상사도 없는데 무슨 할 일이 그렇게 많아?”
“어디서 또 불쑥 떨어진 상사가 그동안 준비한 거 내놓으라고 하면 내밀어야지. 사수 없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있으면 안 그래도 주위에서 못마땅해 하는데 여기서 더 꼬투리 잡히긴 싫어.”
“어휴, 저 성격. 진짜 못 말려.”
제아는 현영의 말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떤 우여곡절인지 몰라도 유난히 그녀를 괴롭혔던 김 대리와 조 과장은 업무 처리 미흡으로 며칠 만에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났고, 결국은 쫓겨나다시피 회사를 그만두고 나갔다.
그녀를 가장 괴롭힌 인물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회사에서 나가는 걸 보니 조금 안쓰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가 코피가 터졌던 그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비상계단에서 잠이 들었던 그날, 조 과장과 김 대리가 사장실에 불려가서 눈물 콧물 쏙 빠지도록 와장창 깨졌다는 것.
베개 해준 값은 정확히 해놓을 테니 걱정하지 말란 뜻이야. 계산은 정확해야 하니까.
도준의 말이 조금 거슬리긴 하긴 했지만, 설마 나 때문에 그들을 자르진 않았겠지.
철두철미한 한도준 사장님이 한낱 사적인 감정으로 그런 일을 했을 리 없으니까.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암, 그렇고말고!
고개를 절레절레하는 제아의 앞으로 현영이 다시 신청서를 내밀었다.
“퇴근하기 전에 이거 작성하고 가. 이거 진짜 대박 기회라니까? 누가 알아? 너나 내가 사장의 특별비서가 될지?”
“난 죽어도 관심 없으니까 현영이 너나 해.”
무엇보다 도준의 특별 비서라니, 내가 절대, 절대! 사양하겠어!
그렇지 않아도 도준과 마주치는 게 불편한 그녀였다.
피하고 피해도 자꾸만 부딪히고 얽혀서 죽겠는데 그의 비서가 되면…….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그의 비서가 되는 순간, 공식적으로 도준의 손바닥 안에 꼼짝달싹 못하고 갇히는 꼴이리라.
손을 절레절레 저으며 급하게 가방을 챙기는 제아의 손에 현영이 다시 볼펜을 쥐여 주었다.
“아, 몰라. 우선 의무적으로 신청서 다 쓰라고 했으니까 대충이라도 쓰고 퇴근해.”
현영의 완고함에 제아는 마지못한 듯 신청서를 대충 작성해서 책상 위에 던져놓았다.
“됐지? 나 먼저 간다!”
제아가 사무실에서 사라지자 현영은 제아가 던져놓은 신청서를 들면서 생긋, 웃었다.
“미션 완료.”
***
작성해놓은 신청서가 접수된 줄도 모른 채, 제아는 불판 위에서 탁탁,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르는 돼지껍데기를 젓가락으로 잡아채서 입 안으로 가져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젠 배가 불러 젓가락을 놓아버린 제아의 중학교 동창들은 지치지 않고 음식을 폭풍 흡입하는 제아를 질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피부도 우리 중에서 제일 좋은 계집애가 회비로 계산한다고 껍데기 겁나 처먹습니다, 진짜. 콜라겐이 얼굴 위로 터져 흐르겠다, 문제아!”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댔어. 겁나 처먹고 죽을 테니 말리지 마.”
뭔 소리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는 정화의 손을 덥석 잡은 제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나 다음 주부터 주말은 헤븐 커피숍에서 서빙 알바, 평일은 밤 10시부터 1시까지 동네 포유 편의점에서 알바 해. 이제 고기도 아닌, 껍데기 먹을 시간도 없다 이 말이지. 그러니까 오늘만은 나 엄청 먹어도 이해해줘. 알았지?”
“뭐야, 너희 집 또 빚 생겼어? 아버님이 또 주식 한 거야? 말 좀 해봐!”
제아는 대답 대신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엄마인 윤영에게 고스란히 월급이 가는 이상, 도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면 미친 듯이 일하고 또 아르바이트까지 소화를 해야 한다.
그래서 제아는 지금 눈앞의 돼지 껍데기가 마지막 만찬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이후부터 이런 껍데기를 먹는 것조차 내게 사치가 될 테니까.
“사랑하는 정화 총무, 나 껍데기 2인분만 더 시켜주면 안 돼?”
애교스럽게 웃는 제아를 정화는 기가 막힌 눈빛으로 응시했다.
“돼지 껍데기 먹고 15만 원 넘은 건 우리밖에 없을 거야! 그만 좀 처먹어! 너 그러다 내일 배탈 난다!”
정화의 말에 반박이라도 하려는 듯 건강을 타고난 위와 장이 활발히 일을 한 결과, 제아의 배 속에서 신호가 왔다.
“정화야, 나 화장실!”
“맙소사, 비우고 와서 또 얼마나 먹으려고! 나 계산할 거야!”
“안 돼. 나 아직 덜 먹었단 말이야! 금방 올 테니까 계산하지 마, 사랑하는 정화야!”
손을 흔들면서 제아가 화장실로 모습을 감추자, 얌전히 지켜보고 있던 동창들은 그제야 참았던 수다를 폭발했다.
“제아 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쟤 스트레스 받으면 엄청 먹어대잖아.”
“맞아. 쟤 옛날에 오빠가 자기 버리고 미국 유학 갔을 때랑 아빠가 주식으로 돈 날렸을 때, 그리고 취직 스트레스 받았을 때 한동안 엄청 폭식했잖아. 그치? 우리 회비도 엄청 깨지고.”
“그거야 옛날 일이지. 대기업 다니고 있지, 멋지고 돈 많은 남사친까지 있는 년이 뭐가 스트레스야. 그리고 오빠가 뭐 버리고 갔니? 분명 성공해서 쟤네 집 빚 다 갚아줬을걸?”
친구들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정화는 테이블 위에 놓인 제아의 핸드폰을 들어 친구들을 향해 흔들어 보였다.
“마음껏 먹게 내버려둬.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푸는 앤데 당연히 우리가 이해해야지. 어차피 우리가 계산할 것도 아닌데.”
“무슨 소리야?”
“우리가 엄청 탐냈던 돈 많고 잘생긴 제아의 남사친, 한지로.”
“한지로라면…… 그 잘생기고 싸가지 없는 남자애? 어머, 난 걔 좀 무섭던데.”
“제아라면 껌뻑 죽잖아. 작년에도 삼겹살집에서 우리 모임 했을 때 그때도 몰래 전화했더니 바로 달려와서 계산해주고 갔잖아. 멍멍이로 변신한 제아도 깔끔하게 데리고 사라져주고.”
“맞다!”
“문제아 저 계집애, 지 오빠도 그렇고 한지로도 그렇고. 괜찮은 남자는 죄다 꿰차고 있으면서 소개는커녕 잘 보여주지도 않잖아. 안 보여주면 우리가 직접 불러서 보는 수밖에. 물론 회비도 아끼고 말이야. 어때?”
은밀한 정화의 제안에 친구들은 일제히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며 즐겁게 외쳤다.
“코올!”
모두의 동의를 얻어 제아의 핸드폰을 열자마자 잔뜩 떠 있는 부재 목록.
-한 사장님-
-한 사장님-
-한 사장님-
-한 사장님-
-한 사장님-
일방적인 연락에 한씨 성을 가진 남자라…….
“이 계집애, 우리가 또 전화할까 봐 한지로 이름도 바꿔놨나 본데? 그런다고 내가 못 찾을까봐?”
“뭐라고 해놨는데?”
“한 사장님으로 해놨어. 바꿀 거면 성이라도 바꿔놓든가. 여하튼 단순한 우리 문제아.”
“누가 알아? 걔네 집 엄청 잘산다면서, 진짜 어디 가게 사장님 됐을 수도 있지.”
정화는 망설임 없이 ‘한 사장님’을 클릭한 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핸드폰 너머에서 나지막하게 남자의 세련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문제아.]
한지로가 이렇게 목소리가 멋있었나?
정화는 남자의 나른한 음성에 순간 귀가 찌릿찌릿, 마치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정화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본론을 꺼냈다.
“어이, 한 사장님.”
[넌 누구지?]
단번에 제아가 아님을 알아챈 남자에게 정화는 감탄을 했다.
“나 제아 중학교 동창 정화라고 하는데. 기억나? 작년에도 한 번 내가 연락해서 우리 봤었잖아. 삼겹살집, 오케이?”
잠시 침묵이 흐르고…….
[용건만 간단히.]
“우리 여기 고기집인데 제아 좀 데려가라구. 온 김에 계산도 해주면 더 좋구. 호호! 너의 제아가 지치지 않고 먹어대서 우리 회비가 지금 거덜나게 생겼거든.”
통화하는 남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몰라도 정화는 갑자기 돼지 껍데기 집이 아닌, 근처에 있는 한우 집을 알려주곤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도 정화는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꿀이라도 발랐나, 목소리 진짜 죽이네.”
“무슨 소리야?”
“어? 어, 아니야. 우선 여기 계산은 우리 회비로 한다.”
“왜? 한 사장 안 온대?”
“우리의 한 사장이 지금 당장 온다고, 마음껏 먹으라신다. 돈도 많은데 돼지 껍데기를 계산하게 하면 한 사장님한테 예의가 아니지. 너희들, 소고기 더 먹을 수 있지?”
“그럼!”
때마침 제아가 화장실에서 배를 문지르며 나오자 정화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얼른 올려놓았다. 그리고 인심 쓰듯 제아에게 말을 했다.
“제아야, 우리 소고기 먹으러 갈래?”
“웬 소고기? 난 껍데기면 만족하는데?”
“에이, 이왕 먹고 죽을 거면 소고기 먹어야지. 우리 소고기 먹으러 가자.”
“갑자기 무섭게 왜 이래. 회비 거덜 난다고 구박할 땐 언제고.”
커다란 눈에 한가득 의심을 품고 있는 제아를 정화는 와락 껴안으면서 일으켜 세웠다.
“회비 더 내란 말 안 할 테니, 걱정 말고 소고기 먹으러 가자. 호호호!”
***
그 시각, 도준은 집무실에 있었다. 인호와 함께 밀린 업무를 겨우 마무리하고 막 집으로 가려던 차였다.
하지만 제아의 동창이라는 여자의 전화 한 통에 도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짜고짜 반말하는 것하며, 작년에 봤다는 말까지.
유추해 보건대 분명 한지로로 착각을 하고 전화한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당연하게 한지로가 바로 달려올 것처럼. 제아에게 남자는 오로지 한지로밖에 없는 것처럼.
그러니, 내가 가주는 수밖에.
집무실을 나서는 도준에게 인호가 말을 걸었다.
“이 시간에 어디 가려고? 내일 새벽에 공항으로 일찍 출발하는 거 몰라? 집에 가서 좀 쉬어.”
“먼저 들어가. 잠깐 들러야 할 데가 있어.”
***
한 시간 만에 제아의 친구가 알려준 고기 집에 도준이 도착하자 때마침 제아는 취기가 살짝 오른 듯 생글생글 웃으면서 화장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도준은 제아의 친구들이 있는 테이블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실례합니다.”
지글지글 불판 위에서 고기를 굽느라 바쁘던 제아의 동창들은 갑자기 나타난 근사한 남자의 등장에 순간 멍하니 입을 버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생긴 남자도 있구나, 감탄해 마지않는 표정으로 완전 넋이 나간 제아의 동창들을 향해 도준은 예의바르게 말을 했다.
“문제아 친구분들, 맞습니까?”
“맞는……데, 누구신지?”
“한 사장, 입니다.”
“네에?”
이번엔 감탄이 아닌 놀라움으로 정화의 입이 벌어졌다.
분명 한지로한테 전화를 했는데, 한 사장이라고 나타난 이 남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딱 봐도 범상치 않은 남자의 아우라.
제아의 지인은 분명하겠지만 멋대로 고기 집에 호출할 레벨은 아니라는 걸 그녀는 단번에 느꼈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정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저, 저기! 제가 전화를 잘못 했나 봐요. 저기, 그러니까, 제아 친구 한지로한테…….”
정화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실수도 실수였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이 부신 눈앞의 남자 때문에 이성이 남아나질 않으니, 자꾸만 말이 더듬어져 나왔다.
어쩐지, 목소리가 기가 막히게 근사하다 했다. 저렇게 생겼으니 목소리도 덩달아 근사할 수밖에.
“전화 제대로 했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제아를 한지로에게 넘기는 일은 없으니, 그는 오히려 정화에게 감사해야 했다.
잠시 말을 멈춘 도준은 정화를 향해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말을 했다.
“한지로가 아니라 한도준, 입니다.”
“네? 아, 네, 한도준 씨. 저기, 그런데 누구……신지? 우리가 알기론 제아에게 아는 남자는 한지로밖에 없는 걸로 아는데.”
제아와의 관계를 묻는 여자의 눈동자는 호기심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러니, 출장이고 뭐고 만사 제치고 달려올 수밖에.
“제아 오빱니다.”
“오빠……요?”
도준은 자신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제아의 친구들을 향해 그답지 않게 부드러운 미소를 날렸다.
“우선, 아는 오빠라고 해두죠.”
그러니 제아에 대해 알고 있는 걸 모두 말해봐.
그 메시지를 담은 도준의 매혹적인 미소는 아주 정확하게, 제아의 친구들에게 효과를 발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