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나랑 자고 갈래?
2016.10.03.
제아는 밤 9시가 넘어서까지 넓은 사무실을 덩그러니 지키고 있었다. 커피를 괜히 줘서는!
―내 첫 작품이, 제아 씨 손에 달렸습니다.
도준의 말이 자꾸만 뇌리에서 맴돌고 무슨 일이 있어도 매진 기록을 세워야 한다는 강박관념까지 들었다.
게다가 얼떨결에 손에 쥐어진 42만 원 때문에 그녀의 부담감은 더욱 컸다.
오늘까지 수정한 기획안을 넘겨야 하는데.
머리가 꽉 막힐 때면 달달한 게 들어가야 제 맛. 그녀는 서랍 안에서 복숭아 사탕을 꺼내 입 안에 쏙, 넣었다.
달달한 복숭아 사탕으로 잔뜩 굳은 손끝을 푼 후에 다시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던 그녀의 뒤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배달 왔습니다!”
우렁찬 남자의 음성이 텅 빈 사무실을 울려 퍼졌다.
손에 든 쇼핑백을 보이면서 씨익 웃고 있는 지로의 모습을 본 제아는 그저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한지로?”
“너 저녁도 안 먹고 일할 거 아냐. 이 오빠가 야식 들고 오셨다.”
“야근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네가 하도 핸드폰 전화 안 받아서 집에다 전화했지. 성질도 지랄 맞아서 저녁도 안 먹고 일할 거라고 너희 어머니가 걱정하시는데 내가 안 올 수가 있나?”
“네 성격도 만만치 않거든요?”
“우리 제아 또 옛날처럼 앞뒤 평면 될까 봐 겁나서 달려왔다면 믿을래?”
“한지로!”
화끈 달아오른 얼굴로 꽥 소리를 지르자, 지로는 씩 웃더니 손을 뻗어 제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걱정 마. 앞뒤 평면 돼도 오빠가 데리고 살아줄 테니까.”
“뭐래, 됐거든?”
컴퓨터를 향해 몸을 트는 제아를 향해 지로가 다가서더니 갑자기 킁킁거렸다.
“어디서 이렇게 달달 향긋한 냄새가 나지? 입술인가?”
지로가 갑자기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키스라도 할 것처럼 다가온 지로의 표정은 장난스러웠다.
하지만 쌍꺼풀이 없는 날카로운 눈매만큼은 진지했다.
“저리 안 가?”
“왜, 내가 이렇게 하니까 심장 떨려?”
“하나도 안 떨리거든?”
갑자기 제아의 손을 움켜쥔 지로가 자신의 심장 부근에 그 손을 얹었다.
“나는 떨리는데.”
“……!”
“그래서 너도 떨렸으면 좋겠는데.”
순간, 침묵이 찾아왔다.
얼굴을 가까이 마주한 채 제아는 천천히 시선을 떨어트렸다.
날카로운 눈매만큼 날카롭게 솟은 콧대와 콧날, 선이 또렷한 잘생긴 입술.
지로에게서 풋풋한 스킨향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한지로도 정말 잘생겼구나.’
차라리 심장이 뛰었으면, 미친 듯이 뛰었으면.
하지만 뛰기는커녕 점점 더 차분하게 가라앉는 심장 박동.
피하지 않는 제아의 모습에 용기를 얻었는지 조금 더 가까워진 입술과 숨결은 조심스러운 떨림을 품고 있었다.
뒤늦게 지로가 뭘 하려는지 깨달은 제아가 몸을 뒤로 바짝 빼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힘으론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제아는 야무지게 지로를 노려보았지만, 그의 양손이 의자의 팔걸이를 단단하게 붙들고 있었다.
이게 이제 보자보자 하니까!
“너 조금만 더 다가오……?”
그때 사무실 입구의 벽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관전하듯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도준이 보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도준의 등장에 놀란 제아는 잡힌 손목 대신 발을 들어 지로의 배를 발로 뻥, 차버렸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지로는 제아의 손을 잡고 있던 손으로 배를 움켜잡았다.
“윽! 힐 신고 배를 차면 어떻게 하냐? 아, 씨, 무서운 계집애!”
“이번 장난은 좀 짓궂었어, 한지로.”
입술은 웃었지만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 제아의 목소리는 그녀의 눈빛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런 제아를 잠시 올려다본 지로가 갑자기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복숭아 향이 너무 좋아서, 말이야.”
홀린 듯 어딘가를 보던 제아는 갑자기 서랍 안에서 복숭아 사탕을 한 개 꺼내 지로의 입 안으로 쏙, 넣어주었다.
“도시락은 꼭 다 먹을 테니까, 오늘은 그냥 가줄래? 나 오늘 늦게 끝날 것 같거든.”
“기다릴게, 버스 끊기면 어떻게 가려고. 너 택시비도 없잖아.”
자신의 주머니 사정까지도 훤히 알고 있는 지로를 제아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엔 미안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택시비도 없이 내가 야근할 것 같아? 걱정하지 마. 그리고 너 이렇게 기다리면 나 미안해서 일도 더 안 돼.”
힘없이 일어나는 지로의 입술에서 피식, 시니컬한 웃음이 흘러 나왔다.
‘난 아직도, 너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하는 존재구나.’
“한지로!”
그가 돌아서자 도시락이 담긴 쇼핑백을 번쩍 들어 올린 제아가 그를 향해 한쪽 윙크를 찡긋, 날렸다.
“잘 먹을게. 역시 너밖에 없어!”
그 미소 하나에 서운했던 것들이, 씁쓸했던 모든 것들이 눈 녹듯이 스르륵 녹아버렸다.
그래서 지로는 또다시 제아 바보가 되어버렸다.
***
지로를 보내자마자 10층 로비로 향한 제아는 창가에 서 있는 도준의 유려한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땀에 젖은 손을 치마에 쓱 문댄 후에야 제아는 조심히 도준을 불렀다.
“오빠.”
서서히 돌아선 도준의 짙은 눈동자가 제아의 눈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반기지 않는 기색이군.”
도준의 음성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퉁명스러웠다.
원래도 그런 말투였지만, 지금은 유난히 심하다고 해야 할까. 그가 반가운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반갑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제아는 가만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그의 눈동자가 유난히도 깊어 보인다.
그가 화가 난 것 같은 기분은 아마도, 착각이겠지.
그런데도 그의 눈빛이, 말투가 신경이 쓰이는 제아였다.
지은 죄도 없는데, 괜히 죄 지은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는, 지금 도준의 눈빛이 딱 그런 눈빛이었다.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못한 건 없었다.
“내가 방해했나 보지?”
“방해……라니?”
“한지로와의 키스.”
“뭐어?”
제아는 너무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도준의 위치에서 봤을 때는 오해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로가 복숭아 사탕 냄새 맡고 어디서 나는 거냐고, 가까이서 냄새를 맡은 것뿐이야. 키스하려는 건 절대 아니었어.”
그녀는 왜 자신이 도준에게 이런 변명을 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유를 몰랐다. 그런데도 꼭 해야만 하는 이 기분은 또 뭔지.
“키스할 듯 남자가 다가가는데도, 넌 피하지 않았고.”
씹어뱉듯이 말을 내뱉는 도준이의 눈빛이 너무도 냉랭해서 제아는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눈빛만으로 저렇게 폭발적인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까지 했다.
“남자이기 이전에 가장 친한 친구야. 지연이 같은 친구. 10년 동안 한결같은 모습으로 내 옆을 지켜준 남자 사람 친구 한지로. 그건 오빠도 잘 알지 않아?”
제아는 일부러 ‘10년’이란 말에 힘을 주었다.
‘오빠가 날 버린 10년, 한지로는 곁에 있어 줬어.’
도준이 그 메시지를 알아듣길 바라며 말이다.
그런 제아를 빤히 바라본 도준이 느릿하게 한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제아는 반사적으로 그가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났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도준의 묘한 눈빛이 잠시 제아의 얼굴에 닿았다.
하지만 도준은 그 대신 제아에게 USB를 내밀었다.
“웬…… USB?”
“모나무흐 마케팅 관련 기획안과 관련 자료들이야. 참고하라고.”
“고마워.”
“그 안의 자료들, 다 파악해놓는 게 좋을 거야. 이후에도 꽤, 유용하게 쓰일 테니.”
이후에도, 꽤, 유용하게? 도준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은 제아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당히 하고 퇴근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도준은 찬바람을 쌩하니 휘날리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도준이 주고 간 USB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는 제아의 입술 사이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사무실 입구에 있는 쓰레기통 입구에 걸려 있는 쇼핑백이 눈에 들어왔다.
쇼핑백을 들어서 열어보니 아직까지 따끈따끈한 도시락이 들어 있었다.
그것도 그녀가 좋아하는 메뉴들로만 구성이 된.
설마, 이 도시락 주려고 온 거야? 그런데 왜 쓰레기통에 비참하게 쳐 박혀 있는지.
“뭐야, 사람 신경 쓰이게.”
쇼핑백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컴퓨터 본체에 USB를 연결해서 그 안을 열어본 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 방대한 양의 자료, 기획전 한 번 진행하는 제아에게는 너무 과한 용량의 정보들이었다.
“세상에, 이걸 다 파악해놓으라고?”
내 뇌가 자기처럼 슈퍼 뇌라도 되는 줄 아나?
하도 기가 막혀서 잠시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본 제아는 그래도 그 안의 자료들을 하나씩 열어서 일일이 확인을 했다.
깊숙하게는 보지 않아도 대충 어떤 자료인지 파악을 해놓고 퇴근할 심산이었다.
USB에 있는 내용들을 대충 확인하고 GK몰 기획안을 메일로 전송한 후에야 무심코 시계를 확인한 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시각 오후 11시 20분.
막차 버스가 아슬아슬하게 끊기기 직전이었다.
버스를 놓치는 순간 택시비 15,000원이 날아간다!
“버스! 내 버스! 하느님, 부처님 제발 버스 놓치지 않게 해주세요!”
불이 나게 사무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에 도착한 순간, 제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젠 환영이라도 보이는 건가?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 소파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서류를 보고 있던 남자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안경을 벗으면서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문제아.”
하다못해, 환청까지 들린다.
눈앞의 존재가 믿겨지지 않아 커다란 두 눈만 깜빡이는 제아에게 도준이 서서히 다가왔다.
“오……빠?”
도준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들린 쇼핑백으로 향했다. 슬쩍 민망해진 제아는 쇼핑백을 슬그머니 뒤로 숨겼다.
“누, 누가 아까운 도시락을 버리고 갔더라구. 손도 안 된 새 거인 거 있지! 그래서 내가 냉큼 주웠지. 내가 좋아하는 메뉴가 잔뜩……이더라구.”
이쯤 되면 ‘내가 사온 거야.’라고 한마디 할 법한데도 도준은 다른 말을 흘렸다.
“집까지 데려다줄게.”
“설마, 나 데려다주려고 기다린 거 아니지?”
“나 때문에 야근하는 거니까.”
“이게 왜 오빠 때문이야? 월급 받고 하는 일이 이건데.”
“그 월급, 내가 주는 건 아니잖아.”
월급이야 회사가 주는 거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 할 말은 아닌 듯싶었다.
그런데도 반박할 수 없게 만드는 게 바로 도준이었다.
그래도 그에게 더 이상의 신세를 지기는 싫은 제아였다.
“버스 타고 가면 돼.”
고집스러운 제아의 말에 도준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11시 30분, 막차 방금 떠났는데.”
버스 시간까지 파악한 도준의 한마디에 제아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열렸고, 도준이 먼저 올라탔다.
“시간 낭비 그만하고 타지 그래.”
결국 제아는 얌전한 강아지처럼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제아를 태운 도준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오자마자 그의 전화가 울렸다.
“아직 밖이야, 집은 한 시간 정도 후에. 인천 공항으로 바로 가지.”
도준이 전화를 끊자, 제아는 조심히 물었다.
“어디 가?”
“출장.”
“몇 시 비행기인데? 짐은 쌌어?”
“너 데려다주고 집에 갔다가 바로 나올 거야.”
그 말인즉슨, 시간이 촉박하다는 뜻인데. 그런데도 이 시간까지 데려다주겠다고 기다리고 있었다니.
가끔씩 이럴 때보면 도준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고생을 뭐하러 해? 나 그냥 택시 타고 갈 테니까 차 세워줘!”
“택시는 위험해, 너 데려다주고 알아서 갈 테니 걱정하지 마.”
“오빠 집 이 근처 아니야? 그런데 끝과 끝을 이 시간에 왔다 갔다 하면서 시간 낭비하겠다구?”
“괜찮아.”
그럼에도 도준은 단호했다. 어휴, 이 고집불통! 어떻게든지 중간점을 찾아야 한다.
“그럼 오빠 집 먼저 가. 짐 챙기고 공항 가는 길에 나 데려다 주면 되잖아.”
“…….”
“공부 머리는 돌아가면서 이런 머리는 잘 안 돌아가? 나 때문에 잠도 못 자고 고생만 하면 내가 편할 것 같아? 나도 택시 타지 않을 테니까 오빠도 이건 양보해. 그래야 나도 마음 편하게 차 얻어 타고 가지.”
도준 못지않게 한 고집 하는 그녀였다.
앙칼진 고양이 눈이 잔뜩 치켜 올라간 걸 보니, 제아도 절대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옅은 한숨을 내쉰 도준은 이내 차의 진로를 변경했다.
10여 분 정도 만에 주상복합아파트 입구에 들어서서 차가 멈추자 그제야 제아는 입을 열었다.
“근데 몇 시 비행기인데 잠도 안 자고 바로 가는 거야?”
“기껏해야 한두 시간 여유야. 그러니 바로 가는 게 편해.”
“밤을 꼴딱 새우고 출장을 가겠다고? 비행기에서 잠도 편히 못 잘 그 성격에?”
“괜찮아.”
또다시 괜찮다는 말로 일관하는 도준의 태도에 제아는 과감히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확 끌어당겼다.
한 뼘도 되지 안 되는 거리에서 서로의 눈빛이 얽혀들었다.
나른하게 풀린 도준의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짙은 색기에 제아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정신 차리자, 문제아!’
마음을 독하게 먹은 제아는 다시 한 번 유혹적인 그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피가 잔뜩 몰린 하얀 흰자위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눈은 이렇게 피곤하다는데. 오빤 좀 자야 돼.”
제아는 지금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야 단순하게 민폐를 끼치기 싫어서 그러는 거라고 하지만, 당하는 도준은 아니었다.
그의 뺨을 감싸고 있는 제아의 따스한 온기가, 깊숙이 스며드는 앙큼한 눈빛이, 달달한 향을 품은 숨결이 아찔하게 입술을 간질였다.
그걸 알 리 없는 제아는 장황하게 잔소리를 퍼붓고 있었다.
“사람이 잠을 자야지! 젊다고 막 혹사시키면 안 돼! 잠깐이라도 눈 좀 붙이고 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면 사장님 월급 회장님이 올려주신대? 그러니까…….”
‘오빤 올라가서 잠깐 눈 좀 붙여. 난 거금을 들여 택시를 타고 갈 테니까.’
그의 얼굴을 감싼 손을 풀면서,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제아는 잔소리를 마무리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도준이 갑자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문제아.”
그냥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평소보다도 더 나직하게 깔린 음성 때문일까,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온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제아의 떨리는 눈빛이 반쯤 어둠에 잠긴 새하얀 도준의 얼굴에 닿았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섬세한 입술 선이 부드럽게 휘면서 흘러나온 그의 말이 어둠을 타고 지독할 정도로 야하게 그녀의 귀를 파고들었다.
“나랑 자고 갈래?”
도준의 그 한마디에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나, 뭔가, 엄청난 말을 들은 것 같아.
“방금, 뭐라고 했어?”
“그렇게 내가 잠깐 눈 붙이기를 원하면 나랑 같이 자고 가던지. 방은 많으니까.”
“……!”
“내가 보기에 제아 너도 꽤 피곤해 보이는데. 아닌가?”
사실은 죽을 정도로 피곤한 제아였다.
하지만 도준의 그 한마디에 그녀의 온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잠기운은 안개처럼 깨끗하게 증발해버렸다.
“하, 하나도 안 피곤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얼른 짐 싸서 내려와! 피곤하기는 무슨! 야근을 내가 얼마나 잘하는데? 아, 더워. 에, 에어컨 좀 틀어주고 가, 오빠.”
횡설수설한 제아는 창 쪽으로 홱, 고개를 틀어버렸다.
짙어진 그의 눈빛이 완벽하게 흘러내리는 제아의 새하얀 목선을 더듬었다.
어둠 속에서도 붉게 달아오른 앙증맞은 귀까지도.
불안한 듯 무릎 위에 놓인 가녀린 손은 자꾸만 꼼지락거리고, 내리깐 긴 속눈썹이 당황한 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지극히 단순한 행동마저도 그의 본능은 치명적인 자극을 당하고 있었다. 갑자기 몸의 한곳이 찌릿찌릿할 정도로 뻐근해진다.
도준은 꺾어주길 바라는 꽃을 향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뻗어나가는 손을 피가 나도록 꼭 쥐었다.
“기다려. 금방 올 테니까.”
도준이 차에서 내리고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제아는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눈높이까지 손을 들자 아직까지도 달달 떨고 있는 손끝이 보였다.
심장이 있는 가슴 부분을 그 손으로 꾹 누르면서 제아는 중얼거렸다.
“심장아, 살아 있는 거 맞지?”
***
도준의 차가 제아의 동네 입구에 다다랐을 땐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그녀를 따라 차에서 내리는 도준에게 제아는 얼른 말을 했다.
“혼자 갈 수 있어!”
“밤길은 위험해.”
“이 동네에서 20년 넘게 살았거든? 우리 동네, 조금도 안 위험해. 그건 오빠도 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어.”
도준에 의해 또다시 가차 없이 말 꼬리가 잘려버렸다.
결국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잿빛 어둠으로 가라앉은 동네를 말없이 걸었다.
그녀가 사는 집 대문이 보이는 골목길에 다다르자 제아는 걸음을 멈추고 도준을 향해 비스듬하게 몸을 틀었다.
“여기서부턴 혼자 갈게. 설마, 이 길도 위험하다고 할 건 아니지?”
“……그러든지.”
흐릿한 빛을 흘리는 가로등을 등진 도준의 날렵한 실루엣이 찌르듯이 시야를 파고들었다.
지금은 어둠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지만 핏발 선 그의 눈도 자꾸만 떠올랐다.
난 오늘도 도움을 받았는데, 오빠한테 뭐 하나 해줄 게 없구나.
그러다가 제아는 갑자기 핸드백을 열어서 복숭아 사탕을 하나 꺼내서 내밀었다.
보잘것없는 사탕이긴 하지만, 지금 그녀가 줄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피곤할 때는, 달달한 게 최고거든……. 먹을래?”
그녀가 내민 사탕을 도준은 받지 않고 잠시 바라보았다.
하긴, 오빠가 이런 사탕을 먹을 리가 없지.
사탕을 내민 민망한 손을 거두려는 순간, 도준이 사탕을 가져갔다.
그는 사탕의 포장을 까서 동그란 사탕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그의 입이 아닌, 제아의 입으로 말이다.
입안으로 갑자기 침입해 들어온 사탕을 얼떨결에 받아먹은 제아는 본능적으로 쪽쪽 빨았다.
먹기 싫으면 먹기 싫다고 하지 왜 나한테 먹이는 거야?
은근히 서운하고, 또 민망했다. 그래도 서운한 기색은 차마 표현하지 못하겠고. 제아는 퉁명스럽게 작별 인사를 하고 걸음을 옮겼다.
“출장 잘 갔다 와.”
그런데 몇 걸음 채 떼기도 전에 몸이 돌려졌다.
그리고 훅 다가온 도준의 얼굴에 놀라 제아가 얼른 몸을 뒤로 뺐지만,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휘어 감고 있었다.
도준은 제아에게 보란 듯이 느릿하게 상체를 기울여왔다.
그가 상체를 기울일수록 묘기 부리듯이 휘어지는 제아의 등. 하지만 휘어지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도준의 가슴에 양손을 얹은 제아 때문에 아슬한 거리가 유지가 되었다.
솟아오른 콧날만 아니라면 닿고도 남았을 서로의 입술.
“정말 복숭아 향이, 나는군.”
핑크빛 입술 사이로 가쁘게 새어 나오는 숨결에도 달달한 복숭아 향이 어려 있다.
감히, 이 거리까지 한지로를 허락했다 이거지.
어둠 속, 도준의 짙은 적갈색 눈동자가 지독한 소유욕에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의 품속에 갇힌 채 바르르 떨리는 제아의 속눈썹 사이를 채우는 건 바로 두려움……이었다.
도대체 너는 왜, 나만 이렇게 두려워하는 건데.
한지로가 그랬던 것처럼. 도준은 비스듬하게 고개의 각도를 틀고, 내리깐 시선 밑으로 제아를 보면서 좀 더 다가갔다.
그의 미세한 움직임에 더는 못 참겠는지 제아는 고개를 홱 틀고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경계라도 하려는 듯 얇은 블라우스 사이로 가늘게 떨리는 동그스름한 어깨가 잔뜩 올라왔다.
차마 소리는 못 지르겠는지 속삭이듯이 빠르게 제아는 말을 내뱉었다.
“놔줘!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질투심에 몸부림치는 나를 보고서도,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문제아, 나야말로 묻고 싶어.”
한지로는 되는데, 나는 안 되는 이유.
“한지로는 피하지 않으면서.”
미치도록 자존심이 상해. 그래서 화가 나.
“오빠인 나는 질색하며 피하는 이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