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괴물 체력을 가진 숫총각
2016.09.29.
곧 있을 대대적인 인사 조정 명단엔 간부급들뿐이었지만, 방금 몇 명이 더 추가가 되었다.
“박경훈 팀장, 이유나 대리, 김연숙 대리, 조현민 과장.”
제아가 떠난 후에도 코끝을 아련하게 파고드는 희미한 복숭아 향은 좁은 공간 곳곳에 배어 있었다.
코끝을 희미하게 감도는 은은한 복숭아 향.
촉촉이 젖어 있던 새까만 눈망울과 입술.
그 유혹에 또다시 담배가 당긴다.
거부할 수 없는 너의 향기와 입술의 유혹.
결국 도준은 오늘도 습관처럼 담배를 한 개비 꺼내서 다시 입에 무는 순간 인호에게서 급하게 연락이 왔다.
[한 사장, 네 형님 오셨어!]
“형님이라니.”
[한강훈 이사 말이야!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는데 어쩌지?]
“곧 내려가지.”
인호로서는 강훈을 내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잠시 눈살을 찌푸린 도준은 짧게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집무실의 문을 열자 다리까지 올리고 긴 소파를 차지하고 있는 강훈이 보였다.
집무실의 주인이 들어왔는데도 강훈은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씨익 웃었다.
“내 동생 한도준, 오랜만이야. 10년 만인가?”
“용건이 뭐지?”
“오늘 저녁, 가족 식사 모임 있으니 참석하도록 해. 10년 만에 돌아왔는데 가족끼리 식사 한 끼 해야지. 마침 지나가던 길이라 직접 전해주려고 들른 형한테 너무 매정하군.”
“동생에 가족이라……. 재수 없는 건 여전하군.”
도준이 이죽거리듯 강훈의 말을 다시 씹어뱉자 강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공식적으로는 난 네 형이야. 제일 그룹 내에서도 윗사람이기도 하고. 그러니 말 함부로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겁쟁이에 입까지 가벼운 형 따위, 난 둔 적 없는데.”
과거의 어떤 장면을 연상시키는 도준의 한마디에 강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왔다.
“한도준, 10년 전 그때처럼 내가 경고 하나 더 해줄까? 왜 돌아왔는지는 모르지만, 예정대로 미국 지사로 다시 돌아가는 게 좋을 거다. 무참하게 짓밟히기 전에 말이야.”
강훈의 살벌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도준의 섬세한 입꼬리엔 흐릿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10년 전 그때처럼, 고자질이라고 하려나 보지?”
“건방진 자식 같으니라고!”
집무실의 문이 거칠게 ‘쾅’ 닫히고 강훈이 사라졌지만, 도준은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무참하게 짓밟힐 건 그가 아니라 그들일 테니까.
***
제일 백화점 집무실로 돌아오자마자 강훈은 책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치며 박 실장에게 날카롭게 물었다.
“건방진 자식 같으니라고! 한도준, 스케줄 파악이 전혀 안 되는 건가?”
“죄송합니다. 한도준 사장님 쪽도 워낙 철두철미한지라, 유인호 실장 이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그쪽에 사람 붙여서 동선 파악해. 누구를 만나고 뭘 하고 다니는지, 좀 더 깊게 파고들란 말이야!”
이제 겨우 그들 부자의 손에 제일 그룹이 거의 쥐락펴락 당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그의 동생 도준의 귀국은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제일 그룹의 실세이자 그의 아버지인 한태영 부회장도 모르고 있을 정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한 회장의 뒤에 숨어서 그들의 목줄을 졸라매는 건 분명 새어머니 한 연희, 그 여자가 분명하리라.
피도 눈물도 없는 한연희, 그녀는 향기 없는 꽃과 같았다.
고상하고 우아한 척은 다 떨더니 아버지 몰래 남자의 외모에 홀려 밖에서 아이까지 낳은 여자였다. 물론 그 덕분에 지금 강훈 자신이 존재하는 거지만.
도준과의 첫 만남을 떠올린 강훈은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 이름만 떠올려도 미칠 것만 같았다.
―네 새어머니는 자식을 낳지 못 하는 몸이야,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라. 때가 되면 한 회장이 널 손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테니.
10년 전, 오로지 아버지인 한 태영의 말을 뇌리에 새기며 제일 그룹의 그늘 속에서 강훈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여자는 절대 경영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한 회장의 확고한 신념 때문에 제일 그룹은 서서히 사위인 태영에게로 기울고 있는 상태였다.
애도 못 낳는 주제에 얌전하게 웅크리고 있으면 될 것을.
주말 아침, 잠에서 깨어나 강훈이 1층으로 내려왔을 때, 연희는 계집애처럼 곱상하게 생긴 소년을 데리고 태영 앞에 앉아 있었다.
얼핏 봐도 단정한 교복 차림에 단정한 외모, 뿔테 안경까지 쓴 소년은 전형적인 모범생의 모습이었지만 눈을 내리깔고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얼핏 봐도 느껴지는 소년의 묘한 매력.
“강훈이 호적에 올리는 대신, 내 아들 도준이도 같이 올릴 테니 그렇게 알아요.”
아들……이라니.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강훈은 궁금했지만, 태영이 알아서 하리라 믿으며 힐긋 곁눈질로 소년을 바라본 후 자리를 피했다.
며칠 후 강훈이 다시 도준을 만난 건, 가장 핫하게 잘 나간다는 MB 클럽이었다.
VIP룸에 앉아 느긋하게 술을 마시던 강훈은 친구인 정민과 함께 다른 VIP룸으로 쳐들어가는 중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태호 여친 알지? 유성 식품 딸 임유진.”
“그런데.”
“유진이가 다른 놈 있다고 헤어지자고 했나 봐. 근데 걔가 그 남자랑 룸에 들어가는 걸 태호가 보고 빡쳤다. 죽여 버린다고 경호원들까지 죄다 끌고 쫓아 들어갔어. 태호 그 새끼, 이번에도 사람 때려서 병원에 입원시키면 걔네 부모가 유학 보내버린댔어. 얼른 말려야 해!”
정민과 함께 룸의 문을 박차고 들어간 강훈은 눈앞에 펼쳐진 충격적인 광경에 잠시 얼어붙었다.
태호의 경호원 두 명은 이미 바닥에 널브러진 상태였다.
새하얗게 질린 유진이 보였고,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는 남자 몇 명이 있었다.
그리고 한주먹에 한 덩치 하는 태호는 이미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소파에 쓰러져 있었다.
그런 태호를 헬멧으로 내리치는 남자의 일정한 손놀림은 지독할 정도로 잔인했다. 벽에 피가 튀었고 새하얀 남자의 옆얼굴에도 피가 튀었다.
불청객을 느꼈는지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두르던 남자가 아주 살짝 몸을 틀었다.
완벽하게 슈트를 입은 강훈과 달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까만 남자, 그 남자의 무심한 눈과 마주한 순간 강훈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야, 이 개새끼야!”
태호의 처참한 몰골에 정민이 달려들었지만, 어느새 정민마저도 소파에 내동댕이쳐졌다.
모델처럼 길쭉하게 빠진 저 야리야리한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친구들이 당하는데도 얼어붙은 듯 서 있는 강훈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의 주인은 바로…….
“한……도준.”
며칠 전 연희가 갑자기 데리고 나타난 범생이 동생이었다.
피가 묻은 가죽 장갑이 싫었는지 도준은 느릿하게 장갑을 벗었다.
손에 들고 있는 검은 장갑 때문인지 매끈하게 빠진 긴 손가락이 유난히도 새하얬다.
그 이름을 들은 걸까. 도준이 비스듬히 시선을 틀며 긴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새하얀 이마 위로 쏟아지는 부드러운 머리카락, 깊은 적갈색 동공과 나른한 미소를 머금은 붉은 입술은 잔인한 폭력을 휘둘렀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처음으로 제대로 보는 동생의 얼굴은 남자인 강훈이 봐도 순간 혹할 정도로 매우 아름다웠다.
소년인 듯 남자인 듯, 섬세한 이목구비는 동양적이었지만 전체적인 생김새는 이국적인 절묘한 매력의 조합……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다.
시선을 떼지 못하는 강훈을 향해 피처럼 붉은 입술이 조롱하듯이 느릿하게 열렸다.
“뭘 봐. 재수 없게.”
발밑에서 태호가 꿈틀하자 도준은 다시 한 번 강하게 그의 가슴을 발로 꾹, 밟아주었다.
꿈틀거림이 사라지자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붉은 입가에 어리는 미소. 그 미소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우면서도 잔인했다.
그런 잔인함마저 좋다는 듯 유진이 엉겨들었지만, 잠깐뿐이었다.
더러운 거라도 묻은 듯 유진이 만졌던 팔을 툭툭 털어낸 도준은 유유히 강훈을 지나쳐 룸을 빠져나갔다.
주차장까지 쫓아 내려간 강훈은 꼬리가 높은 오토바이에 멋지게 올라타는 도준의 모습을 장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저 녀석이, 며칠 전의 그 범생이 녀석이 맞는지 잠시 헷갈렸다.
“한도준!”
강훈이 앞을 막아서자 긴 다리로 오토바이를 지탱한 도준이 비스듬히 시선을 틀었다.
소름 돋을 정도로 차가운 그 눈동자에 강훈은 흠칫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앞으로 이런 사고 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한 회장님은 이런 몰상식한 일들, 아주 싫어하시거든. 형으로서 오늘 일은 눈감아주지만, 다음은 없어.”
“정확히 5초 후 출발한다.”
“……?”
“깔리고 싶지 않으면 비키라고. 겁, 쟁, 이.”
미친 새끼라고 욕이라도 한바가지 퍼붓고 싶었지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고 강훈의 본능이 소리치고 있었다.
부릉, 부르릉!
위협하듯 앞으로 튕겨 나오는 오토바이에 놀란 강훈이 뒷걸음질 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도준은 한쪽 입꼬리만 매혹적으로 비틀면서 비소를 흘렸다.
강훈이 비켜서기 무섭게 도준이 탄 오토바이는 요란한 굉음과 함께 사라졌다.
곧이어 경호원들에게 실려 나온 태호가 인사불성 상태로 차에 실리고 코를 틀어막은 정민이 강훈에게 다가왔다.
“씨발, 태호 새끼 때문에 뒈질 뻔했네. 사람 가려서 덤벼야지.”
“……무슨 소리야?”
“저 새끼가 그 유명한 미친 흑표범이야. 누가 저렇게 생긴 줄 알았겠냐?”
밤의 문화를 즐기는 이들 사이에서 미친 흑표범은 유명 인사였다.
항상 블랙을 입고 다니는, 가는 곳마다 피를 보고 만다는 미친 녀석.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데도 단 한 번도 수면 위로 솟아오른 적 없는 신비한 존재이기도 했다.
저 곱상한 범생이가 미친 흑표범일 줄이야. 헛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지금까지야 어떻게 조용히 버텼는지 몰라도 제일 그룹 일원이 된 이상, 이야기는 틀려진다.
보고할 게 생겼군.
강훈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며칠 후, 한 회장이 노발대발하면서 태영과 연희의 자택으로 쳐들어왔다.
화가 잔뜩 난 듯 형형한 한 회장의 눈빛에 태영마저도 긴장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도준은 미친놈이라서 그런지 한 회장의 눈빛을 받고도 지극히 태연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도준이 녀석, 당장 미국으로 유학 보내라. 학비 이외에 돈 한 푼도 보내주지 마!”
“아버지! 하나뿐인 친손자한테 정말 이러기예요?”
연희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한 회장은 단호했다.
“시끄러워! 도준이 저 녀석 정신 차릴 때까지, 한국 땅 밟을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해!”
***
옛 회상에서 벗어난 강훈은 불안했다.
세상에서 무서울 게 없는 미친 또라이.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해낼 것 같은 미친 천재.
그게 바로 강훈이 기억하는 한도준이었다.
그래서 강훈은 간절히 바랐었다. 미친 천재 녀석이 제발 정신 차리지 않기를.
하지만 도준은 딱 1년을 미친놈처럼 살더니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그 후는 순식간이었다.
하버드대 졸업도 모자라 하버드 대학원 경영학과까지 가뿐하게 수석으로 입학을 한 도준은 엘리트 코스만 착착 밟고 갑자기 돌아왔다.
분명 미국 지사로 발령 대기라고 들었는데.
한도준, 대체 왜 돌아온 거지.
불끈 쥔 강훈의 주먹이 바르르, 떨려왔다.
“어떻게든, 네 녀석 약점을 잡고야 말겠어.”
***
싸늘한 표정의 GK몰 엠디 앞에서 쩔쩔맨 지 20여 분이 흘렀을 때, 제아를 살리는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정식 론칭을 한 달 앞둔 신규 브랜드를 한정수량으로 온라인에 판매를 해보라는 상부의 지시가 급하게 내려왔다고 했다.
아무리 인기 상품이라도 며칠 만에 새치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 3일 남은 기획전이 펑크 나게 생겼던 그녀에게는 황금 같은 기회였다.
이번 주 내내 야근 확정이지만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또 한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우울했던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절로 콧노래가 흘러 나왔다.
미팅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한 제아는 정말 오랜만에 현영과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겼다.
그러던 중 부서장들이 여직원들에게 자판기 커피를 돌렸다는 현영의 말에 되물었다.
“그게 모두 ‘심쿵 사장’ 커피 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만으로 심장이 쿵, 내려앉을 정도로 멋진 사장님! 그 심쿵 사장한테 커피 얻어먹기에 84만 원이 걸려 있거든, 지금.”
맙소사, 또다시 도준에게 내기가 걸리다니.
“심쿵도 당황했지. 잠깐 휴게실에 들렀을 뿐인데 여직원들이 전투적으로 덤벼들면서 커피 한 잔 뽑아달라고 하니까. 다 뽑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부서장들한테 여직원들 커피 돌리라고 지시한 거고.”
“근데 사장님, 여직원들이 무서워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기야 하지만, 사람이 돈이 걸리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나 보지.”
휴, 그 대표적인 예가 그녀 자신이었다. 도준에게 진 빚의 시초가 바로 그 내기 돈이었으니.
“그래서 그 내기는 이제 취소된 거고?”
“취소는 무슨. 제아 네 것도 내가 미리 만 원 걸었으니 걱정하지 마.”
“뭐어? 당장 취소해줘! 난 이제 내기라면 질색이라고!”
그것도 도준이 관련된 내기라면 더더욱. 제아는 급 정색을 하며 격하게 손사래까지 쳤다.
“너 요즘 돈 궁하다고 계속 중얼거렸잖아. 잃으면 만 원인데 이기면 84만 원이라구.”
“됐어. 절대 싫어. 난 싫어!”
“문제아, 내 말 끝까지……? 어머, 안녕하세요!”
휘둥그레진 현영의 시선을 좇아 제아도 덩달아 뒤를 돌았다.
미세한 턱짓으로 가볍게 인사를 받은 도준이 그녀들을 지나쳐, 자판기로 향하고 있었다.
인호가 재킷 안에서 동전을 찾아서 내밀자, 도준은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다.
도준이 10층에 나타났다는 게 그새 퍼졌는지 어느새 휴게실로 여직원들이 몰리고 있었다.
그런 여직원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도준은 양손에 커피를 들고 몸을 틀었다.
그리고 여직원들의 시선도 일제히 도준의 손에 들린 커피에 꽂혔다.
다른 여직원들과 달리 제아는 진심을 다해 그가 모른 척하고 지나가주길 바랐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내리깐 시선에 반질반질한 남자의 구두코가 쓱 밀려들었다.
“문제아 씨가 모나무흐 초기 물량을 판매할 담당 MD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아, 네.”
여직원들의 시선은 이제 도준이 아닌 제아에게 일제히 쏠려 있었다. 옆에 있던 현영마저도 말이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뜨거운 시선에 제아는 눈앞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이번 주 계속 야근한다고 하던데.”
“가, 갑자기 급하게 진행하는 거라서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도준과 공식적으로 대화를 나눈 건 처음인지라 제아는 잔뜩 긴장이 되었다.
“내 첫 작품이, 제아 씨 손에 달렸습니다.”
불경기라는 한파에 제일 어패럴의 신규 브랜드는 나온 지 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도준이 유명한 연예인임과 동시에 디자이너를 겸하는 이들과 진행하는 모나무흐는 벌써부터 패션계에 이슈를 타고 있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커피 좀 내 눈앞에서 치워주세요.’
달달 떨리는 제아의 눈빛을 덤덤히 마주한 도준이 덤덤하게 물었다.
“제아 씨는 자판기 커피 좋아합니까?”
도준의 갈색 동공 깊숙한 곳, 제아만이 알 수 있는 은밀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그녀의 눈앞으로 야속하게 내밀어지는 자판기 커피.
“뇌물입니다.”
도준의 손에서 떠난 온기를 머금은 커피는 제아의 손에 들렸다.
여기저기서 부러움 섞인 나직한 한숨 소리와 비명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당사자인 제아는 죽을 맛이었다.
기쁘기는커녕 도준이 커피에 걸린 내기를 알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설마 이 돈도 갚으라고 하면 어쩌지 등등, 온갖 걱정을 미리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사이 도준의 손에 들려 있던 다른 커피는 현영의 앞으로 내밀어졌다.
“저 주시는 거예요?”
갑작스러운 도준의 선택에 당차던 현영의 손끝마저 달달 떨리고 있었다.
“티타임 같이 즐기세요. 그럼 이만.”
100원짜리 커피 두 잔으로 10층을 떠들썩하게 한 도준은 인호와 함께 유유히 사라지고 있었다.
유려한 도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현영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너랑 있길 잘했어, 문제아.”
“……무슨 소리야.”
“반땡. 42만 원은 내 거다.”
***
집무실 안, 인호는 서류를 확인하고 있는 도준에게 말을 건넸다.
“제아 씨한테 커피는 왜 준 거야? 네가 건넨 커피에 내기 걸려 있다고 내가 귀띔까지 해줬잖아.”
도준의 침묵에도 인호는 끝까지 제 할 말을 다했다.
“어이, 한 사장. 네 동생 지금 여직원들한테 공공의 적 되게 생겼는데 일이 손에 잡혀?”
대답을 할 때까지 절대 입을 쉬지 않을 인호를 잘 알기에 도준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을 해주었다.
“그래서 줬어.”
“뭐?”
“내기에 종지부가 찍혀야 여직원들이 달려들지 않을 거 아니야. 여직원이라고 해도 가까이 오는 건 질색이니까.”
“그런다고 제아 씨를 희생양으로 삼아? 이런 못된 오빠 같으니라고!”
“제아야 그럴싸한 명분이 있으니까.”
“그 명분도 네가 만든 거 아니야. 대체 언제까지 감싸고 돌 건데? 스스로 이겨내고 적응하도록 해줘야지.”
“10년 동안 혼자였어. 내가 돌아왔으니, 이제 제아는 혼자가 아니야.”
“하여튼 동생 일이라면 유별나, 아주. 지독한 시스터 콤플렉스 같으니라고.”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젓던 인호가 갑자기 은근하게 눈을 반짝이며 책상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유별나게 챙겨주는 오빠가 어떤 남자인지 알면 제아 씨 눈물 흘리면서 쓰러지는 거 아냐?”
“…….”
“오빠가 10년 동안 여자랑 잠자리 한 번 갖지 않았다는 걸 알면…… 어후. 그 외모에 학벌이 아깝다. 무슨 무성애자도 아니고, 쯧쯧. 그러니 회장님이 그 난리지.”
끝까지 참고 업무를 보던 도준의 한쪽 눈썹이 꿈틀, 했다.
반응이 오는 걸 조금씩 눈치챈 인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내가 이 맛에 독한 네 녀석 옆에 있지!
“한 사장, 너 솔직히 말해봐. 숫총각이지? 어디 문제 있는 건 아니고?”
“유인호!”
살벌한 도준의 언성에 인호의 입이 다물리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상황이 안 돼서 못하는 놈이랑 네가 같아? 넘쳐나도록 들이대는 게 여자들이고 괴물 체력을 가지고도 쓸 생각을 안 한다는 건 문제가 있는 거지.”
“내 인생에 여자는 한 명이면 족해. 그러니 제발 좀 그 이야기는 그만하지 그래.”
“그니까 그 여자를 위해 숫총각을 유지하겠다 이 말이야? 그 여자는 대체 언제 나타나는데? 그것도 다 만나보고 궁합도 맞춰봐야 네 여자인지를 알 거 아니야? 안 그래?”
도준에게 여자라는 존재는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문제아라는 이름을 가진, 내 여자.
갑자기 능글맞게 다가온 인호가 도준에게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남자가 봐도 섹시하단 말이야. 이러니 여자들이 환장하지.”
“……얼굴 치워.”
“어허! 그렇게 노려보면 더 섹시해 보인다. 한 사장, 설마…… 남자 좋……, 윽!”
인호는 도준에게 서류로 얼굴을 강타당한 후에야 이성이 돌아온 것 같았다.
“한 부회장 쪽은, 별다른 움직임 없나?”
그 한마디에 도준을 놀리던 걸 그만둔 인호는 미소를 싹 거두고 보고를 시작했다.
도준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인호의 보고를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말도 많고 틈만 나면 그를 놀리려고 하는 게 흠이긴 하지만, 인호를 곁에 두려는 이유는 단 하나.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인재답게 한 번 시킨 일은 야무지게 끝장을 보고 마는 게 그와 성격이 같다는 것이었다.
“할 일이 남았으니 먼저 퇴근해.”
기회를 주려고 손을 쓴 거긴 했지만, 사무실에 혼자 남아 고군분투하고 있을 제아가 자꾸만 신경이 쓰인 도준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제아를 위해 산 도시락을 주기 위해 10층 사무실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꽤 경쾌했다.
어린 시절, 독서실에서 공부하던 제아는 도시락을 들고 있는 그를 발견하곤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웃음을 지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 넌 그때처럼 나에게 웃어줄까.
꽁꽁 얼어붙어 있던 차가운 심장이 조금은 설레기까지 했다. 그 미소를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예상대로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지만, 기대감에 옅어졌던 그의 적갈색 동공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보다 먼저, 제아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던 것이다.
기분 나쁠 정도로 싱글벙글 웃으며 얼굴을 들이대는 한지로.
양손이 잡혔는데도 태연하게 지로를 바라보는 제아.
도준의 눈엔 짜증 날 정도로 친밀하고 다정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그의 눈에 짙은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차가운 심장이 품고 있던 작은 설렘은 이내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설렘을 품고 있던 도시락은 이내 쓰레기통에 처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