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키스하려면, 입을 벌려야지.
2016.09.26.
“문제아, 보고 싶었다.”
제일 어패럴 전체 회식이 있던 날, 그리고 클럽 입구로 들어서는 제아를 처음 본 순간, 도준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문제아, 사랑한다.”
그리고 빛이 들어온 룸 안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고백하고 싶었던 진심이었다.
하지만 10년 전 그때처럼 제아의 눈빛에 어린 두려움 때문에 그는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조심히 뻗은 그의 손끝이 제아의 뺨을 간질이는 몇 가닥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올려주었다.
그 손길을 느낀 걸까. 제아가 그의 손끝을 향해 얼굴을 기울여왔다.
손바닥 안에 가득히 들어오는 통통한 뺨.
그 뺨에서 전해오는 부드러운 살결의 열기가 애틋하게 스며드는 순간…….
“우린…… 미쳤던 거야. 그러니까 제발…… 제발 이러지 마…… 오빠.”
제아의 입술 사이로 흐느끼는 듯 새어 나오는 신음에 도준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잔뜩 좁아진 새하얀 미간, 꼭 감긴 눈꺼풀마저 바르르 떨며 흐느끼는 제아는 아마도 꿈속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듯했다.
그런 제아를 가만히 바라보는 도준의 눈빛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꿈속에서 넌 지금, 10년 전 그때를 떠올리는 거겠지.
추억이라면 추억일지도, 악몽이라면 악몽일지도 모르는, 너와 나의…… 첫 키스.
***
우르르쾅쾅!
그날은 하늘을 쪼개버릴 듯 천둥이 쳤고, 온 세상을 쓸어버릴 듯 세찬 비가 쏟아졌다.
그럼에도 이준은 젖은 비탈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몇 번이나 미끄러지고 비에 젖은 온몸이 흙범벅이 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둘만의 아지트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올라갔다.
끼이익―.
오두막의 문이 음산하게 열리고 비에 젖은 초라한 오두막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비 냄새와 산 냄새가 뒤섞인 쾌쾌한 오두막 특유의 냄새가 그의 코를 찌르듯이 공격해왔지만 오두막 안으로 발을 들이는 이준의 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이준이 네가 어떻게 감히 제아한테 그런 짓을 해? 널 우리가 어떻게 키웠는데!
그를 친자식보다 애지중지 키워주었던 고마우신 분들의 오해.
―전, 제아에게 키스하지 않았습니다.
진실을 말해보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짝―!
날카로운 윤영의 손찌검, 그리고 괴물 보듯이 쳐다보던 그녀의 눈빛과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진심이었다.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고!
불과 30여 분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마자 마디마디가 새하얘지도록 그의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톡, 톡톡톡, 톡, 톡톡톡, 톡, 톡톡톡.
그때 조심스럽게 귀를 두드리는 소리에 이준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고 오두막의 문을 응시했다.
“열려라, 참깨.”
그가 했었던 암호 소리가 속삭이듯이 이준의 귀를 스치며 오두막의 문이 다시 스르륵, 열렸다.
가늘게 뜬 그의 시야를 서서히 물들이는 존재는 바로 비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서 있는 제아였다.
“이준 오빠.”
제아는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며 익숙하게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나의 소녀……구나.
이준은 무릎 위에 살포시 앉아 있는 제아를 품에 끌어안으며 새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제야, 이제야 살 것 같다.
그런데 세차게 쏟아지는 비 소리에 그의 이성도 서서히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피부로 스며드는 제아의 살결은 매끄러웠고, 흘러나오는 달콤한 복숭아 향은 치명적일 정도로 아찔했다.
순간 그의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뜨거운 응어리가 점점 가라앉으면서 홧홧한 열기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오빠랑 나, 우리 둘 잘못이야. 그래선 안 되는 건데. 엄마 아빠 미워하는 거 아니지?”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과 함께 흘러나오는 중얼거림에도 이준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우린 키스하지 않았어.”
이준은 다시 한 번 서로가 알고 있는 진실을 말했다.
“부모님이 보셨을 땐 우리가 키스한 것처럼 보였을 거야. 그리고 지금 우리 가족, 너무 힘든 상황이잖아. 그러니까 다신 그러지 않겠다고, 잘못했다고 가서 말하자. 응?”
“잘못한 거, 없어.”
이준은 단호하게 말했다.
힘들어하는 제아를 달래기 위해 공원 벤치에 앉아 버릇처럼 새하얀 이마에 입을 맞추었고, 서로의 이마를 마주한 채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인데.
그런데 멀리서 본 윤영의 눈엔 그들이 키스를 한 것처럼 보였나 보다.
그런데 이젠 이준의 소녀마저 잘못이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비에 홀딱 젖은 가녀린 몸을 덜덜 떨면서, 아른거리는 촛불에 은밀한 소녀의 몸을 드러내면서, 남자의 본능을 자극하는 커다란 고양이 눈으로 애처롭게 바라보면서.
그 모습에 한 가닥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꾹꾹 눌러놓았던 소녀를 향한 그의 진심이 폭발하고 말았다.
“우리가 잘못한 거야. 그러니까?”
이글거리는 눈빛을 한 이준의 긴 손가락이 제아의 가녀린 뒷목을 순식간에 타고 올라 거머쥐었다.
“오……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눈빛, 청초한 입술을 눈에 담으며 이준은 천천히 입술을 내렸다.
천천히 내려온 입술은 제아의 도톰한 입술을 성급하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많이 놀랐는지, 어르고 달래도 고집스럽게 꾹 다물린 제아의 입술.
이준은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명령했다.
“키스하려면, 입을 벌려야지.”
적나라한 그 어투에 꼭 다물린 제아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 순간, 이준은 놓치지 않고 교묘하게 그 입술을 파고들었다.
깊숙하고 더 깊숙하게 파고든 키스는 저돌적이고 원초적이었다.
침범하고, 끌어당기고, 머금고, 어르고.
그는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제아의 뒷목을 좀 더 세차게 끌어당기고, 가냘픈 어깨를 움켜잡았다.
이준은 당장이라도 텁텁한 물기를 머금은 오두막의 바닥에 제아를 눕히고 싶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휘몰아치는 몸 안의 열기를 내리누른 그의 입술 사이로 꽉 잠긴 음성이 새어 나왔다.
“이게 진짜, 키스야.”
“무, 무슨 짓이야?”
터져버린 욕망으로 짙게 변해버린 이준의 눈동자를 멍하니 응시하던 제아는 갑자기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내며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제아는 다시 이준의 품안에 갇히고 말았다.
겁에 질려 달달 떨고 있는 제아의 새하얀 목덜미에 다시 얼굴을 묻은 이준은 오랫동안 품고 있던 절절한 진심을 간절하게 토해냈다.
“문제아, 널 사랑해.”
가녀린 새처럼 몸을 떨던 제아가 갑자기 이준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밀쳐내며 고개를 틀었다.
휘몰아치는 열기를 품은 그의 눈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오빤 미쳤어. 미치지 않고서야…….”
“그래, 난 너에게 미쳐 있어. 그런데 너도 나한테 미쳐 있잖아.”
“……!”
“말해봐. 내가 널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날 사랑하잖아.”
“난, 나는…….”
격하게 흔들리는 새까만 동공으로 제아는 이준의 눈을 힘겹게 마주했다.
제아가 짙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그의 옷깃을 붙잡는 순간, 끼이익 음산한 소리를 내며 오두막이 천천히 입을 벌렸다.
그리고 귀신이라도 본 듯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윤식이 보였다.
“아빠!”
튕기듯이 품에서 벗어나는 제아의 손목을 이준이 낚아채자 제아는 울먹이는 눈빛과 음성으로 그에게 간절하게 호소를 했다.
“우린 잠시 미쳤던 거야. 그러니까 제발…… 제발 이러지 마…… 오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준을 남겨둔 채, 제아는 오두막을 뛰쳐나갔다.
***
10년 전의 기억은, 작은 것 하나까지도 남김없이 그의 가슴에 아프게 박혀 있었다.
그때를 떠올리는 도준의 잘생긴 입꼬리는 한쪽만 묘하게 비틀렸다.
흐느끼듯 헐떡이는 숨결을 계속 토해내는 제아의 꿈을 멈추게 해야 한다.
그 이후의 기억은, 도준 자신이 생각해도 최악의 악몽이었으니까.
그 악몽은 한번으로 충분했다. 꿈에서라도 반복할수록 둘 사이에 싸이는 건 원망과 상처뿐일 테니.
“문제아, 안아줄까.”
어린 시절, 서로가 무서운 꿈을 꿀 때마다 안아주었던 그때처럼.
“으음…….”
잠결에 흘러나온 제아의 콧소리.
하지만 도준은 지금만큼은 원하는 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대답, 들었으니까.
계단에 앉아 손을 뻗어 가녀린 어깨를 툭 밀자 쌔근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스르륵, 그의 품안으로 제아가 안겨들었다.
싸늘한 비상구의 공기 때문일까?
따스한 체온에 이끌린 제아가 더욱더 그에게 몸을 기울여오고 흐느끼던 숨결은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살짝 벌어진 선홍빛 입술 끝에 걸린 건 희미한 미소였다.
악몽과도 같은 꿈이, 멈추었나 보다.
“내가 여전히 너에게 미쳐 있다고 하면.”
“…….”
“넌 지금도, 나에게 미쳤다고 할까.”
“…….”
“내가 여전히 널 사랑한다고 해도.”
제아는 절대 들을 수 없는 독백과도 같은 고백을 한 도준은 이제 그만 사라져줘야 할 때였다.
***
클럽에서 도준을 만난 이후로 제아는 밤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런데 비상계단에서 쪽잠을 잘 때조차 그 꿈을 꿀 줄은 몰랐다.
잊고 싶은데도 차마 잊을 수 없는, 자꾸만 떠올리게 되는 그 기억은 항상 묘한 여운을 남겼다.
그 기억을 꿈에서 다시 생생하게 경험할 때마다 그녀의 심장은 자꾸만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찌르르 울리는 알 수 없는 전류에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그 꿈의 끝은 항상 상처와 후회로 범벅이 되어 그녀를 꿈에서 깨게 만들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아슬아슬한 순간에 그 꿈이 멈추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오랜만에 기분 좋게 잠을 잤던 것 같은데.
하지만 눈을 뜬 제아는 지금, 발끝까지 바르르 떨며 손가락 끝에 침을 발라 코에 연신 묻히고 있었다.
그래도 쥐가 난 다리와 빳빳하게 굳은 상체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준이 깰까 봐 벌써 10분째, 제아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핸드폰 진동 알람에 눈을 뜬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왜 자신이 도준의 품에 안겨 그의 목과 어깨 중간쯤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지, 그리고 도준은 왜 그녀의 머리 위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지.
그리고 왜! 도대체 왜! 사이좋았던 그때처럼 서로의 손가락을 맞물린 채 깍지를 끼고 있는지 말이다!
“휴…….”
조 과장이 제아에게 말한 30분은 훌쩍 지나 있었다.
그런데도 혼날 걸 각오하면서까지 이렇게 버티고 있는 이유는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귓가를 간질이는 그의 고른 숨소리 때문이었다.
확 일어나버리면 되는데, 그럼 되는데, 차마 일어날 수가 없다.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도록, 온몸에서 쥐가 나도록, 혼날 걸 각오하면서까지.
“이놈의 정이 뭐라고.”
그래, 오늘까지만 봐주는 거다, 문이준. 그래도 한때는 문이준이었으니까, 그래서 봐주는 거다!
하지만 제아는 마음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속절없이 정에 휘둘리는데, 왜 오빤 그렇게 나한테 계산적인 건데?
“베개 해준 대가로 빚이나 확 깎아주라고 할까 보다. 100만…… 원? 너무 염치없나? 그럼 10만 원?”
잠깐 베개 역할을 해준 대가로 그 돈 받으면 날도둑이나 다름없는데.
“100만 원이든 10만 원이든, 절대 안 돼.”
확고하면서도 나직한 음성이 머리 위에서 울리자 제아는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뭐야, 안 자고 있었어?”
“방금 깼어. 하도 꼼지락거리고 중얼거리니 잠을 잘 수가 있나.”
설마, 중얼거리는 말들을 다 들었을까?
창피함에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제아를 응시하는 도준의 눈꼬리에 묻어나는 나른한 잠기운의 여운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반쯤 감긴 눈동자 덕인지, 섹시한 눈빛에 잠기운까지 더해져 좁은 비상계단에서 농밀한 색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대체 여기까지 왜 쫓아온 거야?”
“바쁘다는 핑계로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가니, 이렇게라도 보는 수밖에.”
“핑계가 아니라 진짜 바쁘다구! 그리고 내가 가진 건 없어도 빚 져놓고 나 몰라라 하는 염치없는 앤 아니거든?”
“그러니까 내가 왔잖아.”
“내가 잠들었으면 그냥 가면 되지, 왜 내 옆에서 오빠도 같이 잔 건데?”
“너와 내가, 같이 잤다……라.”
묘한 미소를 머금은 도준의 말장난에 제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누, 누가 들으면 오해해! 그렇게 말하지 마!”
그렇게 야한 표정으로, 나른하게 말하지 말라구!
동생이었던 그녀가 봐도 지금 도준의 미소는 미칠 정도로 은밀했고, 야했다.
“푹 자라고 품까지 내어준 사람을 너무 몰아세우는 거 아닌가?”
“누가 그렇게 해 달랬어?”
“네가 원해서 해준 거야. 손은 내가 아닌 네가 잡았고.”
“내……가?”
휘둥그레진 제아의 눈을 응시하며 도준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잠결에 흘린 대답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대답은 대답일 뿐,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거리는 제아를 보며 도준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만 가봐야 하지 않나? 시간이 꽤, 많이 흘렀는데.”
도준의 날카로운 지적에 제아는 그제야 다시 현실을 직시했다.
그와 말씨름할 게 아니라 얼른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는 뼈아픈 말단 직원의 현실을 말이다.
휙 돌아서는 제아의 뒤로 서늘한 도준의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뛰다가 넘어지지 말고 천천히 가. 늦었다고 혼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다가 또 삐끗해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이제 그의 소녀는 어른이 되었는데도 도준은 그래도 작은 것 하나까지도 항상 제아가 걱정이 되었다.
“무슨…… 소리야?”
“베개 해준 값은 정확히 해놓을 테니 걱정하지 말란 뜻이야. 계산은 정확해야 하니까.”
걱정 가득한 제아의 눈빛과 표정에 도준은 생각해서 해준 말이었는데, 오히려 그 말이 제아의 마음을 상하게 해버렸다.
그놈의 계산! 그놈의 정확! 오빠 노릇하고 싶다는 건 정말 말뿐이라니까!
“그놈의 계산, 아주 정확하게 잘해서 좋으시겠네요! 흥!”
화가 난 듯 쿵쾅거리며 비상계단을 내려가는 제아의 뒷모습을 도준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걱정되어서 했다고 하면 분명히 화를 낼 것 같아 돌려서 말해준 것뿐인데,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어려워.”
문제아, 너란 여자. 나한테는 너무 어렵다고.
***
―나 지금 헤라 브랜드 정리해서 사장실에 보고 올리고 다음 주 중으로 재고도 반 이상 소진해야 해. 그러니까 제아 씨가 나 대신에 GK몰에 진행할 기획 좀 대신 진행해줘. 지금까지 잘 알려줬으니, 혼자 할 수 있지?
도준과 비상계단에서 헤어지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사무실에 돌아온 제아에게 김 대리가 한 말이었다.
사실 물류에 가서 몸으로 때운 것 말고는 제대로 배운 것 하나 없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가?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삼 년까지는 아니었지만 눈치로 대충 배운 것도 있었고, 모르는 건 현영에게 물어가며 밤을 새워 기획을 준비했다.
GK몰에서 진행하는 기획전이 오픈되기 3일 전, 재고 관리 시스템에 접속한 순간 제아는 두 눈을 의심했다.
GK몰에서 진행하려고 하는 기획 상품의 수량이 현저하게 줄어 있던 것이다.
[이 대리가 제아 씨랑 같이 기획 진행한다고 제아 씨가 물류에서 수량 확인한 상품 알려달라고 해서 알려줬지. 배송도 내가 제아 씨 첫 기획이라고 해서 얼마나 신경써줬는데.]
물류 박 과장과의 통화를 끝낸 제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온몸이 쑤시도록 물류에서 밤을 새우며 홈쇼핑 팀에 사정사정해가면서 기를 쓰고 확보해놓은 물량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기획전을 내려달라고 애타게 사정했지만, 이 대리는 요지부동이었다.
제아가 발을 동동 구르며 팀장에게 호소까지 했지만.
“어차피 부서 매출로 올라가는데 누가 어디서 파는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이 난리야? 부서가 잘되어야 성과도 좋은 거지! 혼자 잘해보겠다는 제아 씨가 너무 이기주의적이라는 생각은 안 하나? 이래서 제대로 된 4년대 대학 나온 인재들을 뽑는 거라고. 덜 배워서 그런지 인성 교육도 엉망이고 공동체 의식이 없어!”
그 말에 제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져 버렸다.
이 대리가 팀장의 조카라고 하더니.
박 팀장의 말에 이 대리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오로지 현영만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일을 왜 이따위로 하는 거야? 기획전 펑크 나서 GK몰에서 제일 어패럴과 거래 안 한다고 해도 난 몰라! 이번 일 제아 씨 단독 진행한 걸로 연말 고과에 반영해 달라고 할 테니 그렇게 알아!”
사수인 김 대리마저도 나 몰라라 발을 빼버렸다.
결국 외근을 핑계로 사무실을 박차고 나온 제아는 본능적으로 옥상의 아지트로 향했다.
입사 당시 힘이 들 때마다, 서러울 때마다 남몰래 숨어서 울었던 그곳으로.
잘 꾸며진 옥상의 테라스 입구가 아닌 녹이 슨 작은 쪽문을 열고 좁은 공간을 통과하자마자 눈에서 참고 있던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더럽고 치사해서 때려치운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덜 배워서 인성교육이 덜 된 거면, 더 배운 너희들은 왜 그렇게 깔아뭉개지 못해서 난리인데! 더 배웠으면서 남의 것을 채가는 건 나쁘다는 건 왜 모르는 건데!’
이제 다시는 울면서 찾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결국은 일 년도 버티지 못하고 다시 찾아와버린 것이다.
빛바랜 벤치 위에 앉아 무릎을 세워 얼굴을 파묻은 제아는 소리 없는 울음을 토해냈다.
무릎을 감싼 가녀린 팔이 부들부들, 동그스름한 어깨가 소리 없이 들썩였다.
얼마나 울었을까, 콧속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담배 냄새에 그녀는 파묻고 있던 얼굴을 서서히 들었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 속에서 호리호리한 장신의 실루엣이 아른거렸다.
소매로 눈물을 쓱 닦아내고 눈을 몇 번 깜빡이자, 또렷해지는 실루엣의 정체는 바로 도준이었다.
매끈할 정도로 길게 빠진 섬세한 그의 손가락 사이엔 새하얀 담배가 들려 있었다.
초라한 곳에서 초라하게 우는 꼴을, 다른 누구도 아닌 도준에게 보이다니.
도준 앞에서 악착같이 지켜냈던 쥐꼬리만큼의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도망가고 싶지도 않았다.
회사 생활 하다가 울 수도 있는 거잖아?
제아는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도준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길게 한 모금 빤 후 입술 사이로 천천히 담배 연기를 흘렸다.
희뿌연 연기 속, 제아의 모습이 아련하게 비친다.
그렇게 실컷 울어놓고 아무렇지 않은 척 보이려고 애를 쓰는 제아.
파릇하게 떨리는 촘촘한 속눈썹 사이를 채우고 있는 눈물의 흔적은 그의 가슴 한구석을 세차게 할퀴어버렸다.
네가 울면, 나는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널 위해서, 난 모른 척해줘야겠지.
도준의 차가운 포커페이스는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긴 손가락 사이에 있던 가는 몸통의 담배는 무참히 두 동강이 나버렸다.
벤치에서 벌떡 일어난 제아는 그를 향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장님.”
“둘만 있으니 오빠라고 불러야지.”
잠시 머뭇거리던 제아는 이내 포기해버렸다. 사실 도준과 말씨름할 힘도 그녀에겐 남아 있지 않았다.
도준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손수건을 내밀었고, 제아는 당연하다는 듯 그 손수건을 받아서 ‘흥!’ 하고 코까지 세게 풀었다.
“여긴…… 훌쩍, 어떻게 알았어? 들어오는 입구도 작고…… 훌쩍, 지저분해서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인데.”
조금만 더러워도 질색하는 결벽증 도준이 이런 곳을 왔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향긋한 꽃내음이 진동하는 15층 야외 휴게실도 있으면서 왜.
그리고 왜 하필 지금 이 타이밍인지.
설마,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건 아니겠지?
제아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자 도준은 덤덤하게 대답을 했다.
“나도 인적 드문 비밀스러운 공간이 필요해. 예를 들면, 유 실장이 모르는 곳.”
도준은 왜 울었느냐고 물을 법한데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제아의 곁을 지키면서 뻥 뚫린 지붕 위로 드러난 하늘을 말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제아는 그런 도준의 모습을 말없이 눈 속에, 그리고 마음에 담았다.
그를 보고 있으려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울분이 가라앉았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내 편이 생긴 것 같은 묘한 기분.
도준과 같이 할수록 자꾸만 기대고 싶어진다.
눈앞의 남자는 이제 더 이상 그녀의 이준이 아닌데도 바보같이 무슨 미련인지.
그런 스스로를 꾸짖으며 제아가 정신을 차렸을 때, 도준이 빤히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매끈한 그의 손끝이 눈가로 가까워지자, 제아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떴다.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마.”
도준의 손끝에 매달린 투명한 눈물방울, 눈가에 맺혀 있던 마지막 눈물을 그가 닦아낸 것이다.
그의 손끝이 닿았던 곳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에 제아는 벌떡 일어났다.
“나 외근 나가야 돼서 먼저 일어날게!”
도망치듯 제아가 입구로 사라진 후, 도준은 손가락 끝에 남아 있는 희미한 눈물의 흔적을 다시 천천히 느끼며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했다.
“공동체 의식이 부족하고 이기주의적인데다 덜 배우기까지 한 문제아……라.”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입에서 나직하게 흘러나온 중얼거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