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6화 (6/104)

6. 겁도 없이 내 여자를 괴롭힌 네 이름, 말이야.

2016.09.22.

거래를 하듯 딱 잘라 말하는 도준의 말에 제아는 미치고 팔짝 뛸 정도로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제대로 쓴 돈은 고작 30만 원인데, 빚은 2400만 원이라니.

쥐뿔도 없는 주제에 본의 아니게 거액의 돈을 기부한 거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고, 무엇보다 머리를 쓰는 면에선 천재적인 도준을 그녀가 상대한다는 건 처음부터 무리였다.

제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을 기다리는 도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빛도, 표정도, 모두 별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하기만 한데. 그런데 자꾸 말려드는 것 같은 찝찝함은 뭐지?

“얼마……나 하면 되는데?”

“일 년.”

“너무 길어!”

도준이 생각해도 일 년은 긴 시간이었다.

한 번 계획한 게 있으면 뭐든지 속전속결로 처리하는 게 지금까지 살아온 그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를 미치게 하는 문제아의 일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1년으로 부족하다면 2년. 아니,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신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 하니까.

내가 너에게 미친 것처럼, 너도 나에게 미쳐야 하니까.

내가 너에게 정신을 못 차리는 것처럼, 너도 그래야 하니까.

“기간을 줄이고 싶으면 돈을 더 갚든지.”

알짤 없는 그의 일언지하에 제아는 서럽기까지 했다.

아무리 내가 남이라고 선을 그었다고 해도, 사람이 옛 정을 잊어서는 안 되는 거 모르나?

서글프도록 현실을 직시하는 게 빠른 그녀의 머릿속은 벌써부터 주말 아르바이트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어떻게든 돈을 빨리 갚아야 달콤한 악마의 손아귀 안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테니까.

‘평일엔 편의점에서 야간 알바하고, 주말에는 식당? 아니 커피숍? 어떤 일이 더 시급이 세지?’

그러다 번뜩 뇌리를 스치는 건, 지금 그녀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인 도준에게 자신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통장을 넘기는 건 유일한 무기를 그에게 넘기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

그제야 제아는 다급하게 도준에게 다가서며 손을 내밀었다.

“우선, 통장 좀 다시 줘봐. 내가 만기 되면 그때 빼서 줄게.”

“난 한 번 손에 들어온 건 절대 다시 넘기지 않아.”

제아는 도준의 손에 들린 통장을 빼앗기 위해 폴짝폴짝 뛰었지만, 키가 큰 도준이 손을 번쩍 들어 올리자 여자로서 꽤 키가 큰 제아마저도 그의 손에 들린 통장을 빼앗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내 거 내가 다시 달라는데!”

어떻게든 그의 손에서 통장을 빼앗겠다는 일념으로 제아가 도준을 향해 폴짝 뛰며 몸을 날린 순간, 그가 몸을 홱 틀어버렸다.

그 바람에 도준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몸을 날렸던 제아의 몸이 기우뚱했다.

“꺄악!”

이마가 깨지고도 남을 아찔한 찰나, 단단한 무언가에 코를 박긴 했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픔 대신 코끝을 간질이는 청량한 향기, 단단하면서도 따스한 이것은 설마?

제아는 살그머니 두 눈을 위로 치켜떴다.

그리고, 바로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도준과 시선이 정면으로 딱 부딪혔다.

10년 넘게 자신의 오빠였던 그였지만, 오랜만에 봐서 그럴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다시 한 번 잘생긴 그 얼굴에, 깊고 그윽한 그 눈빛에 속절없이 빨려 드는 기분이었다.

품에 얌전히 안겨 홀린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제아에게 도준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문제아, 조심해야지.”

민감한 귀를 어루만지는 그의 따스한 숨결에 제아는 귀의 솜털까지 바짝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귓속으로 스며드는 숨결이 심장까지 스며들어와 발끝까지 찌릿찌릿하게 만들었다.

그냥 말하면 될 것을! 왜 귀에 바짝 대고 속삭이는 건데!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튕기듯이 뒤로 밀려난 제아는 이해할 수 없는 눈빛으로 도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한테…… 대체 왜 이래?”

진심으로 궁금했다.

왜 이렇게까지 오빠 노릇을 하려는 건지, 왜 이렇게까지 우연을 악연으로까지 이어가려고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마음처럼 이해할 수 없는 눈빛을 한 도준이 제아가 딱 물러선 그 거리만큼 다시 다가섰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제아는 커다란 눈을 느릿하게 몇 번 깜빡였다.

찰나였지만, 일말의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도준의 적갈색 눈동자에 비친 건 상처 가득한 영혼이었다.

하지만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사이 점멸해버린 눈동자 속의 영혼은 어느새 포커페이스로 무장하고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거겠지.

“이제 오빠 따위 필요 없다고 했던 말, 진심이야.”

정말 믿어달라는 듯 간절하게 제아가 바라보자, 도준은 심장이 저릿하게 저려왔다.

이렇게 온전하게 한 여자만을 품고 있는 눈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하는 제아가 야속하게까지 느껴졌다.

가질 수 없는 존재를 향해 헛 손짓을 하는 자신의 모습에 도준의 잘생긴 입꼬리가 옅게 비틀렸다.

그럴수록 더욱더 포커페이스 안으로 숨겨지는 절절한 마음, 도준의 희고 긴 손가락이 제아의 탐스러운 뺨을 지그시 감싸고 끌어당겼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나른한 기운에 젖어버린 제아는 그저 속절없이 끌려올 뿐.

“넌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

그의 손바닥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보드라운 뺨의 감촉과 따스한 온기만으로도 숨이 쉬어진다.

그게 바로, 그가 돌아온 이유였다.

네 곁이 아니면, 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으니까.

“제아 네가 거부할수록, 난 오빠 노릇을 더 하고 싶다는 걸.”

닿을 듯 가까워진 입술 사이로 서로의 숨결이 흘러들었다.

제아의 새까만 동공에 온전히 담겨진 그의 모습처럼, 제아의 마음도 온전하게 그의 존재로 채우고 싶다.

“그러니까, 거부할 생각 따윈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제 더 이상 물러서지도, 포기하지도 않을 테니까.

녹아내릴 듯 달콤하게 흘러드는 허스키한 음성과 묘한 색기를 흘리는 나른한 눈빛에 제아는 무방비한 상태였다.

그사이 제 할 말을 마친 도준은 전리품을 손에 든 채 유유자적 사라지고 있었다.

그가 문을 열고 사라지려는 찰나,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제아는 잘생긴 그의 뒤통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말 바보같이, 제아는 깜빡하고 있었다.

그녀의 오빠였던 이준은 그때도, 승부욕 하나는 끝내줬다는 걸.

철저하게 그녀의 실수이기도 했다.

격하게 거부할수록 그의 마음에 화르르, 불을 질러버린다는 걸 말이다.

물 흐르듯 무심하게 대처했어야 했는데, 매 순간마다 너무 감정적으로 격하게 흥분해 버렸으니.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이왕 이렇게 된 거, 제아는 출입문을 여는 도준을 향해 꽥 소리를 질렀다.

“왜 하필 이천 삼백 칠십만 원이었어?”

다른 건 몰라도 제아는 왜 그가 독특한 액수로 입찰을 했는지 미치도록 궁금했었다.

그녀가 아는 도준은 작은 말이나 행동조차도 의미 없는 건 절대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다행히도 도준은 그녀를 향해 다시 몸을 틀었다.

“내가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네 몸값이니까.”

그 말에 자존심이 확 상한 제아가 도끼눈으로 노려보자 도준이 피식 웃는다.

“30만 원, 그리고 이천 삼백 칠십만 원. 총 2400만 원.”

“……?”

“제일 어패럴에 다니는 네 연봉이잖아. 보시다시피 난 사업가라서 객관적인 자료만 취급하거든.”

2400만 원의 뜻을 알게 된 제아는 너무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도준이 경매에 응한 순간부터 이 모든 걸 다 계획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도준이 나가고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후에도 제아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통장이 있었던 텅 빈 손 안의 공기와 아직까지도 세차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제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도준, 이 악마 같으니라고!”

도준이 사라진 휴게실, 정말 그가 돌아왔다는 걸 절절하게 온몸으로 깨달은 제아의 악에 받친 비명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한없이 착하고 다정했던 오빠 문이준은 피도 눈물도 없는 한도준이 되어 그녀에게 돌아온 것이다.

***

-진짜 미안. 나 지금 너무 바빠.-

몇 번의 전화와 메시지를 보낸 후에야 제아에게서 겨우 온 한 통의 메시지.

그 메시지를 보는 도준의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꿈틀거렸다.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 나가는군.”

벌써 일주일째였다. 옥상에서의 만남 이후 도준은 제아를 만난 적도, 통화를 한 적도 없었다.

고의적으로 피한다고 생각하기엔 잔머리 굴릴 줄 모르는 대쪽 같은 제아의 성격을 알고 있는 도준이었다.

그렇다고 체통 없이 제아가 일하는 사무실로 쳐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몇 번이나 제아를 보려고 사무실로 쫓아갈까 했지만, 그게 제아를 곤란하게 할 수도 있으니까.

그때 노크소리와 함께 들어온 비서가 그에게 다가와 파일을 내밀었다.

“사장님, 부탁하신 부서별 출퇴근 시간 내역서입니다.”

비서를 향해 눈짓으로 나가라는 신호를 보낸 도준은 망설임 없이 꽤 많은 파일 안의 내용들을 대충 넘겨버리고 온라인 기획부를 찾았다.

빼곡한 출퇴근 시간이 기록되어 있는 내역서, 가장 빨리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직원 한 명이 눈에 들어왔으니, 바로 문제아였다.

분명 같은 팀인데도 불구하고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밥 먹듯이 하는 야근에 물류센터 지원까지 소화하고 있는 제아는 정말 바쁜 게 분명했다.

보는 도준이 짜증 날 정도로 말이다.

탁―.

체통이고 뭐고. 신경질적으로 파일을 덮은 도준은 집무실을 벗어났다.

도준이 8층 사무실로 무섭게 돌진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제아는 오늘도 김 대리와 조 과장의 요구 사항을 이행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마음속으로 욕은 한바가지 퍼부었을 그녀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심신이 바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도준의 콜을 당당하게 거절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만큼 체력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일주일 내내 야근도 모자라서 물류창고에서 힘까지 팍팍 쓰고 먼지까지 먹었더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컴퓨터의 모니터를 보고 있는데 온몸이 물먹은 솜마냥 무겁게 늘어지고, 눈꺼풀 위엔 돌덩이라도 올라가 있는지 자꾸만 고개가 푹푹, 떨어졌다.

“제아 씨, 지금 자는 건가?”

“아닙니다!”

날카로운 조 과장의 음성에 제아는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회사에서 대놓고 자면 어떻게 하나? 내가 지시한 건 다 해놓고 자는 거야?”

“죄송합니다. 빨리 해드릴게요.”

그제야 자신이 졸았다는 걸 깨달은 제아는 민망함에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화르르 달아오른 열기가 왜 이렇게 코끝으로 집중되는 것 같은지…….

그때 맞은편 파티션에 앉아 있던 현영이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손가락질을 했다.

“제아야, 너 코피…….”

무심코 코로 손을 가져간 제아의 손에 따스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밤을 새워 공부했을 때조차 나지 않았던 코피가 27년 만에 터진 것이다.

빨간 피를 보자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웁! 우우웁!”

“30분 줄 테니까 정신 차리고 와. 보고서 끝나면 제아 씨 물류 센터 지원 가야 하니까.”

조 과장이 큰 선심 쓰듯 말을 했다.

순간적으로 바닥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지만 제아는 가까스로 몸의 균형을 잡으면서 일어났다.

“정말 가지가지하네. 스펙도 안 돼. 체력도 안 돼. 무슨 일을 시킬 수나 있겠어? 누가 보면 혼자 다 일하는 줄 알겠네.”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하는 김 대리의 말에 불끈,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지만 제아는 가까스로 억눌렀다.

성질 같아선 스펙만 될 뿐 일은 쥐뿔도 못하는 저 여자의 머리끄덩이를 휘어잡고 싶었지만 사회생활은 이런 거다, 생각하면서 참기로 했다.

큰 회사에서 경력을 쌓아야 ‘무 스펙’인 자신이 더 좋은 곳으로 이직을 할 수 있으니까.

이 회사를 들어와서 부모님이 얼마나 기뻐했는데, 그만두더라도 직장은 꼭 구하고 그만두자.

내가 회사를 때려 쳐도 저 인간들 때문에는 안 그만둔다!

참아야 할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니까 참자, 참고 또 참자!

하지만 이대로 얌전하게 꼬리를 내리고 사라지기에는 곧 죽어도 억울했다.

제아는 못 본 척, 지나가다가 김 대리의 발을 아주 꽉, 밟아버렸다.

“악!”

“어머! 죄송해요, 대리님! 못 봤어요!”

발끈하는 김 대리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순간, 제아는 속으로 ‘쌤통이다!’ 외치며 몸을 휙 틀어 입구로 전력질주했다.

아니, 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단단한 무언가에 강하게 코를 박은 것이다.

“웁!”

그렇지 않아도 현기증 때문에 어질어질했는데. 부딪힌 충격에 핑그르르 머리가 돌고, 눈앞에 별이 보이는 것 같았다.

순간, 휘청하는 제아의 어깨를 누군가 강하게 움켜잡았다.

흐렸던 시야가 또렷해지면서, 점점 윤곽이 잡히는 건 기가 막히게 잘생긴 남자의 얼굴.

“오ㅃ…… 사장님!”

하마터면 ‘오빠’라고 부를 뻔했다.

제아는 커다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도준의 새하얀 와이셔츠에 선명하게 묻어 있는 핏자국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눈을 들었다.

내리깐 도준의 메마른 눈빛, 무심한 표정.

영락없는 사장의 표정이었다.

지금 이 순간, 도준과 자신은 바로 사장과 말단 직원일 뿐이었다.

말단 직원이, 사장의 가슴팍에 돌진한 것도 모자라, 와이셔츠에 피를 묻혔다.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제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상체를 90도로 깍듯하게 숙여 사과를 했다.

코에 찔러 넣은 화장지가 바닥에 떨어지든 말든.

“죄송합니다!”

떨어진 시야로 도준의 매끈한 구두코가 보였다.

철저하게 계산적인 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냥 넘어가기엔 지켜보는 눈들이 너무 많았다.

보지 않아도 와이셔츠 값 물어내라고 하겠지?

딱 봐도 와이셔츠, 비싸 보이는데. 정말 첩첩산중으로 빚만 늘어나는구나.

바닥에 간간히 뚝뚝, 떨어지는 코피도 모자라 제아는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방금 전의 상황을 모두 지켜봤을 텐데. 창피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어엿하게 잘 지내고 있는 걸 보여주고 싶은데, 왜 하필?

갑자기 숙이고 있던 상체가 휙 들렸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제아의 어깨를 도준은 사무실을 향해 다시 한 번 돌려세웠다.

그리고 제아는 그저 꼭두각시 인형처럼 그의 손에 어깨를 잡힌 채 이리저리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 안의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렸다.

“코피까지 흘릴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 우리 회사에 있을 줄은 몰랐군요.”

지극히 사무적이면서도 감정이 메마른 도준의 음성이 사무실을 나직하게 울렸다.

갑작스러운 도준의 말에 모두들 놀란 눈치였지만 가장 놀란 건 제아였다.

하지만 도준의 다음 말은 더욱더 기가 막혔다.

“열성적인 직원에게 모두 박수.”

쥐 죽은 듯 적막했던 사무실 안이 순식간에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다.

코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박수를 받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너무도 민망해서 애꿎은 바닥만 쳐다보는 그녀의 시야로 주인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운 손이 쑥 들어왔다.

그리고 그 손에 들린 건, 곱게 접어진 손수건이었다.

고개를 들자 항상 무심했던 도준의 눈빛에 어린 낯선 부드러움에, 익숙하지 않은 따사로움에 제아는 하마터면 코피에 이어 서러움이 뒤섞인 눈물까지 와락 쏟아낼 뻔했다.

“손수건은 다시 주지 않아도 됩니다.”

도준을 바라보는 제아의 커다란 눈은 촉촉이 물기가 어려 있었지만, 깨끗한 흰자위 주위는 피가 바짝 몰려 있었다.

딱 봐도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감히…… 나의 제아를.

손수건을 받아드는 제아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걸 본 도준의 손끝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어렸을 적, 제아가 아무리 도가 지나치도록 기어올라도, 너무 소중하고 소중해서 단 한 번도 제아에게 뭐라고 한 적이 없던 그였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소중하고 소중하게 여기던 그의 제아가 짓밟히는 걸 본 그의 마음은 지금, 폭발하기 직전의 활화산이었다.

하지만 내면이 타오를수록 그는 더더욱 차갑게 얼어붙은 포커페이스가 완성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제아의 가녀린 실루엣을 확인하고 나서야 돌아선 도준의 싸늘한 눈빛이, 조 과장과 김 대리의 얼굴에 정확히 내리꽂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직원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도준은 온라인 기획부를 향해, 정확히는 김 대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쥐 죽은 듯 조용한 사무실 안, 도준의 구두 굽 소리가 느릿하게 울리면서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드디어, 목표물에 도착했다.

“김 대리.”

감히 겁도 없이.

“네, 사장님!”

도준이 자신을 호명하자 깜짝 놀란 김 대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먼발치에서만 보았던 코 피 터지도록 잘생긴 사장님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게 믿기지 않은 듯, 김 대리는 황홀한 눈빛으로 도준을 올려다보았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나의 제아를 괴롭힌 네 이름, 말이야.

“기, 김연숙입니다!”

무심하지만 여자의 심장을 툭툭 건드리는 나직한 도준의 음성에 김 대리의 심장이 테러라도 당한 듯 세차게 쿵쾅거렸다.

그 매혹적인 음성에 자신의 회사 생명을 잘라내 버릴 칼날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두 시간 후에 분기별 헤라 판매 실적, 재고까지 정확히 파악해서 사장실로 보고하세요. 단, 본인이 직접 작성하도록.”

“제가…… 다요?”

“그럼 나한테 올리는 보고서를 설마 말단 직원한테 시킬 셈인가?”

경고였다. 나의 제아한테 일을 떠넘길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도록.

“아닙니다!”

“조 과장도 같이 오세요.”

“저는…… 왜?”

너도 나의 제아를 괴롭히는 데 한몫 단단히 했으니까.

도준의 싸늘한 눈빛에 조 과장은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정확히, 두 시간 훕니다.”

정확히 두 시간 후에, 제아가 당한 만큼, 제대로 짓밟아줄 테니까.

***

사무실을 나온 도준은 곧바로 제아가 사라진 비상계단으로 향했지만 보여야 할 제아는 보이지 않았다.

도준은 제아가 보일 때까지 계단을 올라가고 또 올라갔다.

그렇게 거의 옥상에 다다를 때까지 올라가자 그제야 마지막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제아가 눈에 들어왔다.

제아의 한쪽 코에는 화장지가 틀어 막혀 있었고, 그가 준 손수건은 그녀의 손에 꼭 쥐어져 있었다.

제아가 회사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들어서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분노가 치밀었다.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줄 알았던 네가 이렇게 살고 있는 걸 알았다면, 진작 돌아왔을 텐데.

도준은 제아의 옆에 앉아 한참 동안 곤히 잠든 제아의 얼굴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보지 못할 땐 그저 보기만 하면 만족할 줄 알았다.

그런데,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욕심이 난다.

갖고 싶다.

누구한테도 빼앗기기 싫다.

“문제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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