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몸으로 때우든지, 돈으로 갚든지.
2016.09.19.
그때 테라스 입구 쪽에서 여자들의 신경질적인 힐 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어머, 어머머머!”
“세상에!”
“망측해라!”
보지 않아도 뒤에 서 있는 여자들이 자신을 속여서 노예팅에 나가게 한 지로의 동창들이란 건 분명했다.
이대로 당하기엔 분이 풀리지 않는 제아가 고개를 들려 하자, 남자가 그녀를 더욱더 품으로 꼭 끌어안았다.
여자를 잘 아는 듯, 적나라하게 드러난 목선부터 등까지 나른하게 쓸어내리는 남자의 야한 손길에 순간 느껴지는 전율.
남자의 단단한 어깨를 붙잡고 있는 제아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등을 타고 흘러내린 남자의 손이 제아의 가는 허리를 휘어감아 강하게 끌어당겼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사이 남자는 제아를 한쪽 품에 안고서, 다른 한 손으론 어느새 담배를 들어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제아는 지금 상황도 잠시 잊은 채, 새하얀 연기를 흘리는 남자의 붉은 입술을 몽롱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담배 피우는 모습이, 이렇게 섹시할 수도 있구나.
텁텁한 담배 향마저, 이렇게 매혹적으로 느껴지다니.
“보는 눈이 많아서, 데이트를 못 하겠군.”
무심한 어투 속에 배인 짜증.
담배의 불을 꺼버린 남자가 드러난 어깨에 재킷을 걸쳐주고 손을 잡아끌자 손바닥을 통해 스며드는 남자의 따스한 체온에 제아는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지금 그녀가 믿을 사람은 오로지, 손을 잡고 있는 이 남자뿐이라는 믿음까지 희미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향수 냄새가 역겨워서 그러니, 꺼져줬음 하는데.”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여자들을 향해 기분이 나쁠 말을 했는데도 그녀들은 남자의 외모와 음성에 홀려 그저 멍하니 서 있다가 후다닥 길을 터주었다.
참 이상했다.
남자의 재킷을 어깨에 걸치고, 남자의 손에 이끌려 그녀들을 지나치는 순간 왜 어깨가 당당하게 펴지는지.
이대로 얌전하게 가기에는 뭔가 억울한 그녀는 지로의 동창들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번쩍 보이며 날름, 혀를 내밀었다.
‘엿이나 먹어라! 이 재수탱이들!’
제아는 딱 벌어지는 여자들의 입을 보고 나서야 조금은 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뒤에 있는 여자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보이며 발끈하는 제아의 모습에 도준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10년이 흘렀어도 당하고는 절대 못 사는 성질머리는 여전하니 말이다.
그녀를 데리고 파티장을 빠져나가려는 도준의 앞을 키가 훤칠한 남자가 막아섰다.
가면을 쓰고 있지만 도준은 그 남자가 한지로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죄송하지만 그 숙녀분은 저한테 양보해주셔야겠습니다. 지불한 금액은 계좌를 알려주시면 제가 내일 바로 입금해드리죠.”
“지금 당장.”
“뭐라고요?”
“지금 당장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난 싫은데.”
“아니, 이봐요!”
아무리 집이 잘산다고 해도 지로가 그렇게 거액을 가지고 있을 리 없다는 걸 파악한 도준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발끈한 지로가 또 성질을 참지 못하고 욱하면서 덤벼드려는 순간, 제아가 얼른 그 앞을 막아섰다.
“지로야, 나 괜찮아! 너무…… 점잖은 분이셔. 별일 없을 거야.”
순간 나른하게 쓸어내리던 남자의 야한 손길과 집어삼킬 듯 강렬했던 눈빛이 떠올랐지만 제아는 애써 웃음 지었다.
바보같이 속아 넘어간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로 소란을 일으키기는 죽어도 싫었다.
“제아야, 그래도.”
“우리 얼른 가요! 연락할게, 지로야!”
겁에 질려 덜덜 떨던 좀 전과 달리 제아는 도준의 손을 이끌면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
호텔 1층 로비에 마련된 자리에 남자와 나란히 마주앉은 제아는 맹수 앞에 떨어진 먹잇감이 된 기분이었다.
막상 손을 끌고는 나왔는데, 내려오고 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몇백만 원도 입이 벌어질 판에 천 단위라니!
부탁도 안 했는데 몸값을 비싸게 불러 자존심을 있는 대로 세워준 남자가 오히려 그녀는 원망스러웠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된다고 했어! 쫄지 말자, 문제아!’
심호흡을 크게 내쉰 제아는 가면 너머 강렬한 남자의 눈빛을 당당하게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큰돈 써서 티켓을 샀다고 해서 그게 절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은 절대! 아니란 걸 미리…… 말하고…… 싶은데요.”
제아의 말에 도준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당당한 척 큰소리치지만, 달달 떨리는 달콤한 핑크빛 입술과 가늘고 동그스름한 어깨선이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얼마나 긴장을 했기에 평소보다 조금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마저 알아보지 못하는지, 서운할 정도였다.
서운한 그 마음이 심술로 돋아난 도준은 더욱더 목소리를 낮게 깔며 똑똑하고 야무진 제아를 옭아매기 위해 세웠던 계획을 조금씩 드러내기로 결심했다.
“이천만 원이 넘는 돈을 그냥 버린 셈 치라, 그 말인가?”
“그게 왜 버리는 거예요? 서, 서로 합의하에 3시간을 즐겁게 보내자 이 말이죠!”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3시간에 2370만 원이라……. 3시간에 대한 주도권이 그쪽한테도 50% 있다고 주장하는 건가?”
도준의 예리한 질문에 순간 제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니, 무슨 남자가 물이 흐르듯 졸졸졸 말을 이렇게 잘하는지! 말문을 탁, 막히게 하는 유려한 말솜씨가 꼭 누구 같았다.
그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도준은 잡아먹히길 기다리는 애처로운 먹잇감처럼 불안해하는 제아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가면 너머 숱 많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걸 눈에 담으며, 도준은 여자의 옷을 벗겨내듯 슬로모션처럼 움직이는 손끝으로 제아의 가면을 벗겨냈다.
“어쩌지? 나는 그 주도권의 1%도 못 넘기겠는데.”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무방비하게 드러난 얼굴.
도망가야 하는데, 피해야 하는데. 키스할 듯 점점 다가오는 남자의 붉은 입술에 사로잡혀 제아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몸이 움직이질 않으니, 다급하게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건 협상이 아닌 간절한 부탁이었다.
“그럼 시, 시간을 더 늘려요! 엄청 많이많이 원하는 대로! 그럼 되잖아요!”
“그것도 싫다면?”
남자가 뻗은 손이 입을 가리고 있는 제아의 손을 서서히 내리자 이젠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런데도 터질 듯이 뛰는 심장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눈앞의 남자에게 묘한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달달달 떨리는 손끝에서 일어난 전율이 서서히 심장으로 스며드는 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건 바로 도준, 그였다.
그 이외엔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어떤 남자도 그녈 이렇게 당황시킨 적도, 어루만진 적도 없었는데.
‘이준…… 오빠!’
이 파티에 온 것 자체가 미친 짓이었다.
꽉 말아 쥔 주먹처럼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에 꼭 힘을 주고 버티는 순간…….
“쿡.”
흐릿하게 새어 나오는 남자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제아의 귓가를 스쳤다.
“아기 새처럼 떨지 마.”
입술 대신 코끝에 닿는 건 뜨거움을 품은 나른한 숨결.
“네가 그렇게 떨면, 내가 꼭 나쁜 오빠가 된 것 같으니까.”
그리고 속삭이듯 허스키한 음성이 자극하듯이 제아의 귓가를 긁어내렸다.
이 목소리, 이 말투, 그리고 나쁜…… 오빠? 설, 설마.
“이준…… 아니, 한도준……?”
믿을 수 없다는 듯 한껏 커진 눈동자, 떨림 가득한 목소리가 제아의 입술 사이로 흩어졌다.
그제야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남자의 실체가 조금씩 현실감으로 와 닿았다.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는 가면을 썼다지만, 완벽하게 돋보이는 존재감과 드러난 외모, 그만의 신비로운 분위기.
‘바보, 어떻게 모를 수 있어?’
제아는 손을 뻗어 남자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가면을 거칠게 벗겨냈다.
그제야 옅은 웃음기를 머금은 적갈색 눈동자가 드러나고, 고집스럽게 다물린 도준의 붉은 입술이 익숙하게 시야를 파고들었다.
이마 위로 부드럽게 흐트러진 건, 눈빛과 같은 색깔을 한 부드러운 머리칼.
그에게 완벽하게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그녀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사람 놀리니까 재밌어? 재밌냐구! 이 나쁜 놈아!”
받은 충격만큼, 그 상처만큼 조금이라도 돌려주고 싶었다.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얼마나 두려웠는데!
미치도록 두려운 이 순간, 내가 얼마나…… 오빠를…….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어설픈 주먹질로 무작정 달려드는 제아를 도준은 가뿐하게 품으로 받아냈다.
품에 안겨서도 몸부림을 치는 제아를 도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내려다보았다.
“뭐가 문제지?”
지극히 무심한 그의 한마디에 제아는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났다.
흩어져 버린 이성, 솟아오르는 건 마음속 꼭꼭 숨겨놓았던 그를 향한 원망이었다.
“뭐가 문제냐고? 오빠랑 나랑 이렇게 마주 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야! 내가 노예팅에 나오든 말든 무슨 상관인데? 제발 좀 부탁인데 내가 무슨 일을 당하든 신경 끄라구! 제발 좀 모른 척하라구!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오빠랑 난 이제 완벽한 남이라고! 오빠 따위, 이제 필요 없다고!”
발끈하며 휙 돌아서는 제아를 다시 돌려세운 도준이 그녀의 눈앞으로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뒤이어 귓가를 파고드는 도준의 무심하면서도 살벌한 음성.
“그럼 완벽하게 남인 사람의 사진을 함부로 팔지 말았어야지.”
제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란 눈을 그저 꿈뻑거릴 뿐이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사진들, 설마?
양심은 있는지라 제아는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30만 원에 팔아넘긴 사진들이, 슬라이드로 차곡차곡 그의 핸드폰에서 넘어가고 있었다.
“내 얼굴이 고작 30만 원이라니, 기분이 좋진 않군.”
“이, 이걸 어떻게…….”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제아는 이내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어느 순간, 그의 페이스에 휘말려 들어버렸다.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리자, 문제아!
“그깟 30만 원 갚으면 될 거 아냐!?”
어차피 그녀도 그 30만 원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던 차였다.
이왕 그가 알게 되었으니 깔끔하게 30만 원을 갚아버리고 털어버려야지!
“30만 원을 갚겠다.”
“계좌 알려줘. 내가 집에 가자마자 당장 쏴줄 테니까!”
“갚으려면 제대로 갚아야지.”
“뭐?”
“오늘 경매 금액까지 총 2400만 원, 계좌로 쏴. 그럼 깨끗하게 끝나는 거니까.”
지금까지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한 어마어마한 금액에 제아의 입이 쫙, 벌어졌다.
“내가 그렇게 큰돈을 어떻게 갚아?”
“완벽한 남이라고 한 건 바로 너야.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쓴 내 돈을 갚으라는 건데, 그게 왜 미친 거지?”
“누가 오빠한테 경매에 참여하라고 했어?”
제아는 달달 떨리는 손끝을 등 뒤로 숨기며지지 않고 받아쳤다.
이 싸움에서 지는 순간, 어마어마한 빚쟁이가 될 건 뻔하니까.
하지만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한도준.
“그러는 너야말로 노예팅에 나오지 말았어야지.”
“그, 그건!”
겨우 한마디 쏘아붙였을 뿐인데, 바로 입이 막혀버렸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지만, 그걸 도준에게 해명하는 것도 우스웠기에 그저 목청껏 소리 지를 수밖에.
목청 큰 놈이 이긴다는 말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큰돈 주고 사 달랬어? 모른 척 넘어갔으면 됐잖아.”
“보시다시피 넘쳐나는 게 돈이라.”
거만하게 어깨를 으쓱하는 도준의 모습에서 모든 걸 갖춘 남자에게서 나오는 오만함과 자신감이 풀풀 풍기고 있었다.
서서히 무너지는 건 바로, 제아의 멘탈.
그걸 기가 막히게 눈치 챈 도준은 얄미울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사람의 심장을 있는 대로 뒤흔들어놓았다.
“선택해. 오빠 노릇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2400만 원을 갚든지. 난 이번 일들, 호락호락 넘어갈 생각이 없으니까.”
모 아니면 도 중에 선택하라고 압박하는 도준은 지독할 정도로 매혹적이고 이기적인 남자였다.
완벽하게 나쁜 남자로 빙의한 도준의 모습에 제아는 그저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마무리를 하려는 듯, 비스듬히 상체를 숙인 도준이 제아의 귓가에 마지막 속삭임을 흘렸다.
그것도 지독할 정도로 매혹적인 음성으로.
“제아 네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말이야.”
***
―선택해. 오빠 노릇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2400만 원을 갚든지. 난 이번 일들, 호락호락 넘어갈 생각이 없으니까.
수십 번을 곱씹어보아도 조금의 자비도 없는 제안이었다.
돈 때문에 오빠 노릇을 받아들이는 순간, 빚은 사라지겠지만 영원히 그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2400만 원을 갚기엔 턱없이 부족한 통장의 잔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뾰족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하루만…… 생각할 시간 좀 주면 안 될까?
―폰 번호 입력해.
누가 사장 아니랄까 봐 별거 아닌 것마저도 꼭 거래를 하려는 도준의 모습에 화가 났지만, 그녀는 무기력하게 핸드폰 번호를 입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오늘, 드디어 도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사옥 15층 실내 휴게실로 와.-
15층이라면 사장실 전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하는데. 하지만 지금 자신의 위치에서 그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은 말도 안되는 짓이었다. 진짜, 첩첩산중이네!
“제아 씨, 10분 이내로 헤라 재고 리스트 뽑아서 사장실로 직접 보고 올려.”
김 대리의 일방적인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도준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왔다.
-편하게 전용 엘리베이터 타고 오도록.-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제아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사람은 변해도 본능은 변하지 않나 보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치밀한 성격하고는! 이런 남자를 내가 어떻게 상대하지?
15층 휴게실로 향하면서도 그녀는 걱정부터 앞섰다.
휴게실은 작은 사이즈에도 불구하고 꽤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늘이 훤히 보이는 유리 지붕, 작은 연못에 노닐고 있는 잉어들, 편하게 쉴 수 있는 정자, 꽉 들어간 나무와 아찔하게 코를 자극하는 꽃향기.
완벽한 힐링을 할 수 있는 작은 정원 느낌의 휴게실에 제아는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휴, 내가 지금 경치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지.”
세차게 고개를 저어 정신을 차린 제아는 정자 끝에 살짝 걸터앉아 열심히 핸드폰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2400만 원을 갚는다 치면…… 1년이면 한 달에 200만 원, 6개월이면 한 달에 400만 원? 세상에! 이걸 어떻게 갚아?”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한다 해도 어림없는 액수였다.
“그걸 꼭 계산기를 두드려야 아는 건가?”
“엄마야!”
청량한 향과 함께 옆에서 불쑥 나온 도준의 얼굴에 놀란 제아는 잔뜩 인상을 썼다.
“깜짝 놀랐잖아……요.”
이 장소가 회사인 것도 있지만, 도준에게 붙어 있는 사장이란 꼬리표 때문인지 자꾸만 말 끝에 ‘요’ 자가 어색하게 붙었다.
차라리 끝까지 ‘요’ 자를 붙이면 모를까, 조금만 방심하면 어느새 편하게 말을 놓고 있으니 그게 바로 문제였다.
심란한 제아의 속을 훤히 들여다본 도준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에 다리를 꼬고 앉으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말 놓을 거, 일관성 있게 말 놓는 게 좋을 거야.”
제아는 얄미울 정도로 자신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도준을 원망하며 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지?”
“내…… 적금 통장. 네 달 후면 만기라서 200만 원 정도 나와. 이거 받고, 2200만 원으로 해줘.”
제아가 없는 용돈을 쪼개고 쪼개서 몇 년 동안 모은 피 같은 적금 통장이었다.
이 소중한 통장이 도준에게 고스란히 갖다 바쳐질 운명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지만.
사실 그에게 통장을 내민 건 조금이라도 빚을 줄이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오빠 노릇을 기어코 하려는 걸 보면 그래도 조금은 빚을 깎아주지 않을까 하는 얕은 희망을 품어서였다.
하지만 그 희망은 도준이 스스럼없이 통장을 받아들자, 가차 없이 무너져버렸다.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는 그녀의 손에서 도준은 끝끝내 통장을 빼앗아갔다.
“잔금은, 어떻게 갚을 거지?”
그것도 모자라 남은 잔금까지 재촉하다니! 놀라움과 충격, 마지막으로 지금의 현실을 제아가 절실하게 직시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 그러니까…… 돈이 생기는 대로…… 그때그때 바로 갚을게.”
받는 월급 족족 모두 엄마인 윤영에게로 넘어가는 그녀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큰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말을 더듬으며 눈을 피하는 제아를 도준은 감정 없는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200만 원 이상은, 갚을 능력이 되지 않는다 이거군.’
정확히 그가 계획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그가 아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문제아는 좀 더 타이트하게 압박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 도준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이자는?”
제아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재촉하는 것도 모자라서…… 오빠가 나한테 이자 놀이를 하겠다고? 설마…… 아닐 거야.
그래서 그녀는 되물었다.
“이자……라니?”
“내가 무기한으로 기다려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만.”
“이자까지 해서 갚던지 그게 싫으면.”
도준이 잠시 말을 끊자 제아는 이제 두렵기까지 했다.
그의 붉은 입술 사이로 흩어지는 모든 것들이 지금 그녀에겐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았다.
“빚진 돈만큼 1년 동안 나한테 봉사하든지.”
“보, 봉사라니?”
무슨 상상을 했는지 몰라도 두 손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는 제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상상하는 거 하고는. 그런 제아의 순진함이 귀엽게 느껴진 도준이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튕겼다.
“아야!”
“쓸데없는 생각 좀 하지 마.”
깃털처럼 가벼운 충격이었지만, 아픈 건 이마가 아니라 제아의 마음이었다.
서로를 끔찍이 여기던 그 시절, 항상 그녀가 정신을 못 차릴 때면 이준이 하던 버릇 중의 하나였으니까.
그와의 추억은 작은 것 하나까지도 제아의 가슴 속에 선연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1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말이다.
그런데도 눈앞의 도준은 철두철미하게 날짜에 원금도 모자라서 이자를 따져대고 있었다.
“네가 원하지 않는 한, 너한테 손끝 하나 댈 생각 없으니까.”
미묘한 그 발언에 제아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눈에 힘을 바짝 줬다.
그럼 내가 원하면 손을 대겠다 이 말이야?
절대 그럴 일은 없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제아는 도준을 앙칼지게 노려보았다.
“내가 원할 일은 없어! 절대. 절대!”
“뭐, 두고 보면 알겠지.”
도준은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치는 제아의 작은 눈짓조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제아가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이젠 그의 손바닥 안이었다.
느긋하게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제아에게 다가선 도준의 뒤로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아름답게 배경을 이루었다.
꽃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아찔한 꽃 내음에 취하고, 꽃과 어우러진 도준의 매혹적인 얼굴에 취한 제아의 눈이 몽롱하게 풀리는 순간, 도준의 입이 느릿하게 열렸다.
자, 이제 조금씩 조이기 시작해볼까?
“마지막 제안이야. 몸으로 때우든지, 돈으로 갚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