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잘생긴 얼굴값이 고작 30만 원이라니.
2016.09.15.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제아는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또다시 입술을 사수했다.
그런 제아의 눈을 깊숙이 파고든 도준이 손을 들어 가볍게 이마를 튕겼다.
“대체, 무슨 생각 하는 거지?”
“키, 키스하기만 해봐!”
“열이 내렸는지 확인해야 할 거 아냐.”
도준의 한마디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제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방어를 해야 할 게 보기 좋게 어긋나버린 것이다.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고.
입술을 가렸던 손으로 얼른 다시 이마를 가린 제아는 도준의 가슴을 밀쳐내고 허둥지둥 사장실에서 뛰쳐나갔다.
제아가 사라진 문을 잠시 보던 도준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귀엽단 말이야.”
‘키스하려고 한 거, 맞는데.’
***
인정하기 싫지만 사장실에서 마신 차 덕분인지 퇴근하고 집 앞에 도착했을 땐 감기 기운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 같았다.
제아는 주인이 왔는데도 시큰둥하게 누워 있는 늙은 개, 벼룩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본 제아는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비밀을 벼룩에게 조심히 털어놓았다.
“너한테만 말해주는 건데, 사실은…… 이준 오빠가 돌아왔어.”
“왈왈!”
내내 힘없이 시큰둥하게 누워 있던 벼룩이마저도 신기할 정도로 그 이름엔 반응을 했다.
“그래서 언니가 지금 머리가 꽤 복잡하거든?”
정작 필요할 땐 매정하게 떠났으면서 왜 갑자기 나타나서 오빠 노릇을 하려는 건지.
“화도 나고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리고 보고 싶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고.
“그런다고 내가 흔들릴 줄 알아?”
이미 흔들리고 있는 걸. 그래서 불안하고 두려워.
“사장실 불러서 그러는 거, 엄연한 권력 남용이라구! 그치, 벼룩아? 내가 더럽고 치사해서 그깟 회사 때려치운다!”
결심을 굳힌 제아는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하지만 현관문이 활짝 열리기도 전에 윤영의 높은 언성이 새어 나왔다.
“당신 미쳤어요? 어떻게 또 주식을 하려고 해요?”
“여보, 진정해. 이번엔 진짜라고 했다니까. 좀 믿어줘, 응?”
“10년 전 그때도 그랬잖아요! 그 돈만 있었음 우리 이렇게 살고 있진 않았어!”
처음 듣는 부모의 말다툼 소리에 제아는 차마 집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우뚝 선 채, 조금 열린 현관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부모님의 말다툼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윤영아, 우리 이준…….”
“그 입 닫지 못해요? 당신도, 그리고 나도 절대 그 이름을 말해선 안 돼요. 그거 몰라요? 난 이미 잊었어요. 당신과 나한테는 문제아란 딸 하나밖에 없다는 거 잊지 말아요.”
“여보!”
“우리 제아 번듯한 직장 잘 다니고 있고, 나도 이제 예전처럼 식당 일 안 나가도 돼요. 둘 다 죽는 꼴 보기 싫으면 주식은 꿈도 꾸지 말아요!”
안방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 사이로 얼핏 보이는 윤식의 어깨는 추욱 처져 있었다.
한숨을 내쉰 제아는 다시 벼룩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직장 구하기 전까진 절대 그만두면 안 되겠다. 휴우.”
도준을 향한 엄마의 원망이 자신보다 크다는 것이 이상하게도 제아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
도준은 자신을 보며 연신 싱글벙글 웃는 인호의 눈빛이 상당히 신경에 거슬렸다.
“한도준, 너한테 제안할 딜이 하나 있는데.”
도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인호의 손에 쥐어진 핸드폰을 보았다.
저 핸드폰에 대체 뭐가 있길래, 인호가 저렇게 자신만만한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인호에게 끌려가 줄 마음 또한 조금도 없는 도준이었다.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서류에 시선을 가져가자 인호가 더 가까이 다가오며 능청스럽게 말을 했다.
“역시 어느 각도에서 찍어도 기가 막혀! 이래서 사람은 잘생겨야 해.”
“…….”
“요즘 이 사진이 제일 어패럴 여직원들 사이에서 유행이라는데.”
“…….”
“아, 이 사진 유포자가 온라인 기획팀 문 누구누구라고 했던가?”
도준의 한쪽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그걸 기가 막히게 캐치한 인호가 마지막 한 방을 깨끗하게 날렸다.
“근데 잘생긴 이 얼굴값이 고작 30만 원이라니, 너무 저렴하단 말이야.”
탁―.
도준은 책상 위에 서류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웃는 인호를 향해 그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조건.”
“이번 주 주말, 내게 완벽한 휴일을 달라!”
제일 어패럴에 온 이후 바쁜 업무와 일정에 인호에게는 단 하루의 휴무도 없었다.
생각해보면 인호가 제시한 조건이 도준에게도 손해는 아니었다.
원래 주 5일제였으니 그 원칙을 따라달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내일 밤 가면 파티가 열린다는 정보를 내가 입수했단 말이지.”
인호가 초대권 두 장을 그의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주말 휴일은 받아들이지. 하지만 파티인지 무도회인지는 관심 없으니 혼자 가.”
“어허! 내가 원하는 조건은 두 개 다야. 단 하나라도 들어주지 않으면 딜은 없어!”
“…….”
“말이 파티지 사실은 자선 행사라니까? 파티로 모인 돈은 전액 기부한다는데, 좋은 일 하러 간다고 생각해.”
파티든 무도회든 딱 질색이었지만 결국 책상을 톡톡 두드리던 도준은 결단을 내렸다.
“파티는 딱 1시간만 참석할 거야.”
“오케이!”
그제야 함박웃음을 머금은 인호가 그의 앞으로 핸드폰을 쑥 내밀었다.
핸드폰 액정에서 슬라이드로 넘어가는 사진들은 모두 자신의 사진이었다.
일주일 전 제아가 차에서 ‘찰칵찰칵’ 소리를 냈던 그때의 사진이 분명했다.
“비서실 여직원들에게 최고급 더치커피 다 돌리고 확보한 거다.”
“30만 원은 무슨 뜻이지?”
“한 사장, 충격 먹진 마라.”
얼른 말하라는 듯 도준이 눈빛으로 채근을 하자, 머뭇거리던 인호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이 사진들, 네 동생 문제아가 30만 원 받고 여직원들한테 판 거라고 하더라고.”
***
모처럼 한가로운 주말 저녁, 지연의 집으로 향하면서도 제아는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도준이 제일 어패럴의 사장이란 걸 알게 된 이후로 열심히 직장을 알아보지만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으리으리한 철창 대문 앞에 나와 있던 지연이 풀 죽은 강아지 모습을 하고 있는 제아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너답지 않게 왜 이렇게 풀이 죽어 있어? 내가 이렇게 마중까지 나와줬는데.”
지연이 생긋 웃으며 다가와 단단히 팔짱을 끼자 제아는 불현듯 어두운 음모의 기운을 느꼈다.
“갑자기 왜 이래? 불길하게.”
“오늘 나랑 어디 가야 할 데가 있어. 간단히 말하자면 가면 파티 정도?”
“내 주제에 무슨 파티야. 그리고 지금 내 꼴 안 보여?”
“사실은 내가 아니라 한지로 부탁이야. 너 좀 꼭 데리고 와 달라고.”
“내가 지금 파티 갈 상황 아닌 거 잘 알잖아.”
“문제아, 넌 한지로가 불쌍하지도 않니?”
지연의 말에 제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차라리 둔해서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한 게 바로 지로의 마음인데.
“천하의 한지로를 10년 동안 잡고 있는 여자, 동창들이 엄청 궁금해하거든?”
“그런 이유라면 더 못 가.”
지로와 지연이 다녔던 사립 고등학교는 돈깨나 있는 집안 자식들이 가는 학교였다.
그래서인지 제아는 지연과 지로의 동창들을 만난다는 것에 거부감이 들었다.
그리고 지로의 마음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는데 그의 친구들에게 얼굴을 보이는 짓은 더더욱 부담스러웠다.
“동창들이 단단히 벼르고 있어. 얼마나 별로면 보여주지도 못하냐고. 이번에도 너 안 데리고 가면 한지로 완전 바보 된다?”
“지연아.”
“잔말 말고 나만 믿어. 내가 완벽하게 변신시켜줄 테니까.”
묘한 웃음을 흘린 지연은 제아를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가 다짜고짜 자신의 방 안 화장대 앞에 앉혔다.
***
샬로트 호텔 자선 파티에 참가한 도준은 여유롭게 파티를 즐기는 인호와 달리 지루한 표정으로 시종일관 손목시계만 확인하고 있었다.
딱 봐도 파티는 자선 행사를 내세운 부잣집 자제들의 돈 자랑일 뿐이었다.
가면이 그의 얼굴 반을 가리고 있었지만 서 있는 자체만으로 단연 돋보이는 도준은 가히 독보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근처로 몰려든 여자들은 차마 접근하지 못하고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훔쳐볼 뿐이었다.
짙은 향수 냄새와 화장품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리자 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바람 좀 쐬고 와야겠어.”
“1시간 안 됐다. 도망치기만 해봐!”
야외 테라스로 걸어가던 도준은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린 여자와 어깨를 부딪쳤다.
“아, 죄송합니다.”
황금 깃털이 달린 반 가면을 쓴 여자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지나가는 순간, 짙은 향수도 화장품 냄새도 아닌 상큼한 복숭아 향이 그의 코끝을 스쳤다.
‘……문제아?’
도준은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봤지만 검은색의 톱 미니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어느새 북적이는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단단히 미쳤군.”
제아가 이런 곳에 올 리 없는데…….
씁쓸한 웃음을 흘린 도준은 야외 테라스로 향했다.
맑은 공기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향수가 섞인 냄새를 맡지 않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두통이 조금씩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도준이 벽에 기대고 있는지 모르는 여자들의 수다 소리가 야외 테라스로 나온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지로는 그 여자 어디가 좋은 거야? 도저히 이해가 안 돼.”
“그러니까! 우리 혜진이가 훨씬 낫지. 한지로가 눈이 단단히 삔 게 분명해.”
한지로라……. 흔치 않은 이름이었다.
그래서 도준은 흥미롭게 여자들의 수다를 듣고 있었다.
“지로 티켓, 지연이가 사서 그 여자랑 데이트하게 하려는 것 같던데. 혜진이 너, 둘이 데이트하는 거 그냥 두고 보려는 건 아니지?”
“지연이가 지로 노예팅에 참여하면 가만 안 둔다고 했어. 이지연 걔 완전 사이코잖아. 난 걔 감당 못 해.”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정은이 대신에 그 여자를 노예팅에 내보내는 거야. 지로야 자기가 노예이니 그 여자가 나온 걸 모를 테고, 지연이 두 명을 감당할 현금을 챙겨왔을 리는 없잖아? 솔직히 노예 경매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서, 그 여자 티켓 50만 원이면 살걸?”
“그 여자가 노예팅을 하겠어? 협박하지 않는 이상.”
“노예팅이라고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지. 이지연만 떼어내고 적당히 사연 만들어서 몰아가면 지라고 별수 있겠어? 그렇게 하고 아는 남자한테 싼 값에 티켓 사라고 해서 자존심도 확 죽여 버리는 거야.”
자신들이 세운 작전이 흡족한 듯 한참 더 수다를 떨던 여자들이 테라스에서 사라지자 도준은 그제야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가지 말라고 붙잡을 땐 언제고 1시간이 지났는데도 도준이 파티장을 떠나지 않자 인호는 오히려 그게 불안한 모양이었다.
“너 왜 안 가? 설마 좀 더 있어주고 한 달 내내 풀로 부려먹으려는 건 아니지?”
“노예팅이란 거, 12시에 하나?”
“그렇긴 한데, 갑자기 그건 왜?”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자정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솟아오른 무대 주위로 가면을 쓴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도준은 멀찌감치 서서 느긋하게 무대를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몇 차례의 노예팅이 끝나고 사회자가 다음 차례를 소개했다.
“자, 이번 참여자는 아름다운 황금빛 깃털 가면을 쓴 숙녀분입니다. 이 숙녀분의 3시간 티켓 이용권도 50만 원부터 시작합니다. 물론 티켓 구매 금액은 전액 불우 이웃 단체에 기부됩니다.”
검은 톱 미니 드레스.
복숭아 향을 흘렸던 그 여자가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새하얀 조명 아래 드러난 여자의 몸매는 아찔할 정도로 육감적이었다.
가늘고 긴 목선과 연결되는 가냘프면서도 동그스름한 어깨, 풍만한 바스트라인 밑으로 잘록한 허리와 그 밑으로 쭉 뻗은 다리는 가히 일품이었다.
하지만 그 매혹적인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도준은 알 수 있었다.
꽉 쥔 주먹과 어깨의 미세한 떨림…….
그는 미친 게 아니었다. 가면에 얼굴은 반쯤 가려져 있지만,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서 있는 여자의 존재를 곧추선 그의 모든 감각이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등 떠밀리듯 무대 위로 올라온 여자가 바로 문제아라는 것을.
“자, 오십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오십 있습니까?”
“오십!”
남자가 번쩍 손을 들었다.
“네, 50만 원 나왔습니다! 60만 원 없습니까?”
“백!”
느긋하게 구경하던 지연은 갑작스러운 친구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급하게 경매에 참여를 했다.
“아, 이례적인 일이네요. 숙녀분이 여자 노예 경매에…… 참여를 했네요, 하하!”
“백오십!”
남자가 다시 외치자 지지 않겠다는 듯 지연도 다시 손을 번쩍 들었다.
“오백!”
지연이 포기하라는 듯 당당하게 경매에 참여한 남자를 직시했다.
큰 액수에 남자가 당황하자, 야외 테라스에서 수다를 떨었던 여자들이 그 남자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여자들이 반짝이는 클러치를 여는 걸 보니, 경매에 부족한 돈을 남자에게 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육백!”
종지부를 찍겠다는 듯 남자가 외치고, 클러치를 확인한 지연은 돈이 부족한지 발만 동동 굴러댔다.
남자의 뒤에 있던 여자들의 붉은 입술에 미소가 가득 번졌다.
“육백, 육백 나왔습니다! 육백십 없습니까?”
쥐 죽은 듯이 조용한 파티장, 그제야 맹수처럼 몸을 사리고 있던 도준은 나직하지만 또렷한 음성으로 금액을 말했다.
“이천 삼백 칠십.”
파격적인 액수도 액수였지만, 너무도 세세한 경매가에 무대 위로 집중되어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도준에게로 쏠렸다.
태연한 척 그의 옆으로 바짝 다가선 인호가 빠르게 속삭였다.
“한도준, 갑자기 뭐 하는 짓이야? 그리고 이천이면 이천이지 삼백 칠십은 또 뭔데? 얼굴도 안 보이는데 맘에 들었을 리는 없고, 너 혹시 아는 여자야?”
“자선 파티에 왔으니 좋은 일을 하려는 것뿐이야.”
파티장 내부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최고가를 외친 남자의 존재를 무척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이천 삼백 팔십 있습니까? ……네, 그럼 3시간 티켓은 저 신사분에게 낙찰되었습니다! 낙찰된 신사분은 무대 위로 올라와주십시오.”
인호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도준은 무대 위로 올랐다.
그가 낙찰 금액을 기부함에 넣자 진행자의 안내가 이어졌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낙찰 금액이 높아도 티켓은 동일하게 3시간입니다. 신사분 유의해주십시오!”
도준이 다가설수록 가면 너머의 새까만 눈동자가 풍랑을 맞은 듯 세차게 흔들렸다.
두려움에 잔뜩 질린 그 눈동자를 깊숙이 마주하며 제아의 가는 손목을 단번에 거머쥔 그는 무대를 내려왔다.
그들에게 집중되는 따가운 시선 때문에 파티장 안에 있는 건 불가능할 듯싶었다.
그래서 도준은 제아를 데리고 야외 테라스로 향했다.
얌전하게 끌려오나 싶었는데 테라스에 도착하자마자 제아는 잡혀 있는 손목을 뿌리쳤다.
“저, 저기 할 말이 있어요!”
도준은 느긋하게 벽에 몸을 기대며 그늘진 어둠속으로 몸을 숨기며 제아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할지 지켜보기로 했다.
제아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녀를 어떻게 옭아맬지 결정할 심산이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정말 노예팅인지 몰랐어요! 그러니까 친구 지인한테 깜빡 속아서 무대 위에서 하는 봉사활동인 줄 알고 나왔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와 달리 제아는 그의 존재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10년 동안 너의 작은 것 하나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는데.
스치는 향만으로 난 널 느끼는데.
서운함 때문일까, 겁에 질린 제아를 보고 있으려니 심술이 났다.
그는 좀 더 목소리를 낮추어 제아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니까 없는 일로 해달라?”
“네?”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제아는 당황한 눈빛으로 어둠 속에서 몸을 사리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뒤늦게야 느껴지는 남자의 강렬한 존재감.
어둠 속에서 그녀를 주시하는 남자의 존재는 마치 지옥의 왕 하데스처럼 소름끼칠 정도로 아름다웠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그 모습이 지독할 정도로 낯설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제아는 이 순간 자신이 이천만 원이 넘는 돈에 지옥에 팔려온 페르세포네 같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검은 가면 너머 남자의 차가운 눈동자가 얼굴에 닿았는데도 반응을 하는 건 심장이었다.
두근두근두근.
떨리는 손끝으로 세차게 뛰는 심장을 지그시 누르는 제아를 바라보는 남자의 한쪽 입꼬리가 거만하게 말아 올라갔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남자의 섬세한 입술선마저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아른거리는 기억을 더듬는 제아를 막기라도 하려는 듯,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남자가 갑자기 손목을 확 잡아당겼다.
“꺅! 뭐 하는……?”
“쉿, 가만히 있어.”
귀를 간질이는 허스키한 음성이 남자의 입술 사이로 흩어지고 제아는 남자의 가슴에 가만히 뺨을 댄 채, 얕은 숨만 겨우 몰아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