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설마, 입으로 직접 먹여주려는 건 아니겠지?
2016.09.12.
‘이게 아닌데! 정말 아닌데!’
“해, 핸드폰이 왜 이러지? 미쳤나…… 봐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리고 실장님!”
결국 제아는 차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회사로 전력질주했다.
그녀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모습을 감추자 인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한 사장, 동생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글쎄.”
“뭔가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 사진 찍은 거 같은데, 그것도 몇 장이나.”
도준도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갑자기 인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네 동생, 피가 반만 섞여서 그런지 닮은 것도 반만 닮았네. 타고난 몸매는 닮았는데 얼굴은 하나도 안 닮았어. 엄청난 미인일 줄 알았는데.”
“피 한 방울 안 섞였어.”
“뭐라고?”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인호가 뒷좌석을 향해 돌아선 순간, 도준은 이미 차에서 내리고 없었다.
***
점심시간, 제아는 손에 쥔 30만 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늘 찍은 사진을 여직원들은 처음엔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얼핏 보여준 도준의 사진에 열광했고, 결국 그 사진을 모두에게 전송해주는 조건하에 금요일 밤의 내기는 마무리되었다.
“미쳤어. 미치지 않고서야. 30만 원에 자존심을 팔다니.”
눈을 내리깐 채 서류를 보고 있는 도준의 옆모습은 섬세했고, 셔터 소리에 시선을 살짝 튼 눈빛은 섹시했다.
마지막에 조금은 커진 것 같은 나른한 눈매와 고집스럽게 다물린 붉은 입술은 꽉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30살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미소년의 느낌이 묻어나는 도준은 지독할 정도로 낯설면서도 멋있어져 있었다.
“우리 사장 진짜 대박이다. 어떻게 직찍에도 이렇게 사진이 예술로 나오지? 양귀비도 아니고 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 도발적인 눈매까지! 심장 테러 당한 것 같아!”
도준의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현영의 입에서 연신 감탄사가 쏟아졌지만 제아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사장이라니, 그것도 자신이 다니고 있는 회사의 사장이라니!
힘들게 들어온 이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걸까?
제아는 애꿎은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으악! 난 몰라.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문제아, 너 왜 이래? 거금이 손에 들어오니까 실성해버린 거야?”
“현영아, 난 진짜 네가 좋아!”
제아는 현영을 와락 껴안았다.
부서 내 유일한 고졸 출신인 그녀가 갖은 무시와 냉대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유일하게 살갑게 대해준 현영이 있어서였다.
제아는 지금 이 직장 덕분에 당당할 수 있었고, 부모님의 고생도 덜어드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직장을 막상 그만둘까 생각하니 울컥, 서러움이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그런 내기 제안해줘서 고맙다는 의미야?”
제아는 현영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혼잣말하듯 질문했다.
“우리가 사장님을 볼 일이, 자주 있을까?”
제아의 물음에 현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걸 말이라고 해? 너 제일 어패럴에 1년 있는 동안 예전 사장 몇 번이나 봤어?”
“손에 꼽힐…… 정도? 그것도 엄청…… 멀리에서.”
“거 봐. 우리는 보고 싶어도 못 보는 게 바로 하늘같은 사장님이야. 여직원들이 괜히 그 사진에 5만 원씩 투자했겠어?”
“그렇지? 네가 봐도 그렇지?”
그제야 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하늘같은 사장님인데!
오늘의 만남은 지극히 우연, 또 우연이었다.
앞으로 도준과 다시 마주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일이리라.
***
도준은 정확히 아침 8시에 본가 화초방에 정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30여 분이 흐르고 나서야 한 회장은 난을 꼼꼼하게 살피고 있던 작지만 꼿꼿한 체구를 틀었다.
“고얀 녀석! 한국에 들어왔으면 네 엄마부터 찾아갔어야지. 감히 이 할아비한테 총대를 넘겨?”
그의 어머니인 연희에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한 회장이라는 걸 잘 알기에 도준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제일 어패럴에서 적자가 나는 브랜드는 과감히 접고 해외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신규 브랜드 독점 판권 계약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아예 작정하고 한국으로 돌아올 준비를 했구먼? 하루 이틀 만에 생각한 건 아닌 것 같고.”
“제일 어패럴을 먼저 언급하신 건 회장님이십니다.”
“네 녀석이 나한테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풀풀 냄새를 풍겼으니 던진 거 아니냐? 한국에 떡이라도 숨겨놓은 게야?”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는 손자의 모습에 한 회장은 혀를 끌끌 찼다.
생긴 것만 닮은 줄 알았더니 어쩜 저리 똥고집까지 제 아버지를 쏙 빼닮았는지!
“하나뿐인 아들에게 쓰레기 회사나 맡겼다고 네 엄마가 난리다. 네 녀석이 유치한 면세점이랑 제일 호텔도 같이 맡아라.”
“제일 어패럴이 진짜 쓰레기라면 회장님께서 진작 처리하셨으리라 봅니다.”
“허허!”
정곡을 찔린 한 회장은 그저 너털웃음만 흘렸다.
지금의 제일 그룹을 존재하게 한 게 바로 한 회장이 맨손으로 일군 제일 어패럴이었다.
매각 위기에 놓인 제일 어패럴은 한 회장이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회사이기도 했다.
“제일 어패럴이 매각되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하겠습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것 같은 단도직입적인 도준의 말에 한 회장은 다시 몸을 틀어 꽃이 피려는 난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1년 주겠다. 그 안에 증명해 보이지 못하면 국내 제일 그룹은 서 부회장과 서 이사에게 맡기고 넌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거라.”
도준이 본가를 나서자 차에 비스듬히 기대 서 있던 인호가 바짝 다가섰다.
“어떻게 됐어?”
“일 년, 그 안에 증명해 보이지 못하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
“일 년이라고? 쓰레기 회사를 일 년 만에 어떻게 살려내? 그리고 실패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그 전에 주어졌던 미래가 다시 보장될 것 같아?”
“자신 없으면 돌아오지도 않았어.”
도준은 냉정한 한마디를 내뱉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리라.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
며칠이 지났는데도 먼지 알레르기로 인한 감기는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아침 일찍 출근하고 늦은 밤에 퇴근하는 일이 반복되자 망할 감기는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떨어지지 않았다.
“에, 에취이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또다시 터져 나오는 제아의 재채기에 부서 직원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슬금슬금 그녀를 피했다.
보다 못한 조 과장이 제아에게 핀잔을 주었다.
“병원 가서 주사라도 좀 맞던지 해. 부서원들한테까지 감기 옮게 할 거야?”
“죄송합니다. 최대한 조심할게요.”
자리에 앉자마자 제아는 근질거리는 코에 화장지를 쑤셔 넣고 그 위에 마스크를 썼다.
어린 시절 지긋지긋할 정도로 있었던 곳이 바로 병원이었다.
약도, 주사도, 그리고 병원도 끔찍할 정도로 싫은 그녀였다.
감기가 늦게 떨어진다고 해도 병원은 절대 가지 않으리라!
“제아 씨, 다다음주에 GK몰 행사 잡으려고 하니까 작년 헤라 재고 리스트 모두 뽑아서 7층 회의실로 바로 가져다줄래?”
김 대리가 다시 일을 던져주자 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프고 쑤시다 못해, 후끈후끈 열까지 났다.
뻐근한 어깨라도 풀기 위해 제아가 기지개를 켜려는 순간…….
“사장님이다!”
“사장님이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여직원들의 비명에 제아는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도준, 그가 임원진을 거느린 채 7층 사무실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며칠 동안 보이지 않아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도준의 앞으로 튀어나가는 다른 직원들과 달리 제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이고 책상 위로 바짝 엎드렸다.
“헤라 담당자가 누구입니까?”
“접니다, 정 부장님!”
“이번 달을 마지막으로 헤라 브랜드 계약은 종료가 됩니다. 그 안에 재고 처리하지 못하면 김 대리도 각오하십시오.”
“한 달만, 한 달만 더 주십시오! 이번 달 안에 처리하기엔 재고가 너무 많습니다. 제발 부탁드릴게요.”
“대체 재고가 얼마나 되기에 그럽니까?”
“네? 아, 그게…….”
김 대리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정 부장의 음성이 더욱 높아졌다.
“이보세요, 김 대리!”
“정 부장님, 바쁜 시간 쪼개서 회사를 둘러보시는 사장님 앞에서 이게 무슨 짓입니까?”
유인호라는 비서실장의 음성이 분명했다.
서글서글할 줄 알았는데, 일갈하는 음성이 사뭇 살벌했다.
“무능력한 직원 따위, 제일 어패럴에선 필요하지 않습니다. 정 부장이 처리하세요.”
사형선고를 내리며 돌아서는 도준의 뒤로 김 대리가 소리 지르듯이 외치는 게 보였다.
“사장님, 제발! 제가 바로 보여드릴 수 있어요. 제아 씨! 문제아 씨?”
“그만해요, 김 대리!”
정 부장까지 김 대리를 나무랐지만 김 대리는 제아의 이름만 애타게 부를 뿐이었다.
간절한 김 대리의 부름에 그녀는 질끈, 두 눈을 감아버렸다.
그렇게 자리에 없는 듯 바짝 엎드려 몸을 숨겼지만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화장지를 쑤셔 넣은 코가 다시 근질근질해졌다.
“에, 에취이이!”
결국 제아의 입에서 재채기가 터져 나오면서 ‘나 여기 있어요.’라고 대답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저기 있네요! 제아 씨, 헤라 재고 리스트 뽑았어요?”
7층에 있어야 할 제아가 보이지 않자 그냥 집무실로 돌아가려던 도준이었다.
하지만 김 대리의 입에서 튀어나온 제아의 이름에 그가 다시 돌아서는 순간, 재채기 소리와 함께 다람쥐처럼 빠른 걸음으로 제아가 튀어 나왔다.
“죄송합니다! 리스트를 아직…… 뽑지 못했어요.”
제아가 마스크를 벗자 양쪽 콧구멍에 쑤셔 넣어진 화장지가 드러났다.
코에 집중된 시선을 느꼈는지 당황한 제아가 코에 쑤셔 넣은 화장지까지 얼른 빼서 등 뒤로 숨겼지만 도준의 시선은 제아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반쯤 감긴 눈, 새빨개진 코끝, 바짝 메마른 입술은 제아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안쓰러운 모습에 도준은 자신도 모르게 제아에게 손을 뻗었지만 그 손은 닿기도 전에 허공으로 다시 떨어졌다.
눈앞에 있음에도 예전처럼 손을 뻗어 만지고 확인할 수 없는 게 바로 현실이었다.
닿을 수 없는 손 대신, 드러낼 수 없는 마음 대신 지금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김 대리랑 제아 씨 둘 다 사표 쓸 각오…….”
정 부장의 입에서 엉뚱한 불똥이 제아에게까지 튀는 순간, 도준이 손을 들어 정 부장을 저지했다.
“정 부장님, 그만.”
“예? 하지만 사장님.”
“이번 일은 우선 보류하죠. 문제아 씨는 정확히 2시에 사장실로 리스트 올리세요.”
“제, 제가 직접요?”
지금까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제아가 고개를 들었을 때, 도준은 이미 임원진과 함께 사무실을 벗어난 후였다.
집무실로 복귀하자마자 도준은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오후 2시에 진하게 탄 복숭아 티에 레몬청과 생강청 3스푼씩 넣어서 준비해주세요.”
생수 한 모금도 함부로 마시지 않는 도준의 갑작스러운 지시에 이 비서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네! 오후 2시에 말씀하신 대로 준비해서 올리겠습니다!”
감기에 걸린 안쓰러운 고양이를 맞이할 준비를 한 도준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배였다.
***
정각 오후 2시, 제아는 보고서를 들고 사장실로 향했다.
화려할 줄 알았던 사장실 내부는 심플했고, 도준은 통유리 창을 등진 채 책상 위에서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제아는 단둘이 있는 공간에서 도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되었지만 회사에서는 이성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헤라 재고 리스트 가져왔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문제아.”
보고서만 제출하고 사라지려는 제아의 이름을 그가 느긋하게 불렀다.
‘문제아 씨’가 아닌, ‘문제아’라고 말이다.
소파에 자리를 잡은 도준이 그녀를 향해 손짓을 했다.
“이리 와서 앉아.”
분명 오빠로서 부르는 게 분명한데도 이 공간은 엄연히 회사이기에 제아는 차마 그를 거절할 힘이 없었다.
마지못해 제아가 맞은편 소파에 앉자 도준이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찻잔을 쑥, 내밀었다.
“남기지 말고 마셔.”
당연하다는 듯 도준의 말투는 부탁이 아닌 명령조였다.
시선을 내리자 투명하면서도 짙은 갈색 빛의 액체가 찻잔에 담겨 있었다.
‘설마, 아직도 이걸 기억하고 있는 거야?’
맛보지 않아도 이 차가 어떤 차인지, 또 어떤 것들로 만들어진 차인지, 제아는 감이 잡혔다.
그래서 더욱더 마시기 싫었다. 이 차를 마시는 순간, 눈앞의 존재를 인정해버리는 것만 같아서.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제아의 눈빛부터 표정까지, 도준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감기약 먹어서…… 괜찮습니다.”
거절도 모자라서 존댓말이라, 그럼에도 잘생긴 그의 입꼬리 끝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약도, 주사도, 그리고 병원도 싫어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
끝까지 차분함을 유지했어야 했다. 하지만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그의 오만한 말투에 발끈하고 말았다.
“이제 약 잘 먹거든? 주사도 잘 맞고, 병원도 잘 가고!”
“그런데도 감기가 일주일 동안 낫지 않았다?”
분명 그는 묻고 있었지만, 옅은 웃음을 머금은 그의 적갈색 눈동자가 제아의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문제아, 나는 너를 잘 알아.’
10년이나 흘렀는데도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변함없는 그 눈빛도, 그녀의 앞에 내밀어진 문이준 표 감기 차마저도. 제아는 그냥 지금 이 모든 게 싫었다.
보나마나 뜨거운 찻잔 안엔 복숭아 티에 생강과 레몬즙이 잔뜩 들어 있겠지!
그녀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틀었다.
“여기서 나가고 싶으면 그 차, 다 마셔야 할 텐데.”
“절대, 안 먹어.”
찻잔을 사이에 두고 허울뿐이었던 남매는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완벽한 남이 되어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악착같이 버티려는 여자와 집요하게 무너뜨리려는 남자.
도준의 나른한 눈빛이 고집스럽게 고개를 튼 제아의 옆모습을 훑어 내렸다.
앙증맞은 코와 통통했던 볼 살은 여전하지만, 목이 좀 더 길어지고 내리깐 속눈썹이 더 길어져 있었다.
뭐가 그리 분한지 쌔근거리는 숨을 토해내는 메마른 입술에 시선이 가는 순간, 그 입술을 제 입술로 축여주고 싶다는 욕구가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올랐다.
“그럼, 내가 직접 먹여주는 수밖에.”
긴 손가락으로 보란 듯이 찻잔을 들어 입술에 머금는 도준의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제아의 눈앞에서 벌어졌다.
‘서, 설마 입으로 직접 먹여주려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변하지 않는 그녀처럼 그도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한 번 마음먹은 건 어떻게든지 해내고야 마는 그의 성격을 잘 알기에 제아는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제아는 벌떡 일어나 도준의 손에 들린 찻잔을 빼앗아 입으로 가져갔다.
마음 같아선 단번에 마셔버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에 차는 너무도 뜨거웠다.
그래서 우아하지 못하게 입으로 호호 불면서 차를 마실 수밖에.
입술은 열심히 뜨거운 차를 불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눈앞의 도준을 앙칼지게 노려보았다.
그러던지 말던지, 지금 도준의 눈에 제아는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울 뿐이었다.
빵빵한 볼을 더욱더 빵빵하게 부풀려가며, 도톰한 입술을 오므리고 뜨거운 차를 불어대는 제아의 모습을 다시 두 눈으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그, 만 먹을래!……요.”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한 제아는 결국 반도 마시지 못하고 찻잔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둘이 있을 때는 편하게 말해. 존댓말은 거북하니까.”
“내 마음이거든!……요.”
어차피 얼마 버티지도 못할 거면서 쓸데없는 고집하고는.
도준의 냉혹한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에 고정되었다.
“다 마셔.”
“난 이제 더 이상 어린애도, 그리고 오빠 동생도 아니야!”
또다시 반말을 토해내며 발끈해서 일어나는 제아의 손목을 도준이 다시 휘어잡고 강제로 소파에 다시 앉혔다.
잠시 잊고 있었다.
10년이란 세월이 꽤 길다는 것을.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길들여야 한다는 것을.
“말했지. 내가 돌아온 이상 마음대로 되지 않을 거라고.”
“10년 만에 나타나서 오빠 노릇할 생각하지 마!”
“내가 오빠 노릇하는 게 싫으면.”
잠시 말을 끊은 도준이 손목을 확 끌어당겨 가까이 눈을 마주하게 했다.
피하고 싶지만 그의 손끝이 제아의 턱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히 잡고 있었다.
“오빠 노릇하게 만들지 말았어야지.”
얼음처럼 냉랭한 말투, 눈빛, 표정에 제아는 순간, 흠칫했다.
그녀의 오빠였던 이준은 이런 표정,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더 씁쓸했다.
‘이준 오빠, 정말…… 변해버렸구나.’
눈앞의 남자는 이제 더 이상 문이준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바보같이 붙잡고 있던 미련마저 모두 버린 제아는 보란 듯이 찻잔을 들고 아직도 뜨거운 기운이 남은 차를 단번에 마셔버렸다.
뜨거움에 혀가 얼얼했지만, 제아는 고집스럽게 입술을 꼭 다물고 버텨냈다.
“이제 됐지? 감기고 뭐고 다 나을 거니까, 다신 이러지 마!”
도준 못지않게 차가운 눈빛과 표정으로 응수했지만, 스윽 짙은 그림자가 그녀에게 기울여졌다.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그의 얼굴이 코앞까지 바짝 다가오자, 고집이고 뭐고 수증기 증발하듯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그저 떨리는 심장을 느끼며 겨우 숨만 내쉰 채 손바닥으로 뒷걸음질 칠 뿐.
하지만 그럴수록 멀어지기는커녕 소파 위로 눕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쪽 손목이 도준에게 잡힌 터라 물러나봤자 제자리였던 것이다.
“왜, 왜 다가오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