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2화 (2/104)

2. 아직도 내가, 오빠이길 원하나?

2016.09.08.

닿는 것만으로도 그의 이성을 말려버리는 제아를 뒤로한 채 도준은 소파에 비뚜름한 자세로 긴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 한 가치를 꺼내 입에 물었다.

마치 이 공간에 있는 사람이 자신뿐인 것처럼.

그는 지포 라이터를 찾아 담배에 불을 붙여 길게 한 모금을 빨아 후우, 뿌연 연기를 느릿하게 내뱉었다.

만족스럽다는 듯 가늘어지는 눈매와 뿌연 연기 사이로 흐릿하게 비치는 아름다운 실루엣을 제아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오빠…….

그녀의 말 한마디에 죽는 시늉까지 하던 문이준이란 소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섹시함으로 무장한 채 완벽한 어른이 되어 나타났다.

그 모습이 지독할 정도로 낯설어서,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그리워하고 보고 싶었던 그의 품에 와락 안길 수도, 수백 번 수천 번 생각해왔던 마음속 미움과 원망들을 쏟아낼 수도 없었다.

그저 뿌연 시야 속에서도 담배를 물고 있는 붉은 입술을 멍하니 쳐다볼 뿐.

“내 얼굴은 그만 쳐다보고 이리 와서 앉지.”

짙은 속눈썹에 반쯤 잠겨있는 적갈색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농밀한 색기에 제아의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다가가는 순간,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색기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도망갈까?

하지만 나른하게 잠겨 있는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제아는 이미 홀린 듯이 소파에 앉은 후였다.

“잡아먹지 않으니 가까이 와.”

긴 손가락을 까딱이는 도준의 옆으로 다가앉은 제아는 마음이 착잡했다.

지겹도록 봤던 얼굴이건만, 예전에는 자신이 이렇게 애틋하게 오빠를 바라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이젠, 담배도 피워?”

담배 냄새라면 질색하던 오빠였는데. 변한 건 그의 외모만이 아닌 듯싶었다.

“그게 가장 궁금한 건가?”

“……?”

“10년 만에 만났는데, 가장 궁금한 게 담배냐고 묻는 거야. 나한테 할 말이 꽤 많을 줄 알았는데.”

지독할 정도로 무심한 그의 눈빛과 표정에 제아는 어린 시절 그와 재회했던 그날을 떠올렸다.

얼어붙을 정도로 서늘한 지금의 눈빛은 막 대문을 넘어서 다시 나타난 소년의 눈빛과 똑같았으니까.

―문이준, 앞으로 네 오빠가 될 거란다.

아버지의 친한 벗의 아들이라는 아름다운 소년은 곧 가족의 전부가 되었고 버팀목이 되었다.

하지만 너무 힘들었던 10년 전 그때, 가족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소년은 말 한마디 없이 친모에게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연락 한 통 없었다.

잘 지내고 있다고 전화 한 통, 편지 한 통 해줄 수 있는 걸.

“왜…… 연락하지 않았어?”

그는 절대 모를 것이다.

밤마다 이준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잠이 들었다는 걸,

전화나 편지라도 올까 봐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잠이 들고 집에 오자마자 우편함을 확인했다는 걸,

틈만 나면 대문 앞에서 이준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는 걸.

입이 원치 않는 그 이상의 이야기를 지껄일까 봐 제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입술, 피 나겠어.”

이준의 섬세한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에 스치듯이 닿는 순간, 손끝이 떨릴 정도로 강렬한 전류가 온몸에 흐르는 것 같았다.

너무 낯선 그의 모습에 그녀의 몸도 그에게 적응을 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라는 걸 알고 난 후에 오히려 더 터질 듯이 뛰는 심장이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스트레이트 잔에 양주를 따라 마신 그는 그 술잔에 다시 술을 따라 제아에게 내밀었다.

“이제 어른이니, 마실 수 있지?”

이렇게 성숙한 여자가 되었다는 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도 어른이 맞느냐고 묻는 그의 말에 제아는 자존심이 확 상했다.

하지만 기껏해야 소주 두세 잔이 주량인 그녀에게 도수 높은 양주는 감히 도전해볼 수도 없는 에베레스트 산이었다.

저걸 먹으면 내 목이, 타버릴 거야.

“술…… 못 먹어. 담배 냄새도 여전히 싫어하고.”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 꽤 반듯하게 자랐어.”

반듯하게 자란 게 아니라 난 하나도 변하지 않은 거라 말하고 싶었지만, 제아는 그 말을 다시 목구멍 안으로 집어삼켰다.

“못 먹는다면 할 수 없지. 먹으면 말해주려고 했는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아는 도준의 손에서 술잔을 낚아챘다.

입안에 털어 넣은 술이 목구멍을 태우고 있었지만 그녀는 고집스럽게 목 위로 올라오려는 갈색 액체를 다시 삼켰다.

“콜록, 콜록!”

고개를 틀어 기침을 쏟아내는 제아의 옆모습에 도준의 무심한 시선이 박혔다.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탐스러운 뺨은 여전했지만, 좀 더 가늘고 길어진 아름다운 목선과 쇄골 아래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아름다운 라인이 뇌쇄적인 유혹을 해왔다.

도준의 눈이 가늘어지고 적갈색 눈동자에 짙은 열기가 어리는 순간, 겨우 기침을 멈춘 제아가 다시 고개를 틀었다.

“먹었으니까, 말해줘.”

“그 고집, 여전하군.”

“대답이나 해.”

얼음이 든 온더락 잔에 술을 가득 채워 느릿하게 입술로 가져간 그는 눈을 내리깔며 술을 음미하는 것 같았다.

한 폭의 그림 같은 그 모습에 제아의 시선이 몽롱하게 풀리는 순간…….

“미친놈이 정신을 차리려면, 미치게 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져야 하니까.”

도준이 너무도 덤덤하게 10년 전의 기억을 단 한마디로 압축해서 흘리자, 제아는 가슴이 탁 막혀버렸다.

‘미쳤다’는 말을 먼저 입에 담은 건 그녀였기에 더욱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무릎 위에 올린 손이 새하얘지도록 꽉 주먹을 쥐었지만 그래도 충격의 여운이 진하게 감도는 제아의 새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도준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 이제 난 지극히 정상이니까.”

“오……빠.”

“이제 네가 원한다면 철저하게 오빠가 되어줄 수 있어.”

제아의 눈이 쏟아질 듯 커다래지는 순간, 갑자기 도준이 훅 다가왔다.

제아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깜짝 놀라 소파를 손으로 짚으며 뒤로 물러났다.

등에서 느껴지는 푹신한 감촉의 소파, 그리고 바로 눈앞에 그의 얼굴이 있었다.

벗어나려 할수록 탄탄한 그의 허벅지가 제아의 허벅지를 무겁게 짓누르고 그의 눈빛처럼 매혹적인 적갈색 머리카락이 제아의 새하얀 이마를 부드럽게 간질였다.

갑작스럽게 덮친 도준보다 더 미치겠는 건 바로 제아 자신의 이율배반적인 감정이었다.

10년이란 세월은 그나마 서로가 남매로 묶여 있던 그 시절의 아련함마저 앗아가버린 것이다.

이토록 적나라하게, 도준 그를 오빠가 아닌 남자로 느끼다니.

“아직도, 내가 오빠이길 원하나?”

그 은밀한 흔들림을 눈치챈 걸까. 밀당 하듯이 귓가에 닿았다 멀어졌다 하는 그의 숨결이 떨리는 것 같은 건, 손바닥을 통해 스며드는 그의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나만의 착각이겠지.

“이젠 오빠 따위, 필요 없어.”

제아가 떨리는 입술 사이로 가까스로 말을 토해내는 순간, 몸을 짓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졌다.

그녀가 조심히 눈을 뜨자 어느새 도준은 멀어져 있었다.

“치마가 너무 짧아. 화장은 너무 진하고.”

눈빛만으로 옷을 벗길 수 있다면 지금 딱, 이 눈빛이리라.

제아는 지금 그의 눈빛에 입고 있던 옷들이 하나씩하나씩 바닥에 던져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가슴골이 보이도록 풀어헤쳤던 단추는 목까지 단정하게 잠겨 있었고, 아슬하게 드러나 있던 허벅지는 그의 재킷이 가리고 있었다.

그에게 할 말이 너무도 많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오빠였던 이준일 때의 이야기였다.

이젠 서류상으로도 완벽하게 남이 되어버린 한도준이란 남자에게 할 말은 오직…….

“오빠 친엄마 엄청 부자라면서.”

제아의 말에 술잔을 기울이던 그가 무심한 눈빛으로 제아를 바라보았다.

그 무심한 눈빛에 다시 한 번 마음이 아파오고, 심장이 아릿하게 저려왔지만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오빠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가족, 이제 나름대로 잘 살고 있어. 그러니까 죄책감 같은 거 느껴서 오빠 노릇 하려는 거라면 하지 마. 우리 세 식구, 문이준이란 존재를 깨끗이 잊었으니까.”

제아의 마지막 말이 도준의 심장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나는 널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데, 네가 나를 잊었다고?

내가 이렇게 돌아왔는데도, 날 잊겠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앞으로 오빠도 잘 살아. 우리 가족도, 잘 살 테니까. 다신, 서로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 우연이라도…….”

일방적으로 안녕을 고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제아의 손목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도준이 잡아채서 돌려세웠다.

“다시 한 번 말해 봐. 너도 날, 잊었다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로 너의 온몸을 태워버릴 수만 있다면.

갖지 못할 바엔 차라리 태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잔인한 정복욕이 도준의 몸을 서서히 잠식해 나갔다.

“……잊었어.”

손목을 좀 더 확 끌어당기자 가까워진 제아의 얼굴에 도준의 손끝이 닿았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그의 손끝이 짙은 속눈썹을 애무하듯 어루만지고 동그스름한 코끝을 지나 입술에서 딱 멈추자, 살짝 벌어진 선홍빛 입술 사이로 얕은 숨이 토해져 나왔다.

그 옛날, 눈을 감은 채 서로의 얼굴을 각인하던 손길을 떠올리는지 제아의 얇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림을 전해왔다.

‘네 눈은 여전히 나를 담고 있고, 네 몸은 나를 기억해. 그런데 감히…….’

“네가, 나를 잊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틀어버린 제아의 고개에서 느껴지는 완고함, 거짓말은 못 하지만 고집 하나는 끝내주는 문제아란 걸 잘 알기에 도준은 이쯤에서 첫 만남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어차피 며칠 후면, 보게 될 테니까.

도준의 손끝이 마지막으로 제아의 고집스러운 턱을 들어올렸다.

“서류상으로 완벽하게 남남이지만, 난 여전히 네 오빠야.”

“웃기지 마! 누구 맘대로?”

“문제아.”

“내 이름도 부르지 마!”

도준은 나가려는 제아의 손에 명함을 쥐여주었다.

“이딴 거 필요 없어!”

제아의 손에서 떨어지려는 명함을 도준은 이번엔 재킷 안에 쑤셔 넣었다.

“우린 곧, 다시 보게 될 거야.”

기가 막힌 눈빛으로 도준을 바라본 제아는 쾅! 소리를 내며 룸에서 나가버렸다.

제아의 뒤를 따라 룸에서 나간 도준이 난간에 기대어 서자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제아가 보였다.

찾아가기도 전에 스스로 제 앞에 나타나준 기특한 제아를 바라보는 도준의 눈동자 속에 진한 열기가 감돌았다.

손끝과 입술에 감도는 은은한 복숭아 향기, 온몸을 강렬하게 자극했던 나긋나긋하고 보드라웠던 제아의 몸을 떠올리며 도준은 속삭였다.

“문제아, 이번엔 네가 미칠 차례야.”

***

자꾸만 떠오르는 도준 때문에 제아는 결국 밤을 꼴딱 지새우고 말았다.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출근 준비를 하고 나가자 그녀의 아버지 윤식이 거실에서 반갑게 제아를 맞아주었다.

“우리 딸,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나가는 거야?”

윤식의 품으로 제아는 와락 안겨들었다.

그런 부녀를 지켜보던 윤영이 곱게 눈을 흘겼다.

“딸 낳아봤자 다 소용없다니까? 아빠밖에 몰라, 아주.”

“엄만 나를 돈 버는 기계 취급하잖아.”

“이게 얼마나 많이 벌어준다고 유세야?”

“거 참, 출근하는 애한테.”

윤식이 제아의 편을 들자 윤영은 콧방귀를 날리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힘들진 않고?”

“힘들긴, 이만한 직장이 어디 있다고. 나 절대 그만두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배시시 웃는 제아의 미소에 윤식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빠가 미안하구나. 우리 딸한테 짐만 되어서.”

“내가 그런 말 하지 말랬지! 나 괜찮으니까, 절대 그런 말 하지 마!”

윤식처럼 눈시울이 붉어진 제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초록색 대문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그녀는 발걸음을 늦췄다.

버릇처럼 목걸이에 달아놓은 반지를 얇은 셔츠 사이로 만지작거리는 제아의 눈빛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틀이나 흘렀는데도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숨결이 닿았던, 단단한 몸이 닿았던 몸은 아직까지도 선연하게 그 기억을 머금고 있었다.

잊고 싶은데도 잊을 수 없는 그 감각에, 뇌리를 가득 채우는 그의 모습에 제아는 다시 한 번 몸을 부르르 떨며 다짐했다.

“보란 듯이, 잊어 줄 거야.”

***

“좋은 아침입니다!”

물류 센터로 들어서는 제아의 우렁찬 외침에 분주히 움직이던 물류 센터 직원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중에서 박기완 과장이 유난히 제아를 반겨주었다.

“아니, 제아 씨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다음 주에 있을 기획 때문에 김 대리님이 물량 확인 좀 하라고 하셔서요.”

“우리 못 믿어서 보낸 게 분명하고만! 50박스 있다고 했는데 왜 못 믿는 거야? 그렇게 못 믿어서 어디 같이 일하겠어?”

단번에 의도를 알아챈 박 과장이 인상을 쓰자 제아는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에이, 못 믿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물류도 새로 오신 사장님 때문에 바쁘다면서요. 그래서 저한테 물류 센터 일도 도와줄 겸, 확인하고 오라고 하셨어요. 사실 상자 뜯어서 일일이 제품 확인하는 것도 일이잖아요. 안 그래요?”

애교스러운 제아의 말에 박 과장이 못 이기는 척 안내해준 창고 깊숙한 곳, 제아는 팔뚝을 걷어붙이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야무지게 머리끈으로 묶었다.

“자, 이제 시작해볼까?”

제아는 가장 앞에 있는 상자부터 면도칼로 죽 그어 내렸다.

마스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먼지 알레르기가 도졌는지 금방 코가 막히고 목이 부어올라 자꾸만 기침이 터져 나왔지만 억척스럽게 제아는 상자를 뜯고 또 뜯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시끌벅적한 소리에 제아는 무심코 진열대 너머를 힐끗 훔쳐보았다.

“사장님, 먼지도 많은데 굳이 이곳까지……. 이곳은 재고만 쌓고 실질적으로 활용하는 곳은 아닙니다.”

“제일 어패럴이 왜 경영난에 시달리는지 알겠군요.”

대화 내용을 미루어보아 새로 왔다는 사장님이 행차하신 게 분명했다.

비록 금요일 밤의 내기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사장의 정체가 제아는 미치도록 궁금했다.

그래서 철재 진열장 틈으로 고개를 빼꼼이 내미는 순간, 소름 끼칠 정도로 블랙 슈트를 소화해내는 사장의 뒷모습에 저절로 감탄이 새어 나왔다.

‘코피 날 정도로 잘생겼다더니, 뭐 뒷모습은 끝내주네.’

창고 안을 꼼꼼하게 둘러보던 사장이 제아가 있는 어딘가를 향해 비스듬히 몸을 틀자 이때다 싶어 눈은 사장에게 고정한 채 손으론 열심히 핸드폰을 찾았다.

하지만 사장의 얼굴이 확대되어 강렬하게 시야를 파고드는 순간, 제아는 하마터면 비명이 터져 나올 뻔한 입을 얼른 손으로 틀어막으며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제아는 장갑을 벗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재킷 주머니를 뒤졌다.

명함, 그가 준 명함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하느님, 부처님이시여! 제발!’

온갖 신을 다 찾으며 명함을 손에 든 그녀는 간절하게 바라며 감았던 눈을 조심히 떴다.

<제일 어패럴 대표이사 한도준>

반짝이는 금색 명함에 새겨진 또렷한 글씨, 머릿속이 뒤죽박죽 꼬이고 실타래처럼 얽혀버렸다.

마치 도둑질이라도 한 것처럼 격하게 뛰어대는 심장 때문에 급하게 숨을 들이켜자 먼지가 한꺼번에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급하게 마스크를 휴지 삼아 코를 막아보았지만 콧구멍도 모자라 목구멍까지 간질간질했다.

그래도 절대 이런 꼴로 도준과 마주치고 싶지 않은 제아는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창고 뒤쪽에 있는 작은 쪽문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는 순간, 입에서 우렁찬 재채기가 폭탄 터지듯 터져 나왔다.

“에취! 에취이이! 에취이이이!”

한 번 터져버린 재채기는 멈출 줄을 몰랐고, 그 소리에 맞추어 점점 더 가까워지는 구두 굽 소리가 절망적으로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이고, 제아 씨. 거기 엎드려서 뭐 해?”

박 부장의 당황스러운 목소리에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자, 도준의 무심한 시선이 쏘아보듯 제아의 얼굴에 박혔다.

‘저도 묻고 싶네요. 왜 하필, 그것도 바로 오늘 여기에 제가 있는지 말이에요.’

“얼른 이리 와서 새로 오신 사장님한테 인사드려!”

마지못해 일어나 도준 앞으로 다가가면서도 제아는 재채기를 멈출 수 없었다.

“안녕하세…… 에취이!…… 요. 에취이이이이! 온라인 기획팀…… 에취이이! 문제아라고…… 에취이! ……합니다.”

도준은 가늘게 눈을 뜨고 연신 재채기를 토해내는 제아를 바라보았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두 손에 힘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새하얀 손이 더욱더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제아를 보게 될 줄은 알았지만, 회사가 아닌 물류 창고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어젯밤의 매혹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흰색 목장갑을 낀 채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초라한 문제아라니.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나직하지만 차갑게 일갈하는 도준의 음성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터져 나오려던 재채기가 다시 쏙, 들어가 버렸다.

“제아 씨, 지금 당장 여기서!”

갑자기 싸늘하게 일갈하는 도준의 한마디에 박 부장은 당연하다는 듯 제아에게 화살을 돌렸지만, 이내 도준에게 말이 가로막혔다.

“나는 지금 박부장을 말하는 겁니다!”

“예에? 저, 저는 갑자기 왜?”

“본사 직원까지 끌어들일 정도로 물류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다니, 당장 대책 방안 올리세요!”

냉랭하게 얼어붙은 분위기에 제아도 당황했는지 재채기가 나오려는 코를 얼른 손으로 막았지만, 그래도 참기 어려운지 빨간 코가 자꾸만 씰룩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도준이 근질거리는 손을 못 참고 재킷 안주머니에 있는 손수건으로 손이 가려는 순간…….

“감기에 심하게 걸렸나 봅니다. 이걸로 닦으십시오.”

눈웃음을 살살 흘리며 제아에게 냉큼 손수건을 내미는 이가 있었다.

인호의 돌발 행동에 잠시 재킷 안쪽을 더듬던 도준의 민망해진 손이 멈추었다.

그리고 그 불호령은 다시 박 부장에게로 떨어졌다.

“지금 당장, 물류 창고 환경 개선안도 같이 작성해서 오늘 중으로 올리세요.”

당황한 박 부장이 고개를 숙이고 허겁지겁 자리를 벗어나자, 인호가 묘한 눈웃음을 흘리며 도준에게 속삭였다.

“이름이 문제아라면 너의 그…… 맞지?”

도준의 침묵에 인호는 능청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것도 아주 얄미울 정도로.

“그러니 내가 모른 체할 수가 있나? 그런데 동생분 몸매가…… 어후.”

선한 눈웃음을 흘리는 인호의 시선 끝에 손수건으로 코를 풀고 있는 제아가 보였다.

헐렁한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었을 뿐인데 가냘프면서도 육감적인 제아의 몸매는 여지없이 드러나 있었다.

인호야 그렇다 쳐도 물류 창고는 남자들이 대부분인데, 이런 곳에 제아를 혼자 놔두고 갈 수는 없었다.

게다가 딱 봐도 먼지 알레르기가 돋은 것이다.

지금은 단순한 알레르기겠지만 이대로 놔두면 심한 감기로 변해서 며칠을 끙끙 앓아누울 게 분명한 이상 더더욱 제아를 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제아 씨, 본사 가는 길이니 같이 들어가죠.”

“저는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흐트러진 머리칼을 장갑 낀 손으로 쓸어 올리며 제아가 말끝을 흐렸다.

그가 이렇게 사장으로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으니, 당황스러웠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도준이 아니었다.

“명령입니다.”

붉게 충혈이 된 제아의 눈이 찌릿, 노려봤지만 그런 눈빛에 동요할 도준이 아니었다.

“본사 직원이 물류 센터 일을 한다는 건 본사가 한가하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물류 센터 직원들이 무능력하다는 겁니까? 아니면, 둘 다입니까?”

변명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제아는 결국 얌전하게 도준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주차장으로 가자마자 차의 앞좌석으로 냉큼 타려는 제아를 도준이 불러 세웠다.

“문제아 씬 뒤로 타지.”

인호가 둘의 관계를 알 거라고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제아는 양쪽 콧구멍에서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며 신경질적으로 뒷좌석으로 향했고, 뒤이어 도준이 올라타자 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곧이어 이어지는 긴 침묵.

차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제아의 코가 눈치 없게도 끝까지 버텨내질 못하고 재채기를 토해내라고 근질근질 신호를 보내왔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불끈 힘을 주며 인호가 준 손수건을 찾으려고 가방 안에 손을 넣기도 전에 재채기가 터져버렸다.

“에, 에취이이이!”

온갖 분비물을 차 안에 분사하려는 찰나, 웬 손수건이 그녀의 코와 입을 동시에 막았다.

손수건에서 나는 청량한 향에 이상하게도 근질거리는 코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제아가 힐끔 옆으로 시선을 던지자 여전히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도준이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막고 있었다.

“내가 계속 막아줘야 하나?”

“……네?”

“손수건 받아.”

제아가 손수건을 움켜쥐자 그제야 도준의 손이 멀어졌다.

민망함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던 제아의 눈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도준의 모습과 함께 가까워지는 본사가 보였다.

그러자 그녀의 머릿속에 번뜩 생각이 떠올랐다.

‘사진 한 장이면 삼십 만 원이 생긴다. 그 먹잇감이 바로 옆에 있다!’

마음속에서 자존심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미쳤어? 넌 자존심도 없어?’

하지만 자존심이 밥을 먹여주는 건 아닌 게 바로 냉정한 현실이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기던 그녀의 머릿속에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매너 모드. 살기 좋아진 세상. 핸드폰엔 매너 모드라는 게 존재하느니!’

회심의 미소를 지은 제아는 핸드폰을 매너 모드로 바꾼 후 카메라를 작동시켰다.

그리고 거울을 보는 척 살짝 방향을 비틀자 서류를 보고 있는 도준의 옆모습이 핸드폰 액정을 가득 채웠다.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되는데, 그래도 아직 남아 있는 자존심 때문인지 차마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본사 건물에 도착했는지 차가 정지했고, 깜짝 놀란 제아의 손이 얼떨결에 핸드폰의 어딘가를 터치했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셔터 소리가 고요한 차 안에 울려 퍼졌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인호가 놀라 뒤돌아봤고, 도준마저 제아를 바라보았다.

제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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