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빠는, 여동생에게 키스하지 않거든.
2016.09.05.
인천공항 내 모든 이의 시선을 압도적으로 사로잡은 한 남자가 공항을 유유히 벗어나고 있었다.
베이지색 코트 깃을 추스르며 선글라스를 벗고 티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남자에게 지나가던 여자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속절없이 시선을 빼앗겼다.
“한도준, 10년 만에 한국 땅을 밟은 감회가 어때?”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남자가 어깨를 툭 치면서 씨익 웃었지만, ‘한도준’이라고 불린 남자의 부드럽고 섬세한 얼굴에서 묻어나는 눈빛과 표정은 무심함 그 자체였다.
그들 앞에 고급스러운 승용차가 멈추어 섰고, 한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도준이 뒷좌석에 타는 걸 확인한 인호는 운전석에 올라타기 전, 황홀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여자들에게 윙크를 날려주는 걸 잊지 않았다.
“역시 한국 여자들이 최고라니까? 단아하고 예쁘고 섹시하고!”
“한국에 들어오기 싫다고 징징거렸던 건 잊었나 보지?”
“여자랑 미래는 별개거든? 미래가 보장된 미국을 마다하고 매각 위기에 놓인 쓰레기 처리나 하러 한국에 들어온다고 하니 당연히 싫지!”
“지금도 늦지 않았어.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
하여튼 정 없는 녀석이라니까!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매정하게 말을 하는 도준을 인호는 룸미러로 찌릿, 노려보았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한두 번 겪은 쌀쌀맞음도 아니었기에 인호는 태연하게 화제를 돌렸다.
“한 여사님 쇼크로 쓰러지기 전에 한국에 들어왔다고 연락은 하지 그래?”
“찾아가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오실 분이야. 그 정도로 쓰러지실 분도 아니고.”
“하긴. 제발 부탁이니 두 모자가 만날 때 나는 그 자리에 없게 해주라.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기는 싫으니까.”
“…….”
“그나저나 한국에 기를 쓰고 갑자기 돌아오려고 했던 이유가 뭔지, 진짜 말 안 해줄 거야?”
불굴의 의지로 인호가 또다시 물어오는데도 도준은 말없이 창밖을 내다봤다.
SNS에서 우연히 본 사진 몇 장.
얼마나 봤는지 그의 머릿속에 선연하게 각인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도준은 핸드폰으로 그 사진들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볼에 기습 키스를 날리는 남자와 깜짝 놀란 표정의 여자.
화가 난 듯 눈을 앙칼지게 치켜 뜬 여자.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웃고 있는 남자와 여자.
특히 마지막 사진 속 남녀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차가운 분노와 뜨거운 질투심이 동시에 타올랐다.
도준 자신이 웃음을 잃고 지내는 동안 그를 미치게 한 존재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과거에는 ‘문이준’이었고, 이젠 ‘한도준’이 된 자신을 까맣게 잊은 채 말이다.
그가 없는 어디에선가 환하게 웃고 있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여동생을 향해 도준은 마음속으로 서늘한 경고를 날렸다.
‘문제아, 내가 돌아왔어.’
***
단 한 명의 불참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상부의 지시에 제아는 거래처와의 늦은 미팅을 끝내고 부랴부랴 ‘디데이’ 클럽으로 향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클럽을 통째로 빌린 회식이라니.
혜성처럼 나타난 새로운 사장은 등장부터가 남달랐다.
클럽으로 향한다는 말에 제아와 통화를 하던 지로는 불같이 화를 냈다.
[음흉한 늑대가 득실거리는 곳에서 회식을 왜 하는 건데!]
“한지로, 나한텐 너도 늑대거든? 그리고 놀러 온 게 아니라 엄연히 회식이야.”
[어헛,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서운하지! 나같이 선량한 늑대가 어디 있다고? 10년 동안 볼에 뽀뽀 한 번 한 거 빼곤 손도 제대로 못 잡아본 나한테 그러면 안 된다!]
잔뜩 억울함이 묻어나는 지로의 음성에 제아의 입가에 살포시 웃음이 묻어났다.
“알았어. 진짜 무슨 말을 못 하겠어. 상황 봐서 다시 전화하든지 할게.”
지로의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은 제아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디데이 클럽으로 서서히 발을 들였다.
자욱한 연기, 현란하면서도 어두운 조명, 시끄러운 음악, 스테이지를 꽉 채운 젊은 남녀들의 끈적이는 부비부비 댄스.
“휴, 이런 데 진짜 오랜만이네.”
오늘따라 심장은 왜 이렇게 뛰어대는지. 꼭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제아는 오른손으로 심장 부근을 가만히 눌러 진정시킨 후에야 2층으로 올라갔다.
톡, 톡톡톡, 톡, 톡톡톡, 톡, 톡톡톡.
룸 넘버를 확인하는 제아의 귓가에 맴도는 소리에 그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릿속에 스치듯 떠오른 금지된 그 이름에,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마저 툭 떨어뜨렸다.
제아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녀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환청까지 들리네.”
안도감과 함께 물밀듯 밀려오는 아스라한 그리움.
쓴웃음을 지은 제아는 3번 룸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누가 보면 혼자서만 일하는 줄 알겠네. 어떻게 된 게 회식도 지각이야.”
다짜고짜 면박부터 주는 김 대리에게 지극히 예의적인 미소를 날린 제아는 현영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양주를 얼마나 마셨는지 현영의 얼굴은 벌써부터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스테이지 사람들은 대체 뭐야. 클럽을 통째로 빌린 거 아니었어?”
“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3층에서 술 마시고 젊은 사람들은 마음껏 젊음을 즐기라고 사장이 2층이랑 3층만 빌리라고 했대. 2층은 미혼자들이나 35세 이하의 젊은 사람들만 있는 거지. 호호!”
국내 굴지 기업인 제일 그룹이지만, 수많은 계열사 중에서 제일 어패럴은 규모만 컸지 애물단지가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지로의 사촌형 추천으로 겨우 취직한 이 직장이 그녀에겐 너무도 소중했다.
가뜩이나 제일 어패럴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 때문에 제아의 걱정이 태산인데 새로 취임한 사장마저 노는 데 일가견이 있다니.
제일 어패럴이 망하는 건 이제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영아, 이러다 우리 회사 진짜 망하면 어쩌지?”
“망하면 딴 데로 옮기지 뭐.”
제아는 양주를 입 안에 털어 넣으며 속편한 소리를 하고 있는 현영을 부러운 시선으로 보았다.
학벌과 스펙,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너야 상관없겠지.
“자, 자, 문제아 씨! 쓸데없는 걱정 그만하고 오늘만큼은 빼지 말고 술이나 한잔하시죠?”
“나 술 못 먹잖아.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물류 센터 가봐야 해.”
“그럼 우리 스테이지 나갈까? 오늘 특별히 사장이 물 관리도 철저히 하라고 해서 물도 완전 죽여줘.”
“난 나이트클럽에서 만나는 남자는 별로야.”
남자에겐 눈곱만큼도 관심 없는 제아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현영을 제외한 다른 여직원들이 꼴사납다는 듯 흘겨보았다.
“대학도 못 나온 주제에, 이런 곳에서까지 고상한 척 연기야?”
“그러게 말이야. 혼자 열심히 일하는 척, 부지런한 척, 바른 생활 하는 척, 재수 없어.”
제아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런 제아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현영이 테이블 밑으로 제아의 손을 꼭 쥐면서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우리 심심한데 내기나 할까요? 최고 VVIP 룸이 있는 4층에 잠입해서 새로 온 사장님 사진 찍어오기! 어때요?”
“4층은 우리 같은 레벨은 통과도 못 해. 물 관리가 얼마나 살벌한데.”
“그러니까 내기하자는 거죠. 새로 오신 화끈한 사장님이 코피가 날 정도로 잘생겼다는 소문을 제가 접수했답니다!”
“에이, 말도 안 돼. 하버드대 나왔다는데 잘생겼다고? 대머리에 배불뚝이가 아니라?”
“비서실에서 흘러나온 정보예요. 그 정도면 믿을 만하지 않아요?”
한참 내기로 열띤 대화가 오가는 데도 제아는 머릿속으로 철저하게 계산을 하고 있었다.
지금 시각은 10시 반, 막차 버스가 끊기기까지 30분이 조금 넘게 남았다.
버스를 놓치면 집까지 소요되는 택시비는 무려 2만 8천 원?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제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아야, 어디 가?”
“술도 못 먹는데 여기 있으면 분위기만 망쳐, 난 이쯤에서 빠지는 게 나을 것 같아.”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는 순간, 제아의 귀를 번쩍하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5만 원 빵 내기야. 수단 방법은 가리지 말고 무조건 사장님 얼굴 가까이서 사진 찍어오기. 내일 점심시간 때 모여서 내기 정산하는 거야. 어때, 콜?”
“완전 재밌겠다. 근데 우리 4층 통과는 할 수 있을까?”
“힘든 거니까 하는 거지, 쉬운 거면 뭐하려고 내기해?”
“그 내기! 저도 할게요.”
갑자기 끼어드는 우렁찬 음성에 룸 안에 있던 여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어디론가 쏠렸다.
다소곳하게 앉아만 있다가 갑자기 집에 간다고 일어났던 제아가 자신 있는 표정으로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
“제아 너, 간다고 하지 않았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묻는 현영의 옆에 앉으며 제아는 넌지시 속삭였다.
“현영아, 나 5만 원만 빌려줘. 빌려주면 이자 만 원 쳐줄게.”
***
무심한 하늘은 제아를 버리지 않았다.
파티 여왕이라고 불리는 제아의 친구, 지연이 오늘 딱 디데이 클럽에 있을 줄이야!
지연의 클러치를 빼앗아 파우더 룸에서 열심히 화장을 하는 제아의 손놀림은 무척이나 분주했다.
“그래서 지금, 30만 원 벌겠다고 이 짓을 하겠다고?”
“너한테는 껌 값이겠지만, 나한테는 어마어마한 돈이야. 내 용돈, 차비랑 점심 값 하면 딱 떨어지는 거 너도 잘 알잖아.”
“그러다 5만 원도 날리면 어쩌려고?”
“그럴 일 없어.”
백 원도 허투루 쓰지 않는 제아의 성격을 알기에 지연이 한 말이었지만, 제아는 마지막으로 오렌지색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며 실패는 있을 수 없다는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어라, 그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이야?”
“4층 물 관리 심하다면서. 우리 부서 여직원들, 4층 통과할 만한 사람 없어. 밑져야 본전이라 이거지.”
“대신에 너는 택시비만 날린다는 거. 지금 막차 끊기기 20분 전이야.”
“넌 4층 갈 수 있잖아.”
“뭐?”
“내가 성공 못 하면 지연이 네가 가주라, 응? 너는 4층,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잖아. 아니야?”
“그렇기야…… 하지만.”
말끝을 흐리는 지연을 향해 제아가 서서히 돌아섰다.
메이크업으로 한층 돋보이는 고혹적인 이목구비, 풍성한 머릿결이 가녀린 어깨 위에 유혹적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친구를 보는 지연의 눈빛에는 진한 감동이 담겨 있었다.
“이제야 진짜 내 친구 문제아 같네. 내가 나설 필요도 없겠어.”
지연의 중얼거림에 제아는 생긋 웃었다.
“어때? 파티 여왕 이지연 씨, 이 정도면 4층 통과할 만해?”
“말이라고 해? 퍼펙트다! 그런데, 흠…….”
갑자기 다가온 지연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더니 파우치에서 꺼낸 눈썹 칼로 치마 옆선을 과감하게 터서 날씬한 제아의 각선미가 한껏 드러나게 치마의 허리 부분도 접어서 올렸다.
그것도 모자라 목까지 잠겨 있는 제아의 블라우스 단추를 가슴선이 드러날 때까지 과감히 풀어버린 후에야 지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지.”
“너무…… 야하지 않아?”
“볼륨 터지는 그 잘난 몸뚱이는 썩혀서 뭐하게? 이럴 때 써야지. 오랜만에 이름 값 좀 하자, 응? 30만 원 갖기 싫은가 봐?”
지연이 다시 한 번 30만 원을 입에 올리자, 그제야 제아의 마음속에서 꺼져가던 승부욕이 다시 활활 타올랐다.
30만 원.
그 돈이면 지로와 지연의 생일에 선물을 사줄 수 있고 가족들 선물도 살 수 있다.
“갔다 올게!”
제아는 야무지게 대답하며 주먹을 불끈 쥐고 4층으로 향했다.
하지만 4층 통로를 지키고 있던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괜한 짓을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몇 번 방 가시는 겁니까?”
남자는 4층 손님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물은 듯했지만 천성적으로 거짓말은 못 하는 제아는 입이 꽁꽁 얼어붙어버렸다.
30만 원이고 뭐고, 그냥 뒤돌아서 가버리고 싶었다.
제아가 우물쭈물하다 휙 몸을 돌리려는 순간…….
“언니, 왜 이제 왔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웨이터가 제아의 손목을 덥석 잡고 4층으로 올라갔다.
갑자기 나타난 웨이터의 도움으로 순식간에 4층을 통과한 제아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언니, 3번 룸 들어가려고 온 거 맞지? 근데 왜 혼자야?”
‘왜 혼자긴, 무단 침입했으니 혼자지!’라고 말할 수는 없는지라 제아는 웨이터의 시선을 피하며 열심히 핑계거리를 찾았다.
하지만 도무지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던 웨이터가 빤히 바라보자, 그 시선에 그녀는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아, 저기…….”
더듬더듬 제아가 입을 여는 순간, 어깨 위로 느껴지는 단단하고 따스한 손의 감촉과 나직하면서도 허스키한 남자의 음성이 부드럽게 귓가를 스쳤다.
“이 여자, 내 파트너인데.”
“아이쿠, 제가 실수할 뻔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손님!”
90도로 허리를 숙인 웨이터가 황급히 사라지자 제아는 적막이 감도는 넓은 복도에 남자와 단둘이 남았다.
이제 놓아줄 법도 한데 어깨 위에 놓인 남자의 손은 오히려 힘이 바짝 들어갔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압도적인 존재감이 느껴지는 남자.
그 남자를 향해 돌아서려 했으나, 그 순간 제아는 남자와 함께 바로 옆에 있는 룸 안으로 빛처럼 빨려 들어갔다.
칠흑 같은 어둠 속, 무방비해진 제아를 벽에 바짝 몰아붙인 남자의 갈고리 같은 한 손은 제아의 가는 목을, 다른 한 손은 허리를 거머쥐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남자가 허리를 바싹 받쳐 올리자 순식간에 서로의 하체가 들러붙었다.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남자의 단단한 몸과 아찔하게 코를 자극하는 청량한 남자의 체향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그녀의 본능적인 감각이 몸속에서 꿈틀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올 것 같은 신음을 가까스로 억누른 제아는 남자에게 의지하지 않기 위해 간신히 발끝으로 서서 얕은 숨을 몰아쉬었다.
참 묘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이런 남자에게, 그런 본능이 꿈틀거릴 수 있는지.
어떻게 생겨먹은 줄도 모르는 남자에게 10년 만에 반응을 보이는 심장과 본능에 그녀는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다.
최대한 태연한 척 입을 열었지만, 제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음성은 가늘게 떨려왔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비 매너 손 좀 떼어주실래요?”
하지만 대답 대신 돌아온 건, 애무하듯 목부터 등까지 훑어내리는 남자의 나른한 손길.
이쯤 되니 새하얘진 그녀의 머릿속은 이성이고 뭐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벼, 변태예요? 불이라도 좀 켜주던가요! 자꾸 이러시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거든요?”
조금만 더 진한 스킨십을 해온다면 정강이를 확 걷어차든 목의 숨통을 거머쥐든 어떻게든 발악하리라.
그렇게 제아가 결심한 순간, 목덜미 사이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더운 숨결에 척추를 따라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제아의 미세한 떨림을 남자도 느꼈나 보다.
“쿡.”
어둠 속을 나직하게 울리는 남자의 매력적인 저음에 제아는 심장의 울렁거림이 더욱더 심해졌다.
“이보세요! 자꾸 이러면?”
그 순간, 룸 안에 불이 환하게 들어왔다.
은은한 오렌지 빛 조명.
갑작스러운 불빛 공격에 얼른 손을 들어 눈을 가리는 제아의 귀에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남자가 짓궂게 물어왔다.
“자꾸 이러면, 그다음은 뭐지?”
양심의 가책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음성에 발끈한 제아가 눈을 가렸던 손을 내린 순간, 키스할 듯 다가와 있는 남자의 얼굴에 그녀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성이 흔들리고, 본능이 위험을 감지했다.
뒤늦게 뒷걸음질을 쳐보지만 이미 벽에 몰릴 대로 몰린 상황이라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다.
격하게 흔들리는 눈을 감추기 위해 얼른 눈을 내리깔았지만 흘러나오는 음성은 더듬더듬, 떨고 있었다.
“소리 지른다……고……요.”
“그럼, 소리 질러 봐.”
섬세한 얼굴이, 달콤한 숨결을 토해내는 붉은 입술이, 긴 속눈썹에 맺힌 나른하면서도 섹시한 눈빛이 숨 막힐 듯 바짝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남자의 도발에 제아의 얇은 눈꺼풀이, 마스카라에 앙큼하게 올라간 숱 많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림을 전해왔다.
환청을 듣는 귀도 모자라서 이젠 눈까지도 어떻게 된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두 눈을 깜빡여보지만 그럴수록 숨 막힐 정도로 뇌쇄적인 남자의 얼굴은 확대되어 그녀의 망막에 또렷하게 맺혔다.
미치도록 원망하면서도 그리워했던 얼굴이 바로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너에게 미쳐 있었어.
속삭이듯 귓가를 긁어내리는 허스키한 음성이 또다시 귓가를 울리고.
―키스를 하려면, 입을 벌려야지.
친절하게도 키스하는 법을 알려주던 강렬하게 타오르던 눈빛이 뇌리를 가득 채웠다.
집어삼킬 듯 덮쳐오는 선연한 기억에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만 겨우 내쉬고 있는 제아를 놀리기라도 하려는 듯, 남자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벽을 두드렸다.
톡, 톡톡톡, 톡, 톡톡톡, 톡, 톡톡톡.
가벼운 두드림이었지만 제아의 귀엔 고막을 터뜨릴 것 같은 천둥과도 같은 소리였다.
이 암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둘뿐이었다.
제아 자신과, 한때 그녀의 오빠였던 남자.
“이준…… 오빠.”
제아의 입술 사이로 10년 동안 단 한 번도 뱉어낸 적이 없었던 이름이 흘러나왔다.
“한도준.”
도준의 입술을 피해 제아는 고개를 이리저리 틀어보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집요하게 목에 와 닿는 그의 숨결에 온몸의 피는 뜨겁게 달아올랐고, 터질 듯이 뛰는 심장의 울렁거림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그의 손끝에 얼굴이 들리자마자 시야를 격렬하게 파고드는 아름다운 얼굴에 제아는 숨조차 내쉬기 힘들었다.
짙은 속눈썹 사이에 반쯤 가려진 매혹적인 적갈색 눈동자가 드러나고 선명한 핏빛을 간직한 섬세한 입술 선은 허스키한 음성에 서서히 젖어들었다.
“이제 난, 한도준이야.”
이름을 직접 정정해준 도준의 아름다운 얼굴 위로 겹쳐지는 선이 고운 소년의 얼굴.
간절하게 아니길 바라며 제아는 두 눈을 커다랗게 떠보았다.
눈앞의 남자는 오랫동안 남매로 지내왔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녀의 오빠 문이준이 분명했다.
“오랜만이군.”
꿈을 꾸는 듯 혼몽해진 표정을 하고 있는 제아를 마음껏 눈에 담으며, 도준은 지극히 무심한 말투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내 동생, 문제아.”
표정과 눈빛은 지극히 무심했지만, 도준의 마음은 10년간 참아왔던 그리움에 격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내가 널 얼마나 미친 듯이 그리워했는지.’
도준의 나른한 눈빛이 제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노골적으로 훑어 내렸다.
처음 본 순간부터 격렬하게 탐하고 싶었던 존재를 그는 심장 깊숙한 곳에 또렷하게 각인시켰다.
10년 사이, 웅크리고 있던 가냘픈 꽃망울에서 아찔하고 농염하게 피어오른 꽃송이로 변해버린 그녀를 말이다.
너무 그립고 애틋해서, 절절하도록 깊고 깊어서 감히 탐하지 못하고 눈빛으로만 그리움의 체취를 읽어 내리던 도준이었다.
그런데 소녀에서 여자가 되어버린 제아에게서 흘러나오는 농밀한 향기가, 겁에 질린 커다란 고양이 눈이, 탐스럽게 부풀어 오른 촉촉한 입술이 내면에 숨겨놓은 그의 잔인한 정복욕을 자극했다.
무르익을 대로 익은 꽃을 따버리기 위해 홀린 듯이 도준이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는 순간, 제아가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입술을 가려버렸다.
그 손짓에 도준의 차가운 이성이 돌아왔다.
‘아직도, 나를 거부하겠다는 건가.’
완강한 거부의 손짓에 도준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입 끝을 당겨 소리 없이 웃었다.
돌아온 보람이 있었다.
여전히 날 거부하는 넌, 여전히 날 미치게 하니까.
―이준아, 제아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동생이다.
10년 전 제아의 어머니인 윤영이 그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었다.
부모조차 버렸던 쓰레기 같은 자신을 거두어주신 고마우신 분이자 그의 아버지와 각별한 사이였던 윤영의 말을 냉정하게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이젠 그와 제아를 남매로 묶어놓았던 빌어먹을 서류에서도 완벽하게 벗어났으니까.
이젠 완벽하게 남이 되었으니까.
‘이제 떳떳하게 널 가질 수 있어, 난.’
여자의 손처럼 섬세한 도준의 손이 그를 거부하는 손을 툭 건드리자, 제아의 손은 힘없이 떨어졌다.
“문제아, 10년 전 그때처럼.”
키스할 듯 가까워진 입술과 입술 사이로 느껴지는 홧홧한 숨결.
“내가 키스라도 할까 봐 겁이 나는 건가?”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따버릴 수 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낸 도준은 멈춰버린 입술 대신 강렬하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제아의 입술을 마음껏 유린했다.
입술을 타고 흘러내린 그의 시선의 끝에 걸린 건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풍만한 바스트 라인.
10년이란 세월은, 비쩍 말랐던 소녀를 청순하면서도 묘한 색기가 흘러넘치는 여자로 만들어 놓았다.
심장을 꽉 틀어쥐고 흔들어버릴 만큼의 매혹에도 도준은 기민하게 내면의 흔들림을 감추고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만큼이나 차가운 음성을 붉은 입술 사이로 흘렸다.
“그런데 이를 어쩌지?”
입술을 떠난 달콤하고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귓불로 옮겨갔다.
“오빠는, 여동생에게 키스하지 않거든.”
의미심장한 도준의 마지막 속삭임에 제아는 참았던 숨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