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외전 2 황후가 벌을 받는 법
다행히 라벨라의 바람대로 때는 금방 찾아왔다.
“얌전히 따라 와.”
라벨라를 가둬둔 사내들은 다시 내려와 몇 명을 끌어냈다.
“그 여자는 놔둬. 더 비싼 값으로 흥정할 거니까.”
라벨라를 보고 잠시 고민하던 이들은 이내 자리를 떴다. 아마도 거래를 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시작할까.’
기척이 어느 정도 멀어지자 손끝으로 뾰족한 얼음 날을 만든 라벨라는 손목의 밧줄을 빠르게 끊어냈다.
이어 발목을 묶고 있던 밧줄마저 끊어낸 라벨라는 갇혀 있던 이들의 손발도 자유롭게 해줬다.
“큰 소리가 나더라도 도망갈 생각 말고 여기 얌전히 있어요. 알겠어요?”
“…….”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여기서 꼼짝하지 말아요.”
무슨 일인가 싶어 눈만 굴리는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라벨라는 얼음으로 철창의 열쇠 구멍 모양을 본 떠 쉽게 빠져나왔다.
“아, 벌써 재미있네.”
역시 사냥 직전이 제일 흥분되는 법이지.
사내들의 기척을 쫓아 움직이는 라벨라의 금안이 반짝였다.
쾅!
라벨라의 작은 발이 나무문을 힘껏 걷어찼다.
“누구냐!”
은밀한 거래 현장은 갑자기 나타난 작은 여자 하나로 혼비백산이 됐다.
“너는……!”
라벨라의 얼굴을 확인한 사내는 미처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니, 그렇게 세게 안 때렸…….”
어이없어하면서도 사내의 등을 밟고 올라선 라벨라가 건너편으로 몸을 던질 때였다.
반짝이는 자신의 백금발이 얼핏 시야에 들어왔다. 염색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아쉽지만 이쯤에서 정리해야겠네.'
곧장 멈춰 선 라벨라는 빠르게 불기둥을 만들어냈다.
“……부, 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방 안에 있던 사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 목숨 부지하고 싶으면 얌전히 와서 무릎 꿇지?”
한 손에 밧줄을 든 라벨라가 경악한 이들의 눈을 차례로 맞추며 경고했다.
“…….”
“뭐 해?”
“……사, 살려주십쇼!”
라벨라가 불길을 더 키우자 서로 눈치만 보던 사내들이 앞 다투어 무릎을 꿇었다.
“서로서로 묶도록 해. 지켜보고 있으니 엉뚱한 생각은 금물. 알지?”
명령을 내린 라벨라는 사내들이 서로를 묶는 걸 보며 조사를 시작했다.
“후작이 고용한 좀도둑들, 본거지가 어디지?”
“마을 뒤편 산속에 있습니다.”
“뭐? 왜 이렇게 먼 데다 만들었어?”
“죄, 죄송합니다.”
시간이 더 걸리게 생겼잖아?
살짝 마음이 조급해진 라벨라는 사내들을 한데 모아 건물 기둥에 단단히 묶어두었다.
“갔다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도록 해. 아까 봤지? 도망쳐봐야 소용없어.”
라벨라가 손가락 끝에 불을 피워 글씨를 썼다.
타고 남은 재처럼 까만 연기가 ‘죽는다.’ 세 글자를 만들어냈다.
히익, 숨넘어가는 소리를 뒤로하고 건물 밖으로 빠져나온 라벨라는 걸음을 서둘렀다.
머리색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 밖을 막 빠져나가려던 때.
“라벨라.”
“!”
등 뒤에서 그녀의 이름이 들려왔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는 걸까?”
착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은 라벨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런. 일이 꼬였네?’
“음.”
천천히 돌아서는 라벨라는 최대한 예쁜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 귀여운 남편의 잔소리를 피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루비츠의 품에 있는 카엘을 보는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카엘!”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눈썹 사이를 좁혔던 라벨라는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금방 표정을 풀었다.
바동거리며 루비츠의 품에서 빠져나온 카엘이 종종걸음으로 라벨라에게 다가왔다.
서둘러 무릎을 굽힌 라벨라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어머니, 마중을 왔어요.”
“정말?”
“그리고 어머니가 어디로 갔는지 전 말하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우리 카엘, 의리 있는 아이구나.”
라벨라는 아이의 볼에 입을 연달아 맞췄다.
루비츠를 닮은 웃음이 사랑스러웠지만, 지금만큼은 그 사랑스러운 황제가 괘씸했다.
분명히 이런 위험한 곳에 아이를 데려오지 말라 했을 텐데.
라벨라는 카엘을 품에 꽉 안아 제 얼굴을 못 보게 하고서 남편을 힘껏 노려보았다.
야차와 같은 모습에 루비츠의 뒤에 있던 이들이 힉 숨을 삼켰으나 루비츠는 태연했다.
“이만 궁으로 돌아갈까요, 부인?”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데요, 폐하.”
“그곳이라면 정리하고 오는 길입니다만?”
그녀의 남편은 정중한 말투를 쓰면서 화가 났다는 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이쪽도 마저 수습을 해야 돼.”
지은 죄가 있으니 한발 양보하기로 한 라벨라는 왔던 방향을 고개 끝으로 가리켰다.
“응? 이스카.”
그리고 그녀만이 쓰는 애칭을 무기로 꺼내 들었다.
속삭이듯 그 이름을 부르면 그녀의 남편은 여지없이 녹아내렸다.
“……가면서 이야기하지.”
루비츠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역시, 어김없이, 무조건이었다.
“고마워, 이스카.”
라벨라는 싱그럽게 웃었다.
*
갇혀 있던 이들은 모두 무사히 구출됐다.
“자, 여기 있는 병사들이 각자 집으로 안전하게 데려다줄 거예요.”
라벨라는 빛에 적응하느라 연신 눈을 깜빡이는 이들에게 다가가 상황을 설명했다.
라벨라에게 시선을 옮긴 이들이 모두 놀란 토끼눈을 했다.
달빛 같은 백금발과 환한 태양 빛 같은 금안.
소문으로만 듣던 제국 유일의 외모가 설명하는 건 딱 하나였다.
“화, 황후 폐하?”
“아.”
라벨라는 염색이 다 빠져버린 제 머리를 손으로 쥐었다 놓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아니, 그런 건 됐으니까 일어나요.”
라벨라가 질색하듯 손을 내저었다. 그녀를 황송하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은 좀처럼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다음부터는 좋은 일자리를 주겠다는 그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말고. 세상에 쉽게 일하고 많이 벌 수 있는 직업 같은 건 없으니까.”
“폐하.”
“그럼 잘 가요. 수고해요들.”
황궁의 병사들에게 손짓한 라벨라가 몸을 돌렸다.
오늘 라벨라가 손에 넣은 증거들은 귀족회의에 넘어가 그라비텔 후작의 처분을 결정하는 데 사용될 예정이었다.
“자, 그럼 이제 집으로 돌아갈까?”
삐딱하게 서서 그녀를 보고 있던 루비츠가 팔짱을 풀었다.
“가는 길에 나눌 대화도 많을 것 같군요, 황후.”
그녀의 위치를 한 번 더 확인시켜주는 루비츠의 말에 라벨라는 눈만 깜빡였다.
루비츠가 저렇게 나올 때는 일단 한 수 접는 게 나았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봐야 좋을 건 없었다.
*
황궁으로 당장 돌아가려던 계획은 카엘이 지역 특산물인 울란 고기를 먹고 싶다는 바람에 미뤄졌다.
“그럼 저는 옆 테이블에서…….”
“리텔니, 앉아.”
“앉아요, 리텔니.”
“…….”
두 상관의 입에서 동시에 나온 말에 리텔니는 울상이 되어 루비츠의 옆에 앉았다.
그의 두 상관은 팔짱을 낀 채 말이 없었다.
“하하, 황자님. 입에 맞으시나 봅니다.”
리텔니의 유일한 희망은 맞은편에 앉아 맛있게 고기를 오물거리는 황자뿐이었다.
하지만 황자는 배불리 먹자마자 라벨라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고 말았다.
“아이는 왜 데려온 거야?”
카엘이 잠이 든 걸 확인한 라벨라가 불만을 터트렸다. 물론 카엘에게 들릴까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였다.
“자기 때문에 엄마의 행선지가 들켰다고 생각해서 함께 가겠다며 매달리는데, 어떻게 떼어놓고 와?”
이 멍청한 아들 바보가!
“그걸 지금 핑계라고 대는 거야? 몇 번을 말해, 난 카엘이 어린 나이부터 피를 보며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아.”
“똑똑한 아이라는 건 당신도 잘 알잖아. 그리고 본인이 황제의 길을 선택한다면, 이 또한 카엘에게 필요한 교육이야.”
“이스카, 카엘이 우리처럼 자랄 필요는 없어.”
“알아, 그러게 왜 애한테 거짓말을 하게끔 만들어.”
“……그야 차메르가 항상 붙어 있으니까…….”
“……황후. 외부에 나갈 경우엔 분명 내게 언질을 주고 가라고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라벨라가 뜨끔한 표정을 짓자 루비츠가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알지만 한시가 급한 건도 있기 마련이잖아……요?”
“이게 한시가 급한 건인가? 리텔니, 어떻게 생각해?”
화살 끝이 리텔니에게 향했다. 두 주군 사이에서 오가며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리텔니를 루비츠가 모를 리 없었다.
“폐하, 저는 중재자의 역할로 여기에 앉혀 놓으신 거잖습니까. 가만히 듣기만 하겠습니다.”
리텔니가 여우처럼 입을 잠그는 시늉을 했다.
“납치되어 가족도 못 만나고 있는 가엾은 이들을 생각해 보세요, 폐하. 어떻게 모른 할 수 있겠어요?”
방법을 바꾼 라벨라가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던 루비츠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렇다고 매번 이렇게 말도 없이 나가야겠어?”
가까스로 버텨낸 루비츠는 엄격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진 걸 숨길 수는 없었다.
“이게 빠르잖아.”
“라벨라, 당신의 방식을 문제 삼는 게 아니야, 매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당신의 행방을 뒤늦게야 알게 되는 내 기분을 생각해 보라고. 내가 얼마나 걱정할지 생각 안 해?”
“음…… 미안.”
라벨라가 눈웃음을 사르르 치며 혀를 빼무는 순간, 리텔니는 제 주군이 패하리라는 걸 직감했다.
“그렇지만, 내가 말하지 않고 나와도 넌 내 행동을 다 예측하잖아. 안 그래?”
“…….”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이스카, 너밖에 없어.”
역시나 귀까지 붉어진 황제는 이마를 손으로 짚은 채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저렇게 좋으실까.’
두 사람의 승패의 결과가 어찌 됐든 리텔니는 라벨라의 편이었다.
루비츠는 완벽한 황제였다. 리텔니는 루비츠가 역사 속에 가장 위대한 황제로 기록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루비츠의 곁을 지키고 있노라면 모든 걸 내걸고 충성을 바친 보람을 매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런 루비츠의 평가에 힘을 실어주고 날개를 달아주는 이가 바로 라벨라라는 것이었다.
라벨라의 독특한 행보는 임피리아 내에서 연일 화제였고, 황실이 제국민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물론 라벨라가 그런 걸 계산하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어쨌든 제국 역사상 가장 큰 사랑을 받는 황실 가족이었다.
물론 그 두 사람이 툭하면 이런 유치한 기싸움을 벌인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이 싸움의 끝은 눈꼴 시린 애정행각으로 끝날 것이다.
리텔니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폐하, 이만 집으로 돌아가서 대화를 이어가는 게 어떨까요?”
승기를 잡은 라벨라가 슥 몸을 기울이며 루비츠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만 차메르를 부르시지요.”
목덜미를 슥 훑는 하얀 손가락을 루비츠가 단단히 움켜쥐었다.
“아, 그럼 돌아가면 뭘 해야 하는지도 잘 알겠습니다, 황후?”
루비츠가 라벨라의 손가락 끝을 깨물며 씩 웃었다.
‘오, 제발.’
“제발 앞으로는 두 분 싸우실 때 절 빼주시겠습니까?”
결국 못 볼 꼴을 보게 된 리텔니만 이 자리의 패배자였다.
*
“움?”
카엘이 잠에서 깨어났을 땐 이미 그는 황자궁의 침대 위였다.
[무슨 꿈이라도 꾸었느냐.]
머리맡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차메르가 다정하게 물으며 카엘의 배를 도닥였다.
“스승님, 오늘 어머니랑 아버지랑 함께 울란 고기를 먹고 왔어요.”
[즐거웠겠구나.]
차메르의 눈에서 애정이 쏟아졌다.
이 아이를 곁에서 돌보기 위해 봉인에서 풀려나고도 스스로 루비츠에게 새로운 제약을 걸어 달라 청했다.
아무리 루비츠라 한들 오랜 복수심에 휩싸여 있던 그를 제 아이의 곁에 두려 할 리 없었으니까.
그리고 차메르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차메르 자신 외에 유일한 마법사인 이 아이는 한 번씩 괘씸하게 구는 제 부모와 달리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고 싶어졌어요.”
카엘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침대에서 꾸물꾸물 내려오기를 시도하자 차메르는 대번에 난감해졌다.
황제 부부가 궁에 돌아온 뒤 떨어진 명령은 황제궁 근처에는 누구도 얼씬하지 말라는 거였다.
황제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이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금 네 부모님은 바쁘단다.]
“왜요?”
부쩍 궁금한 게 많아진 다섯 살의 아이는 질문이라는 무기를 들이밀었다.
[그러니까…… 그래, 일이 덜 끝났거든.]
“아. 그럼 카엘은 착한 아이니까 부모님을 응원해드릴래요.”
[좋은 생각이구나.]
차메르는 카엘의 앞에 편지지를 띄웠다.
“어머니…… 아버지…….”
카엘의 손가락을 따라 실타래 같은 금빛 연기가 일렁이며 편지지 위에 글씨를 만들었다.
그리고 곧 편지는 허공을 날아 황제궁의 침실로 향했다.
*
‘마력?’
셔츠 단추를 풀던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췄다.
“잠깐……!”
라벨라의 금안이 날카로워짐과 동시에 그녀의 머리 위로 반짝이는 편지가 도착했다.
“아, 카엘?”
라벨라가 경계를 풀자마자 편지지가 허공에 펼쳐졌다.
[어머니, 아버지, 힘내세요, 저는 착한 아이니까 열심히 응원할게요.]
“…….”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루비츠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라벨라를 올려다봤다.
그의 몸 위에 있던 라벨라 또한 굳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황당한 시선이 마주치자 결국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누구 아들이야?”
“당신과 내 아들이지.”
씩 웃으며 묻는 라벨라에 루비츠 또한 뿌듯한 웃음으로 답했다.
“어떻게 해? 응원한다는데?”
“카엘의 응원은 전부 당신에게 줄게.”
“하, 이스카. 내가 말하지 않았어? 침대에서까지 쓰러뜨리는 취미는 없다니까?”
“글쎄, 우리 황후께서 약속을 어기고 잘못을 저질렀으니,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게 맞지 않나? 당신이 카엘에게 늘 하는 말이잖아.”
“……참, 예쁜 입술로 맞는 말만 골라 하시네요, 폐하.”
할 말 없어지게 말이야.
픽 웃음을 흘린 라벨라가 빠르게 몸을 숙였다.
입술이 바로 닿기 직전에 멈춘 라벨라의 부드러운 백금발이 흘러내려 루비츠의 뺨을 간질였다.
“이 머리카락이 얼마나 아름다운데, 자꾸 물을 들이다니.”
“다른 색이어도 예뻐하면서.”
“그건 그렇지만.”
루비츠의 커다란 손이 라벨라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곧 숨결이 섞였다.
팽팽하던 공기가 눅진하게 변해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화로운 황실의 일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