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외전 1 황후는 바쁩니다
“좀도둑?”
“네. 좀도둑이요. 물론 좀도둑치고는 피해가 크긴 합니다만.”
루비츠가 어이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자 리텔니가 한 번 더 확인시키듯 고개를 끄덕였다.
“국경지대에만 보낸 군사가 몇이고 지은 초소가 몇인데, 고작 좀도둑?”
픽 웃음을 흘린 루비츠가 손에 든 서류를 책상 위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키르아에서 올라온 정보니까 틀림없습니다.”
“그것도 바르 지역만 그렇다라…….”
루비츠의 긴 손가락이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그가 황위에 오른 지도 벌써 5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꽤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제일 먼저 한 건 귀족들의 자유를 대폭 늘려 준 거였다. 약속대로 사병을 허락해 각 영지를 지킬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었다.
귀족들이 황궁에 납부하는 세금 제도를 개편해주는 대신, 각 영주민에게 걷는 세금 제도도 개편해 투명한 체계를 만들었다.
제국민이 직접 황궁으로 민원을 넣을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려 했으나 귀족들이 껄끄러워해 그 부분은 양보해준 참이었다.
어차피 임피리아 온 지역에 거점을 둔 키르아가 있으니, 오히려 날것의 정보를 받을 수 있었다.
귀족과 제국민 모두를 고려해 만든 제도를 빠르게 도입했고 어느 정도 안정화 된 후였다.
그런 상황에 좀도둑이라니.
“그라비텔 후작의 사병이면 충분히 해결하고도 남을 텐데? 이 지경이 될 정도였다면 중앙에 도움을 청했어야 맞고.”
“그러게 말입니다. 오늘 귀족 회의가 있으니 그라비텔 후작이 뭐라고 이야기할지 들어 보시죠.”
“그래야겠지.”
서류를 내려다보는 루비츠의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
*
“참, 국경 지대 수비를 강화했는데 다들 어떤 상황인지 궁금하군요.”
“저희는 안정적입니다. 수확 철마다 골머리를 썩었는데 저희 사병과 황궁의 병사들로 해결됐습니다.”
“저희도 그렇습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지에 국경지대가 포함된 이들이 한마디씩 말을 보탰다.
“바르는 어떤가요?”
루비츠의 시선이 마지막 이에게로 향했다.
“저희도 괜찮습니다.”
“……그런가요?”
“네, 이 모든 게 폐하께서 마음 써주신 덕분입니다.”
그라비텔 후작은 평온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루비츠가 놓칠 리 없었다.
“그거 참 다행이군요.”
루비츠는 인자하게 웃어주었다.
물론 리텔니는 그 후에 내려 올 명령을 예상했지만.
*
“저렇게 의심스러운 냄새를 풀풀 흘리는데, 모르는 척할 수야 있나. 키르아에 자세히 확인해보라고 해야겠어.”
“궁으로 들어오라 할까요?”
“됐어, 라벨라에게 말하는 게 빠르지.”
“그 핑계로 황후 폐하 얼굴 보러 가시는 거, 다 압니다.”
“알면 그냥 모르는 척도 해. 리텔니, 넌 사람이 참 변함이 없어서 좋아.”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리텔니를 타박하면서도 루비츠는 긴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였다. 라벨라를 만나러 가는 길은 백이면 백, 늘 설레고 두근거렸다.
“집무실을 나란히 만들어 놓으면 뭐 해.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든데.”
“그것도 꽤 힘들게 투쟁해서 얻어내신 건데 말입니다.”
“저렇게 바쁠 줄 알았으면 황후 자리에 앉히는 게 아니었어.”
“괜히 그러시기는. 솔직히 이렇게 될 걸 예상하셨잖습니까.”
곁에서 지켜본 바, 황후는 일중독에 가까웠다. 일하지 않을 때도 그녀는 황후궁의 연무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만큼 훌륭하신 황후라는 증거죠. 아니면…… 폐하를 향한 애정이 식었거나?”
“아하. 죽고 싶다고?”
우뚝 걸음을 멈춘 루비츠가 엄지 끝으로 허리춤의 검을 밀어 올렸다.
“설마요. 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농담 모르십니까, 폐하? 두 분 금실이 좋다는 건 제국 내에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요.”
루비츠는 리텔니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변명하는 걸 보고서야 검을 집어넣었다.
기분이 좀 나아진 루비츠가 연무장에 이르렀을 때였다. 연무장 곳곳에는 거대한 얼음기둥이 박혀 있었다.
루비츠는 그 사이에 서 있는 사랑스러운 아이를 발견하고 미소지었다.
“카엘.”
다정한 목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무릎을 굽혀 팔을 벌리자 아이는 짧은 다리로 느긋하게 걸어와 루비츠의 품에 안겼다.
루비츠가 몸을 일으키자 아이의 짧은 다리가 깡총하니 허공에 떴다.
“오셨습니까, 아버지.”
발음이 줄줄 샌다는 걸 제외하고는 도저히 다섯 살 아이라고 볼 수 없는 말투였다.
‘도통 적응이 안 된단 말이야.’
리텔니는 어색하게 볼을 긁적이며 차메르를 힐끗 쳐다봤다.
역시 원흉은 황자 곁에 늘 붙어 있는 저 대마법사겠지.
3년 전 봉인이 풀려 자유의 몸이 되었는데도 그는 황궁에 객식구로 남아 황자의 돌보미를 자처하고 있었다.
황제는 기꺼이 그를 반겼지만, 리텔니는 솔직히 꺼림칙했다.
그가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아직도 무서운데, 황자를 보는 마법사의 얼굴은 인자하기 짝이 없었다.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종족이야.’
속으로 혀를 차다가 차메르와 눈이 마주치자 리텔니는 괜히 씨익 웃어 보인 뒤 황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황자를 한 팔로 가볍게 안아 든 루비츠는 하얗고 포동포동한 볼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뭉클해지는 풍경에 리텔니는 자신도 모르게 표정을 풀었다.
말투야 어쨌든 황자는 누가 보아도 사랑스럽고 천사 같은 아이였다.
황제를 꼭 빼닮은 은발에 눈동자는 황후를 닮아 투명한 금안이었다.
하얀 피부와 또렷한 이목구비는 황제를 닮은 것도 같고 어떨 때는 황후를 닮은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마법 훈련을 하고 있었구나.”
주변을 힐끗 둘러본 루비츠가 아들의 머리를 슥슥 문질러주었다.
“네, 오늘은 얼음을 만들고 있었어요.”
“이 정도면 임피리아 사람들 전부가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셔벗이 나오겠는데.”
저 팔불출 황제.
리텔니와 차메르가 동시에 눈썹을 찌푸렸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카엘은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니까.
“그런데 카엘, 네 엄마는 어디에 있을까?”
“…….”
루비츠가 눈을 마주치며 묻자 또랑또랑하게 말하던 작은 입술이 조개처럼 다물어졌다.
루비츠의 자색 눈동자가 일렁였다.
“음, 우리 황후께서 또 궁 밖으로 나들이를 가신 걸까?”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비밀을 지키려는 태도는 역시 라벨라의 훌륭한 조기교육 덕분이었다.
“카엘, 항상 입을 다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란다.”
“그렇지만, 그래도 카엘은 아무것도 몰라요.”
“좋아, 엄마가 알면 훌륭한 아이라고 칭찬하겠구나.”
아들의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번지는 걸 본 루비츠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볼에 입을 맞췄다.
웃는 모습이 라벨라를 쏙 빼닮은 라벨라와 자신의 아이였다.
“하, 그나저나 네 엄마는 또 어딜 간 걸까. 라벨라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었어. 안 그래?”
루비츠의 가라앉은 눈이 차메르에게 책망하듯 꽂혔다.
[그 망나…….]
망나니 같은 녀석의 고집을 몰라서 하는 소리인가.
억울함에 대꾸하려던 차메르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엇보다 마법을 가르치도록 협박 비슷하게 한 건 황제 본인이었다. 하여간 쌍으로 제멋대로인 부부였다.
[마법에 재능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욕이라도 한마디 해주려던 차메르는 카엘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보며 말을 고쳤다.
“그래서, 지금 라벨라는 어디에 있지? 이번엔 도대체 어디로 보내 달라 하던가.”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지만.
루비츠가 한숨을 폭 내쉬며 라벨라의 행방을 찾는 시각.
라벨라는 국경지대에 있는 마을의 외진 골목에 도착한 참이었다.
“아, 왜 나는 이걸 못 하는지 모르겠어. 이 좋은걸.”
차메르를 시켜 바르까지 한 번에 이동한 라벨라가 아쉬움에 툴툴거렸다.
철저한 훈련으로 마력을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게 됐지만, 태생이 마법사가 아닌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한정되어 있었다.
“카엘이 크면 해달라고 해야지.”
다행히 그녀의 아들은 차메르처럼 마법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다고 하니 아쉬움이 덜했다.
적어도 그녀는 전 세계를 통틀어 최고로 강한 존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거다.
‘그 인간이 보면 부러워 죽으려 하겠지.’
라벨라는 생물학적 부친을 떠올리며 코웃음 쳤다.
그뿐이랴. 제 배로 낳아서 하는 말이 아니라 카엘은 어느 모로 보나 완벽한 아이였다.
물론 루비츠, 그녀 남편의 예쁜 얼굴이 큰 역할을 한 덕분이지만.
“그나저나, 어디를 먼저 갈까?”
귀여운 아들을 떠올리며 흐뭇해하던 라벨라가 지붕 위로 올라 마을을 훑었다.
“그라비텔 후작이 뒷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 생각이었나 봐. 영주민들한테 세금을 더 걷으려니 황성의 눈치가 보이고, 그래서 잔꾀를 부렸어.”
임피리아 전역에서 수집돼 올라오는 정보들은 아르젠을 거쳐 모두 라벨라에게 전해졌다.
“치사하게 도적질로 모으시겠다? 그 돈 모아서 뭐 하려고 했대?”
“최근 이상한 취미에 빠졌더라고. 장식용 사람을 구매한다나?”
“뭐?”
“아름답거나 특이한 외모를 가진 사람들을 모은다나 봐.”
아르젠의 보고를 받자마자 참을 수 없어 움직인 참이었다.
참으로 기괴한 취미였다.
사람을 사고파는 게 철저히 금지된 임피리아에서 귀족이 해서는 안 될 일이었고.
더 늦기 전에 해결해야하지만, 관례대로 하면 번거로운 절차도 많고 조사가 진행되는 사이에 후작이 증거를 인멸할지도 몰랐다.
황후가 됐어도 효율을 따지는 그녀의 습성은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되도록 정해진 황궁의 규칙을 따르려 노력했지만 역시 가끔은 키르아의 방식대로 해결해야 할 때가 있었다.
“루비츠는 오늘 늦게까지 회의를 한댔으니까.”
그 전에 모든 일을 끝내고 돌아가면 완벽하다.
게다가 루비츠에게 들키지 않으려 키르아 녀석들도 떼어놓고 혼자 왔으니까.
“일단은 머리부터 잡는 게 낫겠지?”
라벨라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붕 위를 통통 뛰어 넘어갔다.
*
‘저놈이군.’
허름한 펍 구석에 앉아 드나드는 이를 관찰하던 라벨라의 눈에 타깃이 포착됐다.
족제비처럼 찢어진 눈에 비열한 외모. 미리 알고 온 정보대로라면 오늘 저녁 거래를 진행할 후작의 대리인이었다.
낡은 펍과 어울리지 않는 사내는 커다란 덩치의 사내와 은밀히 접선하고는 곧장 자리를 떴다.
‘그렇다는 건, 거래 상대가 저놈이라는 걸 테고.’
목표물을 확인한 라벨라는 망토 후드를 벗으며 사내에게 다가갔다.
까맣게 물들인 머리가 펍의 낡은 불빛 아래 반짝였다. 그녀의 백금발은 ‘내가 황후요.’ 드러내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변장은 필수였다.
물론 마력으로 한 거라 지속효과는 그리 길지 않지만, 루비츠의 회의 전에 돌아갈 예정이니 시간은 충분했다.
“꺄악!”
라벨라는 일부러 사내의 어깨에 부딪치며 앞으로 넘어졌다.
“뭐야?”
컵을 입으로 가져가던 사내는 내용물이 왕창 쏟아지자 버럭 소리를 지르며 라벨라를 내려보았다.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가냘프게 쓰러져 있던 라벨라가 고개만 슬쩍 들었다. 누가 봐도 예쁘게 보일 각도였다.
“눈 똑바로…… 으응?”
역시나 화를 내려던 사내가 눈을 슥슥 비비고는 이내 라벨라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아니, 아가씨. 조심해야지.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곰 같은 사내는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친절한 척 말을 건넸다.
“이 마을에 살고 있나? 못 보던 얼굴인데.”
라벨라를 슥 훑는 눈빛이 마치 상품을 평가하는 듯했다.
“…….”
라벨라가 침묵을 지키자 고개를 갸웃하던 사내가 제 동료들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집이 어딘가. 보아하니 시간도 늦고, 괜찮으면 데려다주도록 하지.”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지만 라벨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하기는.’
사내들의 흡족한 미소를 보며 라벨라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
“이봐, 아가씨. 낯선 사람 말을 그렇게 함부로 믿는 게 아니지. 응? 제대로 인생 배웠다고 생각해.”
사내들은 라벨라를 웬 철창 안에 가둬놓고 낄낄 웃으며 사라졌다.
‘누가 할 소리를.’
손발이 묶인 채 바닥에 누워 있던 라벨라는 픽 한숨을 흘렸다.
전부 그녀의 계획대로였다. 이 잠깐의 굴욕은 조금 후에 갚아줄 예정이니 충분히 참아줄 수 있었다.
“…….”
몸을 옆으로 굴린 라벨라는 곧 겁에 질린 얼굴들을 발견했다.
“저기, 괜찮아요?”
하나둘씩 라벨라의 곁으로 다가온 이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 아름다운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취향하고는.’
쯧 혀를 찬 라벨라는 몸을 꿈틀거려 앉았다. 누군가 다가와 라벨라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주었다.
“아, 고마워요.”
혼자 힘으로도 풀 수 있었지만 감사를 표한 라벨라는 눈을 감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여긴 지하 창고인가. 위층에 다섯. 그 위로 또 한 층……. 좀도둑들이 있는 덴 다른 곳인가 보네. 이런, 귀찮게 됐어.’
오가는 기척을 세며 건물 내부를 대략 파악한 라벨라가 눈을 떴다.
이제는 때만 기다리면 되는 거였다.
‘너무 늦지 않아야 할 텐데.’
루비츠의 잔소리를 듣는 건 사양이었다.
하지만 루비츠의 회의가 예정보다 일찍 끝나는 건 라벨라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그녀의 든든한 심복인 리텔니가 분명히 늦게 끝난다고 확언했기 때문에.
루비츠가 이미 그녀의 행선지를 알아냈다는 걸 모르는 라벨라는 그저 오랜만에 몸을 풀 생각에 즐거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