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그녀, 라벨라 비스메르트
결혼식과 황후 책봉식은 동시에 진행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명목은 라벨라의 건강을 고려해야 한다는 핑계였지만, 실상은 라벨라가 따로 하는 걸 귀찮아해서였다.
날이 정해지자마자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황궁 전체가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떠들썩했지만 라벨라에게는 다른 나라 이야기였다.
“하기 싫은 건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루비츠는 라벨라를 번거롭게 만들 생각이 없었고, 테오도라가 기꺼이 나선 것도 이유였다.
커다란 황궁 전체가 라벨라 한 명의 편의를 위해 움직인다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만, 그걸 트집 잡는 이도 라벨라 한 명뿐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이해하지 못하는 라벨라를 보며 루비츠는 웃었다.
“글쎄, 이쯤 되면 당신에게 사람을 홀리는 마력도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해봐야겠어.”
능글대는 루비츠의 말에 라벨라는 헛숨을 뱉을 수밖에 없었지만.
라벨라의 일상이 한가한 건 아니었다. 행사 당일에 입을 의상을 준비하느라 매일 같이 드나드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했다.
키르아의 본거지를 황궁 근처로 옮기기로 한 탓에 체계를 개편해야 했고, 루비츠 몰래 황후의 업무까지 익히고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결혼식은 어느새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라벨라.”
점심을 먹을 때가 되자 루비츠는 칼 같이 나타났다. 만찬장으로 가는 대신 오늘도 그녀의 식사는 황제궁으로 옮겨질 터였다.
“있지, 이스카. 다벨이 적당한 운동은 도움이 된다고 했어.”
“당신 이미 많이 움직이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뼈가 있는 말에 라벨라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라벨라, 과연 황궁 내에 내가 모르는 게 있을까?”
웃음을 흘린 루비츠가 얘기가 어디서 새 나갔을까 생각하는 라벨라의 미간을 꾹 눌렀다.
“…….”
요즘 자꾸만 루비츠에게 속내를 들키는 것 같았다.
라벨라가 부루퉁해 있는 사이 곧 윤기 도는 음식으로 가득한 상이 그녀 앞에 놓아졌다.
루비츠가 강제로 먹이지 않아도 라벨라는 알아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일할 때 몸이 무거우면 안 된다며 필요 이상으로 먹지 않던 라벨라가 하루 세끼를 얌전히 챙겨 먹는 것도 변화 중 하나였다.
“잘 먹네.”
“아기가 잘 커야 하니까.”
“흐음.”
“그렇게 보지 말아줄래? 나도 내게 이런 모성애가 있을 줄은 몰랐거든.”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여.”
“그냥 먹는 것도 예쁘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루비츠가 웃으며 은근슬쩍 라벨라의 손목을 감아쥐었다. 전과 달리 말랑하고 보드라웠다.
살집이라고 전혀 없던 몸에 보기 좋게 살이 붙고 있었다. 괜한 뿌듯함에 라벨라의 입이 오물거리는 걸 사랑스럽게 바라볼 때였다.
“폐하, 네이트랄 공자가 찾아왔습니다.”
“공자가?”
루비츠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공자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뭔가 단단히 각오한 듯 비장하기까지 한 표정이었다.
“폐하, 잊으신 듯하여 말씀드립니다. 원래 임피리아에서는 이맘때쯤 신부를 위한 연회를 엽니다.”
“아, 그렇지.”
루비츠는 라벨라의 입술 끝에 묻은 소스를 닦아 낸 손가락을 핥으며 무심하게 반응했다.
“신부를 위한 연회? 그게 뭔데?”
입안에 있던 음식을 삼킨 라벨라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임피리아에서는 결혼으로 집을 떠나게 되는 신부를 위해서 신부의 가족들과 친구들이 연회를 엽니다.”
공자가 라벨라를 향해 따스한 미소를 내보였다.
“그렇군요. 그런데 저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아닐까요.”
가족도 친구도 없는데?
“무슨 그런 서운한 말을. 우리가 가족인데,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나도 그냥 넘어갈 수 없겠는데.”
라벨라의 심드렁한 반응에 발끈한 건 공자와 루비츠 두 사람 모두였다.
루비츠가 심상해하는 라벨라의 볼에 입을 맞춘 뒤 공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럼 프롬쉘에서 연회를 준비하겠습니다.”
허락이라고 생각한 공자가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아, 그건 곤란한데.”
“폐하. 설마 신부의 추억을 방해하실 겁니까?”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해 환하게 웃던 공자의 입꼬리가 굳었다.
“홑몸도 아닌데 프롬쉘까지 며칠 거리를 보낼 수 없지 않겠습니까.”
할 말을 잃은 공자가 그럴듯한 반격을 시도하려 입을 움찔거렸다.
“그건 그렇지만, 이건 임피리아의 전통입니다. 가족들 모두가 라벨라 양을 보고 싶어 하고 축하해주고 싶어 한단 말입니다.”
“그럼 그들이 이곳으로 오면 되겠네요.”
“……네?”
“황궁은 넓고, 빈 곳은 많은데 무엇이 고민입니까.”
“아.”
그렇게 라벨라를 위한 연회는 급작스럽게 마련됐다. 키르아 녀석들이 황궁에 오면 묵는 황자궁이 장소였다.
안 그래도 바쁜 황궁이 갑작스러운 연회를 준비하느라 더 바빠졌다. 주인공이자 원흉이 된 라벨라는 썩 불편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좀 조용히 넘어갈 수는 없는 거야?”
“당신은 좀, 사랑받는 거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 그냥 즐겨, 라벨라.”
*
연회 당일 저녁.
“신부의 가족과 친구들만 모이는 자리입니다. 당연히 신랑이 될 폐하는 예외입니다.”
루비츠의 참석이 금지되었다.
라벨라를 데리러 온 공자는 감히 황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심지어 다벨 녀석도 참석인데, 나만 금지다?”
루비츠의 날카로운 시선이 아르젠의 곁에 서 있는 다벨에게 꽂히자 다벨이 딴청을 부렸다.
“엄밀히 따지면 나도 아직 키르아 소속일 텐데.”
공식적으로 키르아를 나간 적은 없으니 루비츠의 논리에 반박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대장.”
아르젠이 어떻게 하냐는 눈빛을 라벨라에게 보냈다.
“라벨라.”
루비츠가 귀와 꼬리를 내린 강아지처럼 가여운 목소리를 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라벨라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거보라는 듯 의기양양해진 루비츠를 본 공자가 황제모욕죄를 저지를 뻔한 건 물론이었다.
결국 임피리아의 전통을 따르긴 했으나 신랑이 참석하는, 전례 없는 연회가 시작됐다.
사람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라벨라의 결혼을 기뻐했다.
주인공인 라벨라는 헐렁한 튜닉 한 장을 걸친 채 응접실 소파에 느슨하게 앉아 있었다.
연회를 떨떠름해 했던 라벨라는 턱을 괸 채 기뻐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모두가 그녀의 결혼을 축하했고,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흠, 나쁘지 않은 것 같네.’
아이가 생겨서 그런 걸까. 조금 감성적인 사람이 된 것도 같고.
라벨라가 픽 웃으며 배를 쓸어내릴 때였다.
“흐어엉, 대장이 결혼을 한다니.”
“…….”
울먹이는 목소리에 라벨라의 금안이 옆으로 도르르 굴러갔다.
“세상에, 저 작은 몸속에 아기도 있대. 아르젠, 넌 믿어져? 칸피덴! 넌 믿어지냐고!”
술주정을 시작한 페시니의 커다란 목소리가 황자궁 내에 쩌렁쩌렁 울렸다.
“……누가 쟤 입 좀 막아 봐.”
또 시작이네. 이마를 짚은 라벨라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페시니, 적당히 마셔, 이렇게 좋은 날에.”
아르젠이 페시니의 엉덩이를 발로 툭툭 차며 말릴 때였다. 페시니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스카, 너 이 자식.”
“!”
정신을 놓은 페시니의 뭉툭한 손가락이 정확히 루비츠를 가리켰다. 라벨라의 곁에 앉아 음식을 먹여 주던 루비츠의 한쪽 눈썹이 올라섰다.
그 무례한 손짓에 모두가 술이 깨는 기분이었다. 개중에는 딸꾹질을 해대는 이도 있었다.
모두가 숨죽인 채 루비츠를 쳐다봤다. 라벨라 또한 고개를 돌려 그녀의 연인을 올려다봤다.
루비츠는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린 채였다.
“언감생심, 네놈이 우리 대장을! 우리 귀한 대장을!”
페시니는 제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기억이나 할까?
“이스카.”
상대할 생각하지 말라고 그의 팔을 잡으려는데 루비츠가 천천히 일어나 페시니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페시니는 제가 무슨 실수를 한 지도 모른 채 다시 털썩 앉아 술을 들이붓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비리비리한 게 마음에 안 들었다고. 싸가지라고는 손톱만큼도 없고 말이야.”
“그래서, 그런 내가 라벨라를 데려가는 게 마음에 안 들어?”
페시니의 앞에 몸을 기울인 루비츠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이 자식. 그걸 말이라고 해?”
“어쩌나, 이제 와서 못 무르는데.”
“누가 무르래?”
“그럼?”
“네놈이 우리 대장을 너무 좋아하니까. 그래서 네가 좀 좋아졌다 이거지.”
뜻밖의 고백에 웃음을 참지 못한 라벨라는 고개를 돌린 루비츠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좋대.’
입 모양으로 말한 루비츠가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대장 울리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하, 페시니. 취했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루비츠가 어이없다는 듯 팔짱을 낀 채 페시니를 노려봤다.
“솔직히, 내가 라벨라를 울리겠어? 라벨라가 날 울리겠지. 안 그래?”
“……그러네.”
황제의 말을 들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임피라에 역사에 없던 역대급 팔불출 황제가 나타났다고.
그리고 황제의 말대로 그가 예비 황후 때문에 우는 날이 한 번은 올지도 모르겠다고.
*
페시니의 술주정은 연회가 끝나고도 계속해서 이야깃거리가 됐다.
연회의 후폭풍이 가시기도 전에 어느새 결혼식은 하루 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결혼식 전날 밤.
“우리 어디 가는데?”
행사 당일을 위해 일찍 자라고 잔소리를 들었는데도 루비츠는 공기가 좋으니 산책을 가자며 라벨라를 데리고 황제궁을 빠져나왔다.
“황후궁.”
“거긴 왜?”
“가보면 알아.”
그리고 도착해서야 라벨라는 왜 루비츠가 황후궁에 기거하지 못하게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황후궁은 하나의 박물관처럼 바뀌어 있었다. 라벨라가 좋아할 희귀한 물품부터 다양한 무기로 가득했다.
“이게 끝이 아니야.”
황후궁의 정원으로 이끈 루비츠는 라벨라의 표정을 대놓고 살폈다.
“어때? 연무장으로 바꿔놨어. 아기가 태어나고 나면 당신이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아무리 황제라 해도, 황궁을 이렇게 마음대로 바꿔도 되는 거야?”
“그런 재미도 없으면 내가 이 자리에 있는 보람이 없지 않겠어?”
“…….”
“청혼 겸, 결혼 선물이야, 라벨라.”
이미 많은 것을 받았는데도 그는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마음에 들어?”
“어. 무척 마음에 들어.”
짧게 답한 라벨라는 루비츠의 앞섶을 잡아 제게로 끌어당겨 눈을 마주쳤다.
그녀가 좋아하는 보랏빛 눈동자가 지척에 있었다.
“무엇보다, 네가.”
숨결을 흘리며 속삭인 라벨라는 예쁜 붉은 입술에 입을 맞췄다.
*
“봐, 라벨라. 달이 무척 커.”
황후궁 테라스로 간 루비츠가 제 무릎 위에 라벨라를 앉히며 감탄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도 저런 달이었는데.”
“그랬어?”
“무심하기는.”
전혀 기억이 없는 라벨라가 살짝 미간을 찡그리자 루비츠가 서운해하면서도 그 위에 입을 맞췄다.
“그때, 펍에서 당신이 계단을 내려오던 모습이 생생해. 요정같이 예쁜 여자가 내려오는데, 눈을 의심했지.”
“강렬하기로는 너만 할까.”
“잘생겨서?”
“그런 걸로 하지 뭐.”
새침한 대답에 루비츠가 웃음을 흘렸다.
“난 어쩌면 그때부터 당신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걸까.”
“그때 내가 말했던 건 기억 안 나?”
“나. 정확히 ‘내 얼굴과 이 몸매를 봐. 나한테 첫눈에 반한 남자가 너뿐이겠어?’라고 했지.”
“잘 아네.”
“그래도 라벨라, 내가 그저 그런 남자들과 같지는 않을 텐데.”
“당연하지. 넌 내가 유일하게 사랑한 남자잖아?”
“!”
순순히 흘러나오는 고백에 볼을 붉힌 건 정작 루비츠였다.
“당신은 정말…….”
“정말 뭐?”
사람을 천국에서 지옥까지 오르내리게 만든다니까.
루비츠는 얄미울 정도로 예쁘게 웃는 그의 연인을 품에 가뒀다.
금빛 연기처럼 사라질 것만 같았던 그녀가 지금 그의 곁에 있었다.
“라벨라.”
“응.”
“사랑한다고 말해줘.”
짙은 보랏빛 눈동자를 들여다본 라벨라가 다시금 웃었다.
“응, 사랑해.”
*
“세상에, 하늘도 축복하는 게 틀림없어요.”
침실의 창문을 열며 시녀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눈을 깜빡인 라벨라가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날씨는 맑았다.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높고 푸르렀고, 살랑살랑 바람이 불었다.
“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되실 시간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가장 아름다운 신부인가.
뭐든 최고인 건 나쁘지 않지.
라벨라가 픽 웃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너무 아름다워요.”
“역시 우리 아가씨는 빛이 난다니까요.”
루비츠의 명령에 따라 심혈을 기울여 만든 드레스를 입히는 두 사람의 입에서 연신 감탄이 흘러나왔다.
테오도라에게 받은 황후의 티아라와 보석을 착용해야 하는 대신, 루비츠는 작고 반짝이는 보석들을 드레스에 박아두었다.
걸을 때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보석은 라벨라의 하얀 피부를 더욱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시녀들의 알림에 문이 열리고, 앞에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환하게 웃으며 라벨라를 반겼다.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폐하께서도요.”
기쁜 얼굴을 한 리텔니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식이 열릴 황궁의 본관까지 세츠와 키르아가 라벨라를 에워싼 채 호위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사람과 함께였을까.
늘 혼자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을 보니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열린 문 앞에 이르자 리텔니가 손으로 라벨라가 가야 할 방향을 가리켰다.
라벨라가 걸어갈 길을 따라 새하얀 천이 기다랗게 뻗어 있었다.
새로운 길. 그리고 그 끝에, 루비츠가 있었다.
“…….”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많은 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네이트랄 공작 부자, 카셰이 장로, 무트. 그녀가 임피리아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의 애정과 존경, 사랑이 담긴 눈빛들.
그리고 정면에 그 누구보다 더 사랑을 숨기지 못하는 눈빛으로 서 있는 남자.
그 눈빛을 볼 때마다 그녀의 삶에 다른 색이 입혀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라벨라, 당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인 루비츠가 라벨라의 머리 위에 황관을 얹었다.
“자, 가볼까?”
루비츠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결국, 이런 선택을 했구나.’
라벨라는 옅게 웃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잡은 손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루비츠와 함께 테라스로 나가자 귓가가 먹먹할 정도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라벨라.”
황궁 안과 그 바깥으로 모인 많은 사람들을 보며 루비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네게 깨끗해진 비스메르트의 이름을 주고 싶었어.”
“…….”
“자유롭지만 외로웠을 네게 있을 곳을 만들어주고 싶었어.”
라벨라의 금안이 스르륵 움직여 루비츠에게 닿았다.
“당신이 앞으로 살아갈 곳이야, 나의 곁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사랑받으면서, 그리고 사랑하면서.”
“…….”
라벨라는 먼 곳까지 이어진 풍경과 그 안에 섞인 사람들을 바라봤다.
오로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강해지는 것만을 목표로 살았던 그녀가 이제부터 지켜야 할 사람들.
새로운 이름, 새로운 세계.
그리고 새로운 삶.
“이스카, 넌 한 번도 실패해 본 적이 없다 했지.”
“응.”
“마찬가지야, 난, 내 선택을 후회해 본 적 없어, 단 한 번도.”
라벨라 특유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본 루비츠가 싱그럽게 웃었다.
“……그것 참 안심이 됩니다, 나의 황후.”
고개를 숙인 루비츠가 지금 막 그의 아내가 된 라벨라에게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