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만 모르는 유혹-84화 (84/94)

84. 넌 그냥 너이면 돼

“폐하, 바로 출발하셔도 됩니다.”

수행단 점검을 끝낸 리텔니가 나무 밑에 기대어 서 있던 루비츠에게 다가왔다.

“인사가 끝나면.”

루비츠는 마을 사람들과 대화하는 라벨라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카셰이에게 ‘진짜’ 황제의 검도 받았고, 차메르와의 대화도 잘 마무리됐다.

쿠즈네에 온 목적은 달성했으니 이제 다시 황성으로 돌아갈 차례였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솔직히 전 그 마법사가 폐하의 명을 순순히 따를 줄은 몰랐습니다.”

루비츠의 시선을 따라 몸을 돌린 리텔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거절할 이유가 없지. 그 덕에 난 라벨라에게 칭찬받을 건수가 하나 더 생겼고.”

“그것참 기쁘시겠습니…… 아!”

씩 웃는 루비츠를 보던 리텔니가 뒤늦게 탄식했다.

“황성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황성이란 단어에 라벨라에게 꽂혀 있던 루비츠의 시선이 다시 리텔니에게 돌아왔다.

“네이트랄 공작인가.”

“네.”

리텔니가 품속에서 꺼낸 서찰을 루비츠에게 건넸다.

“공작이 꽤 귀찮아졌겠군.”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인가.

내용을 확인한 루비츠가 다시 리텔니에게 돌려주며 비릿하게 웃었다. 모든 것이 그의 예상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한창 활활 타오르고 있겠네. 나메렌 후작은 잔뜩 겁을 먹었을 테고.”

“……저는, 정말 폐하가 무섭기까지 합니다.”

리텔니가 서찰을 품에 넣어 갈무리하며 혀를 내둘렀다.

“그럼 내가 손 놓고 보고 있을 줄 알았어? 봐, 리텔니. 난 실패하지 않는다니까.”

“네네, 라벨라 님의 일만 제외하면 말이지요.”

리텔니는 실실 웃으며 주군의 청혼이 현재 조건부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아픈 데는 찌르지 말고.”

“이번에도 꼭 성공하셔서 폐하의 성공기록이 이어지기를 빌어드리겠습니다.”

“내가 말했었나, 리텔니?”

“?”

“넌 아주 충심이 넘쳐.”

“알아주시니 기쁩니다, 폐하.”

루비츠가 빈정대는 말에 리텔니가 싱긋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내가 장담하는데, 그 충심이 아니었더라면 넌 벌써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을 거야.”

“네, 정말 다행이지 뭡니까.”

그 모습을 어이없다는 듯 보던 루비츠가 느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황궁의 불이나 끄러 가볼까. 더 늦으면 공작이 화를 낼지도 모르겠어.”

리텔니의 어깨를 툭툭 두들긴 루비츠가 라벨라 쪽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차메르도, 지금 황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도, 결국 라벨라가 제 곁에 남을 이유를 만들기 위한 절차일 뿐이다.

라벨라를 붙잡을 핑계가 될 수 있다면 루비츠는 어떤 것이든 활용할 생각이었다.

‘역시 있는 자리가 다르다고 사람이 변하는 건 아니지.’

리텔니는 루비츠의 걸음을 따라 황가의 문양이 그려진 망토가 펄럭이는 걸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위풍당당한 뒷모습은 임피리아를 방랑하던 시절, 까만 망토를 입고 다니던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황위를 정당하게 넘겨받으려 오랜 시간을 인내하고 차근차근 계획을 실행해 나가는 주군을 바로 옆에서 지켜봐 왔다.

이제 황위를 손에 넣은 주군의 목표는 저 아름답고 냉혹한 암살 길드의 수장이다.

‘라벨라 님, 이번만큼은 폐하께서 이기실 것 같아요.’

리텔니는 모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   *   *

“영감님이랑 이렇게 오래 있는 건 처음이네?”

황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올 때와 다르게 라벨라와 함께 있는 이는 차메르였다.

차메르가 협조적으로 나올 줄 몰랐던 라벨라는 비싯비싯 웃으며 내내 차메르의 속을 긁고 있었다.

콧대 높은 양반이 루비츠의 제안에 반박조차 못 하고 수긍하던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차메르의 엉뚱한 짓 덕분에 며칠 내내 침대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던 터라 마음속에 앙금이 남아있었다.

‘이스카를 제대로 칭찬해줘야겠는걸.’

제 속에 들어왔다 나가기라도 한 건지 차메르를 몰아붙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차메르를 곁에 두고 부려먹을 생각을 하니 콧노래가 나올 지경이었다.

‘저 검만 아니었어도.’

즐거운 라벨라와 달리 차메르는 이 사달의 원흉이 된 라벨라의 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황제의 검과 똑 닮은 걸 왜 라벨라가 가지고 있는 건지.

처음부터 이 모든 게 라벨라의 수작이었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계속 궁금했는데 말이야.”

만족할 만큼 차메르를 놀린 라벨라가 말끝을 늘였다.

꼬아놓은 다리 위에 두 팔을 얹고 몸을 기울인 라벨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

“왜 거짓말했어, 영감님? 그때, 나더러 마법 못 쓸 거라고 했잖아.”

[……네가 자유자재로 사용하게 되면 곤란하니까.]

숨길 이유가 없어진 차메르는 솔직하게 답했다.

[난 내 뜻대로 움직여 줄 인형이 필요해서 널 불러들인 거였다. 네가 이곳에 오게 된 것도 네 몸이 내 마력을 담고 있는데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비츠에게 내가 마법을 쓰면 생명줄이 짧아질 거라고 협박했어? 내가 쓰지 않게 하려고?”

그 말 때문에 마력을 사용하는 건으로 루비츠와 얼마나 기싸움을 벌였는데.

기억을 떠올리자 짜증이 불쑥 샘솟은 라벨라가 날카롭게 차메르를 노려봤다.

[그래, 녀석을 시험해 보기 위해 한 말이었다. 그 녀석이 널 어떻게 이용하는지 볼 생각이었지.]

“음흉하네, 영감님. 어쩌나, 그랬는데 전부 실패하셨네.”

라벨라가 얄밉도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가 재미있는 거 보여줄까?”

싱글싱글 웃으며 차메르를 보던 라벨라가 얌전히 손바닥을 펼쳤다.

“잘 봐.”

중얼거린 라벨라가 조용히 손바닥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작은 불꽃이 빠르게 일렁이다 사라졌다.

“후우.”

잠깐이었는데도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봤지?”

[……언제부터……]

“그간은 계속 훈련했어도 안 됐는데 말이야, 영감님이 날 돌려보내려고 했던 그때 이후로 가능해졌어.”

[…….]

제 생명이 깎인다 경고했는데도 훈련했다니, 참으로 지독하다.

“결국 영감님이 날 도운 셈이지.”

어쩌면 처음부터 라벨라를 데려온 것 자체가 실수였을지도.

“그러니까, 영감님이 루비츠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현명한 선택이었어. 딴생각하지 말고 날 제대로 가르치는 게 좋을걸?”

[…….]

“안 그러면 나도 내가 이 마력을 어떻게 사용할지 모르겠거든.”

웃고 있었지만 차메르에게는 가장 효과적인 협박이었다.

“오백 년을 살아도 전부 다 아는 건 아닌가 봐. 결국 이렇게 된 걸 보면.”

[…….]

차메르가 할 말을 잃은 걸 보며 한참이나 깔깔대며 웃던 라벨라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가만히 창밖의 흘러가는 풍경을 눈에 담던 라벨라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영감님.”

시선은 여전히 창밖에 둔 채였다.

“영감님은 오백 년이나 살았잖아, 임피리아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본 거고. 그렇지?”

[…….]

또 무얼 가지고 약을 올리려나 싶어 차메르는 입을 꾹 다물고 응하지 않았다.

“루비츠는 내가 황후가 되기를 원해.”

[…….]

차메르의 금안이 스르륵 라벨라에게로 움직였다.

“내가 그 자리를 받아들이는 게 맞는 걸까?”

라벨라의 시선도 천천히 돌아와 차메르에게 고정됐다. 웃음기도 없는 진지한 질문이었다.

“나는, 당신이 비스메르트를 끝내기 위해 불러들인 존재였잖아?”

라벨라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선 채였지만, 가라앉은 분위기가 꽤 무거웠다.

[……그걸 왜 내게 묻지. 내 의견은 어차피 의미 없지 않나.]

라벨라의 배를 힐끗 본 차메르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건 그래. 수업이나 시작할까?”

눈을 깜빡인 라벨라가 쿡 웃음을 터트렸다.

차메르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고민하고 있군. 그래, 황실과 어울릴 만한 아이는 아니지.’

만약 라벨라가 루비츠와 멀어진다면, 배 속의 아이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황위를 이어받지 않게 되면 비스메르트도 끝이 나겠지. 그렇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녀석에게 비스메르트의 피가 섞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오로지 그 혼자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차메르의 생각 또한 복잡해졌다.

*   *   *

황제의 행렬이 돌아왔다.

“……드디어 오셨군.”

연회 기간 내내 시끄러웠던 분위기를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공작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틈만 나면 그에게 찾아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귀족들을 상대하느라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황자궁에서 기다리는 공작의 눈에 대화를 나누며 걸어오는 두 사람이 보였다.

라벨라는 뚱한 표정인데, 황제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그녀에게 무어라 연신 속삭이며 웃고 있었다.

“거참, 신기하기도 하지.”

가끔씩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저 젊은 황제도 연인의 곁에서는 풋풋한 청년처럼 보이니 말이다.

아무리 봐도 저 황제를 감당할 여인은 암살자이며 그의 수양딸인 라벨라 하나뿐이었다.

“저 분위기를 깨뜨리는 이가 하필 나라니, 참 싫군.”

혀를 끌끌 찬 공작이 탄식하며 루비츠를 향해 다가갔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폐하. 그리고 나의 귀여운 따님.”

“공작, 어찌 연회에 계시지 않고?”

아직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루비츠가 느른한 말투로 물었다.

“일은 잘 마무리하고 오셨습니까?”

“보다시피요. 그런데…….”

루비츠가 턱을 문지르며 공작을 아래위로 훑었다.

“일이 있는 건 우리가 아니라 공작인 것 같군요.”

공작이 무슨 말을 꺼낼지 알면서 루비츠는 모르는 체했다.

“네, 안타깝게도 그렇게 됐습니다.”

이미 전서구를 통해 보고를 끝낸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라벨라의 앞이라는 이유로 두 여우가 능글맞은 연기를 이어갔다.

“무슨 일이 있나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라벨라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언젠가 터질 일이었지요.”

“…….”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라벨라는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 남은 위험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녀의 진짜 정체.

키르아. 그리고 암살 길드의 수장인 그녀.

*

“어휴, 우리 아가씨 얼굴 상한 것 좀 봐.”

“머리 장식을 좀 더 화사한 색깔로 하는 게 좋겠어요.”

라벨라의 머리를 매만지는 두 여인의 목소리가 부산스러웠다.

루비츠의 명에 진즉 프롬쉘에서 달려온 이들이었다.

‘하긴, 지금까지 안 터진 게 신기할 정도긴 했지.’

하지만 라벨라의 생각은 다른 곳을 부유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피아체, 그 아이도 오래 참았네.’

어차피 루비츠를 지지했던 귀족들은 대충이나마 그녀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었을 터.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니,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다.

다만 이것이 언제 어떤 결과로 다가올지 정확히 예상할 수 없었을 뿐.

라벨라는 책으로 읽었던 임피리아 황가의 역사를 떠올렸다.

과연 자신이 그 역사의 오점 같은 존재가 될지 어쩔지는 알 수 없었다.

‘루비츠는 무조건 밀어붙이려나.’

혹 반대하는 여론이 크다면, 루비츠가 무작정 고집을 부려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흐음, 마음에 안 들어.’

역시 누군가의 약점이 될지도 모른다는 건 심히 불쾌했다. 자존심을 마구잡이로 긁어놓는 기분이었다.

“자, 준비 끝났어요.”

“오늘 연회에서 우리 아가씨가 제일 아름다우실 거야.”

“……아가씨? 어디 불편하세요?”

“아, 아니요. 고마워요, 두 분 다 고생했어요.”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라벨라가 뒤늦게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즉위식을 기념하는 연회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동안 황자궁에서 쉬라고만 하던 루비츠는 어쩐 일로 함께 연회에 참석할 것을 권했다.

귀족들의 분위기를 살필 겸 제안에 흔쾌히 응한 참이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루비츠의 존재를 알리는 말에 라벨라는 곧장 응접실로 향했다.

“예쁘네, 라벨라.”

소매의 커프스를 매만지던 루비츠가 멈칫 몸을 굳혔다가 환하게 웃었다.

“지금 날 보고 감탄할 때야?”

정말 큰일 날 녀석일세.

볼 때마다 사랑에 빠졌다는 눈으로 보면 어쩌자는 건지.

라벨라는 표정을 숨기지 않는 연인을 밉지 않게 흘겨봤다.

“그럼 이제 가실까요?”

생글생글 웃으며 루비츠가 라벨라의 앞에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라벨라는 그 손을 멀뚱멀뚱 보기만 할 뿐이었다.

“?”

“내가 프롬쉘에서 예법 공부를 꽤 열심히 했거든?”

“그런데?”

“황제의 에스코트를 받는 영애는 없었지, 아마?”

“왜 없어? 여기 있잖아.”

루비츠가 쓸데없는 말 말고 손이나 내놓으라는 듯 내민 손을 까딱였다.

“라벨라.”

라벨라가 손을 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루비츠는 라벨라의 손을 끌어와 잡았다.

그리고 라벨라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넌 그냥 너이면 돼.”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진짜 네이트랄 영애가 될 필요는 없다는 뜻이야.”

“…….”

“자, 그럼 갈까?”

루비츠의 웃는 미소는 사랑스러웠다.

내가 그냥 나이면 된다?

듣기에 좋은 말이지만, 라벨라는 그래서 불안해졌다.

늘 생각과 현실은 다른 법이니까.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루비츠가 바보가 될 때는 라벨라, 자신과 연관이 있을 때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불안은 연회장의 문이 열리는 순간 현실이 됐다.

“…….”

시끌벅적하던 연회장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고요해진 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주인공인 황제가 아니라, 황제의 손을 잡고 있는 라벨라에게.

두려움, 공포, 경계심. 그리고 약간의 호기심.

참 익숙한 시선이었다.

‘어머나, 이런 건 또 오랜만이네.’

라벨라는 웃음을 삼켰다.

하지만, 어쩐지 씁쓸해지는 기분이 꽤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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