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폭로와 반전
“그렇게 쳐다봐도 말은 안 돼.”
루비츠가 단호하게 말했다.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그냥 본 거거든?”
마차의 창틀에 팔을 얹고서 티격태격하는 페시니와 아르젠을 구경하던 라벨라가 입술을 비죽였다.
“그쪽은 신경 끄고 날 보는 게 어때? 당신 혼자 심심할까 봐 나도 같이 있잖아.”
“내 핑계 대기는.”
라벨라가 창문을 탁 소리 나게 닫으며 몸을 바로 했다.
키르아는 따로 움직이겠다는 라벨라의 말을 묵살한 채 황제의 행렬에 합류시킨 루비츠였다.
“느려서 답답하겠지만 조금만 참아.”
루비츠가 다정하게 라벨라를 달랬다.
최대한 단출하게 꾸렸어도 황제의 행렬이었다. 대규모 인원이니 바람처럼 움직이는 키르아와 비교한다면 속도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당신 몸을 생각해서도 이쪽이 더 나아.”
라벨라가 언제든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실내를 고쳐놓은 마차였다.
“진짜 환자가 된 기분이네.”
“환자 맞아, 차메르를 만나면 그놈의 마력을 없애라고 하든지 해야겠어.”
루비츠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이를 으득 갈았다.
“없애긴 왜 없애, 이 좋은걸? 잘 달래서 완벽히 쓸 수 있게 해야지.”
라벨라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빡이며 루비츠를 바라봤다.
“……괜찮겠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폭 내쉰 루비츠가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뭐가?”
“널 돌려보내려 했던 자야.”
“원래 적은 가까이에 두고 지켜보는 거야. 게다가 당한 게 있으니 그 영감한테 뽑아먹을 수 있는 건 다 뽑아먹어야 속이 후련하겠거든?”
“와, 역시 당신은 대단해.”
루비츠가 놀리듯 손뼉을 치면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흥, 피차일반이야.”
코웃음 친 라벨라는 괜히 루비츠의 손등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내리쳤다.
“처음부터 내가 마력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거, 예상했지?”
루비츠는 대답 없이 씩 웃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떠나겠다고 우겼으면, 이걸 가지고 날 붙잡았을 거잖아.”
“음, 들켰네?”
뻔뻔하기까지 한 태도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 루비츠는 차메르의 봉인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비스메르트였다.
마법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루비츠가 그걸 가지고 거래를 하려 한다면 넘어가 줄 수밖에 없었다.
“자꾸 너한테 지는 기분이 들어.”
라벨라가 팔짱을 낀 채 루비츠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어차피 난 당신 말 한마디에 끔뻑 죽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할까?”
“흐음.”
머리 위에서 노는 것처럼 굴다가도 이렇게 바짝 목줄을 쥐여주니 그 기분이 또 나쁘지 않다.
“넌 날 즐겁게 하는 법을 너무 잘 알아.”
“당신이 즐겁다니 다행이네.”
잘게 웃은 루비츠가 은근슬쩍 가까이 다가왔다.
기다란 손가락이 능구렁이처럼 넘어와 라벨라의 손등을 톡톡 건드렸다.
“당신에게 사랑받으려고 내가 무척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기를 바라.”
고개를 살짝 내린 루비츠가 라벨라의 귓가에 속삭였다.
예쁜 입술로 기분 좋을 말만 골라 하는 황제폐하시라.
‘그래, 뭐, 자유를 포기하고 선택할 만큼의 가치는 충분하지.’
라벨라가 모르는 척 손을 내어주자 루비츠는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어 단단히 깍지를 꼈다.
라벨라는 이 선택의 끝이 어떻게 될지 조금 궁금해졌다.
* * *
주인이 자리를 비운 황궁은 축제 분위기였다.
비극의 기억을 지워야 한다는 귀족들의 주장하에 황제의 즉위식을 기념하는 연회는 성대하게 열렸다.
새로운 황제는 관례대로 쿠즈네로 떠났고, 남은 이들은 연회의 마지막 날 참석할 황제를 기다리며 즐기기만 하면 됐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선황제와 폐위된 황태자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에 새로 황위에 오른 젊고 아름다운 황제에게 모든 관심이 쏠렸다. 정확히는 그의 아내로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차기 황후에게.
“그런데, 네이트랄 가의 영애는 왜 안 보이지?”
차기 황후로 점쳐지는 인물은 정작 선황제의 장례식뿐만 아니라 황제의 즉위식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보던 이들은 실망이 컸다.
“지난번 납치 사건으로 난리가 났다는 이야기 못 들었나? 황제께서 황자궁에 두고 보호하신다잖아.”
“세상에…… 지극정성으로 아낀다는 소문이 진짜이긴 한가 봐.”
“애당초 ‘그’가 영애를 욕심내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난 거니까.”
“말해 뭐해, 오죽하면 이번 쿠즈네 행에도 동행시켰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로써 차기 황후는 정해진 거나 다름없군.”
모두가 쑥덕대며 두 사람의 열렬한 사랑에 대해 한마디씩 말을 덧붙였다.
“결혼도 전인데, 젊은 황제께서 여러모로 남다른 행보를 보이시네.”
“뭐, 보기 나쁜 그림은 아니지. 황제 부부 금실이 좋은 건 여러모로 좋은 본보기잖나.”
“어쨌든 제국에 새로운 바람이 불지도 모르겠어.”
모두가 입을 모아 기대감을 표출했다. 오로지 단 한 사람만 빼고.
“…….”
연회장 한편에 또래의 영애들과 함께 있던 피아체는 웃을 수가 없었다.
듣지 않으려 해도 모든 이들의 대화 주제가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피아체와 함께 있는 영애들 또한 루비츠와 라벨라를 두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피아체, 왜 그리 기운이 없나요?”
갈수록 피아체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본 영애 하나가 아는 체를 하자 모두의 시선이 피아체에 꽂혔다.
“피아체는 라벨라 영애와 특별히 더 가깝다고 들었어요.”
“라벨라 영애가 황후가 되면, 피아체는 더 기쁘겠네요.”
“우리도 그간 라벨라 영애와 가까워졌으니, 곧 황궁을 드나들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렇죠?”
네이트랄 가에 들락날락하며 라벨라와 안면을 터두었던 영애들이 눈을 반짝였다.
황후의 최측근이 되는 건 귀족 영애의 특권이자 명예였다.
모두가 설렘으로 볼을 발그레 붉히는 걸 보며 피아체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황후? 영애? 웃기고 있네.
드레스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입술은 잘근잘근 씹다 결국 찢어졌다.
“아니요, 저는 싫어요.”
결국 참지 못한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
“피아체?”
차가울 정도로 서릿발이 선 목소리에 영애들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아체는 황후 폐하와 가까이 지내기 싫은 건가요?”
서로 눈치를 보던 영애 중 하나가 조심스레 의중을 물었다.
“하, 황후요? 원래 암살 길드의 수장인 여자예요! 그런 여자가 황후라니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피아체의 위험한 발언에 놀란 영애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도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말 그대로예요, 다들 키르아라고 들어는 봤겠죠? 그 여자가 그곳의 수장이라고요.”
후작이 그토록 신신당부했건만, 피아체는 이미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키르아? 그 암살 길드로 유명한?’
‘네이트랄 영애가?’
모두 놀라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서로 바라본 채 눈만 도르르 굴려댔다.
몇몇은 부채를 펼쳐 당혹스러운 얼굴을 가리기도 했다.
피아체의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한 가지 사실은 명확히 알 것 같았다.
이 자리에서 입을 잘못 놀리는 순간 목숨이 위험하다.
“호호, 갑자기 목이 마르네…….”
“아아, 저도 배가 고픈 것 같아요.”
모여 있던 영애들이 슬금슬금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날 밤.
“제가 오늘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아세요?”
연회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간 영애들은 연회 내내 간질거렸던 입을 터트렸다.
“세상에, 네이트랄 가의 영애가 실은……!”
충격적인 소식이 귀족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말이 안 될 건 또 뭡니까?”
“하, 그럼 자작께서는 제국의 황후가 어디 정체도 모르는 암살자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임피리아에 황실이 어떤 존재인지,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즐거워야 할 연회는 싸움터가 됐다.
젊은 황제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동안 귀족들은 눈만 마주치면 의견을 드러내며 싸웠다.
목소리를 높이는 건 네이트랄 가의 권력을 견제하고자 하는 이들, 그리고 제 딸을 황후 자리에 밀어 넣고 싶은 야망이 있는 이들이었다.
“제국 최고의 가문에서, 그런 정체도 불분명한 여자를 수양딸로 만들어 황후로 만들려 하다니, 욕심이 과하셨습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네이트랄 부자를 비난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창피한 걸 아니까 연회에 오지도 않는 거겠지요.”
이런 상황을 알았기 때문인지 네이트랄 공작가는 연회에 코빼기도 비추질 않고 있었다.
귀족들을 뒤흔든 소문에 가장 충격을 받은 건 나메렌 후작이었다.
“피아체, 네가 기어코 일을 벌이는구나.”
“저, 저는 있는 사실을 밝혔을 뿐이에요.”
“……당장 떠날 준비를 하거라.”
황실에 대한 충성과 핏줄에 대한 애착에서 갈등하던 그는 마음을 정했다. 이성적인 황제지만 그가 더이상 피아체를 참아줄 것 같지 않았다.
나메렌 후작이 헐레벌떡 황성을 떠날 때.
“또 보네, 영감님.”
라벨라는 쿠즈네의 땅 밑에 있었다.
[내게 아직도 볼 일이 남아 있었나.]
“응.”
깨어난 차메르를 보며 라벨라는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불투명한 차메르가 라벨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의도를 읽어보려 했지만 라벨라의 눈동자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내게 마법을 가르쳐줘.”
라벨라는 칸피덴을 살려달라 청하지 않았다.
칸피덴의 목숨을 두고 차메르와 거래할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었다. 당장 생명이 위급한 건 아니니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어떻게든 직접 고칠 작정이었다.
[…….]
답이 없는 차메르를 보며 라벨라가 픽 웃음을 흘렸다.
“아직도 복수를 포기 못 했어?”
복수라. 차메르는 그 날카로운 단어에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녀의 뒤로 동굴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유유자적하게 서 있는 은발머리 녀석이 보였다.
황가의 모든 사내가 죽었으니 혼자 남은 녀석이 당연히 황제가 되었을 터.
녀석이 망설임 없이 루카비에게 검을 던지던 모습이 떠올랐다.
싱글싱글 웃는 낯을 하고 있지만 누구보다 냉혹한 녀석이었다. 어쩌면 가장 비스메르트다운건지도.
‘그렇군. 녀석이 마지막 비스메르트인가.’
……마지막?
[!]
생각에 잠겨 있던 차메르의 고개가 다시 라벨라에게로 향했다.
정확히는 그녀의 납작한 배로.
[……너……]
차메르가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입술을 어름거렸다.
라벨라가 나타났을 때부터 그녀가 지닌 마력이 전보다 강해졌다는 걸 느끼고 의아해하던 차였다. 처음엔 요상한 마석을 이용해 자신의 마력을 마음껏 끌어갔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랬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비스메르트의 핏줄.
제 마력을 자양분 삼아 자라고 있는 작은 생명체가 있다. 아직은 너무 미미해 인간은 느낄 수 없겠지만.
‘결국, 이런 결말인가.’
차메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루비츠를 죽인다 해도 비스메르트는 이어진다.
자신의 마력을 이어받은 아이를 죽일 수 없으니 자신의 복수 또한 의미가 없어지는 거였다.
비스메르트의 핏줄과 제 마력을 섞은 아이를 만들어내다니.
이것은 마치 자신과 비스메르트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 것과 같은 이치였다.
차메르에게는 가장 모욕적이었으며 충격적인 결론이기도 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에 시간을 끄는 건 여전하네.”
상황을 관망하던 루비츠가 걸음을 떼며 다가왔다.
“그대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고 여기는 건가? 자유로운 몸이 되고 싶으면 그녀의 말을 듣는 게 좋을 텐데.”
[!]
“아, 봉인을 당장 풀어주겠다는 뜻은 아니야.”
루비츠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삐딱하게 섰다.
“솔직히 루카비와 손을 잡지만 않았어도 오늘 이 자리에서 봉인을 풀었을 테지만.”
루비츠의 입꼬리가 조소하듯 비틀려 올라갔다.
“자업자득이지, 안 그래? 날 믿지 못한 당신의 패착이야.”
[…….]
“지금처럼 약간의 힘을 쓸 수 있는 수준,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는 조건으로 봉인을 약하게나마 풀어주겠어. 물론 철저하게 내 관리하에 둘 거고.”
[이유가 뭐지.]
“라벨라가 마력을 제대로 사용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가르쳐.”
[거절한다면?]
“그럼 영원히 그 속에 갇혀 살아야지.”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심상한 말투였다.
[…….]
저 뻔뻔한 비스메르트가 저주스러웠지만 반박할 수도 없다. 거래의 우위는 이제 녀석의 손에 있었다.
차메르의 복잡한 얼굴을 본 루비츠가 팔짱을 풀고 픽 웃음을 흘렸다.
“황궁으로 와, 그리고 지켜봐.”
[…….]
어느새 해사한 미소로 바뀐 루비츠를 보며 차메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당신이 증오하고 저주하는 그 비스메르트가 어떻게 제국을 위해 움직이는지. 철저하게, 편견 없이 두 눈으로 확인해.”
[…….]
“그리고 라벨라가 당신의 손에 좌지우지되지 않을 정도의 실력이 되면, 그때는 그대의 봉인을 풀어주겠어. 어쨌든 약속한 거니까.”
루비츠의 말을 해석하는 차메르의 눈빛이 짙어졌다.
“자존심 내세워 거절해봐야 당신만 손해라는 거 알지?”
알다마다.
이미 라벨라에게서 제 마력을 거두는 건 불가능해졌다.
그의 마력은 라벨라에게 동화되었다. 라벨라에게 흡수된 마력은 이제 제 것이라 할 수 없었다.
그가 나서지 않아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그녀는 스스로 활용할 방법을 깨우칠 거다.
그때가 되면 이런 거래의 기회조차 없어질 테지.
참으로 영악하고 간교한 녀석들이 아닌가.
[……]
무엇보다 라벨라 배 속의 아이. 그 아이가 무사히 태어난다면, 차메르는 그 아이를 교육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차메르는 헛숨을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