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약속의 시간
“흐음, 이런 건 예상 못 했는데.”
숟가락을 들어 라벨라의 입가로 가져가던 루비츠가 재미있다는 듯 읊조렸다.
“?”
무슨 뜻이냐는 듯 눈동자만 굴려 쳐다보자 루비츠가 픽 웃음을 흘렸다.
“당신이 이렇게 얌전히 있을 줄은 몰랐거든.”
평소였다면 그 자존심에 불쾌한 티를 팍팍 냈을 텐데, 지금도 아기새처럼 얌전히 주는 대로 받아먹고 있지 않나.
라벨라의 끼니를 챙기는 게 요즘 루비츠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덕분에 회의에서 느꼈던 불쾌감은 침실의 문턱을 넘는 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다.
“당신이 이러는 이유가 다른 사내 때문이라고 생각하니까 좀 별로긴 한데.”
루비츠가 멈추지 않고 느린 속도로 손을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그 녀석 때문에 당신이 여기에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뭐라도 다 내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야.”
루비츠가 연신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당장에라도 떠나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라벨라는 황궁에 눌러앉아 얌전히 다벨의 치료를 받는 걸 선택했다.
차메르의 마력때문에 다친 칸피덴을 치료하려면 라벨라 자신이 먼저 회복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라벨라가 떠나지 않은 덕에 키르아의 녀석들도 여전히 루비츠의 황자궁에 함께 머무르고 있었다.
여전히 깨어나지 않는 칸피덴 또한 물론이고.
“앞으로 녀석을 깍듯하게 은인으로 대접할까 봐.”
녀석이 죽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라벨라의 마음속에 녀석이 큰 죄책감으로 자리 잡았을 테니까.
더럽다 싶을 만큼 추한 독점욕을 드러내는 것 같아 차마 라벨라에게는 꺼내지 못하는 말이었다.
한편으로는 목숨까지 걸어가며 라벨라를 아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있다.
그러니 라벨라가 녀석에게 신경쓰는 것 쯤은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었다.
“그래, 네 말이 다 맞으니까 슬슬 우리를 다른 곳으로 옮겨주는 게 어때.”
가만히 루비츠의 이야기를 듣던 라벨라가 자신의 의지를 또렷하게 드러냈다.
“솔직히, 네 침실은 좀 아니지 않아?”
이것 보라는 듯 라벨라의 동그란 눈이 주위를 훑었다.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만 해도 그랬다.
다섯 바퀴를 굴러도 넉넉할 만큼 커다란 크기에 금실로 수를 놓은 화려한 이불과 그보다 더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한 공간.
역시 네이트랄 공자의 말마따나 프롬쉘과는 차원이 달랐다.
당연한 거였다. 여긴 황자의 침실이니까.
황자의 침실을 떡하니 차지하고 누운 여자를 보며 황궁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 눈에 훤히 보였다.
“당신의 어떤 말도 다 들어줄 수 있지만 그건 안 돼, 여기가 제일 안전해.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낫는 데만 신경 써.”
빨리 회복하려면 이쪽이 낫다는 말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온갖 산해진미로 만든 음식을 나르는 이스카를 보고 있자면 더더욱.
칸피덴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녀가 자유자재로 마력을 쓸 수 있을 만큼 건강해지는 게 먼저였다.
“아니, 황궁을 떠나겠다는 게 아니잖아. 황자궁 말고 적당히 다른 곳으로 내주면 되는 거 아니야?”
“안 돼. 나 엄청 바빠. 여기서 더 먼 곳으로 가면 그만큼 내 시간을 낭비하는 거거든?”
“…….”
할 말을 잃은 라벨라는 루비츠가 입에 쏙 넣어준 과일을 오물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매 끼니때뿐만 아니라 틈만 나면 자신의 상태를 보러 오는 루비츠였다.
바깥소식이 이 안으로 전해지지 않도록 루비츠가 손을 써두긴 했지만, 지금 그가 꽤나 바쁠 시기라는 건 알았다.
“그렇게 바쁘면 여기에 안 오면…….”
“…….”
“아니, 바쁘다며?”
상처받은 것처럼 눈꼬리를 내리는 루비츠에 라벨라가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전하. 오후 회의에 참석하셔야 합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침실 바깥에서 루비츠를 부르는 리텔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바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루비츠가 아쉽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당신이 더 중요해.”
“…….”
“왜 그렇게 봐?”
떠나려던 루비츠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너, 지쳐 보여.”
라벨라가 망설이다 꺼낸 말에 루비츠가 다정하게 웃었다.
“맞아, 그러니까 당분간은 여기 있어.”
“…….”
“알잖아, 당신이 있어야 내가 살아. 다녀올게.”
몸을 숙인 루비츠는 핏기가 돌아오기 시작하는 라벨라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쩔 수 없나.’
라벨라는 그의 부탁을 얌전히 들어주기로 마음 먹었다.
제 뜻을 양보하는 건, 그러니까…… 바쁘신 황자 전하를 배려하는 거였다.
그가 마음 편히 일에 몰두할 수 있도록.
진작 떠났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곳에 머무르는 건 그 이유 하나였다.
라벨라는 그렇다고 믿었다.
* * *
“장례 준비가 끝났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다음 날, 곧바로 즉위식이 진행될 겁니다.”
“…….”
“전하…….”
리텔니는 묵묵히 걷는 주군의 옆모습을 안타깝게 훔쳐봤다.
라벨라의 시야에서 멀어지자마자 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루비츠의 마음을 모를 수 없었다.
그들의 오랜 목표를 이루게 됐지만, 마냥 좋아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부자간에 쌓인 정이 없다 한들, 형제의 손에 아버지를 잃은 거였다.
이런 식의 비극을 발판 삼아 이루려던 계획은 아니었으니 완벽한 성공이라 보기엔 어려웠다.
“즉위식이 진행되면.”
리텔니는 한숨을 삼키며 보고를 이어갔다.
“귀족들은 당장 황후 책봉 문제를 걸고넘어질 겁니다.”
건국 이래 한 번도 혼자의 몸으로 황제가 된 이는 없었다.
“그렇겠지.”
루비츠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걸음을 멈춘 그가 라벨라가 머무르는 침실 쪽을 한 번 돌아본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직은, 안 되겠지?”
“…….”
라벨라가 곁에 남는 걸 선택할지 묻는 거다.
리텔니는 대답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이럴 땐 빈말이라도 거짓을 말해주는 게 어때, 리텔니.”
“……죄송합니다.”
루비츠가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집무를 보러 간 사이, 라벨라에게는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남편의 부고 소식을 듣고 쿠즈네에서 돌아온 황후였다.
“아아, 그냥 앉아 있어요.”
테오도라는 몸을 일으키려는 라벨라를 만류했다.
“진즉 찾아오고 싶었는데 회복될 때까지 기다렸어요.”
“죄송합니다, 폐하.”
“무슨 그런 말을, 아, 루비츠가 다녀갔나 보군요.”
고개를 내젓던 황후가 침대 옆의 의자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루비츠가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곳이었다.
“네.”
황자가 뺀질나게 드나든다는 소문이 안 났을 리가 없다. 라벨라가 민망함을 숨기며 희미하게 웃었다.
“영애, 얼굴이 많이 상했군요.”
테오도라가 속상한 얼굴로 라벨라의 손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
라벨라는 조금 당혹스러운 기분에 휩싸였다.
황후는 웃고 있었지만 루비츠보다 더 많이 지쳐 보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남편과 아들을 잃은 황후를 먼저 위로해줘야 할 것 같았다.
“괜찮아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수도 있다 각오했어요.”
라벨라가 몸을 움칠거리자 테오도라가 고개를 내저었다.
“마음 써줘서 고맙군요, 영애.”
테오도라가 슬픔을 머금은 미소를 지으며 라벨라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라벨라의 시선이 테오도라에게 여전히 잡힌 손으로 향했다. 따스한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제 나와 루비츠, 그 애 만이 남았네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테오도라가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나는…….”
“…….”
“나는, 영애가 우리의 가족이 되어줬으면 좋겠군요.”
“폐하.”
라벨라가 짧게 침음한 뒤 작은 입술을 열었다.
이제 그녀의 진짜 정체를 테오도라 또한 알았을 터. 계속해서 영애라 부르는 그녀의 호칭도 어색하던 참이었다.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요.”
라벨라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안다는 듯 테오도라가 고개를 가볍게 내저으며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내 아들이 그대를 아끼고, 그대가 내 아들을 진심으로 아낀다면. 그거면 된 거 아닌가요. 그리고 쿠즈네에 있으면서 카셰이에게 그동안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요.”
“…….”
“내 부탁을 진지하게 생각해줘요, 영애.”
테오도라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루비츠를 닮은 그 눈이었다.
“대의를 위해 아들에게 희생을 요구한 나입니다. 그런 내가 또 뻔뻔하게 욕심을 부리고 있군요.”
남편과 아들을 잃고도 꿋꿋하게 견디던 여인이 제게 간청하며 눈물을 흘린다.
황후의 눈물을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라벨라는 자신이 약해지는 상대가 루비츠 하나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하지만, 폐하.”
라벨라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잠시 망설이던 기색은 깨끗하게 지워진 후였다.
“전 그런 자리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영애, 그대가 어떤 사람이었건…….”
“아뇨,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아이를 가질 수 없거든요.”
“!”
테오도라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드는 걸 보며 라벨라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 사실을 불편하게 느낀 적은 없었으니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스스로도 웃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런.’
라벨라는 제가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 * *
“정말, 그냥 있어?”
“그래, 여기서 쉬고 있어.”
“…….”
라벨라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연인을 말없이 바라봤다.
황제의 장례식날이었다.
모든 준비를 끝마친 그는 밖으로 나가기 전에 당연하다는 듯 라벨라를 찾았다. 습관같은 행동이었다.
장식도 없는 짙은 정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얼굴이 조금 어두워보였다.
“당신이 지금 모습을 드러내면, 당신의 미래는 자연스레 결정되는 거야.”
루비츠가 다정하게 웃으며 라벨라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인 건 귀족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인파가 황제가 떠난 걸 슬퍼하고 애도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루비츠는 오늘, 그들 앞에 차기 황제로서 모습을 드러내게 될 터.
그 자리에 라벨라가 함께 참석한다면, 이미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진 그녀가 차기 황후로 공식화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나라도 당신의 자유는 보장 못 해.”
보통 눈에 띄는 외모여야 말이지.
루비츠가 농담처럼 흘린 뒤 라벨라의 손을 잡고 손가락 끝에 입을 맞췄다.
마음은 그렇지 않을지언정, 그는 라벨라의 입장을 고려하는 마음 넓은 연인으로 보이기 위해 기꺼이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스카.”
라벨라는 장난스레 웃으며 손가락마다 입을 맞추는 이스카를 물끄러미 보다 입을 열었다.
“응?”
“슬퍼?”
루비츠의 눈썹이 들렸다 제자리를 찾았다.
“……조금.”
그러다 가만히 웃는다.
“…….”
웃는 게 진심이 아니라는 건 바로 알겠다.
루비츠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녀석의 표정은 전부 읽을 수 있다.
녀석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마음에 걸렸다. 며칠 내내 지워지지 않는 그늘이었다.
곁에 있는 데도 힘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과 애틋한 마음이 뒤섞였다.
라벨라는 가만히 손을 뻗어 루비츠의 목에 팔을 둘렀다.
“위로해주는 거야?”
“응.”
“영광인데.”
루비츠가 살이 조금 더 빠져 한 줌밖에 되지 않게 된 라벨라의 허리와 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다녀와, 그때는 제대로 위로해줄게.”
“그래, 그럴게.”
‘그리고 네게 할 말도 있고.’
끝말을 꾹 삼킨 라벨라는 입꼬리만 끌어올린 미소로 침실을 떠나는 루비츠를 배웅했다.
인기척이 멀어지자 침대에 홀로 남은 라벨라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회복 속도가 빨라 몸은 조금씩 제 컨디션을 찾고 있었다.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이제 장거리 이동 정도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부 루비츠의 지극정성한 간호 덕택이었다.
‘흐음.’
창밖을 슥 둘러보니 황궁의 공기가 무거운 게 느껴졌다. 모두가 어두운 옷을 입고, 화려한 꽃과 장식은 자취를 감췄다.
저 속에 그녀의 이스카가 홀로 있다.
“…….”
라벨라는 제 배를 무심코 쓸어내리다 손을 멈췄다.
“그런, 그런…….”
솔직한 고백에 황후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일부일처가 원칙인 임피리아이니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건 이들 입장에서 큰 결격 사유일 확률이 높았다.
“루비츠와 의논해보도록 해요, 꼭, 그러겠다고 약속해요.”
그녀 선에서 함부로 말할 수 없다고 여겼는지 테오도라는 당부의 말만 남겼을 뿐이었다.
그러고도 그녀는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한 채 한참이나 라벨라의 손등을 어루만지다 떠났다.
그런 테오도라의 모습이 또렷한 잔상으로 남았다.
루비츠와 의논해보라니.
“보나 마나 괜찮다고 하겠지.”
라벨라는 당연히 루비츠가 개의치 않아 할 거라는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장례식이 끝나면 곧 루비츠의 즉위식이다.
그녀가 약속했던 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뜻이었다.
마음은 결정했으니, 이제는 루비츠에게 답을 줄 때였다.
그녀의 결론을 듣고 난다면 루비츠는 어떻게 나올까.
창밖을 보는 라벨라의 금안이 한층 더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