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네가 울까 봐
“…….”
군데군데 금박을 입힌 화려한 그림이 있는 천장이 제일 먼저 보였다.
“라벨라?”
조금 더 무겁고 낮아진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울렸다.
“정신이 들어?”
“…….”
라벨라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그만 웃어버렸다.
낯선 공간이지만 어디인지 짐작이 갔다.
꿈속에서 보던 지하 공간도 아니고, 원래 세계로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또 한 번 죽지 않고 살아난 거다.
게다가 은은하게 퍼져있는 청량한 향기. 이스카가 곁에 있다.
“웃는 거 보니 괜찮은 것 같네.”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한숨처럼 들렸다.
커다란 손이 조심스레 다가와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더니 이마를 짚었다가 다시 그녀의 볼에 손등을 살짝 붙였다 뗐다.
“윽.”
손의 주인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리려던 라벨라가 몸을 움찔했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정확히는 온몸의 장기가 뒤틀린 느낌이었다.
“으아.”
“움직일 생각하지마, 몸의 마력이 다 꼬여 있어.”
루비츠가 얼굴을 찡그리며 끙 앓는 라벨라의 어깨를 붙잡아 눌렀다.
다정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지만, 낮은 목소리에는 못마땅한 기색과 숨길 수 없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나, 꽤 강하긴 한가 봐.”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도로 누운 라벨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긁힌 듯한 목소리가 걸걸했다.
“그래, 보통 강한 게 아니지. 이 지경이 되고도 살아 있으니까.”
라벨라가 농담처럼 던진 한마디에 정색하면서도 침대를 짚고 몸을 기울인 루비츠가 라벨라의 눈을 바라보며 픽 웃었다.
핼쑥해진 얼굴이 라벨라의 눈에 고스란히 박혔다.
‘화났구나.’
화내고 싶은데 자신이 아프니까 참고 있는 게 훤히 보인다.
라벨라는 눈꼬리를 살풋 접었다.
“그렇게 웃지마. 나는 지금 웃을 기분이 전혀 아니거든?”
루비츠는 마음을 녹이는 연인의 미소를 보며 짐짓 근엄한 얼굴을 했다.
그는 침대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누워 있는 라벨라를 한 번 더 눈에 담았다.
라벨라가 정신을 못 차리고 누워 있는 동안 몇 번을 손으로 만져 보고 눈으로 확인했는지 모르겠다.
차메르처럼 불투명하게 흐려졌다가 점점 투명해지며 희미해지던 모습.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릴 때마다 등골에 소름이 쫙 일었다.
그대로 라벨라가 사라졌다면…….
아예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녀가 임피리아 어딘가로 숨어버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죽을 때까지 평생 그리움에 말라갔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루비츠는 두 손으로 감싸 쥔 라벨라의 손을 펼쳐 제 볼을 부볐다.
아직 회복되지 않아 온기라고는 하나 없는 서늘한 손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지금 자신의 품 안에 있으니까. 곁에 있으니까.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목숨도 위험했을 거래.”
루비츠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보고하던 다벨의 말을 조용히 전했다.
“당신, 정말…… 위험했다고.”
“알아,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
라벨라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목소리를 내기가 버거워 숨을 고르며 천천히 말을 꺼내야만 했다.
“너 때문에, 버텼어.”
“…….”
“내가 그렇게 가 버리면, 너, 울까 봐.”
몸이 찢길 것 같은 고통에도 버틸 수밖에 없었다.
“인사도 없이, 헤어지면, 안 되니까.”
“…….”
루비츠는 목이 메는 기분이었다.
이런 때에, 이렇게 사람 마음을 온통 뒤흔들만큼 훅 치고 들어와 버리다니.
장난기를 가장해 진심을 전하는 라벨라를 이길 방법이 있을 리가.
“그래, 고마워.”
공포도, 불안도, 걱정도, 모든 것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사랑받아서 기쁜 마음이 싹을 틔운다.
사랑에 빠진 자는, 이토록 단순하고 어리석은 모양이지.
루비츠는 라벨라의 서늘한 손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내가 올 때까지 잘 버텨줘서, 정말…… 고마워.”
루비츠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지만, 라벨라는 모른 척하기로 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러고는 괜히 머쓱해지는 기분에 다른 걸 물었다.
“나, 며칠이나 누워 있었어?”
“……정확히 사흘 반.”
그렇게 오래?
눈을 동그랗게 뜬 라벨라는 루비츠의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지는 걸 보지 못했다.
“루카비는 죽었고, 차메르는 원래대로 돌아갔어.”
라벨라는 흐려지던 시야에 번지던 붉은 색을 떠올렸다.
“……루카비.”
“그래, 내가 죽였어.”
라벨라의 눈동자에 얼핏 걱정의 기색이 스쳐 지나가는 걸 본 루비츠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었어.”
결론 짓는 말투가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듯 단호했다.
‘그런가.’
그의 죄악감을 덜어주려 했지만 결국 그의 손에서 정리되고 말았으니, 어쩌면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헛웃음을 흘리려던 라벨라가 아파서 눈을 찡그렸다.
궁금해하는 마음을 알았는지 루비츠는 그 후에 벌어진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이곳은 황궁이고, 라벨라가 어떻게 이곳에 왔으며 얼마나 심각하게 사경을 헤맸는지도.
그런데, 그 많은 이야기 중에 중요한 게 빠져 있었다.
라벨라는 가만히 루비츠를 들여다봤다.
“……이스카.”
“응?”
“칸피덴은?”
그의 생사를 알려주는 게 먼져여야 했다.
“…….”
곤란한 듯 붉은 입술이 다물어졌다. 망설이는 듯한 눈빛이 보였다.
라벨라는 몸을 일으키려다 제지당했다.
“칸피덴은? 어디에 있어?”
마력에 잠식당해 느리게 박동하던 심장이 불길하게 뛰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입술을 달싹이던 루비츠가 라벨라를 직시했다.
라벨라의 회복을 우선으로 여긴 터라 아직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언제까지 숨길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살아는 있어.”
살아는 있다?
이상한 표현에 라벨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렇다고 이스카의 표정이 심각한 것도 아니었다. 뭐라 설명하기 어렵게 기묘했을 뿐.
“다벨 말로는 마력에 당한 부작용인 것 같다고 하는데…….”
“내가, 가 봐야겠어.”
라벨라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루비츠가 제지했다.
“기다려. 당신 몸, 움직여도 되는 상태 아니야.”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
“후, 알았으니까 고집부리지 말고.”
이럴까 봐 곧장 말해주지 않으려 했던 루비츠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별수 없지.
라벨라를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낸 루비츠가 그녀의 어깨와 다리 밑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얌전히 있어. 떨어지기 싫으면.”
그대로 라벨라를 안아 올린 루비츠가 신신당부했다.
라벨라는 어쩔 수 없이 얌전하게 자신의 몸을 맡겼다.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루비츠의 품에 폭 안긴 채 옮겨지고 있자니 씁쓸한 자괴감이 밀려 올라왔다.
침실을 나와 화려한 황궁의 복도를 걸어갈 때는 더했다.
마주 오는 사용인들이나 이스카의 수하들을 마주칠 때마다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자신을 지키려다 목숨이 위험해진 수하를 만나러 가는데, 제 발로 걸어갈 수조차 없다니.
“지금, 이렇게 안겨서라도 갈 수 있는 게 다행인 거 알지?”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안다는 듯 머리 위로 루비츠의 타박이 쏟아졌다.
‘알거든?’
“다른 사내를 걱정하는 연인을 고이 모셔다드리는 기분이란.”
루비츠가 혀를 끌끌 차며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라벨라는 루비츠가 저런 신소리를 하는 이유가 제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칸피덴은 정말 괜찮은 걸까.
루비츠가 라벨라를 데려간 곳은 그녀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루비츠를 보고 허리를 숙인 병사들이 곧바로 문을 열어줬다.
그의 긴 다리가 성큼 안으로 들어서자 응접실에 모여 있는 키르아 녀석들이 바로 보였다.
깨어났을 때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다들 여기에 모여 있었던 모양이었다.
“대장!”
페시니가 우렁차게 소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저 녀석…….”
페시니가 입을 틀어막았다가 다시 점잖게 손을 내렸다.
“아니, 황자님께서 못 들어오게 해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대장 깨어난 것도 못 보고…….”
루비츠를 노려보는 페시니의 눈길에 원망스러움이 그득했다.
“그런데 대장, 몸 상태가…….”
아르젠이 루비츠의 품에 안긴 라벨라를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녀석들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이게 됐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르젠에게 괜찮다며 눈빛으로 응해준 라벨라가 서두르라는 듯 루비츠의 옷깃을 죽 잡아끌었다.
“네, 분부대로요.”
말 없는 재촉에 고개를 끄덕인 루비츠가 키르아 녀석들을 뒤로 한 채 라벨라를 침실로 데려갔다.
“아, 깨어나셨군요.”
라벨라를 본 다벨의 심각하던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안색은 아직 창백한데요.”
칸피덴의 상태를 확인하던 그가 곧장 라벨라의 진료를 시작했다.
“다벨.”
라벨라가 서둘러 그를 만류하자 루비츠는 그녀를 다벨이 앉아 있던 소파에 내려놓았다.
“상태는?”
라벨라가 다벨에게 물으며 칸피덴을 가까이서 훑었다.
잠들어 있는 것처럼 누워 있는 칸피덴은 어떠한 외상도 없었다.
“…….”
그리고 라벨라는 곧 다벨에게 물을 필요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몸 안에 일렁이는 금빛 물결이 시야에 보였으므로.
‘저거, 마력인가?’
미간을 찌푸린 라벨라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칸피덴을 보니 그의 몸속 이곳저곳을 비틀어 쥐고 있는 실타래 같은 금빛 물결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꼬불꼬불한 글자 같기도 했고 엉켜 있는 실타래 같기도 했다.
‘그런데, 이건…….’
라벨라가 미간을 좁혔다.
금빛 물결을 보는데 꼭 답이 적혀 있는 문제를 읽어내리는 기분이었다. 마치 캄캄하던 눈이 밝게 개인 것처럼.
차메르와 충돌하면서 무언가 그녀의 몸에 또 다른 변화가 생긴듯했다.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라벨라의 침묵이 충격을 받아서라고 여겼는지 다벨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
라벨라는 어깨를 툭 떨어트렸다.
“응, 그런 것 같네.”
그녀 스스로 풀 수 있는 문제처럼 보였다.
다만 문제는 그녀가 마력을 운용하기는커녕 몸 하나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상태라는 것뿐.
“후.”
안도한 라벨라가 의자에 지친 몸을 뉘듯이 쓰러졌다.
잠깐 움직였을 뿐인데도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 축축했다.
살았으니 됐어. 죽지 않았으면 된 거야.
라벨라는 칸피덴을 눈에 담았다.
망설임 없이 자신을 품에 안고 보호하던 그 순간이 생생했다.
바닥에 떨어질 때도 자신이 다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보호하던 녀석이.
‘겁도 없이, 자기가 뭐라고 몸을 날려 날리기를.’
깨어나기만 해 봐라. 혼쭐을 내 줄 테다.
라벨라는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죽지 않은 것은 물론,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대로 사라졌다면 마음 한구석이 계속 찝찝했을 거니까.
*
“물론 반역을 저지른 죄인입니다. 당연히 그 죄를 물어야 마땅하긴 하나, 이미 목숨으로 갚지 않았습니까.”
“목숨으로 갚았다고요? 황제를 시해한 대역죄인입니다. 심지어 군사를 일으켜 반역을 저지른 중죄인입니다! 시신을 까마귀밥으로 내던져줘도 모자랄 판인데!”
루카비의 사후 처리를 두고 귀족들 간의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황제의 장례를 앞두고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겨 있지만, 이 회의실만큼은 예외인 듯했다.
벌써 며칠째 루카비의 처우에 대해 결론을 내지 못하고 불필요한 고성만 메아리치고 있었다.
“…….”
한숨을 쉰 네이트랄 공작이 루비츠를 보며 신호를 보냈다.
루비츠의 뜻대로 귀족들 간의 싸움을 내버려 뒀다. 이쯤 하면 그들에게 진심으로 편이 될 자들과 언제든 등을 돌릴 자들을 충분히 가린 셈이었다.
“……법대로 하시지요.”
이마를 짚은 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루비츠가 손을 떼어내며 읊조렸다.
“그러라고 있는 법 아닙니까.”
“…….”
냉기 어린 한마디에 시끄럽던 공간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들끓던 불길이 지나간 자리에 재만 남은 듯했다.
모두의 시선이 새로운 황제가 될 젊은 사내에게 모였다.
“이의가 없다면 이쯤 하고 끝내시죠.”
루비츠가 냉정하게 몸을 일으켰다. 자리를 뜨는 루비츠를 아무도 붙잡지 못했다.
몇몇 이들이 말을 얹고 싶은 듯 우물쭈물하는 게 보였다.
루비츠는 조소를 삼키며 회의실을 떠났다.
한때 루카비를 지지했던 이들이 더 요란하게 나서서 루카비의 처벌을 요구하는 모습이 우스웠지만, 황제가 되면 그가 매일 보게 될 아첨꾼의 모습이었다.
“슬슬 점심때인가.”
루비츠가 잡념을 떨치며 리텔니에게 물었다.
“네, 전하. 음식이 식기 전에 가셔야겠는데요.”
리텔니가 빙그레 웃으며 지친 주군을 재촉했다.
“그건 곤란하지.”
루비츠의 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가식과 거짓에 뒤엎인 이들을 보며 불쾌해진 마음을 단번에 날려줄 존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그의 침실, 그의 침대에 누워 얌전하게.
“전하를 보면 헷갈려 죽겠습니다.”
언제 차가웠냐는 듯 싱그럽게 웃는 주군을 보며 리텔니가 혀를 내둘렀다.
“병간호하는 게 즐거워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계시잖습니까.”
라벨라가 아픈 건 또 끔찍하게 싫어하면서 말이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난 라벨라가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거든?”
그럴 리가 있냐는 듯 루비츠가 눈을 가늘게 뜨고 리텔니를 아래위로 훑었다.
“……전하, 그 입꼬리는 내리고 말씀하시지요.”
리텔니가 어느새 성큼성큼 사라지는 루비츠의 뒷모습을 보며 투덜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