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만 모르는 유혹-79화 (79/94)

79. 나의 이스카

“!”

차메르의 손짓에 마력이 크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잔잔한 물결 같던 마력이 혈관을 타고 역류하는 느낌이었다.

‘원래 주인이라고 반응하는 모양이지.’

라벨라는 침착하게 호흡하며 출렁거리는 마력을 안정시키려 애썼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대비했으니, 훈련의 성과를 확인해 볼 차례였다.

하지만 몇 번을 시도해 봐도 마력이 요동치는 걸 가까스로 막아내는 게 고작이었다.

‘이런.’

그제야 항상 품에 지니고 있던 마석 몇 개가 빠져 있다는 게 기억이 났다. 낭패였다.

‘다시 마석을 가지러 가야 하나.’

오두막 쪽을 슬쩍 본 라벨라가 차메르와 루카비를 빠르게 확인했다. 마력에 집중한 채 두 사람을 따돌리고 움직이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너무 긴장을 풀고 있었어.’

헛웃음이 터졌다. 이를 아득 문 탓에 입 안에서 비릿한 맛이 났다.

차메르의 힘과 부딪치면서 생긴 파장이 강렬했다. 마치 몸 안에서 폭죽이 팡팡 터지는 것 같았다.

‘하긴,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건가.’

얼결에 불기둥을 만들어냈을 때를 떠올리며 훈련을 해봐도 몸 안의 마력을 바깥으로 꺼내 사용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이 마력은 자신의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곧장 원래 세계로 날아가지 않은 게 다행인 건지도 모른다.

‘이를 어쩐다.’

라벨라는 집중력을 흐트러트리지 않으려 애쓰면서 루카비쪽을 힐끗 쳐다봤다.

지금 상황에서 루카비까지 가세한다면 꽤 힘들어질 것 같았다.

불행 중 다행인지 루카비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이쪽을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녀석이 정신 차리기 전에 뭐든 해 봐야겠지.

“나 하나 돌려보내면, 뭐가 달라져?”

비릿하게 웃은 라벨라가 차메르를 향해 빈정댔다.

“그래, 네가 사라지면 그 애송이 황자 녀석은 무너지고 말 테니까. 짝을 잃고 미쳐버린 늑대 한 마리 없애는 것쯤이야.”

라벨라가 쯧, 혀를 찼다.

거봐, 이스카. 내가 네 약점이 되는 건 사양이라고 했잖아.

자신이 이렇게 사라져버리게 되면 녀석이 어떻게 될지 훤히 그려졌다.

그 꼴 안 보려면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데.

“나 하나 없다고, 흡, 무너질 녀석이 아니야.”

하지만 입을 여는 것조차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독하게 훈련했는데도 마력의 소유자인 당사자를 이겨 먹기는 쉽지 않은가 보다.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차메르가 코웃음을 치며 더 강한 힘으로 밀어붙여 왔다.

‘흐윽.’

라벨라의 고운 이마에 주름이 패였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이 몸을 쥐어짰다.

몸안에서 거대한 불덩이들끼리 부딪치며 곳곳에 불꽃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

얇은 실핏줄이 여기저기서 팟 터지는 걸 느끼며 라벨라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실력으로 차메르를 이기기엔 아직 역부족이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라벨라의 시선이 루카비의 손으로 향했다. 손을 감은 천이 점점 붉게 물들고 있었다.

‘저걸 없애야겠네.’

그녀의 목에 족쇄처럼 채워져 있었던, 차메르의 보석.

봉인의 힘이 약해지면 안되니 비스메르트의 피가 계속해서 필요하겠지.

저걸 치워버려야 봉인이 다시 강해지면서 차메르를 사라지게 할거다.

이를 악문 라벨라는 제 몸 안의 마력을 장악하려는 차메르의 힘을 겨우겨우 억눌렀다.

‘일격이면 돼.’

루비츠를 상대하며 한층 더 성장했으니 저런 샌님 하나 처리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라벨라는 온 신경 세포의 긴장을 늦추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라벨라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차메르가 헛숨을 뱉었다.

‘어느 틈에 이만큼이나.’

그녀의 몸에 흐르는 마력은 모두 제 것인데, 그녀의 의지를 따라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봉인된 몸으로 힘을 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역시 이곳에 두어서는 안 될 아이라는 생각은 이제 확신으로 바뀌었다.

빨리 보내버려야 한다. 지금이 아니면 저 아이는 더 강해져서 나타날 터.

차메르가 마지막 힘을 그러모을 때였다.

‘저것은!’

라벨라의 손을 본 차메르의 눈이 크게 뜨였다.

황제의 검.

검 손잡이의 익숙한 문양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저게 왜 라벨라에게 있는 거지?

차메르의 생각이 복잡해졌다.

봉인을 푸는 방법만 안다면, 이대로 라벨라를 데려가도 되지 않나? 아니 라벨라를 없애고 검만 가져가도 될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차메르가 고민하는 사이, 팽팽하게 부딪치던 힘의 균형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그래, 이 몸이 헛고생했을 리가 없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라벨라는 곧장 루카비에게 달려들었다.

‘아차!’

미간을 좁힌 차메르가 서둘러 라벨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차메르가 마지막을 위해 모아두었던 힘이 금빛 파장을 터트리며 라벨라에게 날아간 순간.

“대장!”

“!”

짧은 외침과 함께 커다란 몸이 라벨라의 몸을 감싼 채 나동그라졌다.

‘헉.’

바닥에 쓰러지며 둔탁한 소리가 났지만 라벨라에게 직접적으로 오는 통증은 없었다.

‘뭐야, 이건.’

루카비를 지척에 두고 검을 휘두르지 못한 라벨라는 당혹스러워졌다.

낑낑대며 품에서 빠져나오려 애썼지만, 상대가 워낙 강한 힘으로 끌어안은 탓에 쉽지 않았다.

겨우 고개만 빼낸 라벨라가 사내의 정체를 확인할 때였다.

‘칸피덴?’

절대 풀리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던 팔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커다란 몸이 축 늘어지더니 짙은 남색 머리칼이 라벨라의 어깨 위로 툭 떨어졌다.

“칸피덴!”

어깨를 움켜쥐고 당기자 힘 빠진 몸이 쉽게 옆으로 넘어갔다. 온기가 사라진 몸은 서늘한 얼음기둥처럼 굳어 있었다.

“……칸피덴?”

다급해진 라벨라가 칸피덴의 목덜미로 손을 가져갔다.

맥박이 현저히 느려지고 있었다. 서둘러 고개를 숙인 라벨라가 코끝에 귓가를 붙이자 미약한 숨이 느껴졌다.

‘빨리, 빨리 끝내야 해.’

움찔거리는 루카비의 기척을 느낀 라벨라가 검을 고쳐 쥐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몸속에 흐르는 마력이 꿀렁댔다.

잠깐 집중력이 깨진 사이에 차메르에게 우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뒤늦게 반격을 시도해봤지만 이미 차메르가 마력의 흐름을 압도하고 있었다.

‘하필 이럴 때!’

라벨라가 입술을 짓씹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무력감이었다.

조금만 더 훈련을 서둘렀더라면 괜찮았을까.

[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네게도 잘된 일이지.]

차메르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웅웅거렸다.

[목숨이 아깝다면 그만 버티고 미련 없이 돌아가거라.]

뜨거운 것이 울컥 터져 입술 사이로 흐르는 게 느껴졌다.

내장이 뒤집힌 것처럼 속이 뒤틀렸다.

이미 쿠즈네의 대장간에서 느꼈던 감각이었다.

[그것 보아라, 벌써 네 몸이 엉망이 됐다는 걸 너도 느끼고 있지 않느냐.]

흐려지는 시야에 당장 공격할 것처럼 검을 고쳐 쥐고 다가오는 루카비가 보였다.

칸피덴을 안고 있는 손이 안개처럼 흐려지고 있었다.

‘하, 이렇게? 이렇게 허무하게?’

임피리아로 넘어온 뒤 보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스카가 화내겠네.’

인사도 없이 떠난 줄 알고 며칠 내내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뒤를 쫓아온 게 불과 얼마 전이었다.

‘또 그러면 안 되는데…….’

이스카를 떠올린 라벨라는 겨우 남은 힘을 그러모아 단검을 던졌다.

정확히 루카비의 손을 향해.

하지만 몸이 비틀거린 탓에 검은 아슬아슬하게 표적을 빗겨나갔다.

‘아.’

이런. 진짜 끝인가.

“라벨라!”

점멸하는 의식 사이로 멀리서 이스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환청?

라벨라는 감기려는 눈에 힘을 주려 애썼다.

번쩍이는 무언가가 루카비를 향해 날아오는 것 같더니 시야가 검붉게 변했다.

“이스……카.”

힘없이 무너지는 몸이 누군가의 품에 안긴 듯했다.

청량한 향기.

멀리서도 누구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이의 향기였다.

“…….”

눈이 까무룩 감기며 의식이 사라졌다.

[!]

멀리서부터 날아온 장검이 루카비의 몸을 관통하는 게 느린 화면처럼 보였다.

차메르는 깨달았다.

그의 마지막 희망이 모두 부서져 먼지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루카비가 바닥에 털썩 고꾸라지는 순간 느슨해져 있던 봉인의 힘이 꽉 조여들었다.

‘봉인만 아니었더라면.’

라벨라를 상대하는 게 겨우였던 제 마력은 뒤늦게 나타난 불청객을 인지하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저주와 같은 봉인에 거부할 수 있을 리가.

불투명했던 차메르의 몸이 더 흐려지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은빛이 그의 옆을 지나치는 게 느껴졌다.

힘을 잃은 허수아비처럼 쓰러진 라벨라를 품에 안는 황자가 보였다.

‘끝이로구나.’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그의 계획은 완성되는 거였다.

라벨라를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기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

제 마력을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 그녀에게 소름이 돋았다.

그녀를 데려온 것이 제 패착이 될 줄은…….

빼앗길까 두려운 사람처럼 라벨라를 꽉 끌어안고 있던 루비츠의 고개가 들렸다.

핏발이 선 형형한 시선이 차메르에게 날아왔다.

“…….”

[…….]

형체가 있었다면 당장에 찢여죽였을 것처럼 사나운 눈빛이었다.

무장을 한 사내들이 우르르 달려와 두 사람을 보호하려는 듯 에워쌌다.

그것이 차메르가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  *  *

‘또 여긴가.’

라벨라는 익숙한 공간을 보며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축축하고 음습한 지하 공간에 퍼진 역한 피비린내.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어린아이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나란히 앉은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고통과 공포로 얼룩진 얼굴은 무척 익숙했다.

‘나 죽으려나?’

라벨라는 심상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항상 죽을 위기에 처하면 이 꿈을 꾸고는 했으니 이제는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그렇구나, 죽나 보다.’

이번에야말로 죽는구나.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버둥댔으니 마력의 부작용으로 온몸이 망가진 모양이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거다.”

주문을 외우듯 평온한 목소리가 뇌리에 새겨졌다. 아버지의 깨끗한 구두 위에 얼룩진 핏자국이 보였다.

“아가야, 네가 죽는 것은 강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

“그러니, 누구를 원망할 필요도 없단다. 모든 것은 네가 약하기 때문이니.”

네네, 그러시겠죠.

수도 없이 반복적으로 들어온 말을 또 듣게 된 라벨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맞는 말이었다.

차메르의 마력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이스카의 주머니에서 털어 낸 막대한 돈으로 마석을 사모으면서까지 훈련하고 또 훈련했는데.

결국 이기지 못했다.

차메르의 마력을 완벽히 통제하지 못했고, 그 결과 죽게 됐으며, 무엇보다…….

‘칸피덴.’

그의 목숨까지 위험하게 만들었다.

쿨럭.

터져 나온 기침에 각혈이 쏟아졌다.

‘내 운도 여기까지인가 봐.’

라벨라는 바닥을 적시는 피를 보며 체념했다.

버티고 버텨왔던 질긴 목숨줄도 끝인 모양이었다.

몸이 허물어지고 시야가 기울었다.

라벨라가 다시금 의식을 놓으려 할 때였다.

“라벨라!”

누군가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 어찌나 힘을 세게 줬는지 세상이 다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아파 죽겠는데 누구야.’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도 불쑥 짜증이 치솟았다.

가만 안 둘 거야. 죽더라도 누구인지 확인은 하고 가야겠다.

분노한 라벨라가 힘겹게 눈을 뜨자 칠흑같이 새까맣고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춤을 추듯 살랑거리는 게 보였다.

시야가 조금 더 뚜렷해지자 까만 물결 같은 그것의 정체가 사람의 머리칼이라는 걸 알았다.

‘?’

예쁜 남자아이였다.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아이는 이 더러운 지하 공간에서 혼자 반짝이고 있었다.

‘여기에 저런 녀석이 있었나?’

우성인자만 모은 탓에 여러모로 뛰어난 아이들이 모여 있긴 했지만, 확실히 더 눈에 띄는 녀석이었다.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려는데 갑자기 그의 머리색이 은발로 바뀌었다.

“!”

라벨라가 눈을 깜빡이며 다시금 아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새하얀 피부에 유리구슬 같은 보랏빛 눈동자, 붉은 입술.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 성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누구?”

겨우 목소리를 끄집어내자 그제야 아이는 안도한 듯 손의 힘을 풀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다행이다. 네가 죽은 줄 알고 무서웠어.”

아이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도 같았다.

“나, 죽은 거 아닌가?”

“아니, 안 죽었어.”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멍청하긴. 넌 이렇게 죽을 만큼 약하지 않다니까?”

“…….”

천사 같다는 거 취소.

아이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빈정대고 있었다.

“너 아주 멀쩡히 살아 있어.”

“아야.”

아이가 머리를 죽 잡아당긴 탓에 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거봐, 살아 있잖아.”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서는 미소가 몹시 익숙했다.

“…….”

누구였더라, 되게 중요한 사람 같은데.

기억을 되짚던 라벨라의 뇌리에 섬광이 스쳤다.

‘……루비츠!’

그래, 아, 나의 이스카.

어떻게 저 얼굴을 몰라 봤을까.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외모인데.

라벨라의 입가에 웃음기가 번지는 순간,

“?”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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