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만 모르는 유혹-78화 (78/94)

78. 라벨라...!

거대한 말발굽 소리가 고요한 밤을 일깨웠다.

“루비츠 전하시다! 성문을 열어라!”

멀리서부터 빠르게 달려오는 한 무리를 본 문지기들이 서둘러 성문을 열었다.

연달아 열리는 문을 거치며 루비츠 일행은 멈추지 않고 빠르게 성 안으로 내달렸다.

“어떻게 된 겁니까.”

루카비가 갇혀 있던 별궁에 도달해서야 말에서 내린 루비츠가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성큼 걸어갔다.

“그것이…….”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전하.”

아르젠을 대신해 루비츠를 기다리고 있던 네이트랄 공작이 빠르게 일행에 합류하며 대답했다.

“!”

공작의 안내에 따라 별궁의 침실로 향한 일행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얀 카펫 위에 쏟아진 핏자국이 말라붙다 못해 검게 변해 있었다.

“이 정도의 양이라면…… 단번에 급소를 찔렀을 겁니다. 이미 죽었을 것 같은데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확인한 수하 하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찌른 건 분명 칸피덴일 터. 실력자니 실수는 없었을 거다.

“루카비는?”

그렇다면 시신이라도 있어야 맞지.

“……없습니다.”

“없다? 칸피덴은?”

“그 사내는 홀로 빠져나와 말을 타고 사라졌답니다. 그 뒤를 아르젠이 쫓아갔다더군요.”

공작이 목격자의 이야기를 종합해 짧게 보고했다.

“…….”

루비츠는 다시 카펫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것이 칸피덴의 피는 아닐 터. 죽지 않았다 해도 홀로 움직일 수 없는 치명상을 입은 루카비가 갑자기 사라졌다?

“……!”

설마.

루비츠의 머릿속에 이런 일이 가능한 존재가 떠올랐다.

이 세상에 오로지 단 한 명.

하지만 봉인된 그가 어떻게?

만약 어떤 우연으로 인해 루카비와 차메르가 손을 잡은 거라면.

손을 잡은 두 사람의 목표가 무엇일지는 뻔했다.

“폐하, 폐하께는 말씀드렸습니까?”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루비츠가 다그치듯 네이트랄 공작에게 소리쳤다.

“아닙니다. 안 그래도 보고를 드리려던 차에 전하께서 오셔서.”

이런. 공작의 말을 듣는 루비츠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황제궁으로!”

루비츠는 빠르게 별궁을 빠져 나갔다.

“전하, 폐하께서는 지금 침소에 드신…….”

“비키거라.”

황제의 침실을 지키던 병사들이 어리둥절해하다가 서슬퍼런 공작의 명령에 주춤주춤 물러났다.

황자가 답지 않게 서두르는 걸 보니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마음이 급해진 공작이 병사들을 밀치며 문을 열자 루비츠가 가장 먼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

“폐하!”

그리고 그들이 발견한 건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된 황제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네이트랄 공작의 목소리가 떨렸다.

철통같은 경비 속에서 황제가 살해됐다. 충격받은 이들이 망연한 얼굴을 했다.

한 발 늦었구나.

입술을 잘근 깨문 루비츠는 천천히 걸어가 황제의 침대 옆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루카비, 너는 결국 이런 선택을 하는 구나.’

침통하게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던 루비츠는 부릅 뜬 황제의 눈을 내려주었다.

“전하…….”

네이트랄 공작이 조심스레 부르는 말에 루비츠가 몸을 일으켰다.

폐위 절차를 밟고 있던 황태자는 사라졌고, 황제는 살해됐다.

“궁을 폐쇄하고 루카비를 수배하세요.”

황제에 대한 애도를 끝낸 루비츠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황제궁을 조사한다고 한들 증거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정말 루카비와 차메르가 손을 잡은 거라면.

그래도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장례 절차는 관례대로 진행하도록 하고.”

시신을 수습할 이들을 부르게 한 루비츠가 어두운 얼굴로 궁을 나서자 그 뒤를 한 무리의 사람들이 따랐다.

“공작, 잠시 궁을 그대에게 맡겨도 되겠습니까.”

“전하,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걸음을 멈춘 루비츠가 공작을 마주보며 진중하게 묻자 공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유일하게 남은 황가의 사내다.

당연히 절차대로 황제의 장례를 진행하고 황위를 물려받아야 마땅한 시점이었다.

“라벨라에게 가봐야겠어요.”

“전하!”

나올까 두려웠던 이름에 공작이 결국 어쩌지 못하고 탄식만 뱉어냈다.

몸을 휙 돌려 버리는 황자는 이미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

공작이 도와달라는 듯 리텔니에게 시선을 옮겼다.

지금 황자를 말릴 수 있는 이는 충직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오른 팔 뿐이었다.

리텔니가 서둘러 루비츠를 뒤따랐다.

“리텔니.”

별다른 설명이 없는 부름이었지만 루비츠의 눈을 보며 리텔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비츠를 제외한다면 리텔니는 이곳에서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차메르와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무서운 마법사가 라벨라를 노리는 거라면 리텔니가 예상했던 것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다녀오십시오, 전하.”

“경!”

제 편인 줄 알았던 리텔니의 배신에 공작이 절로 큰 소리를 냈다.

“대신, 혼자 가시는 건 안됩니다.”

“돌아올 때까지 부탁해, 리텔니.”

“걱정 마세요, 제가 누굽니까.”

핏기가 사라진 하얀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언제고 리텔니의 불안을 가중시키면서도 결국 신뢰하게 만드는 주군 특유의 웃음이었다.

*

콰르릉, 땅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

루카비는 자신의 양옆으로 쏟아져 내리는 흙무더기에 놀라 몸을 웅크렸다.

그의 앞에는 분노한 마법사가 찢어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죽이는 건 안 된다고 했을 텐데.]

봉인을 풀 수 있는 황제의 검을 찾지 못했다.

오래전, 그를 봉인하는 데 사용했던 바로 그 검이 있어야만 했다.

게다가 비스메르트의 피다, 그냥 피도 아니고 황제의. 옆에 두고 써먹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 멍청하고 어리석은 놈이 그의 명령을 어기고 황제를 죽였다.

차메르는 절절 끓어오르는 분노에 눈에서 열기가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루비츠를 없애면 자연히 내가 황제가 될 텐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군.”

움츠렸던 몸을 편 루카비가 태연한 척 굴며 어깨의 흙을 털어냈다.

이렇게 화를 내면서도 뭘 어쩌지 못하는 걸 보면 확실히 마법사는 자신을 죽이지도, 해하지도 못하는 게 분명했다.

한마디로 이 거래에서 우위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뜻이었다.

확신이 커진 루카비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황제의 입을 열게 하는 게 먼저였어.]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잖아, 차라리 죽이라면서 버티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뻔뻔하게 대꾸하는 루카비를 보며 차메르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게다가 봉인을 지금 풀어주면 당신이 나와 거래한 걸 지킨다는 보장이 없잖아. 그러니까 내가 황위에 오르는 게 먼저야.”

망설임도 없이 제 아비에게 검을 휘두르는 녀석을 똑똑히 보았다.

“걱정 마시지요, 대마법사님. 어쨌든 황제의 검만 찾아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루비츠 그 녀석이 이미 빼돌렸을 수도 있고. 당신하고 먼저 거래를 했으니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지.”

[…….]

“서둘러 움직입시다, 지금쯤이면 벌써 들켰을 거라고.”

루카비는 땅 위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황제를 죽이고 그들이 옮겨온 곳은 지하 깊숙이 위치한 서고였다.

황제의 말에 힌트를 얻어 루카비가 차메르에 대해 조금의 정보를 알게 된 바로 그 숨겨진 황가의 서재.

차메르는 성안을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기척들을 느끼며 가늘어진 눈으로 루카비를 노려보았다.

“루비츠 녀석을 우리 뜻대로 움직이게 하려면, 녀석의 약점을 잡아야지.”

루카비가 잔혹하게 웃었다.

루비츠가 네이트랄 가의 영애를 이용하는 것뿐이라 여겼는데, 진심으로 마음에 품고 아끼고 있다니.

차메르에게서 들은 모든 진실은 그에게 하나같이 희망을 주는 것들이었다.

루비츠가 피눈물을 흘리며 제 앞에서 무릎 꿇는 걸 꼭 봐야겠다.

그래야 이 문드러진 속이 조금은 시원해질 테지.

루카비는 제게 기적처럼 주어진 이 마지막 기회를 허투루 날릴 생각이 없었다.

황제를 죽였으니 이제는 루비츠 하나만 남았다.

“가시죠, 아름다운 영애를 만나러.”

루카비는 벌어진 손아귀에 박아둔 보석이 떨어질까 꽉 움켜쥐었다.

제 피를 양분 삼는 그 보석이 저 마법사를 이용할 수 있는 열쇠였다.

*

“여기서 이렇게 뵐 줄은 몰랐네요.”

“영애야말로 내 예상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군요.”

갑자기 등장한 자신을 보고 놀라지도 않는 라벨라에 루카비가 빈정거렸다.

“아, 차림이 좀 그런가요?”

루카비가 무슨 의도로 말하는 건지 뻔히 알면서도 라벨라는 편안한 셔츠에 바지를 입고 있는 제 옷차림을 슥 둘러보며 대꾸했다.

“어쨌든 내가 가야 하는 건가 고민했는데, 이렇게 찾아오시다니 번거로운 수고가 줄었네요. 그것도 두 분이 같이 올 줄이야.”

라벨라는 루카비와 차메르를 보며 싱긋 웃었다.

“하?”

그 미소에 루카비가 헛웃음을 뱉었다.

“두 분의 조합이라니 신선한데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라벨라가 입술 끝을 늘이며 차메르를 바라봤다.

불투명한 형태의 차메르는 방관자처럼 루카비의 뒤에 서 있었다.

설명을 바라는 건 아니었으나, 말해준다면 마다할 생각도 없었다.

[…….]

하지만 차메르는 그림자라도 된 것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흠.

라벨라의 금안이 다시 루카비를 훑었다.

노골적인 시선에 루카비가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순진하고 조신한 느낌의 영애는 어디 가고 그 자리에는 나른한 시선을 가진 무례한 여자가 있을 뿐이었다.

“아, 알겠다.”

루카비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마력에 라벨라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칸피덴에게서 차메르의 보석을 돌려받지 못했지. 계속 지니고 다녔던 건가.

‘녀석, 멍청하게 빼앗겼나 보네.’

게다가 루카비의 몸에 튄 피는 마르지도 않은 채 아직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깨끗하기만 한 차메르와는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누구의 피일까. 가늠해보는 라벨라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칸피덴은 어디 있죠?”

“하.”

역시 칸피덴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건 그녀의 명령이었던 것일까.

루카비가 참을 수 없는 모멸감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사람을 깜찍하게 속이셨더군요, 영애.”

“무슨 말씀이신지?”

루카비의 으르렁대는 말에 라벨라가 고개를 작게 옆으로 기울였다. 사뭇 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이었다.

루카비는 그 모습을 노려보다가 입술을 짓이겼다.

알고 나서 보니 암살 길드의 수장이라는 자리가 퍽 어울리는 듯 보였다.

그래, 지금은 그녀에게 감정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우린 영애에게 함께 손을 잡자 제안하러 온 겁니다.”

여자의 정체를 알게 된 이상 일단은 회유가 먼저였다.

팔짱을 낀 채 루카비의 말을 곰곰이 짚어보던 라벨라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황제를 죽이셨군요.”

“…….”

이제야 퍼즐이 다 맞춰졌다.

그들이 제게 온 이유.

이번에도 승기를 움켜쥐게 된 라벨라는 여유롭게 창틀에 기대어 섰다.

“봉인을 푸는 게 목적인 분이 황제를 죽이면 어쩌나.”

라벨라의 금안이 도르륵 옆으로 굴러가 차메르에게서 멈췄다.

비스메르트의 정통 후계인 황제만이 차메르의 봉인을 푸는 게 가능하다.

그런데 죽였다는 건, 봉인을 푸는 건 황제 자체가 아니라 황제의 권력을 가진 자의 ‘무엇’이라는 뜻.

“황제까지 죽였으면서, 바로 루비츠에게 가지 않고 왜 내게 왔을까요.”

라벨라가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처럼 느긋하게 말꼬리를 이었다.

“황태자님께서는 루비츠를 죽일 만큼의 능력이 되질 않으시니까.”

라벨라가 놀리듯 툭 던진 말에 루카비의 귀까지 붉어졌다.

“영애, 농이 지나치군요.”

파르르 떨던 루카비가 라벨라를 노려보았다.

“모든 비스메르트를 없애는 게 꿈 아니었나? 왜 같이 움직이실까?”

그러거나 말거나, 라벨라가 무례하다 싶을 만큼 손끝으로 루카비를 콕콕 가리키며 차메르를 응시했다.

“우리 위대하신 대마법사님께서는 비스메르트를 직접 죽이실 수 없으니까. 봉인의 힘의 원천인 비스메르트를 거스르는 건 못 하니까.”

정곡을 간파당한 차메르의 입술 끝이 실룩였다.

그래, 확실히 저 아이는 위험하다. 지나치게 똑똑하고 눈치가 빠르다.

게다가 그녀의 몸에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마력이 담겨 있었다.

마치 제 몸에서 뭉텅 뜯어내 이식이라도 한 것처럼.

“영애, 예의를 갖춰 대할 때 순순히 따르는 것이 좋을 겁니다.”

차메르와 라벨라 사이에서 오가는 이야기에 불안해진 루카비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라벨라의 농간에 마법사가 마음을 바꾸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흐음, 두 분은 내게 뭘 원하시죠?”

“루비츠를 버리고 나와 손을 잡아요. 그대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줄 수 있으니까.”

“어쩌나, 내가 원하는 건 그쪽이 줄 수 있는 게 아닌데.”

“제국의 권력자가 주지 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저런, 아닐걸요?”

라벨라가 안됐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다가 씩 웃었다.

“내가 원하는 건, 루비츠 그 자체거든.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걸 가지려면 당신이 사라지는 게 맞지.”

“…….”

“난 녀석의 웃는 얼굴이 제일 마음에 들거든.”

[어쩔 수 없구나.]

차메르가 안타깝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흥, 어차피 날 죽이지 못하잖아?”

라벨라가 비음을 흘렸다.

네이트랄 가의 영애라는 신분은 라벨라가 차메르의 비밀에 다가서게 해주었다. 시중에는 금지된 서적들을 접할 기회.

마법사는 자신과 같은 마력을 가진 자를 죽이지 못한다.

마법사에게는 핏줄보다 더 강하고 끈끈하게 연결된 것이 마력이었다.

차메르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여유롭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널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려는 거다.]

“!”

라벨라에게로 향한 그의 손끝에서 금빛 물결이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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