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불길한 전조
지금 루카비를 죽인다면 루비츠가 곤란해진다.
하지만 칸피덴은 개의치 않았다. 조금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오로지 라벨라 하나였으니까.
“……이봐?”
서슬 퍼런 검날을 본 루카비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칸피덴.”
불길한 직감에 루카비가 두 손을 칸피덴에게로 뻗었지만, 칸피덴의 검은 망설임 없이 루카비의 몸을 노렸다.
“……흐억……”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일격이었다.
루카비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숨을 흘렸다.
관통한 검날을 두 손으로 붙잡아 봤지만 깊이 박혀 소용이 없었다.
“이게…… 무슨 짓…….”
실핏줄이 터져 붉게 충혈된 눈을 한 루카비가 칸피덴을 노려보며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이의 손끝에 마지막으로 힘이 들어갔다.
옷자락을 쥐어뜯는 강한 힘에 무언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거긴……!’
루카비가 붙든 것의 정체를 깨달은 칸피덴이 루카비의 손을 잡으려는 순간.
“!”
……루카비의 몸이 사라졌다.
분명히 검을 찔러 넣었던 감각이 아직도 손끝에 선명했다.
바닥에 흥건한 핏자국도 이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사라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멍하니 검을 내려보던 칸피덴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라벨라…… 대장!’
*
쾅!
“?”
불안함에 별궁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던 아르젠은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
피 칠갑이 된 상태로 침실을 빠져나오는 칸피덴을 본 아르젠이 사색이 된 채 달려갔다.
칸피덴은 혼이 나간 사람처럼 창백했다.
“칸피덴!”
“비켜.”
황급히 달려 나가려는 칸피덴의 앞을 막아서니 핏방울이 잔뜩 튄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왜 이래? 무슨 일이야? 설마…… 황태자를 죽였어?”
칸피덴이 아르젠의 옆으로 비켜 지나가려 했지만 아르젠이 다시 그 앞을 막으며 물었다.
“죽이지 않았어.”
칸피덴이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그의 마음은 불안한 예감에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럼 몰골이 왜 이래?”
아르젠이 칸피덴을 아래위로 훑었다. 들어갈 때는 분명히 깨끗하고 멀쩡한 모습이었다.
“죽이려고 했는데, 사라졌어.”
“……뭐?”
“……사라졌다고! 비켜, 대장에게 가야 해. 대장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더는 지체할 수 없어진 칸피덴이 아르젠의 어깨를 밀치고 달려 나갔다.
‘대장이 위험하다고? 대체 무슨 일이?’
그 뒷모습을 황망히 바라보던 아르젠도 서둘러 뛰기 시작했다.
“이봐! 네이트랄 공작님을 불러! 별궁을 확인하시라고 전해!”
아르젠은 지나가다 마주친 병사에게 크게 소리쳤다.
그가 별궁 내부를 먼저 확인했어야 했지만, 루카비가 진짜 사라졌든 아니든 그는 키르아였다.
라벨라가 제일 중요한 건 마찬가지였다.
삐익!
달리면서 루비츠의 전령구를 불러낸 아르젠은 제 옷자락을 이로 찢었다.
손가락 끝을 물어 피를 낸 아르젠은 천 조각 위에 몇 가지의 단어만 급히 휘갈겼다.
‘제길! 제대로 쓰기나 한 건가!’
그 와중에도 아르젠은 칸피덴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시선을 내릴 수가 없었다.
루비츠가 알아서 해석해주길 바라는 수밖에.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녀석이니까 가능하겠지.
“말을 내줘!”
어느새 말을 빼앗기 위해 검을 뽑아 드는 칸피덴을 본 아르젠이 급히 소리쳤다.
멍청한 표정으로 물러나는 병사의 손에서 말고삐를 뺏은 칸피덴이 빠르게 말에 올랐다.
“내게도!”
아르젠의 재촉에 병사 하나가 말 궁둥이를 내리쳐 아르젠 쪽으로 달리게 했다.
달리는 말에 올라탄 아르젠에게 루비츠의 전령구가 날아들었다.
말고삐를 한 손으로 잡은 아르젠은 전령구의 부리에 천 조각을 물려주었다.
“똑똑한 새니까, 잘 가져다줄 수 있지? 부탁한다.”
다리에 묶으며 시간을 보냈다가는 칸피덴을 놓칠 거였다.
무지막지하게 성안을 달리는 칸피덴은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자라면 가리지 않고 죽일 기세였다.
“성문을 열어요!”
어느 정도 칸피덴을 따라붙은 아르젠은 계속해서 소리쳤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무서운 속도로 내달린 두 사람이 순식간에 황궁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팔락거리는 천을 문 작은 새도 밤하늘을 날아갔다.
*
힘이 풀린 두 다리가 저절로 꺾였다.
“으윽, 컥.”
배를 움켜쥔 루카비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쿨럭 터져 나왔다.
“……허억.”
루카비는 끊어질 것 같은 숨을 겨우 이어갔다. 뜨거운 불기둥이 내장을 헤집는 것 같았다.
시야가 점점 흐려지면서 의식 또한 멀어져갔다.
이대로 죽는 건가.
“흐윽.”
억울하고 분통해진 루카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모든 원흉이 된 루비츠와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방관자였던 황제와 황후, 자신을 배신한 후레이 자작과 칸피덴까지.
루카비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 짜내 모든 이들을 향해 저주를 퍼부을 때였다.
“!”
지독했던 고통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몸을 적시던 피도 멎었을 뿐만 아니라 흐릿했던 시야도 다시 밝아졌다.
내가 꿈을 꿨던 건가.
루카비가 배의 상처 부근을 더듬었다. 찢어진 옷은 그대로였지만 상처는 없었다.
두 손을 들어 보았지만, 여전히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얼빠진 표정이라니.]
낮은 목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
또렷해진 시야에 들어온 이를 본 루카비가 흠칫 몸을 굳혔다.
“누, 누구냐!”
칸피덴에게 찔렸던 배를 본능적으로 가린 루카비가 기다시피 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역시 비스메르트 답군.]
그 모습을 본 차메르가 기가 찬다는 듯 조소했다.
“…….”
루카비는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새하얗다 싶을 만큼 반짝이는 백금발을 가진 사내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불투명한 몸은 산 자의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나도 이미 죽은 것인가.
“네 정체가 무엇이냐!”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내가 조금만 늦었다면 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텐데.]
차메르가 입술 끝을 비틀었다.
[내가 비스메르트의 목숨을 구해주는 날이 오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차메르가 빈정대면서 루카비의 앞으로 미끄러지듯 걸어왔다.
거리가 가까워진 탓에 사내의 얼굴이 정확히 보였다.
루카비는 사내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곧장 읽어냈다.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혐오감이었다.
그런데도 루카비는 사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화려하다 싶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 백금발에 투명한 금안.
이미 그가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그래, 네이트랄 영애.’
그렇다면…….
루카비는 서둘러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분명 그가 있던 곳은 별궁의 침실이었는데 주위는 어둡고 컴컴한 동굴 같은 곳이었다.
부드러운 카펫이 깔려 있어야 하는 바닥은 무릎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흙바닥이었다.
그러니까 죽지 않고 산 거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루카비는 바짝 정신을 차렸다.
책에서 봤던 내용이 진짜인가.
저 사람은 그럼 어마어마한 힘을 가졌다는 것일 테고.
그 사실이 루카비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었다.
“여, 여긴 어디……입니까.”
말투가 저절로 공손해졌다.
게다가 정체불명의 저 사내가 자신을 구해준 데는 이유가 있을 거였다. 죽이려 했다면 살릴 이유도 없을 테니까.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경계하면서도 꼬치꼬치 캐묻는 루카비에 차메르가 쯧, 혀를 차고는 턱 끝으로 루카비의 손을 가리켰다.
“!”
차메르와 제 손을 번갈아 보던 루카비는 조심스레 손을 펼쳤다.
그 안에는 작고 투명한 금색 보석이 있었다. 루카비는 제 피에 물들어 원래의 색조차 알아보기 힘든 보석을 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구나!’
검에 찔렸을 때 칸피덴을 강한 힘으로 움켜쥐면서 제 손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건 내 것이다.]
눈을 내리깐 차메르가 서늘한 시선으로 루카비를 바라봤다.
은발 머리를 보면 비스메르트의 피가 분명했다.
보석에 닿은 피 때문에 일시적으로 그를 가둔 봉인의 힘이 약해진 듯했다. 봉인이 약해진 걸 느끼자마자 차메르는 곧장 상대를 불러 들였다.
오래전 루비츠의 피로 라벨라를 불러들였듯이.
그렇게 나타난 게 눈앞의 머저리 같은 녀석이었다. 어쨌든 모든 정황을 볼 때 그는 확실한 비스메르트였다.
[내가 누구인지 짐작하는 바가 있는가.]
“…….”
역시나 멍청한 표정.
하지만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상황 판단을 못하는 걸 보니 루비츠와 달리 아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 녀석이 황태자겠군.’
루비츠가 끌어내리려던 상대.
[따라와.]
일시적으로 약해졌던 봉인의 힘이 다시 강해지고 있었다.
모습을 유지할 수 없게 되기 전에 어서 녀석을 이용해야 했다.
차메르는 자신의 몸이 봉인된 수정구로 루카비를 데려갔다. 소름 끼치는 광경에 압도당한 루카비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 대마법사인 거군.”
그냥 멸족한 마법사인가 했더니, 그 신화의 주인공일 줄이야.
정체를 알게 된 루카비는 온몸의 솜털이 오싹 서는 기분이었다.
이건 제게 기회인가, 아니면 또 다른 지옥길인가.
[아주 멍청한 놈은 아니었군.]
“언젠가 책에서 읽은 적이 있지.”
건국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니 임피리아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진실을 아는 건 오로지 황제에게만 허락된 권위였다.
“백금발에 금안이라, 재미있군.”
루카비는 라벨라를 처음 만나고 난 뒤 황제가 무심코 흘리던 말을 귀담았다.
계속 찝찝하게 맴돌기에 황실의 숨겨진 도서를 뒤졌고 봉인된 대마법사 이야기가 진짜라는 걸 알게 됐다.
“그 내용이 진짜였다니.”
[나에 대해 안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들리는데. 이상하군, 네 아우는 벌써 오래전에 이곳에 다녀갔는데 말이야.]
“……뭐라고?”
호기심에 물들었던 루카비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황위를 원한다더군.]
“!”
[그래서 거래를 했지.]
“무슨, 무슨 거래를 했지?”
[그를 황제로 만들어주는 대신 날 봉인에서 풀어주기로.]
“!”
루카비는 경악했다.
그럼 그렇지.
죽어가던 자신도 살린 이 마법사의 어마어마한 능력.
녀석이 그토록 자신을 몰아붙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예상대로 반응하는 루카비를 보며 차메르는 조소했다.
“혹시 그대가 네이트랄 가와도 연관이 있나?”
[네이트랄? 처음 듣는군.]
“당신 같은 존재가 또 있는지를 묻는 거다.”
[…….]
차메르는 침묵을 선택했다. 그건 루카비에게 확신을 심어줬다.
‘그래, 다 이유가 있던 거야.’
“그 거래, 나와도 가능한 거 아닌가? 나와 손을 잡는 게 어때. 내가 바로 당신의 봉인을 풀어주지.”
죽었다 살아난 루카비는 아주 좋은 계획을 떠올렸다.
[…….]
“당신의 힘이 필요해, 날 황제로 만들어 줘.”
[그대 아우와도 한 약조이니 내가 두 번 해야 할 이유가 있나. 게다가 그 꼴을 보아하니 그대는 이미 밀려난 모양인데.]
“그런 나를 살린 건 당신에게도 목적이 있단 뜻이지. 루비츠는 믿지 못한다거나. 안 그래?”
[…….]
“루비츠에게 이용당하지 말고 내 손을 잡아, 당장 봉인을 풀어줄게.”
[봉인을 푸는 것은 황제만 가능하다.]
“그럼 내가 황제가 되면 되겠네.”
탐욕에 가득찬 얼굴을 보며 차메르는 웃음을 삼켰다.
결국 돌고 돌았지만,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 * *
“흐음.”
루비츠가 선물해 준 마석을 손에 쥐고 굴리던 라벨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잠하던 차메르의 마력이 요동치고 있다.
즉, 차메르가 마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차메르의 보석은 칸피덴에게 돌려받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루비츠의 안내로 마도구를 제작하는 이들을 만나면서 마력의 원리를 알게 된 후였다.
루비츠가 큰돈을 쓴 덕분에 그 대용품을 만들었고, 오히려 차메르의 마력을 제게로 끌어올 수 있었으니까.
지금은 마력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훈련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차메르가 움직였다면, 그건 그들의 계획에 변수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슬슬 움직이는 게 좋을까. 아니면 기다려야 하나.”
창밖을 보며 라벨라가 고민하는 시각.
삐익-.
황궁으로 향하던 루비츠는 제게로 날아드는 새를 향해 손을 뻗었다.
“!”
작은 새의 부리에는 찢겨서 너덜거리는 천 조각이 물려 있었다.
그의 전령구가 먹이 외에 무언가를 물고 오는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그들끼리 정해놓은 신호를 벗어난,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졌다는 뜻.
게다가 다리에 묶인 것도 아니니 위급한 일인 듯 보였다.
루비츠는 서둘러 천 조각을 빼내 펼쳤다.
[황태자 실종, 칸피덴 쫓는 중]
말라붙은 핏자국이었다.
단어를 조합해보며 상황을 유추하던 루비츠의 미간이 좁아졌다.
“전하?”
다가온 리텔니가 무슨 일이냐는 듯 눈으로 물었다.
“루카비가 사라졌다는데.”
“네? 결국 칸피덴이……?”
그랬다면 미리 이야기가 오간 만큼 당당하게 빼냈을 테니 실종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겠지.
“글쎄, 확인해봐야 할 것 같은데.”
찢어진 천과 피,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휘날려 쓴 글씨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는 걸 의미했다.
“서두르자.”
루비츠가 말고삐를 당겼다.
그 순간, 검집의 가죽끈 하나가 끊어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때가 되면 교체해주는 만큼 드문 경우였다.
“…….”
떨어진 건 카셰이가 만든 검 중의 하나였다.
루비츠가 말없이 바닥에 떨어진 검을 보고 있자 수하 중 하나가 말에서 내려 주운 뒤 루비츠에게 건넸다.
말없이 받아든 루비츠는 먼 허공을 응시했다.
‘라벨라.’
서늘한 공기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