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그녀의 비밀
“당연히 그냥 넘길 수는 없지요.”
브라트는 루비츠를 말릴 생각이 없었다. 이런 일을 벌였을 때는 응당 뒷일도 염두에 뒀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나메렌 후작이 마음에 걸립니다.”
루비츠의 생각에 동의하면서도 브라트는 딸을 끔찍이 아끼는 후작이 떠올랐다.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막상 자신의 딸이 처벌을 받게 된다면 후작은 딸을 지키려 할 확률이 높았다.
아직 루비츠 황자가 황위에 오른 것도 아니니 지지 세력에 균열이 생기는 건 썩 좋다고 할 수 없었다.
“후작이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들면 되는 겁니까?”
루비츠는 브라트의 생각 정도는 다 안다는 듯 픽 웃음을 흘렸다.
“모든 귀족가에 라벨라의 납치 소식을 긴급으로 전해요. 일을 크게 만들어 봅시다. 그래야 피가 바싹 마르는 기분일 테니까.”
라벨라의 행방을 알기까지의 그 며칠, 그들이 속을 태운 것의 그 몇 배로 갚아 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라벨라도 곧장 돌아올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
루비츠가 냉정한 눈빛으로 읊조렸다.
“네? 돌아오지 않는다니요?”
브라트가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안 그래도 혼자 돌아온 황자가 의아하던 참이었다.
“아가씨는 대체 무슨 생각이랍니까?”
온 성이 발칵 뒤집힌 마당에 당장 돌아오기는커녕 데리러 간 황자마저 혼자 돌려보내다니.
“그걸 내가 알면. 하, 보통 고집은 아니지.”
루비츠가 그 마음 안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 쉬었다.
“정말 같이 안 갈 거야?”
“나도 내 계획이 있거든?”
“칸피덴이 루카비를 데려온다는 보장도 없잖아.”
“……너, 나 몰래 다른 일을 벌인 건 아니지?”
“…….”
“그랬기만 해 봐. 그리고 성에 있으면 여러모로 눈에 띄니까 자유롭게 움직이기도 힘들고, 당분간은 이렇게 있을게.”
“그래도 혼자 두고 가는 건…….”
“나더러 충분히 강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잔소리 그만하고 얼른 가, 정리되면 프롬쉘로 갈게.”
끝끝내 혼자 남길 선택한 라벨라였다.
하여간, 고집불통.
“……곧 돌아올 거에요.”
제 계획이 틀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말이지.
또 한 번 혼나게 생겼네.
처음으로 라벨라 몰래 뒷공작을 펼친 루비츠는 폭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난 황궁으로 돌아가야겠군요.”
“전하, 그래도 좀 쉬었다 가시지요. 요 며칠 계속 강행군이셨잖습니까.”
몸을 일으키는 루비츠를 보며 브라트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걱정 말아요, 가장 좋은 명약을 먹고 왔거든.”
라벨라의 정성이 가득 담긴 시간을 선사 받았던 루비츠는 보는 사람을 두근거리게 만들 만큼 싱그럽게 웃었다.
*
네이트랄 공작가에서 긴급히 각 영지로 보낸 도움의 요청은 후작의 손에도 빠르게 도달했다.
“뭐? 라벨라 영애가 납치를 당해?”
밀봉된 편지의 내용을 확인한 후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가는 마당에 비보였다.
“누가 감히 그런 미친 짓……!”
설마.
후작은 황태자의 반란을 진압하고 영지로 돌아왔을 때 어딘가 이상하던 피아체를 떠올렸다.
‘그래,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내가 지금 무슨 상상을.’
성안에서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란 아이가 무슨 수로.
아무리 황자를 좋아하는 마음이 크다 한들 피아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던 후작은 곧장 피아체의 방으로 향했다.
“피아체.”
“네?”
수를 놓고 있던 피아체가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
후작은 불안해졌다. 평소라면 자신의 방문에 저토록 놀랄 아이가 아니었다.
숨기는 게 있는 듯, 불안한 표정으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지 않는 피아체라니.
“라벨라 영애가…….”
“죽었대요?”
“……뭐?”
후작의 미간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수틀을 쥔 피아체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며 후작의 심장도 덩달아 쿵쾅댔다.
네이트랄 영애가 예비 황후나 마찬가지라는 건 황자의 지지 세력 모두가 짐작하는 바였다.
“아직 납치되었다는 것만 알고 있다.”
“아아…….”
놀라는 게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반응.
“혹시, 짐작 가는 바가 없느냐.”
“제가, 그런 일을 어떻게 알겠어요.”
눈을 동그랗게 뜬 피아체가 펄쩍 뛰었다.
“……그래, 그렇지. 걱정되어 물어봤다.”
더이상 묻지 못하고 피아체의 방을 나선 후작은 눈을 감고 침음했다.
그리고 방에 혼자 남겨진 피아체는 덜덜 떨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괘, 괜찮을 거야.’
라벨라가 죽으면 납치극에 동참한 그녀의 죄도 함께 묻히는 거다.
‘제발 돌아오지 말아요, 영애.’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품는 자신이 무서웠지만, 피아체는 이제 간절히 라벨라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
* * *
“음.”
침대 위에 누워 뒹굴뒹굴하던 라벨라가 폭신한 이불에 코를 파묻었다.
“역시 안 나네.”
이스카 특유의 청량한 향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이러다 화상을 입는 거 아닐까 싶을 만큼 뜨거운 온기에 데워졌던 침대는 사늘한 감각만이 남아 있었다.
“짜증나, 이런 거.”
이불을 움켜쥔 라벨라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누군가 떠난 빈자리를 보며 허전해하고 그새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날이 올 줄이야.
입술을 샐쭉인 라벨라는 괜히 침대를 한번 노려보고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오두막 밖으로 나갔다.
비가 한차례 쏟아지고 난 뒤라 풀 내음과 숲을 가득 채운 나무들의 싱그러운 향기가 가득했다.
이스카를 닮은 향기.
“아, 그래! 인정해, 인정한다고!”
라벨라는 결국 한숨 쉬듯 항복을 선언했다.
제 마음을 인정하고 나니 모든 감각이 이스카와 연결되어 버린다.
쫓아내다시피 보내버린 건 자신인데, 쓸쓸해 하는 건 또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아아.”
라벨라는 오두막 입구 계단에 풀썩 주저앉아 펼친 두 손바닥을 뒤로 뻗었다.
땅을 짚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약한 바람이 불며 머리칼을 흐트러트렸다.
“하아, 어쩐담.”
어쩔 수 없이 한숨이 흘러나왔다.
루비츠가 황위에 오르면, 그렇게 조건을 걸어놓고 모른 체해왔지만 사실은 루카비를 제 손으로 처리하는 순간 결정해야 한다는 걸 안다.
루카비가 사라지면 루비츠는 당연히 황태자가 될 테고.
그때는 제 옆자리에 자신을 앉히려 할 터다.
네이트랄 가라는 막대한 권력을 등에 업은 영애가 된 입장이니 자연스러운 수순을 밟아 황태자비가 되는 미래겠지.
전부 이스카가 그린 그림이라는 걸 모를 수 없었다.
키르아와 이스카, 이스카와 키르아.
자유를 얻으면 이스카를 곁에 둘 수 없고, 이스카를 선택한다면 속박된 삶을 살아야 한다.
원래의 그녀라면 둘 다 가지려 했겠지만, 이건 양립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들다니.”
마음이 명료해지니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놓고 싶지 않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긴 한데. 제국의 황제를 무슨 수로?
“칸피덴이 빨리 루카비를 데려왔으면 좋겠네.”
답이 없는 고민에 라벨라는 일단 눈앞에 놓인 문제에 집중하기로 했다.
* * *
라벨라가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걸 알리 없는 칸피덴은 계획대로 황성에 이르렀다.
“여기야.”
황궁으로 향한 칸피덴을 맞은 건 아르젠이었다.
“황자한테서 소식 들었어.”
아르젠이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칸피덴보다 한발 앞서 도착한 루비츠의 전령구에는 칸피덴을 도와주라는 명령 같은 부탁이 적혀 있었다.
“대장하고 무슨 일을 벌인 거야?”
칸피덴을 데리고 당당하게 황궁 정문으로 걸어 들어가면서도 아르젠은 쌓아놨던 불만을 터트렸다.
처음 라벨라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혼비백산했던 걸 떠올리면 지금도 화가 울컥 치솟았다.
“처음부터 대장하고 얘기됐던 거야?”
칸피덴이 키르아를 배신했다는 사실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가.
이런 중요한 사실을 자기만 쏙 빼놓고 정하다니. 아르젠은 라벨라에게도 서운해지려 했다.
“아니야.”
“뭐?”
아르젠이 칸피덴을 위아래로 훑었다.
“나 혼자 계획한 거야. 대장은, 지금 그냥 내게 맞춰주는 것뿐이고.”
“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르젠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저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서 혼자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건지 감이 안 잡혔다.
“설마, 엉뚱한 짓을 벌이려는 건 아니지?”
지금도 녀석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질투 때문에 이런 일을 벌였다는 걸까?
“넌, 대장이 황궁에 묶이더라도 괜찮나?”
입술을 어름거리다 묻는 칸피덴의 말에 아르젠이 표정을 굳혔다. 안타깝지만 이제 두 사람의 관계는 칸피덴이 어쩌지 못할 만큼 깊어진 상태였다.
“포기해. 그 두 사람, 네가 어쩐다고 벌어질 사이 아니야.”
“…….”
“칸피덴. 대장의 선택이 그런 거라면 우린 따라야 해.”
아르젠이 칸피덴의 팔을 강하게 붙잡으며 짙푸른 눈을 응시했다.
“언제는 대장이 선택하는 것 중에 옳지 않은 게 있었어?”
“…….”
“대장이 원하는 게 그거라면, 존중해. 너야말로 우리들 중 누구보다 대장을 아끼는 거 아니었어?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마. 우리 모두 대장에게 빚진 게 있잖아.”
경고하는 말투는 서슬 퍼런데 칸피덴의 팔을 놓아준 손은 위로하듯 등을 툭툭 두들겼다.
다시 걸음을 옮기는 아르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칸피덴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루카비를 내주겠다면서 루비츠가 덧붙인 말이 떠올랐다.
“라벨라의 계획은 잘 알았어,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계획을 세웠는지도. 하지만, 난 그녀 뜻대로 하게 두지 않을 거야.”
“대장의 뜻을 거스르겠다는 건가?”
“그럼 내가, 그런 지저분한 일을 그녀에게 맡겨 두고 뒷짐 진 채 지켜볼 것 같아?”
대꾸하는 녀석의 눈은 차갑고 서늘했다.
“인질의 행방을 받았으니 나도 대가를 내놔야겠지. 약속한 대로 루카비를 만나게 해줄게. 원한다면 데리고 나갈 수 있게 손을 써 둘 거고.”
“…….”
“하지만 그대로 두고 나간다면, 루카비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선택은 네 몫이야, 칸피덴.”
“…….”
“이번만큼은 네가 라벨라가 아닌, 내 뜻을 따라주리라 생각해.”
누구보다 피에 물든 손에, 불필요한 피를 묻히고 싶지 않은 마음.
그걸 녀석이 제일 잘 알아준다는 것이 모순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칸피덴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털어냈다.
*
그리고 그 날밤, 루카비가 갇힌 별궁.
“윽.”
별궁 앞을 지키던 병사가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약속대로 별궁을 지키는 군사의 수를 줄여놓은 루비츠 덕분에 칸피덴은 적당히 침입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별궁 안쪽으로 수월하게 들어섰다.
마지막 병사가 쓰러지고, 루카비가 있는 침실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누구지?”
며칠 사이에 핼쑥해진 루카비는 시야에 들어오는 그림자에 초췌한 낯을 들어 올렸다.
“칸피덴, 그대가 왔군.”
방문자의 정체를 확인한 루카비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내내 어둡게 가라앉아있던 얼굴에도 점점 웃음기가 번졌다.
그가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는 건 그들의 계획이 성공했다는 뜻이었다.
루카비의 약점이 될 여자. 그리고 귀족의 정점에 있는 네이트랄을 움직일 수 있는 키. 그 여자가 제 수중에 들어왔다는 거다.
후레이 자작의 배신으로 뼈에 새긴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대 혼자인가.”
“그렇습니다.”
“그래, 무언가 계획을 세운 게 있는 건가? 아니, 그건 나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지. 나갈 방법은? 여기엔 어떻게 들어왔지?”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루카비는 침대와 근처의 책상 사이를 오가며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황태자궁에 비한다면 턱도 없이 작은 공간이었다.
“그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칸피덴의 낮은 목소리에 루카비의 눈이 사나워졌다.
“셰바르의 행방에 대해서인가? 그거라면 나도 모른다고…….”
“그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가!”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루카비는 평온하기 그지없는 칸피덴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반가웠던 것도 잠시 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에 답답해졌다.
“네이트랄 가의 영애에 대해서입니다.”
“네이트랄?”
갑자기 그녀는 왜?
엉뚱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루카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이트랄 영애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칸피덴은 루카비가 읽었던 책의 내용을 다시금 생각했다.
[마법사 일족은 대대로 백금발에 금안을 갖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은…….]
칸피덴이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좀처럼 보기 힘든 외모라 임피리아인이 아니라 여겼을 뿐이었다. 마법사라니, 건국 신화에나 나오는 존재라 믿기엔 어려웠다.
“그걸 그대가 왜 궁금해하지?”
“제게는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책의 내용이 사실이고 라벨라가 진짜 그런 존재라면, 초대 황제의 손에 멸족한 존재가 살아 있는 것이니 라벨라가 위험해지는 거였다.
라벨라를 황실에서 멀어지게 하고 싶은데, 모두가 그를 말린다. 그러니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뭘 알면서 묻나. 루비츠의 약점이니, 당연히 이용해야지. 그녀의 정체를 빌미로 루비츠를 반역으로 몰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
역시.
살려둘 수는 없겠다. 그의 입에서 라벨라에 대해 한 마디라도 나오면 곤란하니까.
“하나 궁금한 것이 있어. 대장이 백금발과 금안을 가진 이유, 너도 알고 있나?”
“……그래, 알아.”
“안다고? 그걸 알면서도, 넌…… 대체 어쩔 셈이지?”
“그게 왜? 그냥 그녀는 유일무이하게 아름다운 외형을 갖고 태어난 것뿐이야. 아름답잖아? 그렇지, 칸피덴?”
비밀을 아는 건 그와 루비츠, 둘만으로 충분하다.
칸피덴은 곧장 검을 뽑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