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혼날 차례
“그대가 여길 찾아오다니 의외로군요.”
칸피덴을 먼저 맞이한 건 리텔니였다.
“가시죠,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리텔니는 무뚝뚝한 얼굴의 사내를 곁눈질로 훑었다.
함께 일하며 친해진 아르젠이나 페시니와는 다르게 칸피덴과는 접점이 거의 없었다.
오가며 몇 번 스치듯 본 게 전부였던 그를 다시 본 건 황궁 연회에서였다. 그것도 황태자의 곁에 있는 모습으로.
황태자의 수하가 된 이가 하필 라벨라가 실종된 이후 주군을 찾아온 이유가 뭔지 짐작이 갔다.
‘차라리 라벨라 님과 황태자를 맞바꾸자고 해줬으면 좋겠네.’
리텔니는 이 사내가 라벨라의 행방을 알고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의 주군은 지금 폭주하기 직전의 위태위태한 상태였다.
만약 라벨라의 행방을 찾아내지 못하면 그가 어떻게 변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하아, 이런 결말은 예상 못 했는데.’
차메르와의 거래한 뒤 임피리아 전역을 헤맬 때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겠나.
그토록 소망해왔던 목표가 고지에 있는데, 주군에게 약점이 생겨 버렸다.
라벨라는 그들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지만, 가장 쉽게 제 주군을 무너트릴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라벨라 님, 제발요.’
“들어가시지요.”
한숨을 삼킨 리텔니가 칸피덴의 앞에 문을 열어주었다.
“……!”
리텔니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칸피덴은 방 안 가득한 살기에 들어서다 말고 흠칫 몸을 굳혔다.
“어서 와.”
“…….”
루비츠는 책상 위에 걸터앉아 단검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칸피덴.”
낮긴 했지만 익숙한 목소리와 말투였다.
달라진 건 머리색과 옷차림뿐, 황자라기보다는 펍에서 마주쳤던 첫 만남 때와 비슷했다.
아니, 한 가지 더.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등골이 오싹할 만큼 서늘한 미소로 바뀌었다는 것도.
루비츠가 검을 휙 허공으로 던졌다가 받았다. 칸피덴에겐 낯설지 않은 행동이었다.
라벨라가 자주 하는 거니까.
“…….”
칸피덴은 눈을 감았다 떴다. 이런 걸 알아채고 마는 자신이 싫었다.
“내가 기다리는 소식을 들고 왔으리라 믿어도 되나?”
검을 책상에 내리꽂아 박아 넣은 루비츠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 외에도 무장한 이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칸피덴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눈앞에서 대놓고 뿜어대는 살기에 긴장한 온몸의 신경세포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맞아, 내가 데리고 있어.”
조용히 긴 숨을 들이마신 칸피덴이 토해내듯 대답했다.
“……데리고 있다?”
기묘한 말을 들었다는 듯 루비츠가 쿡쿡 웃었다.
“확인해 봐.”
칸피덴은 품에서 작은 검을 꺼내 루비츠에게 던졌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루비츠는 낚아챈 검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봤다.
카셰이가 만들어 준 라벨라의 검이었다. 그와 라벨라만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
“원하는 게 뭐지?”
검을 소중하게 움켜쥔 루비츠가 눈을 들어 올렸다.
“황태자…… 아니, 루카비를 풀어줘.”
“이유는?”
셰바르를 넘겨받는다면 칸피덴이 루카비를 지켜야 할 이유도 사라지는 거였다.
“대장이…… 키르아의 역할이 무엇인지 기억하라는 말을 전하라더군.”
키르아의 역할.
“흠, 널 대신해서 손을 더럽힐 사람이 필요하다는 건가? 나더러 네 뒤를 닦아주라는 거야?”
오래전, 라벨라에게 제 편이 되어 달라 말했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루비츠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미간을 좁혔다.
‘이 여자가 진짜.’
분명히 그런 일을 시킬 마음이 없다고 확인시켰거늘, 라벨라는 이쪽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모양이다.
“좋아. 루카비를 넘기겠어.”
별수 없었다.
‘이게 라벨라가 원하는 것이라면야.’
루비츠가 고개를 기울였다.
생각보다 쉽게 수긍하는 루비츠에 칸피덴이 의아해지려던 찰나.
“대신, 난 인질이 무사한지 확인해야겠는데.”
단호한 말이 흘러나왔다.
물론 라벨라는 아주 멀쩡하게 잘 있을 거다. 알면서도 요구한 건, 얼굴을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였다.
안 그러면 제가 먼저 죽게 생겼으니까.
* * *
루비츠가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과 달리.
칸피덴을 루비츠에게 보낸 라벨라는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설령 납치를 당했다 하더라도 어디든 갈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라벨라는 인적 없는 숲에서 몸을 풀며 땀을 흘리는 데 시간을 다 보냈다.
사실 훈련보다는 잡념을 떨치기 위한 게 더 컸다.
‘루카비를 처리하고 나면, 그다음은?’
답을 내릴 수 없는 미래가 계속해서 번잡스럽게 라벨라를 괴롭혔다.
“그를, 그렇게 사랑해? 이런 귀찮은 일을 자처할 만큼?”
오두막을 떠나기 전, 칸피덴이 참을 수 없다는 듯 물어 온 질문이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굳이 납치당한 척 넘어와 황태자를 유인해내기로 했으니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긴 했다.
겨우 이스카의 죄악감을 덜어주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
몸을 씻고 오두막으로 돌아온 라벨라는 침대에 발라당 드러누운 뒤 눈을 감았다.
사랑이라.
차메르와 거래한 걸 알았을 때만 해도,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스카를 제 손으로 죽일 수도 없고, 버리기도 쉽지 않으니.
그 정도만 해도 라벨라 인생에 있어서 큰 변화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런 존재를 가져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 지금은? 지금은 사랑이라 확신하는 건가?
이스카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건…….
“!”
미간을 찡그린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라벨라가 눈을 번쩍 떴다.
‘칸피덴인가?’
아직은 먼 거리, 누군가 오두막으로 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흠.”
황궁에 투옥되었을 루카비를 이토록 빨리 빼 왔을 리 없다. 게다가 다가오는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설마?’
검을 쥔 라벨라가 문 옆으로 가 벽에 몸을 기댔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고, 누군가 뛰어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쾅!
오두막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나 참.”
흔들거리는 문을 어이없다는 듯 본 라벨라가 근육의 긴장을 풀었다.
그럼 그렇지. 가만히 앉아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녀석이 아니지.
기어이 며칠을 못 참고 여기까지 자신을 보러 온 그 행동력이 가상할 정도였다.
“아예 부수지 그랬……!”
침입자를 향해 핀잔하던 라벨라의 표정이 곧 차갑게 굳었다.
“얼굴이 왜 이 모양이야?”
라벨라는 곧장 손을 뻗어 연인의 턱을 잡아챘다.
좌우로 휙휙 돌려 제대로 확인한 라벨라의 눈빛이 사납게 튀었다.
내내 잠을 자지 않은 건지 눈 밑에는 그늘이 내려앉았고, 살이 더 빠진 얼굴은 금방이라도 없어질 것 같았다.
숨길 생각조차 없는 살기는 또 어떻고.
“…….”
화를 내는 건, 역시 애정이 있다는 거겠지?
라벨라의 뚜렷한 분노를 확인한 루비츠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루비츠의 손이 제 턱을 움켜쥔 하얀 손을 감싸듯 덮었다.
얼굴을 보니 살 것 같았다.
내내 물이 꽉 찬 것처럼 갑갑하던 폐에 공기가 훅 들어오는 것처럼, 드디어 숨이 쉬어졌다.
“왜 답이 없어?”
하지만 상한 얼굴을 살피는 라벨라의 얼굴은 더욱 험악해졌다.
“밥 안 먹었어? 잠도 안 잤나 봐?”
귀족 회의 후로 고작 일주일이 조금 넘게 지났을 뿐이었다.
황궁에서 프롬쉘로, 또 그곳에서 여기로. 쉴 틈도 없이 움직였을 테지만 그 정도에 약해질 녀석이 아니었다.
“……그럼, 잠이 오겠어?”
그런 당연한 걸 묻다니.
루비츠가 헛숨을 뱉으며 대꾸했다.
“당신이 그렇게 사라졌는데, 밥이 넘어가겠냐고.”
“…….”
보랏빛 눈동자에 순간 음험한 기색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걸 본 라벨라가 입을 다물었다.
“……걱정했어?”
왜 그랬냐는 듯 떨떠름한 표정이다.
“하.”
답답함에 머리를 쓸어넘긴 루비츠가 문을 닫고 그대로 등을 기댔다.
손이 잡혀 있던 라벨라도 덩달아 루비츠의 품으로 딸려 들어갔다.
“대체 뭘 걱정한 건지 궁금해지네?”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봐. 아니면, 내가 사라졌을까 봐?
라벨라는 제 어깨 위에 이마를 툭 떨어트리며 기대오는 루비츠의 귓가에 대고 중얼거렸다.
“……둘 다.”
“앞의 건 쓸데없는 걱정이라 말하고 싶고.”
“그럼 뒤의 건.”
고개를 든 루비츠가 라벨라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뒤의 건 맞고?”
“음…… 나름대로 타당한 걱정이긴 하네.”
“하?”
라벨라가 쿡쿡대며 웃는 소리에 루비츠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며칠 내내 사람을 지옥 불에 넣어두고 괴롭힌 여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고 있었다.
“당신, 내가 얼마나…….”
억울해진 루비츠가 입술을 비틀자 곧바로 촉촉한 입술이 겹쳐졌다 떨어졌다.
“미안해.”
라벨라가 씩 웃고는 입술 위에 속삭였다.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니까?”
어쨌든 칸피덴도 라벨라가 실력을 인정하는 몇 되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다.
“미리 말했으면 세츠를 남겨두고 갔을 거잖아, 너. 그럼 일이 꼬였을지도 모른다고.”
“…….”
“왜 이래, 다 알면서.”
정말 잘못했다는 듯 아래로 내린 눈꼬리를 살짝 접기까지 한다.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한 것도 놀라운데 녹일 것같이 달콤한 미소에 입맞춤까지. 넘어가지 않고는 못 배길 만한 행동을 연타로 날려버린다.
루비츠는 의도적으로 살살 구슬리는 게 뻔히 보이는 라벨라를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며칠간 머릿속을 괴롭히던 끔찍했던 상상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들끓었던 불안도 희미해져 사라졌지만.
“그래도 화 안 풀렸어.”
루비츠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얼마나 걱정했는데, 이런 장난 같은 키스에 홀라당 넘어갈 수는 없었다.
“어머, 난 이 예쁜 얼굴이 많이 보고 싶었는데.”
라벨라가 양손을 미끄러뜨려 루비츠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닌 게 아니라, 얼굴을 보는 순간 복잡했던 감정은 사라지고 반가움이 앞섰다. 상한 얼굴을 보니 화도 좀 나고.
무척이나 좋아하는 얼굴인데 이렇게 상하게 만들다니. 제 허락도 없이 함부로.
그렇지만 지금은 자신이 화를 낼 타이밍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릴까, 우리 황자님께서.”
루비츠의 가슴팍에 고개를 얹은 라벨라가 눈만 커다랗게 뜨며 연인을 올려다봤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을 느리게 움직여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 제게 고정된 루비츠의 눈동자에서 다정한 빛이 떠오른다. 마치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상상이 들 정도로.
“응? 말해 봐, 이스카.”
피를 바싹 말려 죽이려는가 싶더니, 애교라고는 절대 없을 것 같은 여자는 이제 사람을 흐물흐물 녹이려고 작정했나 보다.
“글쎄. 보통 방법으로는 안 풀릴 것 같아.”
루비츠가 눈동자를 올렸다 내리며 라벨라를 응시했다.
“어쩐담. 우리 황자님의 화를 풀어주고 싶기는 한데…….”
라벨라가 안타깝다는 듯 비음을 흘렸다.
“나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더 편한 사람이라.”
“……”
“어떻게 할까?”
그리 물으며 붉은 혀끝을 살짝 빼물었다가 쏙 집어넣어 버린다. 사람 감질나라고.
“제일 잘하는 걸 하는 게 맞지. 안 그래?”
대답하는 루비츠의 눈이 가늘어졌다.
루비츠는 라벨라가 내미는 손에 적당히 잡혀주기로 했다.
“그걸로 넘어가 준다니, 참 다행이야.”
내내 심술부리듯 굳어있던 입꼬리가 녹은 버터처럼 사르르 올라서는 걸 본 라벨라가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허리를 붙잡고 있던 라벨라의 손이 등허리를 타고 올라가 넓은 어깨를 꾹 감싸 쥐었다.
밀착된 몸 사이에는 조금의 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루비츠의 목 뒤로 올라온 손이 목덜미를 감아 아래로 끌어 내렸다.
서로만을 눈동자에 담은 채 입술이 먼저 닿고, 그다음 눈이 감겼다.
루비츠는 조급해하지 않고 모든 걸 라벨라의 손에 맡겼다.
아랫입술을 감쳐무는 부드러움도, 벌어진 입술 사이로 느껴지는 작게 부서지는 숨결도,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다.
느긋하게 안을 파고드는 숨결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서서히 온몸으로 퍼지는 것만 같았다.
마치 생기가 빠져나가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몸에 다시 피가 도는 것처럼.
그러니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이 온기를 만끽하고 싶었다.
달칵.
허리 옆에 있는 버클을 풀어 검집을 떨어트린 손이 그대로 미끄러져 올라와 가슴팍의 단추로 향했다.
단추를 손가락으로 살살 굴리던 라벨라가 손을 멈추고 입술을 떼어냈다.
“…….”
멀어지는 숨결에 루비츠의 눈이 스르르 떠졌다.
“기대해, 열심히 노력할 생각이니까.”
눈이 마주치자 라벨라가 사랑스러운 미소와 함께 속삭였다.
“이미 기대하고 있는데.”
달콤한 경고에 픽 웃어 준 루비츠가 다시금 눈을 감았다.
키스를 바라는 듯 얌전하고 다소곳한 태도와는 상반된 마음가짐이었다.
“응큼하긴.”
태도조차 얌전할 생각이 없는 라벨라는 즐겁게 입을 맞췄다.
황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무척 깊고, 진하게.
* * *
뜨거웠던 열기가 미지근해지고, 어스름한 새벽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올 때쯤.
“그런데 너.”
루비츠의 위로 제 몸을 굴린 라벨라는 그의 가슴팍에 두 팔을 얹고 그 위에 턱을 괸 채 미간을 찡그렸다.
“정말 내가 도망갔을 거라고 생각했어? 진짜로?”
온 마음과 온몸으로 정성을 다해 화를 풀어줬으니, 이제 화를 낼 차례는 자신이었다.
“음, 그러니까…….”
루비츠가 슬쩍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지금 그에게는 그녀의 화를 풀어줄 수단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조차 라벨라는 계산한 거겠지만.
‘이런.’
라벨라에게 선수를 빼앗기고만 루비츠는 난감해졌다.
잔뜩 혼이 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