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빚은 만들지 않는다
커다란 손이 느리게 올라가 이마를 짚었다.
‘라벨라가, 사라졌다고.’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매끈한 턱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긴 속눈썹이 어두워진 보랏빛 눈동자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제 발로 떠난 건가.’
감히 누가 프롬쉘의 성에 잠입할 것이며 다른 이도 아닌, 라벨라를 납치할 수 있을까.
아르젠은 여전히 황궁에서 공작 부자의 곁을 지키고 있으니 키르아의 단체 행동도 아닐 터.
“…….”
곧바로 칸피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끼어들었다 한들, 이렇게 떠나 버린다고?
정말? 떠나겠다는 말 한마디 없이?
루비츠가 헛숨을 토해냈다.
“여기, 그대로 있을 거지?”
그렇게 물었을 때 라벨라는 무어라 대답했더라.
“……다녀와.”
기다리겠다는 한마디 없었지만, 루비츠는 자신을 향한 그 어여쁜 미소에 희망을 걸었다.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었는데, 내 착각이었나.
쉽게 믿어버린 게 패착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츠를 떼어놓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와 한심함, 불안감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전하.”
밑에서부터 서서히 번져가는 살기를 느낀 리텔니가 작은 목소리를 냈다.
그제야 루비츠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
침잠된 눈동자가 천천히 리텔니에게 향했다.
표정이 사라진 얼굴은 얼음 조각 같았다.
“찾아내. 작은 흔적 하나라도 전부 다.”
“……네.”
직접 라벨라의 입을 통해 듣기 전까지는, 그녀 스스로 떠난 거라 믿고 싶지 않았다.
떠난다 해도, 이렇게는 아니야.
루비츠는 어금니를 아득 물며 걸음을 옮겼다.
* * *
“칸피덴, 이제 결정할 시간이야.”
이미 대화의 주도권을 잡은 라벨라는 손가락으로 무릎 위를 톡톡 두들겼다.
복잡한 마음이 된 칸피덴이 이마를 문질렀다.
라벨라가 무기를 다 내려놓은 건 겉치레일 뿐이다. 지금도 라벨라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신을 죽이고 갈 수도 있었다.
“연회장에서 처음 널 봤을 때 말이야.”
라벨라는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 칸피덴을 보며 다른 말을 꺼냈다.
“솔직히, 조금 당황했어.”
“!”
칸피덴의 눈썹이 꿈틀댔다.
“네가 황태자의 편에 붙었든 아니든 상관없을 줄 알았는데, 약간 충격이었던 것도 같고.”
“…….”
“다른 녀석은 몰라도, 너는 날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라벨라가 픽 웃으며 칸피덴을 응시했다.
“무의식에 그렇게 믿었나 봐, 내가.”
라벨라가 팔짱을 풀고 어깨를 으쓱였다.
“조금 괘씸하지 뭐야? 그깟 가족 문제가 뭐라고, 감히 내 뒤통수를 때리나 싶었지.”
“그건…….”
“그런데 이스카가 말이야.”
흥미로운 사실을 전하듯 라벨라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네가 날 배신할 리 없다고 확신하더라?”
“…….”
“녀석의 그 말이 아니었다면, 아마 난.”
라벨라의 눈빛에서 웃음기가 지워졌다. 올라갔던 입꼬리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
칸피덴은 숨을 죽였다.
냉정한 금안이 마치 온몸을 후려치듯 할퀴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널 죽였을지도 몰라.”
아무리 칸피덴이 키르아의 주축 멤버였다고 한들, 위험 요소가 된 이상 라벨라는 그런 선택을 했을 거다.
그게 자신이 살아온 방식이었다.
“바랍스에서도, 내가 네게 아무것도 묻지 않은 건. 이스카 녀석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야. 네가 날 배신할 리 없다고.”
“…….”
칸피덴은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스카한테 여러 번 빚진 셈이지, 너도, 나도.”
널 죽였다면, 나도 좀 속이 쓰렸을 것 같거든.
살기를 지운 라벨라가 싱긋 웃으면서 턱을 괬다.
“우리가, 어디 가서 빚지는 사람들은 아니니까. 그렇지?”
그리 말하는 라벨라를 어떻게 이길까.
칸피덴은 라벨라가 바라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차피 도와주기로 한 거, 녀석을 제대로 밀어줄 생각이야.”
결국 칸피덴은 그녀의 의견을 따를 것이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어.”
확신한 라벨라가 칸피덴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황태자를 데려와.”
“……황태자를?”
칸피덴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
대답 없이 확고한 눈을 보니 라벨라는 이미 머릿속에 모든 계획을 정리해 놓은 모양이었다.
“알겠어. 대신.”
자포자기한 칸피덴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는 대장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해. 대장이 위험한 상황이 온다면, 난 대장의 결정을 따르지 않을 거야.”
내가 그 손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 그렇게 해.”
칸피덴의 결연한 눈빛을 보며 라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칸피덴이 오두막을 나가는 걸 보며 라벨라는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칸피덴에게 잔인한 짓을 해버렸다. 그의 마음을 이용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허.”
양심이 콕콕 찔리는 기분에 라벨라는 황당해졌다.
양심이라니.
자신에게 그런 감정이 있기는 했던가.
“확실히, 이상해.”
라벨라는 머리를 쓸어넘기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자신이 더이상 자신이 아닌 것만 같은 낯설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라벨라가 산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쯤이면 이스카도 프롬쉘에 도착했을 거다.
이스카가 황궁으로 떠나기 전날 밤 자신을 찾아왔던 때가 계속해서 생각이 났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커다란 몸으로 품에 파고들던 녀석의 얼굴은 꽤 괴로워 보였다. 앞에서 티를 내고 싶지 않았는지, 웃음 뒤에 숨기고 있긴 했지만.
묘하게 다정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다.
아마도 제 손으로 혈육을 없애야 한다는 사실에 죄악감을 느끼는 거겠지.
그래도 명색이 연인인데, 모른 척할 수야 있나.
그녀가 이스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그런 거였다.
이스카의 손을 더럽히지 않도록 해주는 것. 그래서 녀석의 죄악감을 덜어주는 일.
그걸 위해 칸피덴의 납치극에 동참했다.
잘 마무리되려면 이스카가 제 계획에 협조적으로 나와야만 했다.
“쓸데없는 생각은 안 해줬으면 좋겠는데.”
늘 그녀의 예상을 벗어나는 건, 오로지 이스카.
그 하나였다.
* * *
루카비의 반란은 제대로 해본 것도 없이 끝이 났다.
성을 빠져나가려던 루카비는 이미 루비츠가 풀어놓은 병사들에게 덜미를 잡힌 후였다.
“제길.”
루카비는 포박된 상태로 연신 이를 갈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더라면, 황태자였던 신분을 고려해 비리에 대한 처벌만 받고 끝났을지도 몰랐다.
군사를 일으킨 탓에 그는 잠정적 죄인이 아니라 진짜 죄인으로 전락해 버렸다.
비리가 폭로되고 루카비가 황태자위를 스스로 내던지기까지는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루비츠가 벼랑 끝에 선 그를 절벽으로 몰았기 때문이었다.
‘후레이 자작.’
그가 뒤통수를 친 게 분명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등을 떠밀렸단 걸 모르는 루카비는 엉뚱한 곳에 화살을 돌렸다.
그간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키워낸 군사가 이토록 허망하게 무너지다니.
이 자리 하나 지키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었나.
루카비는 믿을 수가 없었다.
포박된 그는 그대로 황제 앞에 끌려갔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누르며 강제로 무릎을 꿇게 했다.
“루카비, 이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다니.”
황제의 눈동자에는 동정도, 조소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한 마리 벌레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별궁에 유폐하겠다. 처분을 기다려라.”
차가운 명령이 떨어졌다.
황제의 망토가 루카비의 앞에서 펄럭이며 멀어졌다.
이대로 끝인가.
……칸피덴은? 그는 임무 수행에 성공했을까?
아, 그렇다 한들.
별궁에 유폐되면 그를 만날 방법이 없어진다.
마지막 희망이 촛불처럼 사그라졌다.
“…….”
루카비는 절망에 빠졌다.
* * *
루카비의 반란은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진압됐지만, 그 뒤의 일은 절대 녹록지 않았다.
“이쯤 되면 위로를 보내드려야겠군. 이렇게 오랜 시간 공을 들였는데 허무하게 끝이 났으니.”
한숨을 쉰 네이트랄 공작이 그답지 않게 빈정거렸다.
공작이 들고 있는 서류에는 루카비가 벌였던 비리 목록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이 정도면 황궁의 숟가락 하나까지 전부 그분 손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어.”
황궁 안에 루카비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황제의 눈에 띄지 않게 교묘하게 건드려야 했으니 얼마나 오랜 시간 준비했을지가 훤히 보였다.
“그러게요, 얼른 집에 가고 싶은데 일이 너무 많군요.”
공작 곁에서 함께 서류를 보던 브라트가 쭉 기지개를 켜며 웃었다.
공작에게는 루카비가 벌였던 비리들을 확인하며 황궁을 재정비해야 할 중요한 임무가 주어졌다.
황궁 내의 살림을 관장하는 관료들이 있었지만, 황제가 믿을 수 없다고 해버리는 바람에 모든 책임이 공작에게로 넘어온 탓이었다.
“전하는 프롬쉘에 도착하셨겠지요?”
“도착하시고도 남았겠지.”
반란을 진압하고도 이틀이나 지났으니, 지금쯤이면 뜨거운 재회를 만끽하고 있을 테지.
냉철하고 차가운 황자는 유독 라벨라의 앞에서만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버님.”
“이야기하거라.”
“라벨라 양은…….”
황후 직을 받아들일까요?
브라트는 말을 다 꺼내지 못했다.
“아닙니다.”
그와 동시에 프롬쉘에서 출발한 전령이 두 사람을 찾아왔다.
“프롬쉘에 무슨 일이 있느냐?”
공작이 의아해하며 전령을 바라봤다.
“그것이, 아가씨가 실종됐습니다.”
침을 꼴깍 삼킨 전령은 목소리를 낮춰 소식을 전했다.
“뭐라고?”
공작 부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지금쯤 난리가 났겠군.”
라벨라 일에 한해서 이성적이지 못한 황자를 떠올린 공작이 눈을 질끈 감으며 침음했다.
“브라트. 프롬쉘로 돌아가라.”
“네, 아버님.”
브라트가 떨리는 손을 감추며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실종이라니.’
괜찮을 거다.
어디 그녀가 보통 여인이던가.
무려 키르아의 수장이다.
‘아니, 그래도!’
약에 당해 쓰러졌던 모습을 떠올리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라벨라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귀여운 영애라 라벨라에게 호감을 느꼈을 뿐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녀가 네이트랄 가에 온 이후로 정이 더 많이 든 모양이었다.
‘전하. 처음부터 이걸 노리신 거겠지요.’
루비츠의 수를 읽어낸 브라트가 허탈한 한숨을 흘렸다.
라벨라는 이제 그의 집안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커다란 존재가 되어 있었다.
* * *
‘죽었을까?’
화장대 앞에 앉은 피아체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오늘 황궁에서 중요한 회의가 열린다.’
아버지가 그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미친 짓을 벌이진 않았을 거다.
중요한 회의가 뭔지 피아체도 눈치껏 알아들었다.
후작은 루비츠 황자를 지지하니까, 아마 황태자가 폐위되고 황자가 그 자리에 오르는 걸 거다.
그럼 라벨라를 황태자비로 들일 거라던 루카비의 약속도 의미가 없어지는 거였다.
‘누가, 누가 데려간 걸까.’
피아체는 마차를 습격한 사내들의 얼굴을 떠올리다 진저리쳤다.
누런 이에 덥수룩한 수염은 생각만으로 두려웠다.
‘아아, 들키지는 않겠지?’
그냥 라벨라를 불러내기만 하면 알아서 치워주겠다는 편지 한 통에 그런 모험을 감행한 거였다.
정말로 그녀가 없어졌으면 싶었다. 그럼 루비츠 황자의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서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이대로 나타나지 않고 사라져줬으면…….’
라벨라가 죽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몽글몽글 자라날 때였다.
“아가씨, 영주님께서 돌아오셨어요.”
“아, 깜짝이야! 놀랐잖아, 유모!”
“어휴, 뭘 그리 놀라신담. 요 며칠 내내 아가씨 참 이상해요.”
“내, 내가 뭘.”
피아체가 새침하게 대꾸하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화장대를 짚은 그녀의 손가락은 달달 떨리고 있었다.
“아가씨?”
“아, 아버지가 오셨다고?”
“네, 지금 막 도착하셨어요.”
“으응.”
가까스로 몸을 움직인 피아체는 홀로 내려가 후작을 반겼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의 얼굴은 일이 성공했다는 안도감에 환하게 피어있었다.
‘그 여자가 어떻게 됐는지 들으신 게 있을까?’
후작을 지켜보며 피아체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 일이 있고 벌써 사흘이 넘게 지났으니, 지금쯤이면 소식이 퍼질 만했다.
“피아체? 내게 할 말이 있느냐?”
“네? 아,아니요.”
피아체가 자신도 모르게 도리질 치고는 황급히 몸을 돌려 계단을 올랐다.
“…….”
그 뒷모습을 후작이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 * *
벌써 사흘째.
라벨라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한 루비츠는 거의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전하, 먼 곳이긴 하지만 의심스러운 흔적을 찾았습니다.”
“어디지?”
수하를 풀어 프롬쉘 구석구석을 뒤지던 루비츠는 작은 단서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라벨라가 흔적을 남길 리 없으니 헛된 일일 수도 있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나메렌 후작의 영지로 향하는 길입니다. 말과 마차가 달린 흔적인데 사흘 정도 지난 것 같다고 하니 시기가 비슷합니다.”
비가 오지 않아 흔적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던 게 행운이었다.
“내가 직접 가보지.”
라벨라의 희미한 흔적이라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
루비츠가 성큼 발을 옮길 때였다.
“전하! 전하를 뵙겠다고 찾아온 이가 있습니다.”
다른 수하가 루비츠의 앞을 가로막았다.
“누구지?”
“……칸피덴이라 전하면 아실 거라고.”
“!”
칸피덴이?
“……데려와.”
루비츠의 눈이 날카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