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웃어줬어?
어떻게 생각하냐니.
노골적이면서도 교묘하게 핵심을 피해 떠보는 말이었다.
‘피아체가 다녀갔다 했지.’
칸피덴의 말을 떠올린 라벨라는 대답 없이 살포시 웃으며 볼을 붉혔다.
역시 그녀와 이스카의 관계를 아는 걸까.
황태자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이야기를 하는 걸까.
모든 건 대화에서 유추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대화는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라벨라의 예상과는 달리 황태자와의 담소는 싱겁게 끝났다.
“조만간 프롬쉘에 초대해주길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영애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그는 인자한 미소로 다음을 기약할 뿐이었다.
“……와 주신다면 기쁠 거에요.”
라벨라 또한 의아함을 매너 뒤에 감췄다.
“그럼 또 만나요, 영애.”
루카비는 기꺼이 라벨라를 궁 입구까지 배웅했다.
특별대우였다.
라벨라를 고이 돌려보내고 집무실로 돌아온 루카비는 창가에 서서 라벨라가 탄 마차가 사라지는 걸 주시했다.
“아름다운 영애이긴 하지만…….”
루카비는 등 뒤에 다가온 인기척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딱히 눈에 띄는 점은 없군.”
“그렇습니까.”
칸피덴은 심상하게 대꾸했다.
특이점이 없다고 느꼈다는 것에서 이미 황태자는 라벨라에게 진 것과 다름없었다. 그녀가 심어주고 싶어 하는 이미지에 그대로 넘어간 거니까.
모든 게 라벨라의 의도라는 걸 황태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다.
“그런데 이상하지.”
천천히 몸을 돌린 루카비가 칸피덴을 힐긋 쳐다봤다.
“꼭 어디선가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루카비가 턱을 문질렀다.
“…….”
그래도 감은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루비츠 녀석이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다행히 진지한 고민은 아니었는지 루카비의 관심은 금방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혹시나 해 살짝 긴장했던 칸피덴도 굳었던 혀를 풀었다.
하긴. 라벨라가 마음먹고 정체를 숨기려 한다면 결코 알아낼 수 없을 터.
그 밤에 잠깐의 침입으로 라벨라를 알아보기엔 어렵다. 알면서도 괜히 심장이 선득거렸다.
칸피덴의 관심사는 오로지 라벨라의 안전, 단 하나였다.
“훌륭한 배경을 갖고 있으니 녀석으로서는 무척 탐나기야 하겠지. 게다가 아름답기도 하고.”
루카비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칸피덴에게 이미 라벨라의 뒷조사를 시킨 내용을 보고받은 후였다.
물론 칸피덴은 보고 내용을 교묘하게 바꿨다.
루비츠가 라벨라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고. 따지고 보면 사실에 기반한 내용이긴 했다.
“그래. 귀족회의를 소집해야겠군. 언제가 좋을까.”
당장이라도 황태자비 후보를 공표해버리고 싶지만, 그럼 너무 재미가 없지 않나.
“그래도 일단은 상황을 지켜볼까.”
칸피덴의 속을 알 리 없는 루카비는 즐거운 상상에 빠졌다.
루비츠와 접점을 가졌던 귀족들이 황태자궁을 들락날락하기 시작했다. 황태자비 후보로 지목된 영애가 속한 가문이거나 관련이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한 이치였다. 다들 자기 잇속대로 움직이는 작자들이니까.
루비츠의 노력을 헛수고로 돌리고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공들이던 걸 뺏겼을 때 녀석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루카비가 빙긋 웃었다.
너도 한번 느껴볼 필요가 있겠지.
자신의 것을 뺏기는 기분이 어떤 건지.
* * *
“면접은 잘 보고 왔어?”
프롬쉘로 돌아온 라벨라를 맞은 건 입이 퉁퉁 나와 있는 이스카였다.
라벨라의 방으로 연결되는 응접실 한가운데에 삐딱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그는 불쾌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
라벨라는 이스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곁에 서 있던 하녀장에게 시선을 던졌다.
“조금 전에 도착하셨습니다.”
라벨라의 의문을 읽은 하녀장은 난감한 얼굴로 라벨라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어쩐지.
외투조차 벗지 않은 녀석의 살짝 흐트러진 은발 머리를 보아하니 그녀가 도착할 시간에 맞추기 위해 서둘러 달려 온 모양이었다.
……그렇게 신경이 쓰였나.
녀석이 불안해하는 게 이해는 안 가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쉬울 거 하나 없는 사내를 안달하게 만드는 이가 자신이라는 사실이 이토록 뿌듯해지는 날이 올 줄이야.
라벨라가 살짝 웃어 보이자 하녀장이 눈치껏 자리를 비키며 사람들을 물렸다.
“면접은 잘 봤냐고?”
라벨라가 픽 웃으며 토라진 연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그녀는 오만해 보일 정도로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따스한 손이 슬그머니 다가와 작은 손을 꼭 움켜쥐었다.
“웃어줬어?”
기다란 손가락이 손바닥 안쪽을 파고들어 은근히 문지르며 간질였다.
“울 수는 없잖아.”
“쳇.”
이스카가 투덜거리면서 몸을 일으킨 탓에 라벨라의 고개가 절로 위로 들렸다.
“걱정하지 마, 너한테 웃어주는 것처럼 웃지는 않았어.”
“……그래?”
살짝 구슬리니 마음에 들었는지 가로로 길게 늘어진 눈꼬리에서 스르륵 힘이 빠졌다.
“안아도 돼?”
그러면서 또 작은 강아지처럼 유순하게 꼬리를 흔든다.
언제부터 그렇게 허락을 받았다고.
녀석은 자신이 어떻게 굴어야 라벨라가 약해지는지 잘 아는 거다.
“하여간, 영악한 황자님이야.”
핀잔하면서 어깨만 으쓱이자 커다란 몸이 덮치듯 라벨라를 품에 가뒀다.
이스카는 부드러운 백금발에 볼을 부비면서 사랑스러운 향기를 폐부 깊숙이까지 끌어당겼다.
언제고 황홀할 정도의 안정감을 주는 향기였다.
그래도 부족하다. 이렇게 품에 안고 있어도 이 여자를 향한 지독한 갈증이 일었다.
“고생했어. 안 해도 될 일을 하느라고.”
“알긴 아는구나?”
“어떻게 몰라. 전부 나 때문인데.”
“이 순간에도 이자가 불어나고 있다는 걸 잊지 마.”
“원하는 건 전부 줄 생각이라니까.”
평소처럼 능글거리며 하는 농담이 아니라 분명 진심이다.
옅은 웃음을 터트린 라벨라가 이스카의 가슴팍을 밀어내는 동시에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대……!”
아슬아슬하게 타이밍을 맞춰 떨어진 두 사람의 시선이 다급해 보이는 손님에게 향했다.
“대장.”
노크도 없이 달려들어 온 이는 안에 있는 사람을 빠르게 확인하고서야 다시 호칭을 입에 올렸다.
그녀의 방은 성에서도 가장 안쪽이었다. 여기까지 쉬지 않고 뛰었는지 아르젠의 얼굴이 그의 머리색만큼이나 붉었다.
라벨라의 얼굴에 피어 있던 짓궂은 미소가 사라졌다.
“뭐였어?”
아예 아르젠에게로 몸을 돌린 라벨라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칸피덴이 건넨 쪽지에 적힌 장소에 확인차 다녀온 그였다.
“그게…….”
숨을 고른 아르젠이 웃음을 퍽 터트리며 허리를 폈다.
“셰바르가 있던데.”
“셰바르라니? ……잠깐, 셰바르라고?”
오즈벳 상단을 손에 굴리던 자. 그리고 칸피덴의 생물학적 부친.
잠시 아리송해 하던 라벨라가 금방 깨닫고는 이스카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모든 걸 예상했다는 듯 덤덤한 표정이었다.
“말했잖아, 녀석이 당신을 배신할 리는 없다고.”
읊조리는 이스카의 표정이 애매모호했다.
“어쨌든 중요한 ‘증거’가 들어왔으니 시기를 조금 당겨도 되겠어.”
일이 잘 풀린 탓에 아르젠의 목소리가 밝았다. 그보다는 칸피덴이 그들을 배신하지 않은 게 더 기쁜 것도 같았다.
“‘증거’ 확인하러 가볼 거지?”
라벨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스카를 바라봤다.
“그래야지, 협조적으로 나오게 하려면 직접 만나야지 않겠어?”
“그래, 그럼 그동안 난 쿠즈네에 다녀와야겠어.”
중요한 거사를 앞뒀으니 차메르와 확실히 매듭을 지을 필요가 있었다.
“쿠즈네에?”
지금 이런 때에?
이스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당신 혼자 못 보내.”
“혼자 갔다 와야 빠르지.”
“알지만, 그래도 싫어.”
“얌전하게 잘 기다리고 있으면 다녀와서 상을 줄까 싶은데.”
“…….”
“응? 알겠지? 우리 황자님.”
라벨라가 이스카의 볼을 톡톡 두들기고는 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부딪쳤다.
“아, 좀!”
아르젠은 기겁했고.
“……약았어, 당신.”
이스카는 늘 그랬듯이 녹아내렸다.
“새삼스럽기는.”
라벨라는 커다란 눈이 가늘어지도록 접으며 웃었다.
“대신 세츠는 데려가야 해.”
“음…….”
“라벨라.”
“알겠어.”
그 정도는 양보하기로 한 라벨라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제야 이스카의 얼굴에 안도한 기색이 퍼졌다.
* * *
“라벨라 님.”
“잘 지냈어요?”
말에서 폴짝 뛰어내린 라벨라가 망토를 벗으며 물었다.
“어찌 기별도 없이 여기까지 혼자 오셨단 말입니까.”
귀한 몸이 어찌.
카셰이는 식겁한 표정이었다.
“겸사겸사요.”
엄밀히 따지자면 혼자는 아니지만. 세츠는 카셰이에게도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물건도 돌려받고, 만날 사람도 있고.”
“아.”
“대장님!”
멀리서부터 소리치며 달려오는 무트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라벨라 앞에 멈춰 선 무트가 헉헉댔다.
“대장간에 있다가, 라벨, 라 님이 오셨다고 해서…….”
“대장간?”
라벨라는 몸을 바로 세우는 무트를 보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저도 이제 훈련을 시작했거든요. 얼른 마스터해서 제 손으로 만든 쿠즈네의 무기를 라벨라 님께 드릴게요.”
“흐음, 장로님이 만든 것보다 별로면 안 쓸 거야.”
“당연하죠.”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펴는 무트에 픽 웃어 보인 라벨라가 카셰이에게 고갯짓했다.
“네, 들어가시죠.”
카셰이가 손을 뻗으며 길을 안내했다.
카셰이의 집무실은 변한 게 없었다.
라벨라가 한 손을 허리춤에 얹은 채 삐딱하게 서 있는 동안 카셰이는 깊숙이 숨겨두었던 물건을 꺼냈다.
책상 위에 내려놓고 천을 풀어 헤치자 라벨라가 맡겼던 금색 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때요, 좀 알겠나요?”
“순수하게 차메르의 마력으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것 외에는…… 죄송합니다.”
카셰이가 난감해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흠. 아녜요, 어차피 직접 만날 생각이니까.”
“저는…… 걱정스럽습니다, 라벨라 님.”
“괜찮아요.”
라벨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셰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바닥의 카페트를 걷어냈다.
“30분 내로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
이래도 되는 걸까. 걱정이 앞섰지만, 딱히 막을 권리도 없었다.
라벨라의 지시에 카셰이는 고개만 끄덕였다.
“다녀올게요.”
라벨라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탁.
사다리를 탈 필요도 없이 깔끔하게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한 라벨라는 곧장 어둠에 눈을 적응시켰다.
횃불도 없이 성큼성큼 걸으며 라벨라는 품 안에 넣어두었던 작은 돌을 꺼내 카셰이의 보석과 함께 쥐었다.
“마도구 만드는 사람, 만나고 싶다며.”
어렵겠다더니 이스카는 오래 지나지 않아 그녀가 원하는 자리를 만들어줬다.
그자에게 부탁해 만든 거였다.
큰돈을 들였으니 효과가 있길 비는 수밖에.
물론 그 돈은 그녀가 아니라 이스카의 주머니에서 나오긴 했지만.
물건을 품 안으로 다시 집어넣고 갈무리한 라벨라가 성큼성큼 어둠 속을 헤치고 나갔다.
* * *
“지금쯤이면 쿠즈네에 도착했으려나?”
“아마도.”
“…….”
“……요?”
심드렁하게 대답한 아르젠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스카의 시선에 뒤늦게 단어 하나를 더 붙였다.
그러자 돌아오는 건 비웃음이었다.
“하던 대로 해, 새삼.”
“아, 나도 난감하거든?”
민망해진 아르젠이 괜히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함께 지내던 키르아의 동료였지만 알고 보니 황자였고, 황자의 자리로 돌아갔는데도 여전히 예전처럼 키르아의 곁에 있으니.
연신 큭큭대는 이스카의 웃음소리에 입을 비죽인 아르젠이 말고삐를 당길 때였다.
“아르젠.”
“왜……요.”
그래도 이제 그는 더이상 키르아의 이스카가 아니다.
페시니야 생각이 없는 놈이니 그렇다 치지만 아르젠은 자신이 철저히 이해관계를 따지는 이성적인 사람이라 여겼다.
마음을 정한 아르젠이 앞으로 달려가려다 말고 어색하게 대꾸했다.
“…….”
불러놓고도 이스카는 말이 없었다.
말발굽 소리가 잠깐의 침묵을 메웠다.
“내가 라벨라를 황후 자리에 올리겠다면, 너희는, 키르아는 어떻게 할 거지?”
아르젠이 굳은 탓에 그의 말 또한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다그닥 소리를 냈다.
“어떻게 하기는요. 딱히 달라질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
“대장을 몰라? ……요? 대장이 마음먹으면, 그걸로 끝인 거. 그러니까 대장 허락부터 받으시지요.”
”그렇지.”
아르젠의 불퉁한 말투에 이스카는 웃었다.
“난.”
웃음이 사그라지고 이스카는 입꼬리만 끌어올렸다.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
“그리고, 키르아가 계속 그녀 곁에 있었으면 해.”
“궁금한 게 있는데…….”
눈을 가늘게 뜬 아르젠이 옆에 나란히 가는 황자를 쳐다보았다.
“이거 부탁입니까, 협박입니까?”
“음…….”
이스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아르젠과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아마도 둘 다?”
“…….”
어이가 없어 아르젠은 헛숨을 토했다.
이스카는 웃으면서 원하는 걸 얻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아르젠은 그저 여우 같다고만 느꼈던 황자의 경고를 다시금 생각해야 했다. 그가 셰바르를 다루는 모습을 보는 순간.
“으아아악.”
참혹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