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만 모르는 유혹-65화 (65/94)

65. 전부 내 곁에서

라벨라의 입에서 나올 법한 표현은 아니었다.

라벨라조차도 그런 말을 한 자신이 어색한지 온몸으로 낯설어하는 티를 냈다.

감정과 속마음을 숨기는 게 숨 쉬는 것보다 쉬운 여자인데. 이스카는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무엇이 라벨라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앉기나 해, 국정 회의 관해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괜히 툴툴거리며 핀잔하는 말투에서 머쓱해 하는 게 훤히 보였다.

그 모습이 미치도록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한편으로는 라벨라의 이런 모습을 끌어낸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모친이라는 게 또 질투가 난다.

“아, 미칠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본심을 툭 터트린 이스카는 라벨라를 힘껏 끌어안았다.

“왜 이래?”

“예뻐서.”

이스카는 버둥대는 라벨라를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팔에 힘을 줬다.

그녀의 이런 낯선 태도가 제 곁에 있을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신호라고 믿고 싶었다.

라벨라가 다른 사람의 애정을 도구로 여기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게 아닐까.

평생 자신을 혹독하게 다그쳐 온 이 작은 여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 행복이 제 곁이면 더 좋겠고.

이스카는 고백할 수 없는 지독한 사랑과 욕심을 삼키고 또 삼켰다.

*   *   *

“피아체는?”

“방에 있습니다.”

“여전히 그대로인가?”

“네, 며칠째 식사조차 제대로 안 하고 있습니다. 주방장에게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라 할까요?”

“……그냥 두게.”

나메렌 후작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단단히 일러두었는데도 네이트랄 가의 티파티에 다녀온 이후 피아체의 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황자를 향한 마음이 꽤 진지하고 큰 모양이었다. 그렇다 한들 어쩌겠나.

피아체의 마음이 그렇다고 해서 어쩔 방법이 없었다.

‘시간이 약이겠지.’

책상 앞에서 다시금 자세를 고쳐잡은 후작이 서류를 들여다보려 할 때였다.

“영주님, 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의아해하는 후작에게 전해진 건 황태자의 인장이 찍힌 초대장이었다.

게다가 초대의 대상은 피아체였다.

“이렇게 빨리?”

후작이 국정 회의에서 돌아온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영주님, 이게 대체…….”

초대장의 내용을 함께 본 비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집무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리 없는 피아체는 방에 틀어박혀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앙다문 입술 사이로 서러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베갯잇은 이미 눈물로 흠뻑 젖은 지 오래였다.

눈물로 가득 찬 시야에 아름다운 정원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자꾸만 재생됐다.

‘가지 말걸.’

라벨라와 이야기를 마치고 유리정원으로 돌아가던 그녀가 다시 걸음을 돌린 건, 라벨라에게 확답을 받기 위해서였다.

전에 프롬쉘에서 만났을 때, 라벨라는 황자님과 그저 신뢰하는 동료 사이라고 했었다.

말이 나온 김에 얼렁뚱땅 넘기지 말고 확실하게 짚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라벨라에게 확실히 도와달라고 해야지.

하지만 피아체는 라벨라에게 가지도 못하고 걸음을 멈춰야 했다.

저 멀리, 라벨라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는 남자.

“!”

햇빛이 부서져내리는 아름다운 은발머리. 황자였다.

머리색과 옷차림이 달라졌을 뿐인데도 그는 훨씬 더 아름다웠다.

심장이 마구잡이로 쿵쾅거렸다. 홀린 듯 아름다운 얼굴을 본 피아체의 심장이 꽉 조여왔다.

먼 거리였는데도 그의 눈빛과 표정이 날아와 눈에 선명하게 박혔다.

눈앞의 여인이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볼을 감싸 쥐고 입을 맞추던 그 모든 장면까지.

“흐아앙.”

피아체는 가슴을 부여잡고 다시 베개 위에 엎어졌다.

어찌 이토록 고통스러울 수 있는 걸까.

그를 마음에 담았다는 이유 하나로 피아체는 내내 지옥불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그녀의 마음을 누가 알아줄까.

자신을 봐주지 않는 사내, 자존심이 상해서 잊으려고도 해봤지만 마음속에 단단히 못 박힌 것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피아체가 갓 잡은 생선처럼 팔다리를 퍼덕대며 울 때였다.

“아가씨!”

문이 벌컥 열리고 유모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세상에나, 아가씨.”

“나가, 유모…….”

“지금 이러실 때가 아니에요.”

침대 곁으로 다가온 유모가 땡깡 부리는 피아체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

피아체가 울먹이며 살짝 고개만 틀어 유모를 바라봤다.

“아가씨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유모의 창백한 얼굴은 기쁜 것도 같았고 심란한 것도 같았다.

항상 엄격하게만 굴던 유모가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 어느새 눈물이 멎은 피아체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내가 왜?”

“아가씨가…….”

“빨리 말해 봐, 내가 뭘?”

“……황태자비 후보래요!”

“뭐?”

피아체가 기절할 듯 큰소리를 외쳤다.

*

뜻밖의 소식에 놀란 건 피아체 하나뿐이 아니었다.

황궁에서 보낸 초대장은 임피리아 전역으로 향했다.

유서 깊은 고위 귀족부터 하위 귀족들까지, 결혼 적령기의 영애에겐 모두 황태자비 후보라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프롬쉘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련님.”

“잠깐, 지금 중요한 상황이란 말일세.”

브라트는 조심스레 자신을 부르는 이에게 손만 들어 보였다.

라벨라의 곁에 앉은 그는 진지한 얼굴로 턱을 괸 채 체스판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차피 내 승리로 끝날 것 같은데.”

이스카가 픽 웃으며 공자를 자극했다.

체스판에 기울어질 것처럼 상체를 숙인 공자와 달리 이스카는 소파에 등을 파묻은 채 느긋한 태도였다.

“그럼, 라벨라. 슬슬 데이트 나갈 준비를 하는 게 어때?”

시선만 옆으로 굴린 이스카가 라벨라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채근했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전하.”

“보기보다 고집이 센데, 공자.”

“흥, 승부는 끝날 때까지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전 지난번 같은 일이 또 생기는 건 허락할 수 없습니다.”

자객의 습격으로 어쩔 수 없이 외박했던 때를 말하는 거였다.

감히 무엄하다 싶을 만큼 황자에게 잔소리를 퍼붓고도 부족했나 보다.

“난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왜 두 사람이 이러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결국 라벨라가 심드렁하게 중요한 사실을 지적했다.

“무슨 일인가요?”

라벨라는 초조해 보이는 사용인의 얼굴을 보며 브라트를 대신해 물었다.

“그것이…… 황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

그제야 브라트의 고개가 들렸다.

“영주님께서 안 계신 터라 도련님께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가지.”

지체없이 몸을 일으킨 브라트가 다시 응접실로 돌아왔을 땐, 그의 손에 초대장을 위장한 통보가 들려 있었다.

“허, 황태자께서 마음이 급하셨나 봅니다.”

브라트가 초대장의 내용을 다시금 확인했을 때였다.

우둑.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에 응접실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이스카의 손에 있던 체스 말이 똑 부러져 바닥으로 추락했다.

누군가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고요한 침묵을 깨뜨렸다.

“……이런, 킹이 사라졌으니 제 승리인가요.”

서늘한 공기를 지울 목적으로 브라트가 조용히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막상 진짜로 통보가 오니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

라벨라의 하얀 손가락이 이스카의 손등에 솟아오른 푸른 핏줄을 살살 쓸었다.

그러면서 싱긋 웃은 라벨라가 입을 열었다.

“어머, 고작 후보라니.”

마치 약 올리듯이 명랑한 말투로.

“라벨라.”

그제야 손의 힘을 푼 이스카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하지만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형형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루카비의 의도는 충분히 알지만, 그래도 분노가 일었다.

“어차피 황태자비로 지목되는 건 나일 텐데. 그렇지?”

“!”

경악한 브라트가 휙 고개를 돌려 라벨라를 쳐다봤다.

어마어마한 발언을 던진 그의 여동생은 순진해 보일 정도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맙소사.’

저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거 아닌가? 부채질 정도가 아니라 활활 타오르라고 불쏘시개를 집어넣는 수준이었다.

보지 않아도 황자가 화가 잔뜩 난 게 느껴졌다. 황자가 뿜어내는 냉기가 피부를 콕콕 찔러댔으니까.

한 번씩 황자에게서 풍기는 살기는 등허리가 오싹해질 정도였다.

“그럼 의견 나누시고 나중에 귀띔해주시지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이 팽팽해지자 브라트는 눈치껏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진저리친 브라트는 슬쩍 몸을 일으키며 응접실에 함께 있던 사용인들에게 눈짓했다.

둘만 남겨놓고 자리를 뜬 브라트는 응접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까지 해뒀다.

‘저러다가 어디 하나 부서지는 건 아닌지 몰라.’

하여간 황자에게 저토록 까불 수 있는 존재는 라벨라 하나뿐일지도 모르겠다.

새삼 라벨라의 대범함에 감탄하며 그는 황태자의 초대장을 벽난로 안으로 던져넣었다.

싸움의 씨앗이 된 종잇조각은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후우.”

둘만 남게 되자 한숨을 쉰 이스카가 테이블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잠깐.”

라벨라가 테이블 위에 놓인 이스카의 손을 꾹 내리눌렀다.

“?”

몸을 일으키다 만 이스카가 라벨라를 내려다보며 눈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 화를 내.”

라벨라가 눈썹을 꿈틀하며 타박했다.

어젯밤, 국정 회의 내용을 전할 때만 해도 이 정도로 화내진 않았으면서.

“어차피 이렇게 될 거 예상했던 거잖아.”

이스카를 죽이는데 계속 실패한 황태자가 어떻게 전략을 바꿀지 많은 수를 따져 본 후였다.

그리고 이건 그들이 예상한 것 중 하나였고.

게다가 황태자의 곁에는 칸피덴이 있었다.

칸피덴이 진짜 배신한 거라면, 라벨라와 이스카의 과거 행적이 황태자의 귀에 들어갔을 가능성도 계속 염두에 두어야 했다.

물론 지금으로선 칸피덴의 진짜 의중이 무언지 애매하긴 했지만.

“알아, 그냥 녀석이 널 건드리려고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이스카가 잡히지 않은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리듯 쓸어 넘겼다.

“쯧.”

혀를 찬 라벨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스카의 앞으로 스르륵 다가섰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살기를 흘리면 돼, 안 돼.”

단단한 다리 사이를 비집고 선 라벨라는 이스카의 귀를 부드럽게 문지르다 꾹 누르며 잡아당겼다.

마치 심술 난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말투와 손길이었다.

“아.”

이스카가 어이없다는 듯 얕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치켜떴다.

“겨우 이미지 잘 가꿔 놨는데 망칠 생각이야? 다들 무서워하잖아.”

그러거나 말거나 라벨라는 이스카를 혼내듯 부드러운 귀를 잡아 꾹꾹 늘여댔다.

“너, 내 옆에 있으면 저주도 안 먹히는 거 아니었어?”

“……그건 그런데.”

“그런데?”

“모르겠어, 당신하고 연관된 일에는 자제가 잘 안 돼.”

하소연하듯 중얼거린 이스카가 라벨라의 품에 툭 머리를 기댔다.

오랜 훈련으로 군살 하나 없는 납작한 배는 폭신하기보다는 단단했다.

그런데도 그녀의 품이 주는 안락함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

이스카는 조금 더 고개를 묻으며 라벨라의 가느다란 허리를 두 팔로 휘감았다.

“……당신이 어느 날 갑자기 다 귀찮다며 사라질까 봐 걱정돼.”

“멍청한 상상이네.”

뿌리치는 대신 가느다란 손가락이 머리칼 사이로 파고드는 걸 느끼며 이스카는 안도했다.

“잊었어? 난 지금 네 도구라니까.”

“그 표현은 좀…….”

“널 황위에 올리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리고 난 그 대가를 톡톡히 받을 거거든?”

말을 톡 잘라먹는 라벨라에 이스카는 잠자코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리고, 페시니가 자기 이름을 역사에 남기겠다며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알아?”

“아아, 그 녀석, 그래서 열심이었군.”

황궁에서 나온 그는 리텔니와 함께 움직이면서 루카비의 비리와 관련된 자들을 잡아 들이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 내가 손해 보는 장사하는 사람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황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무조건 곁에 있을 거란 뜻이다.

넓은 공간을 가득 채웠던 살기는 어느새 지워지고 두 사람을 에워싼 공기는 편안하고 달콤해졌다.

“이스카.”

“응.”

“넌 나를 조금 덜 사랑하는 게 좋겠어.”

“가능한 소리를 해.”

라벨라는 절대 풀어주지 않을 것처럼 힘이 단단히 들어간 이스카의 팔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맹목적으로 애정을 퍼부으면서도 한 번씩 제 눈치를 보며 제동을 거는 그였다.

워낙 노골적으로 애정을 드러내니, 제게 쏟아지는 사랑이 이제는 당연하게 깔린 전제처럼 느껴졌다.

‘……곤란한데.’

하지만, 그만큼 녀석의 집착과 독점욕 또한 강해지고 있다는 걸 모른 체할 수 없었다.

그가 황위에 오른다면, 함께 있는 게 당연했던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질 텐데.

이스카가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제게 붙박여 이 지독한 소유욕을 드러내는 보랏빛 눈동자가 옆에 없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무언가 그녀가 생각하는 선을 넘어서고 있다고. 처음 했던 계획과 다르게 무언가 뒤틀리고 있다고.

‘일단 계획이 끝나면…… 그때 생각하자.’

라벨라는 결론 내리는 걸 잠시 뒤로 미뤘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라벨라는 낯선 변화를 애써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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