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낯선 감정
가족이라니.
오늘따라 유난히 자주 듣는 단어였다.
“…….”
“내가 너무 앞서갔군요, 그렇죠?”
라벨라의 묘한 반응에 아차 싶어진 테오도라가 미안해하며 눈꼬리를 접었다.
루비츠의 마음만 알고 있을 뿐, 눈앞의 귀여운 아가씨의 마음이 어떠한지는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사실, 루비츠가 영애에게 큰 신세를 졌다고 들었어요.”
다시 위엄 있는 황후로 돌아간 테오도라가 차분하게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신세라.
루비츠가 황후에게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했을까 궁금해졌다.
차메르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을 테니 대충 둘러대긴 했을 텐데.
“루비츠가 황궁을 떠난 후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전혀 모르니까 많이 궁금했어요.”
황후는 아무래도 녀석의 과거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아…….”
라벨라는 난감함을 숨기며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음, 암살 길드에 들어왔고요, 길바닥 생활을 좀 오래 한 모양이에요. 저랑 같은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는 걸 보니 불법적인 일에도 좀 연루됐을 수도 있어요.
황후에게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건가?
음, 그랬다가는 저 우아한 여인이 기절할 것 같다.
라벨라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이스카와 말을 맞추는 건데.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요, 내 딴에는 고마워서 감사를 표하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전 황자님께 도움이 될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 걸요.”
어쨌든 황궁으로 초대한 큰 이유가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라벨라는 수줍은 척 눈을 내리깔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라벨라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테오도라가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던 백작 부인에게 고개를 끄떡였다.
“고마워요, 부인. 이제 주변에 사람을 물려 주겠어요?”
“네, 폐하.”
다가온 백작 부인과 눈인사를 나눈 라벨라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그녀가 두고 간 화려한 상자로 향했다.
“이건 영애에게 주는 선물이에요.”
테오도라가 상자의 뚜껑을 열면서 라벨라의 앞으로 밀었다.
은빛 진주 알갱이가 몇 겹으로 알알이 엉킨 줄 아래 커다랗고 투명한 보랏빛 자수정이 박힌 목걸이였다.
“이건, 대대로 황후에게만 내려오는 것 중 하나에요. 영애에게 선물하고 싶었어요.”
황후에게만 내려오는 걸 왜 내게?
당혹스러워하는 라벨라를 보며 테오도라는 짐짓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오늘 국정 회의가 열리는 건 알고 있나요?”
“……네.”
“그 자리에서 황태자비 선정에 대한 이야기가 오갈 거에요. 나는…….”
테오도라가 잠시 말을 멈춘 채 뜸을 들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고통이 얼핏 스쳐 지나갔다.
“영애와 영애의 가문이, 루비츠에게 힘이 되어줬으면 좋겠군요.”
이런 말을 해 봐야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알지만, 루카비의 감시하에 팔다리가 잘린 그녀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
“비정한 어미라고 욕해도 할 말이 없어요.”
“폐하…….”
“내게는 루카비도 소중한 아들이지만…….”
황후의 주름 진 눈가에 눈물이 어룽댔지만 그녀의 표정은 단호하고 고고했다.
“제국의 황후라는 자리가 그래요. 감정만으로 있을 수 없는 자리죠. 때로는 지독하리만큼 냉정해야 하는…….”
말끝을 흐리며 씁쓸하게 웃는 황후에게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루비츠가 그대를 많이 아끼는 것 같더군요.”
테오도라가 다시금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라벨라의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가엽고 외로운 아이입니다.”
그래, 이스카와 닮았다.
그제야 황후가 이스카의 모친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루비츠의 곁에 있어 주겠다고 내게 약조해줄 수 있나요?”
황후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간절하고 절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눈빛이었다.
“…….”
고작 곁에 있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런데도 라벨라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졌다. 선뜻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왜?’
라벨라는 의아해졌다.
그녀에겐 황후조차 이 싸움에서 이용할 패일 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얻고자, 그냥 알겠다고 고개만 끄덕이면 될 일이었다. 거짓이라도, 빈말이라도 해주면 그만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
황후와 헤어져 궁을 가로지르는 라벨라의 표정은 미묘했다.
아직까지도 황후에게 잡혔던 손등 위에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너무 심려치 마세요, 폐하. 황자님은 지혜로운 분이니까요.”
결국 라벨라는 겨우 그 한마디를 건넸다. 실로 그녀답지 않은 어설픈 격려였다.
왜인지 황후에게 잘해주고 싶었다.
‘나 참. 우리 황자님 때문에 내가 별걸 다 신경 쓰게 됐잖아.’
괜시리 이스카를 탓한 라벨라는 헛숨을 토하면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황후가 자신을 보던 눈빛과 표정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적대감, 두려움, 신뢰, 불신, 욕망, 그리고 사랑.
그간 자신을 향한 눈빛들에 담긴 많은 감정을 봤지만, 황후의 것과는 결이 또 달랐다.
분명 그녀의 눈에 깃든 건 애정과 미안함이었다.
대체 왜?
그녀와는 만난 적도 없었고, 대화를 제대로 나눈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차메르와 이스카의 거래도 모르고 제 진짜 정체도 모른다.
그럼 네이트랄 가의 영애라서? 제 아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존재니까?
‘흐음. 그렇다고 하기엔.’
라벨라는 얼굴도 가물가물한 생물학적 모친을 떠올렸다.
자신을 보는 그녀의 표정이 어떠했더라.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잘 생각나지 않았다.
약간의 두려움이었던 것도 같고.
어쨌든 이스카를 이야기하면서 피어오르는 다정함과 루카비를 언급하며 아파하는 황후의 표정은 꽤 새롭게 다가왔다.
‘그런 게 엄마라는 건가.’
황후와의 만남은 라벨라에게 묘한 여운을 남겼다.
어느새 황후궁을 빠져나온 라벨라가 대기하던 마차에 오르려던 때였다.
“…….”
“아가씨?”
멈칫하는 라벨라에 마차 문을 붙잡은 네이트랄 가의 사용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걷다가 탈게요.”
살짝 미소지은 라벨라는 마차 뒤를 돌아 사뿐히 걸어갔다.
본궁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는 정원은 마치 숲 같았다.
라벨라는 오가는 사람도 없이 적막한 길을 홀로 걸어갔다.
적당히 시선에서 자유로울 만한 곳까지 걸어간 라벨라는 담에 기대어 조경을 보는 것처럼 몸을 숙였다.
양옆으로 적당한 돌담이 쌓여 있어 드레스를 입은 상태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어머나.”
그녀의 손에서 부채가 추락했다.
가까이에 있는 자라면 일부러 떨어트렸다는 걸 알 수 있었을 테지만.
“어쩌지, 선물 받은 소중한 건데.”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라벨라는 슬쩍 몸을 들고 몇 걸음 떨어진 곳의 기둥을 바라봤다.
“……괜찮으시다면, 주워주실 수 있을까요?”
마치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곤란하신가요, 기사님?”
한 번 더 묻자 기둥 뒤에서 꼼짝 않던 기척이 드디어 움직였다.
모를 수가 없었다. 라벨라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기척이었으니까.
‘칸피덴.’
라벨라는 피식 웃었다.
“우연이겠지만, 기사님이 여기 계셔서 참 다행이네요.”
우연?
글쎄, 칸피덴이 이곳에 있는 게 과연 우연이었을까.
절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
라벨라를 물끄러미 보던 칸피덴이 훌쩍 담을 넘었다.
부채를 집어 들고 담 바깥에 선 그는 라벨라의 앞으로 다가섰다.
“잘 어울리네.”
라벨라는 기사 복장을 한 칸피덴을 아래위로 훑으며 입꼬리를 늘였다.
“……너도.”
“…….”
처음이었다. 칸피덴이 대장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은 건.
달라진 옷차림만큼 그들의 사이도 달라졌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어떨까 싶었는데 꽤 좋아 보여, 지금 있는 곳에 만족하나 봐?”
“…….”
라벨라의 웃음기 섞인 평가에 칸피덴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라벨라에게 부채를 내밀 뿐이었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떨어트린 그 물건을.
장갑을 낀 라벨라의 손이 다가왔다.
“고마워요, 기사님?”
작게 속삭인 그녀가 부채를 받아들 때, 칸피덴은 라벨라의 손끝을 가만히 쥐었다.
그리고 사교계의 예를 따르듯, 라벨라의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
“그럼.”
라벨라의 손을 놓은 칸피덴이 몸을 돌렸다.
멀어지는 칸피덴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라벨라는 손을 꾹 움켜쥐었다.
칸피덴의 입술이 닿았던 그 손이었다.
“아르젠.”
브라트와 합류하기 위해 본궁으로 온 라벨라는 마차의 문이 열리자마자 아르젠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아르젠은 여전히 공작가의 비서 역할로 라벨라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마차에 오른 아르젠이 문을 닫자 라벨라는 손에 쥐고 있던 쪽지를 건넸다.
칸피덴이 손에 쥐여준 거였다.
“이게 뭔데?”
아르젠이 궁금해하며 쪽지를 펼쳤다.
작은 종이 안에는 날짜와 시간, 주소가 적혀 있었다.
“글쎄, 나도 모르겠네.”
선물일지, 아니면 함정일지.
적힌 날짜는 지금으로부터 열흘 후.
“그때 가 보면 알 수 있겠지.”
라벨라의 입술에 비소가 걸렸다.
그리고 라벨라가 기척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먼 거리.
칸피덴은 궁을 떠나는 라벨라를 지켜봤다.
그의 손에 전부 감싸질 만큼 작은 손이었다.
대련을 하며 몸이 닿을 때도 있었고 라벨라가 종종 몸을 기대어 올 때도 있었지만, 그가 먼저 라벨라의 몸에 손을 댄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입술이 닿은 것은.
입술부터 시작된 열기가 목구멍을 홧홧하게 태우는 것만 같았다.
“떠날 때 잡지 않겠다고 했지? 마찬가지야, 오는 것도 막지 않아.”
손을 놓고 돌아설 때, 제 뒤에 대고 툭 던지던 라벨라의 말이 귓가에 웅웅댔다.
설명도 없이 황태자의 곁에 있는 자신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
무심한 말투, 그 안에 담긴 건 일말의 애정이라고 생각해도 될까.
칸피덴의 턱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다.
* * *
“어머니께서 라벨라를?”
말의 콧등을 쓸어주던 이스카가 미간을 좁혔다.
귀족들을 포섭하느라 꽤 먼 지역까지 온 그는 세츠가 전하는 소식을 들으며 의외라는 표정을 했다.
황후가 귀족가 영애들을 궁으로 초대하는 건 그리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상대가 라벨라라고 하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대화가 오갔을지 꽤 궁금해지는데.”
아직 국정 회의의 내용을 모르는 이스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둘 사이의 대화를 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게다가 자신과 헤어진 그 당일에 바로 황궁으로 향했다니.
“허, 아무 말도 없더니만.”
라벨라가 의도적으로 숨겼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터졌다.
“라벨라 님께서 일이 끝나면 프롬쉘로 오시라 했습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세츠의 말에 동의한 이스카는 슬슬 해가 지려하는 노을 진 하늘을 올려다봤다.
금방 어두워질 테지만 그는 곧장 출발하는 걸 택했다. 조금 피곤하더라도 라벨라를 빨리 만나는 게 더 좋았다.
라벨라를 만나는 시간을 제외한다면 일분일초를 다투며 움직였다. 몸을 혹사하다시피 하는 터라 리텔니의 잔소리도 그만큼 심해지긴 했다.
하지만 힘들어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최근 네이트랄 가에서는 하루가 멀다고 각종 파티가 열렸다. 전부 라벨라가 그를 위해서 벌인 일들이었다.
이스카는 그 안에서 수많은 귀족과 안면을 트고 친분을 쌓으며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고 새롭게 각인시켰다.
네이트랄 가의 안주인 역할을 하게 된 영애가 인사차 친분을 위해 여는 사교 파티는 황태자의 눈에서 아슬아슬하게 빗겨나 있었다.
귀족회의에서 그의 편이 되어 줄 이들은 어느새 루카비의 지지자 수를 넘어섰다.
모든 게 그들의 계획대로였다.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으니 이제는 속도를 높일 때였다.
“세츠, 우리의 ‘증거’들은 잘 관리하고 있겠지?”
“네,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이니까요.”
꼬리를 밟을 수도 없는 곳에 꼭꼭 숨겨 두었다.
“터트릴 준비는 다 되어 있습니다. 적당한 때만 기다리면 됩니다.”
이스카는 픽 웃으며 말에 올랐다.
“그럼 우리 아가씨를 만나러 가볼까.”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는 달콤한 포상을 받을 차례였다.
“……왔네?”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말을 달려 프롬쉘에 간 이스카를 기다리는 건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서 있는 라벨라였다.
안 자고 맞아준 건 기쁘긴 하지만.
“음, 분명 내 기억엔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이스카는 은근슬쩍 라벨라를 끌어안으며 눈동자를 굴렸다.
밀어내지는 않으니 일단 안심.
조금 더 과감하게 나가기로 한 이스카가 라벨라의 볼에 입을 맞췄다.
이것도 피하지 않으니 안심.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고, 그럼 뭐가 문제일까.
“왜 그런 표정일까?”
사람 긴장되게 말이야.
이스카가 금안을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나더러 가족이 될 사이라고 하시던데.”
“누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지만 이스카는 일단 오리발을 내밀기로 했다.
“누구겠어, 내가 누굴 만나고 왔는지 알고 있잖아?”
“일단 나는 그런 뉘앙스의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걸 알아주길 바라.”
이스카가 서둘러 변명했다.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라벨라의 침묵은 긍정적인 의미였다.
이스카가 웃으며 라벨라의 볼을 감싸 쥐었다.
“그래서, 만나 본 소감은?”
그냥 인사차 물어본 말이었다. 그랬는데 라벨라의 반응이 이상하다.
도발적으로 마주쳐올지언정 절대로 눈을 피하는 법이 없는 그녀가 입술을 어름거리다 눈동자를 좌우로 굴려댔다.
“라벨라?”
몸을 숙인 이스카가 걱정스레 라벨라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좋은.”
“음?”
잘 들리지 않아 이스카는 라벨라의 입술 근처로 귓가를 붙였다.
“……좋은 분 같았어.”
“!”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놀란 나머지 미간을 좁힌 이스카가 라벨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