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감히 내 것을?
어느 정도 마을을 벗어난 라벨라와 이스카는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은 인적이 드문 숲이었다.
뒤를 쫓는 이들 또한 덩달아 속도를 높이는 게 느껴졌다.
“이쯤이면 되겠지?”
“괜찮을 것 같은데.”
라벨라가 멈춰서며 묻자 이스카가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높게 솟은 나무들이 울타리가 되어 목격자가 없을 만한 곳. 오늘 밤 몇 명이 사라진다 해도 흔적조차 찾기 힘들만 한 곳.
두 사람 모두 몸을 풀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라는 결론을 내렸다.
“후, 그런데 라벨라 당신. 그렇게 좋아하는 티 내지 마.”
이스카가 후드를 벗으며 불퉁하게 툴툴거렸다.
라벨라가 좋아할 만한 데이트를 생각해내느라 얼마나 고민했는데. 기껏 성공하고 나니 엉뚱한 녀석들이 공을 가로채는 것 같았다.
“왜, 질투 나?”
“어. 좀 그러네.”
라벨라가 입술 끝을 늘이며 묻자 이스카는 망설임도 없이 인정했다.
“욕심쟁이 황자님이네. 뭐 하러 질투해? 저것도 네가 달고 온 거면서.”
허리춤을 짚은 라벨라가 어이없다는 듯 턱끝으로 이스카의 뒤를 가리켰다.
“저것도 선물로 쳐 줄 거야?”
이스카의 엄지손가락이 뒤로 향하며 허공을 쿡 찔렀다.
“물론이지. 난 마음에 들어.”
라벨라의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온통 새까맣게 몸을 가린 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세상에, 많기도 해라.”
라벨라가 기쁜 듯 웃으며 두 사람을 에워싼 자들을 눈으로 훑었다.
“다 온 건가?”
“하나, 둘, 셋…… 총 열. 맞아. 빠짐없이 다 왔네.”
“그래, 한 놈이라도 빠지면 곤란하지. 목격자는 없어야 하니까.”
여전히 못마땅한 이스카가 욕설을 뱉듯이 읊조렸다.
“…….”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었으면서도 습격자는 말이 없었다.
암살 전문가들을 고용한 모양이네.
“제법 기대되는걸.”
라벨라가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누르면서 동시에 망토의 단추를 풀어냈다.
몸을 낮춘 라벨라가 뒤편으로 튀어 올랐다.
“!”
덕분에 쉭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른 습격자의 검은 공중에 붕 떠 있던 라벨라의 망토를 스쳤다.
“아, 아까워라.”
찢긴 망토를 본 라벨라가 혀를 차고는 곧장 제 쪽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려는 습격자의 목을 노렸다.
“헉.”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사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깔끔하게 떨어진 검 끝이 곧장 반대편으로 가 다른 이의 목을 찔렀다.
허공에 흩뿌려지는 검붉은 액체 사이로 이스카의 장검이 번쩍였다. 카셰이가 만들어 준 검이었다.
라벨라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치사하게 저걸 들어? 한 번에 몇 놈을 노리는 거야!
‘어어, 이러다가 다 뺏기겠……!’
“내 거야! 건들지 마!”
다급해진 라벨라가 명령하듯 외쳤다.
카셰이의 무기를 받고서도 사용할 일이 없어 아쉽던 차였다.
“허. 내 거? 내 거라고? 누가 네 건데?”
이스카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는 게 들렸지만 라벨라는 개의치 않았다.
이스카는 자신을 공격해 오는 녀석들을 적당히 상대해주며 라벨라의 몫으로 남겼다.
“조금 천천히 할 걸 그랬나.”
결국 나머지 녀석들까지 직접 제 손으로 처리한 라벨라는 개운하면서도 아쉬운 얼굴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몸놀림으로 가볍게 움직인 탓에 라벨라의 이마에는 땀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불필요한 살생은 하지 않는다며?”
눈을 가늘게 뜬 이스카가 놀리듯 물었다.
“이건 필요한 살생이었어. 황자님을 지켜드려야지.”
물론 라벨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받아쳤지만.
“그래서, 이거, 몇 번째야?”
라벨라가 신소리 말고 솔직하게 답하라는 듯 이스카를 빤히 노려봤다.
모처럼 하는 데이트니 방해받고 싶지 않다며 세츠조차 다른 임무에 보내버린 이스카였다.
마음만 먹으면 두 사람이 어딜 다녔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만들 수 있었다.
그랬는데도 이 정도로 쫓아 왔다는 건 그냥 이스카를 간 보기 위해 보낸 자객들은 아니란 의미였다.
정확히 이스카의 목을 노린 거였다.
“음, 글쎄, 세는 것도 포기했어.”
어차피 라벨라의 눈을 속이는 건 불가능하니, 이스카는 솔직하게 대답하는 걸 선택했다.
황궁을 나온 이후 벌써 열 손가락을 넘어갈 정도였다.
귀족가에 자객을 보낼 수는 없으니 주로 이스카가 이동할 때나 여관에 묵을 때를 노리는 듯했다.
진짜 목숨을 앗아가고 싶다면 귀족들의 눈이고 뭐고 아무 때나 습격을 시행했을 텐데. 아직 루카비에게 여유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왜 말 안 했어?”
라벨라의 금안이 싸늘해졌다.
물론 이런 습격에 쉽게 당할 이스카가 아니라는 건 그녀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 사실과는 별개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끼고 아끼는 제 소유물을 누군가 깔짝대며 건드리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있나.
라벨라는 빙글빙글 뱀처럼 음흉하게 웃는 루카비의 얼굴을 떠올렸다.
‘감히 내 것에?’
녀석의 웃는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어야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았다.
“죽일까?”
“……루카비를?”
“아, 황태자였지, 참.”
라벨라의 비꼬는 말투가 마치 ‘그래서, 그게 뭐?’라고 말하는 듯했다.
원래 있던 곳에서 그녀의 손에 없어진 권력자만 해도 한둘이 아니었다.
하물며 손에 굳은살 하나 없는 샌님 하나쯤이야.
“당신, 지금…… 화내는 거야?”
“!”
주먹을 꾹 움켜쥔 채 분노에 잠겨 있던 라벨라가 뒤늦게 눈을 두 어 번 깜빡였다.
“라벨라, 당신이 화내주니까 기쁜데.”
“…….”
싱글거리며 눈꼬리를 야살스레 접는 이스카의 표정이 한눈에 들어왔다.
“흥.”
들킨 마당에 부정해봐야 의미도 없고. 새침하게 돌아가던 라벨라의 얼굴이 불쑥 다가온 손에 잡혔다.
“화내는 것도 예쁘고, 대체 당신이 안 예쁠 때는 언제일까.”
이스카의 커다란 손이 새하얀 볼에 튄 작은 핏방울을 부드럽게 닦아냈다.
아름다운 피사체를 보는 것처럼 황홀해하면서도 닦아내는 손짓에는 속상함이 묻어났다.
자신 때문에 라벨라가 이런 습격을 받는 게 속상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즐거워하니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건가 싶은 모순이 싫었다.
라벨라는 복잡해 보이는 이스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스카. 몇 번을 말해야 해.”
녀석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난 네 얼굴이 마음에 든다니까? 그런 이상한 표정 하지 마.”
제 눈치를 보는 평소의 이스카는 좋지만, 저렇게 아픈 얼굴을 하는 건 어쩐지 보기 불편했다.
타박하니 그제야 못 말린다는 듯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옅게 웃는다.
흠, 그나마 낫네.
라벨라가 이스카의 손이 닿지 않은 쪽 볼을 슥 문질러 닦아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익숙한 손길이었다.
“그나저나, 진짜 돌아가긴 힘들겠는데.”
손가락에 묻어나는 꾸덕한 붉은색에 눈을 찌푸린 라벨라가 짜증스레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 꼴을 하고 갔다가는 하녀장부터 시작해 줄줄이 기절할 게 훤히 보였다.
어쨌든 그녀가 키르아의 대장이라는 건 네이트랄 공작 부자만이 아는 기밀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라벨라의 속눈썹이 아래로 길게 늘어졌다가 슬쩍 올라섰다.
“우리 데이트 시간이 더 길어지겠네?”
사르르 녹아내릴 것처럼 사라졌다가 나타난 금안에는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음, 그거야말로 기쁜 소식이네.”
언제 우울했냐는 듯 이스카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섰다.
“당신, 지금 꽤 엉망이거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이스카가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라벨라의 유혹에 뻗대며 자존심을 세울 마음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아주 작은 손톱만큼도.
“전부 내 탓이니, 책임지고 깨끗하게 씻겨줄게.”
귓가에 은근하게 속삭이는 녀석의 음흉한 속내가 고스란히 보였다.
능글거리는 미소 속에 담긴 욕망을 감추지 않는 모습.
그래, 이래야 내 이스카지.
라벨라는 손을 뻗어 이스카의 입술 위를 꾹 누른 뒤 미끄러트렸다.
이제는 너무도 잘 알았다. 이스카가 제게 어떤 즐거움을 줄 수 있을지.
* * *
“또 실패라고?”
“……돌아온 자가 없다 합니다, 죄송합니다.”
누군가는 선하다 평했던 루카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마치 분노가 용암처럼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루비츠가 황궁을 나간 이후로 몇 번이나 자객을 보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꼬리가 잡히지 않을 용병부터 시작해 암살 길드까지 동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 습격했고 실패했는지 알지 못하니 대체 누구의 실력인지도 함부로 평할 수 없었다.
“전하, 그자를 보내심이 어떠할까요.”
“…….”
루카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후레이 자작이 누굴 말하는 건지 알았다.
“키르아의 수장이었다면 보통 실력은 아닐 텐데요.”
“……녀석은 아껴둔 패야.”
“솔직히 숨기는 게 많은 것 같아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도 지금은 녀석을 대신할 자가 없어.”
그나마 녀석이 있기 때문에 루비츠의 행적을 추측하고 이런 시도나마 해볼 수 있는 거였다.
칸피덴에 대한 루카비의 신뢰는 부쩍 커진 상태였다.
함께 키르아를 만든 자를 제 손으로 죽이고 떠나온 자였다. 그 덕분에 키르아의 핵심 인원들은 뿔뿔이 흩어진 상태고 캄파냐 상단은 키르아와 안녕을 고했다 했다.
칼리벨을 감시하는 자의 말을 들으니 칸피덴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나마 칼리벨을 지키던 녀석들도 하나둘 떠나고 길드가 텅 비었다 했으니.
‘키르아도 아니라면, 대체 녀석을 비호하는 게 누구란 말이지?’
루카비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루비츠를 죽이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방법을 바꿔야겠군.”
루카비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삭였다. 여기에서 이성을 잃으면 끝장이었다.
녀석을 직접 죽일 수 없다면, 녀석의 약점을 찾아내면 될 일이다.
“녀석의 주변을 전부 털어. 개미 새끼 한 마리까지도 녀석과 관련이 있는 건 전부. 과거 행적까지도 뒤져. 하나라도 나올 테니.”
녀석에게 가장 소중한 걸 찾아 부서트려 볼 작정이었다. 녀석의 주변부터 차례차례 무너트리면 된다.
“어머님을 내 손으로 칠 수는 없으니.”
그러니 다른 걸 꼭 찾아내.
루카비가 마지막으로 경고하듯 음산한 목소리를 깔았다.
그리고 루카비가 바라던 단서는 의외의 곳에서 튀어나왔다. 그것도 칸피덴의 입에서.
“그러니까 그대 말은, 그 나메렌 후작의 딸이 연모하는 상대가 루비츠라 이건가?”
“……그렇습니다.”
후작은 그저 딸의 몸이 약해져 요양 중이라 하였지만, 원인이 상사병이란 건 공공연한 기정사실이었다.
어디 정체도 모를 작자에게 빠졌다가 실연당해 앓고 있다는 이야기는 사교계에서 물어뜯기 좋은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였다.
그랬는데 그 상대가 루비츠라니.
“하, 이런 재미있는 일이 있나.”
루카비는 진심으로 웃었다.
“아무래도 그 영애가 내게 큰 도움을 줄 것 같은 예감이 드는걸.”
루카비는 모처럼 즐거워진 기분을 만끽했다.
* * *
“후후, 루비츠가 네이트랄 공작가에 드나든다고?”
“네, 다른 귀족가에도 머무르긴 합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네이트랄 가에 치중되지 않도록 골고루 다니고 있었지만, 테오도라의 귀에는 네이트랄이라는 단어만 쏙 날아와 박혔다.
“제게 큰 도움을 준 영애입니다. 마음에 품고 있기도 하고요.”
그리 말하는 아들의 눈이 진지해서 테오도라는 또 눈물을 흘릴 뻔했다.
당장 결혼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장성해서 돌아온 아들이 실감이 났으니까.
“네이트랄 가라……. 그 귀여운 영애와 만나서 대화라도 좀 나누고 싶군요.”
“궁으로 한 번 초대하심이 어떨지요.”
“그럴까요?”
모리나 후작 부인의 제안에 테오도라가 빙긋 웃었다.
루카비가 황후궁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한다는 건 모르지 않지만, 귀부인들이나 영애들을 초대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으니 크게 문제 될 일은 없었다.
게다가 다른 이도 아니고 네이트랄 가의 영애이니까.
특별히 아끼는 편지지를 꺼낸 황후는 정성스레 말을 고르며 초대장을 작성했다.
“즐거운 만남이 될 것 같군요.”
편지를 마무리한 테오도라는 즐거운 마음으로 몸을 일으켰다. 황제와 함께 저녁을 하는 날이었다.
옷매무새를 다시 정비한 황후는 가벼운 걸음으로 황후궁을 나섰다.
“두 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맞이한 건 예상치 못한 손님이었다.
‘왜? 목적이 뭐지?’
테오도라는 갑작스레 끼어든 루카비가 황제와 정무 이야기를 의논하는 걸 보면서 긴장감을 숨겼다.
제 아들이지만 이유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루카비다. 식사가 마무리될 때쯤에야 테오도라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제, 황태자비를 맞이할 생각입니다.”
“!”
테오도라는 들고 있던 나이프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계속해서 미루기만 하더니 마음을 굳힌 모양이구나. 그래, 늦기는 했지.”
황제는 심드렁하면서도 예의상 묻는 듯한 투였다.
“정무 회의 때 의논해보마.”
그냥 결혼이 아니라 ‘황태자’의 결혼이다.
원하는 여인을 아무나 들일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고 황태자비에 가장 어울릴 영애는 귀족들의 입에서 추천이 흘러나올 터.
“폐하, 제국을 함께 이끌어 갈 사람을 맞이하는 일입니다.”
“…….”
‘그래서?’라고 묻는 것 같은 황제의 눈을 보며 루카비는 빙긋 웃었다.
“이왕이면 마음에 맞는 영애와 했으면 하는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