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오늘은 외박 예정
“세츠.”
라벨라와 멀어진 이스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성큼 뻗으며 느른하게 움직이는 긴 다리가 마치 맹수의 것 같았다.
“누구였지?”
“나메렌 후작가의 영애와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스카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내용은.”
“두 분의 관계를 물었습니다.”
“…….”
라벨라가 뭐라 대답했는지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우리 사이는 당분간 비밀이야. 언젠가 잘 써먹을 때가 올 거니까.”
못마땅하긴 했지만 이스카도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긴 했다. 아직은 루카비에게서 라벨라를 보호해야 했다.
네이트랄 가에 드나드는 만큼 다른 귀족들과 만나는 횟수를 늘린 것도 루카비의 눈을 속일 목적이었고.
하지만 이성과 달리 욕심은 끝을 모르고 자라난다. 당장이라도 라벨라와의 관계를 공식화하고 싶어 몸이 달았다.
‘참자, 참아.’
이스카는 턱을 지그시 물었다.
절대로 라벨라의 계획을 어그러트려선 안 된다.
라벨라가 이 싸움에 뛰어들겠다고 선언한 이상, 표면적으로는 라벨라가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니 라벨라 앞에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하게 굴어야 했다. 그래야 라벨라는 어쩌려고 그러냐며 한숨을 쉬면서도 제 곁에 더 머물러 줄 테니까.
“세츠, 그쪽에도 사람을 붙여.”
“네.”
세츠가 사라지고 이스카는 참았던 한숨을 터트렸다.
오래도록 조심하며 준비해 온 전쟁이건만, 하루빨리 이 지리멸렬한 싸움을 정리해버리고 싶었다.
그냥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강제로 황태자의 자리에서 끌어내 버릴까 하는 위험한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치솟았다 사라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벨라 그녀 하나 때문에.
‘큰일이군.’
아무래도 미쳐가나 보다.
피에 미친 황제와 여인에 미친 황제. 결국 미친 건 전부 마찬가지 아닌가.
이런 마음을 안다면 라벨라는 뭐라 말할까.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을까, 아니면 한심하다는 듯 타박할까.
이스카는 자조적으로 쓰게 웃었다.
* * *
“그래, 황자님께서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셨구나.”
이미 전해들은 소식인데도 무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카셰이는 기쁜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야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양이다.
황태자를 떠올리면 안타깝기도 했지만, 제국의 미래를 위해 오랜 저주를 끊으려면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래, 라벨라 님의 밑에서 지내는 건 어떠하냐.”
“좋은 분입니다. 무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이 따뜻한 분이에요.”
무트는 검술 훈련으로 굳은살이 배긴 손을 펼쳐 보였다.
“검을 만든다는 녀석이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면 어떡해?”
라벨라의 한마디에 얼결에 시작한 훈련이었지만 정말 많은 걸 배우고 있었다.
무섭기만 한 길드원들이 잘해주는 것도 자신의 안부를 한 번씩 묻는 라벨라 때문이었다.
“그렇구나. 그분을 만난 건 네겐 큰 행운이다.”
“맞습니다.”
“넌 지금 역사의 흐름이 바뀌는 한복판에 서 있는 거다.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거라. 앞으로 쿠즈네를 어떻게 이끌어 갈지는 네 몫이 될 테니.”
“네.”
만날 때마다 한층 더 성장해 있는 무트를 뿌듯하게 보던 카셰이는 책상 위에 올려진 초커로 시선을 옮겼다.
라벨라가 제게 조사해 달라며 보내온 물건이었다.
투명한 금색의 보석은 쿠즈네의 무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광석과 비슷한 느낌이면서 조금 달랐다.
‘차메르가 준 것이라고.’
심각해진 표정 탓에 카셰이의 주름진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용도가 무엇인지 알아봐야겠다.
“!”
보석만 떼어낸 카셰이가 대장간으로 향할 때, 차메르의 감긴 눈이 움찔 떨렸다.
‘그 아이가 온 건가.’
아니. 아니다.
‘어째서 쿠즈네에?’
정작 목걸이를 지니고 있어야 할 라벨라는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목걸이를 빼낸 건가. 그건 라벨라와 자신을 이어주는 매개체였다.
보석이 라벨라에게 없으면 그나마 모습을 드러내던 것도 할 수 없게 될뿐더러 라벨라의 존재를 느낄 수 없게 된다.
‘이런.’
오래전 비스메르트가 제 피를 희생해 봉인하면서 걸어 둔 제약은 어마어마했다.
전지전능한 신에 가까웠던 과거가 무색할 만큼, 무력해진 지금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흘러넘치는 마력은 강제로 빼앗겨 비스메르트를 위한 무기를 만드는 데 쓰였고, 그 무기는 자신을 제압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됐다.
루비츠의 피가 자신을 깨울 때 잠깐이나마 봉인이 약해진 틈을 타 차메르는 꽤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라벨라를 데려왔고, 한 번씩 본체를 벗어날 수 있도록 라벨라에게 족쇄를 채워놨다. 물론 봉인의 제약 탓에 자유롭게 오갈 수는 없었지만.
‘라벨라.’
차메르는 찝찝해졌다.
그녀는 차메르가 자신의 마력을 부어 놓은 그릇이었다. 그의 명령대로 움직여줘야 할 꼭두각시 인형.
그리고 차메르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갇혀 있는 시간 동안 수많은 계획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처음에는 봉인이 풀리면 이 땅에 있는 모든 생명을 쓸어버리리라 다짐하며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흐르며 분노는 희석되고 퇴색되었다.
불필요한 살생. 백성은 무슨 죄인가 싶었다. 자유를 찾기만 한다면 그냥 조용하게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겼다.
그러다가도 다시 제 신세를 곱씹다 보면 비스메르트를 향한 분노가 들끓었다.
역시 비스메르트의 핏줄만큼은 꼭 끊어내리라.
루비츠 황자는 제 손으로 핏줄을 처리할 것이고, 마지막 비스메르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손에 죽게 하는 것도 괜찮은 결말이었다.
그러니 라벨라는 어떻게든 제 손안에 머물러줘야 했다.
그녀는 애당초 루비츠를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차메르, 그 자신을 위한 ‘도구’였다.
* * *
“어딜 가는 건데?”
얼굴 전부가 가려질 만큼 커다란 후드가 달린 망토는 라벨라의 손과 발까지도 가렸다.
오로지 신발 앞코만 라벨라가 걸을 때마다 살짝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곳이야.”
라벨라의 어깨를 감싸 안은 이스카가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이스카의 복장도 라벨라와 비슷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심하게 가린 탓에 오히려 길거리에서 눈에 띌 줄 알았는데 이스카가 그녀를 데려간 곳은 인적조차 없는 음습한 길목이었다.
한동안 몸도 사릴 겸 프롬쉘에 오지 말라고 했더니 그럼 네가 나오라며 라벨라를 기어코 밖으로 끌어낸 그였다.
덕분에 드레스 대신 편안한 복장으로 나오게 됐으니 꼭 싫지만은 않았다.
“당신 내가 준 마석, 어디서 산 건지 항상 궁금해했잖아.”
“!”
귀찮음이 섞여 있던 라벨라의 눈이 금방 반짝이는 걸 보며 이스카는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할 줄 알았어.”
라벨라를 데리고 임피리아의 아름다운 곳을 보여주고 맛있는 걸 먹이는 데이트를 하고 싶었지만, 라벨라의 취향을 저격하려면 이쪽이 더 알맞을 거라는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당신을 좀 잘 알지, 내가.”
“흥.”
인정하긴 싫어 코웃음 쳤지만 라벨라는 내심 기대가 됐다.
“오랜 세월 허락된 자들만 드나드는 곳이니 키르아가 아무리 돈을 많이 갖다 바쳐도 소용없었을 테고.”
길드의 정보망을 이용해 어찌어찌 접근은 했지만, 그런 이상한 물건은 취급하지 않는다며 딱 잡아떼니 뚫을 방법이 없었다.
“소개해 줄게. 당신이 앞으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아마 내가 준 어떤 선물보다 당신 마음에 들걸?”
이스카의 호언장담은 허언이 아니었다.
어두운 골목을 몇 바퀴나 돌고서야 들어간 낡은 집이었다.
그 안에서도 숨겨진 공간을 찾아 한참 밑으로 들어간 라벨라는 즐거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런 별천지가 있었다니. 신기한 물건투성이였다.
라벨라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움직이는 걸 본 이스카는 주인에게 살짝 신호를 보냈다.
이곳에 드나드는 이들의 신원은 비밀에 부쳐지긴 하지만 굳이 얼굴을 내보일 필요는 없었다.
“그럼 편히 보시고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시오.”
두 사람을 남겨둔 채 주인이 사라지자 라벨라는 후드도 벗어젖히며 본격적으로 구경에 나섰다.
“갑자기 서운해지려고 하네. 이제야 이런 곳에 데려와 주는 거야?”
라벨라의 타박하는 말에 이스카는 허탈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떤 진귀한 선물을 갖다 바쳐도 그녀가 이만큼 좋아하진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당신이 좋아할 줄은 알았지만 기대 이상이네.”
“알면 진작 좀 알려주지. 응? 이건 뭐지?”
라벨라는 이미 눈앞의 물건들에 혼을 빼앗긴 듯했다.
“제국 내에 딱 두 군데뿐이야. 황성에 하나, 프롬쉘에 하나. 앞으로는 당신도 필요하면 드나들 수 있을 거야.”
소개로만 올 수 있는 곳이거든.
이스카가 작게 말을 덧붙였다.
“마법사도 없고 마력에 대해 아는 사람들도 없다면서 이런 물건은 누가 사 가?”
“나 같은 사람들. 마력이 담긴 물건이라는 것도 모르고 사가는 녀석들이 대부분일 거야. 안 좋은 쪽으로. 암살이라든가, 뭐 그런.”
“그럼 이 물건들을 만드는 사람들은 뭔데?”
“쿠즈네와 비슷해. 옛날 마법사들의 마도구를 만들던 사람들이 암암리에 기술을 자식에게 넘긴 거지.”
마법사가 사라졌다고 해도 마력은 남아 있으니까.
“흠, 미래의 황제께서 이런 곳에 드나들어도 되는 거야?”
“그러니까 드나드는 거지. 누구보다 가장 연관이 깊잖아?”
“하긴.”
“무엇보다 희귀한 만큼 가격도 장난 아니라서, 아무나 드나들지도 못해.”
“…….”
“왜?”
라벨라의 묘한 시선이 얼굴에 닿자 이스카가 얼굴을 예쁘게 기울이며 눈웃음을 쳤다.
“황궁에서 빈털터리로 쫓겨나다시피 한 황자님이 어떻게 돈을 모았을까 싶어서.”
첫날 여관에서 키르아에 들어오라 제안했을 때 돈은 이미 차고 넘치게 많다며 거절하던 그였다.
실제로 많은 것도 같고.
“음, 당신이랑 비슷한 방법으로?”
이스카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애매한 답을 내놓았다.
“흥, 자랑이다.”
그럼에도 찰떡같이 알아들은 라벨라가 어이없다는 듯 조소했다.
“어쨌든 돈 많은 애인 괜찮지 않아? 당신이 말만 한다면 난 이 공간에 있는 전부를 선물할 수도 있어.”
이스카가 장난치듯 거만한 말투로 젠 채 했다.
“그건 나쁘진 않네.”
“흠?”
생각보다 순순히 인정하는 라벨라에 이스카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알잖아, 나 돈 좋아하는 거.”
새삼 뭐 그런 반응이냐는 듯 라벨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스카는 긴 손가락으로 턱을 문질렀다.
그렇다면 황궁 내에 거대한 창고를 만들어 볼까. 온갖 무기와 희귀한 것들을 채워 넣고 라벨라를 꼬시면 못 이기는 척 넘어와 주려나?
거기에다가 전용 연무장을 만들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러면 혹한 라벨라가 황궁에서 살고 싶어할까.
그녀가 황후의 역할을 하지 않고 매일 같이 창고와 연무장에 박혀 있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일은 자신이 두 배로 하면 되니까.
이미 자신이 황위를 탐내는 것부터가 임피리아의 관례를 깨는 것인데 그깟 황후의 책임쯤이야.
오히려 그녀가 제 곁에 있어 주는 게 임피리아의 평화를 위해서도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이건 좀 희한하게 생겼네.”
“…….”
입구에 기대어 선 채 팔짱을 끼고 고뇌하던 이스카는 라벨라의 옆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렵다. 루카비를 상대하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더.
황위를 갖는 것 보다 연인의 마음을 붙잡아두는 게 몇만 배는 어렵게 느껴졌다.
차라리 누가 정답을 알려주면 좋겠네.
답답해진 이스카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이스카.”
“응?”
잠시 생각에 잠겨있느라 라벨라에게서 눈을 떼고 있던 그는 바로 코앞에 있는 얼굴에 움찔했다.
“무슨 생각해?”
어떻게 하면 널 옆에 붙잡아 둘 수 있을까 그런 생각.
“……아무것도.”
“…….”
라벨라는 이마에서 손을 떼어낸 채 빙긋 웃는 이스카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얼핏 본 녀석의 표정이 꽤 어두웠지만, 본인이 말할 생각이 없는 걸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나 마도구 만드는 사람들 만나고 싶어.”
라벨라는 솔직하게 원하는 걸 털어놓았다.
“…….”
역시 어려운 아가씨 같으니라고.
“시도해 볼게. 쉽지는 않겠지만.”
잠자코 라벨라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이스카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의 분부라고, 원하는 건 해드려야지.
“그리고 나 여기서 갖고 싶은 게 있어.”
결국 라벨라가 고른 물건들까지 거금을 치르고 말았지만 이스카는 기꺼웠다.
어지간한 일에는 감흥조차 없는 라벨라가 즐거워하는 걸 본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으니까.
“우리 황자님 주머니를 제대로 털었네.”
“이 정도로는 티도 안 날 텐데.”
라벨라의 짓궂은 농담을 받아친 이스카는 웃으면서 어둠 속으로 라벨라를 이끌었다.
아쉽지만 이제 그녀를 성으로 돌려보낼 시간이었다.
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흔적이 남지 않도록 돌아서 가야 하니 시간이 조금 더 지체될 테지만 그래서 더 좋긴 했다.
달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골목을 밟던 라벨라가 은근하게 이스카의 허리를 문질렀다.
“……알아.”
이스카는 화답하듯 라벨라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몸을 돌렸다.
“어쩌지? 오늘 못 돌아가겠는데?”
“잔소리 듣게 생겼네.”
“괜찮아, 듣는 건 내가 아니라 이스카 너니까.”
라벨라가 싱긋 웃었다.
성으로 향하던 걸음이 반대 방향으로 바뀌었다.
“당신, 너무 즐거워 보이는데.”
마을을 벗어나 외곽으로 향하는 그녀의 걸음이 새의 깃털처럼 가볍다.
“티 났어? 오늘 데이트 참 마음에 드네.”
라벨라의 작은 혀가 붉은 입술을 쓸어내렸다.
라벨라의 예쁜 귀는 두 사람의 뒤를 쫓는 이들의 발소리를 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