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만 모르는 유혹-56화 (56/94)

56. 깜짝 선물

“전하, 꼭 이 길로 가야 하는 겁니까?”

리텔니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좁고 어두운 통로를 부지런히 살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손에 든 횃불이 아니라면 바로 앞서 걸어가는 주군의 뒷모습도 보이지 않을 듯했다.

“그냥 성문으로 당당하게 들어가시지. 곱게 차려입고 이게 무슨 짓이랍니까.”

오늘을 위해서 주군의 말도 깨끗하게 씻기고 갈기도 멋들어지게 손질해두고, 온갖 부산을 떤 참이었다.

한데 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만 좀 투덜거려, 리텔니. 그러게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는.”

잠시 멈춰 선 이스카가 방향을 확인하고는 다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서운하지 않습니까? 이게 다 전하를 향한 제 충성심인데 말입니다.”

“알지, 너무 잘 알지.”

이스카는 그 충성심은 넣어두라고 말하는 대신 리텔니를 달래는 걸 선택했다.

“성을 떠날 때, 이 길을 통해서 나왔어.”

“…….”

그날이 언제인지 짐작한 리텔니가 입을 다물었다.

“그 길을 되돌아가고 싶었어.”

루카비의 손에 큰 상처를 입고 사경을 헤맬 때, 황후가 자신을 빼낸 비밀 통로였다. 그 덕에 황제 부부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길의 존재를 알게 됐고.

“일종의 의식이라고나 할까. 의지도 새롭게 다질 겸.”

통로 끝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혈육과의 전쟁이었다.

무력한 희생양에서 찬탈자의 입장이 되어 돌아간다.

이스카의 보랏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무겁게 가라앉았다.

투덜거리던 리텔니는 입을 꽉 다문 채 주군의 뒤를 따랐다.

“……돌아왔네.”

통로를 빠져나온 두 사람이 이른 곳은 황후궁의 정원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몇 년 만이죠?”

“글쎄, 오래돼서 기억도 안 나.”

“전하.”

리텔니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서렸다.

오래도록 준비해왔던 시간이 빛을 발할 때가 되었다.

이 싸움은 어떻게 흘러갈까.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 이스카가 몸을 돌렸다.

“가자, 리텔니.”

그들의 목적지는 분명했다.

*   *   *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테라스에 모여 있던 이들이 연회장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던 이들도 모두 몸을 일으켰다.

‘이스카.’

귀공자들에 둘러싸여 있던 라벨라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우리 루비츠 황자님이 오셨네.’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라벨라는 절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부채 뒤에 숨겼다.

짙푸른 정복을 입은 이스카는 조금 새로웠다.

잘난 외모라고 생각은 했지만, 꾸며 놓으니 이스카 특유의 분위기가 더욱 짙어졌다.

예전의 이스카가 나른한 색기를 흘리는 까만 날짐승 같았다면, 루비츠 황자가 된 지금은 우아하게 몸짓하는 새하얀 사자 같은 모습이었다.

‘역시 마음에 든다니까.’

라벨라는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살짝 쓸어냈다.

쏠린 시선을 즐기듯 이스카의 긴 다리가 느른하게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떡 벌어진 어깨에 달린 은빛 견장이 걸음을 따라 흔들렸다.

만면에 피어난 산뜻한 미소만큼이나 가벼워 보이는 은발 머리는 샹들리에의 조명을 받아 환히 빛났다.

“……루비츠 황자?”

어디선가 놀란 목소리가 튀어 올랐다.

“루비츠 황자라고?”

“저분이, 그 황자님?”

누군가 꺼낸 이름이 도미노처럼 연회장 내에 퍼져 나가며 웅성거림이 더 심해졌다.

줄에 달린 인형처럼 모든 이의 고개가 이스카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단상 쪽으로 밀물처럼 날아들었다.

그제야 라벨라는 높은 단상 위에 혼자 앉아 있는 황태자를 마음 놓고 쳐다볼 수 있었다.

‘흐음.’

황태자는 여전히 옥좌에 앉은 채 고요히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라 조금 김이 새긴 했지만 라벨라는 다시 이스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단상 바로 아래까지 도달한 이스카가 루카비를 정면으로 마주 봤다.

“…….”

루카비가 앉은 곳까지는 고작 다섯 계단.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오를 수 있는 거리였다.

“……루비츠.”

루카비가 흘리듯 이름을 읊은 후에야 이스카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형님.”

굽혔던 허리를 편 이스카가 씩 웃었다.

“널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구나.”

“깜짝 선물이 되었으면 해서 조용히 오느라 빈손입니다. 이해해 주시겠지요?”

부드럽게 웃는 루카비는 진심으로 동생을 반기는 자애로운 형의 모습이었다.

긴 시간 동안 성장한 건 역시 자신 혼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간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한 번도 직접 축하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거든요.”

새삼 깨닫게 된 사실을 느끼며 이스카는 여유롭게 말을 이어 나갔다.

“무슨 그런 서운한 말을.”

팔걸이를 짚고 몸을 일으킨 루카비가 천천히 단상을 내려왔다.

이미 이스카가 입을 연 순간부터 고요해진 연회장에 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가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더러는 호기심, 더러는 두려움.

아프고 병약하다더니. 대체 어딜 봐서? 모두의 머릿속에 의아함이 샘솟았다.

소문만 무성하던 황자는 눈부셨고 아름다웠다. 시선을 사로잡고 호기심을 일으킬 만큼.

또 한 번 제국에 피바람이 불게 될까. 역사를 기억하는 이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보니 기쁘구나, 루비츠.”

“형님께서 기뻐해 주시니 저 또한 기쁩니다.”

루카비가 팔을 뻗어 이스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내가 아주 큰 선물을 받았구나.”

하얀 손이 느리게 두어 번 이스카의 등을 쓸어내렸다.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우애 깊은 형제의 애틋한 포옹이었다.

“어떤 선물보다도 가장 마음에 들어.”

이스카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준 루카비가 자연스레 그의 몸을 앞으로 돌렸다.

“다들 예상했겠지만.”

루카비가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저의 하나뿐인 형제, 루비츠입니다. 오랜 시간 요양하느라 볼 수가 없었지요. 앞으로 제국에도 큰 힘이 되어 줄 겁니다.”

제가 황태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담긴 말.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함이 한 차례 좌중을 휩쓸었을 때, 후레이 자작이 먼저 손뼉을 쳤다.

“참으로 보기 좋은 우애입니다. 제국의 미래가 참으로 밝을 것 같군요.”

눈치를 보던 귀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그를 따라 박수치기 시작했다.

이스카는 가볍게 미소지은 채 웃음을 삼켰다.

다정한 말과는 다르게 어깨를 쥔 루카비의 손은 부서트리고 싶은 사람처럼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네 덕분에 연회의 마지막을 즐겁게 장식할 수 있게 됐구나.”

이스카에게 여유롭게 웃어 보인 루카비가 신호를 보내자 넋을 놓고 있던 악단이 뒤늦게 연주를 재개했다.

등을 떠미는 루카비의 손길에 이스카는 다시 연회장 가운데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교계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황자가 제일 처음 춤을 청하는 상대는 누구일까.

귀족답게 모두가 표정을 숨기며 잠자코 그의 행보를 지켜봤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감히 춤을 청해도 될까요?”

“……영광입니다.”

물 흐르듯 매끄러운 매너를 선보이며 이스카가 손을 내민 상대는 네이트랄 가의 수양딸이었다.

불과 이틀 전, 황태자가 첫 춤을 청했던 상대.

누군가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   *   *

“…….”

복도를 걸어가는 황태자의 걸음이 평소와 다르게 빨랐다.

뒤를 따르는 이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서로 눈치만 살폈다.

“그자를 부르게.”

“네.”

집무실로 향한 루카비는 후레이 자작에게 짧은 명령을 내렸다. 황급히 사라지는 후레이 자작 뒤로 문이 닫혔다.

쾅!

꽉 움켜쥔 주먹이 책상을 내리치며 참았던 화를 터트렸다.

잉크병이 넘어지며 내용물이 쏟아졌다. 붉은 잉크가 피처럼 끈덕지게 흐르다가 카펫 위로 뚝뚝 떨어졌다.

“후으.”

온몸을 지배하는 살기에 머리끝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그 자리에서 티를 낼 수 없으니 하릴없이 입 안쪽의 살만 짓씹어댔다. 덕분에 입 안쪽의 살이 너덜너덜했다.

연회 내내 비릿한 피 맛이 혀끝에 맴돌았지만, 자리를 뜰 수도 없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이 다시 책상을 내리칠 때, 바깥에서 사람이 왔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나타난 남색 머리의 사내. 얼마 전 루카비를 찾아온 이였다.

길게 호흡하며 분노를 진정시킨 루카비가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녀석이 나타났더군.”

“…….”

루카비는 동요조차 하지 않는 눈앞의 사내를 보며 조소했다.

“네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하지.”

검집을 쥔 칸피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대신 네 놈은, 약속대로 녀석의 목을 바쳐야 할 거야.”

칸피덴은 음험한 빛을 내는 루카비의 눈을 보다 고개를 숙였다.

이스카와 같은 색의 눈동자였으나 풍기는 분위기는 퍽 달랐다.

자신과 부친도 그러할까.

“……명심하겠습니다.”

칸피덴은 밀려드는 잡념을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루카비가 이스카의 잔상을 곱씹으며 분노하는 사이, 이스카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궁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네이트랄 공작 소유의 별장에 고요한 말발굽 소리가 모여들었다.

“왔습니까.”

마차도 없이 최소한의 호위들만 대동한 귀족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나 참. 수양딸로도 모자라 황자님까지?”

“그러게 말입니다. 된통 속았지 뭡니까.”

“이 모든 일에 네이트랄 공작님이 연관되어 있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네이트랄 공작의 연락을 받고 모인 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자마자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내둘렀다.

연회장에서 황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하마터면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머리색이 달라져서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어떻게 그 얼굴을 잊는단 말인가.

“내가 황자님 얼굴을 어찌 뵙나.”

특히나 제 편의대로 황자를 딸과 결혼시키려 했던 나메렌 후작은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잿빛이 된 상태였다.

“어쨌든 네이트랄 가가 움직였다는 건 좋은 소식이지요.”

“일단 들어가 봅시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줄지어 건물 안으로 들어간 이들은 회의실의 상석에 앉아 있는 황자를 직면했다.

“다들 늦은 밤에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은밀한 모임이라는 걸 증명하듯 촛불 하나 없이 달빛만 그득한 공간이었다.

공작 부자는 보이지 않고 그들과 안면이 있는 리텔니만이 황자의 뒤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본의 아니게 정체를 숨긴 건, 정중하게 사과하겠습니다.”

“크흠, 솔직히…… 좀 당황스럽긴 했습니다. 언질이라도 미리 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용기 있는 한 명이 먼저 총대를 메자 여기저기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카는 빙긋 웃었다.

제 얼굴도 모르면서 저의 편에 선 이들이었다.

황후와 인연이 있거나, 혹은 황태자의 라인에 대놓고 서지 않아서 배척당했거나.

각자의 사정과 이유가 있을 뿐, 이들 중에서 진심으로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이 몇이나 됐을까.

당연히 경계심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서로에게 확신을 갖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이해해주면 고맙겠군요.”

황자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들은 귀족들이 표정을 굳혔다.

“물론 그러셨을 줄 압니다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요.”

황태자가 꾸민 계획을 다 알게 된 후였다. 게다가 황자인 줄 몰랐다고는 해도 이스카 시절의 황자에게 모두가 도움을 받았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루비츠 황자가 어떤 사람인지도 확실히 알게 된 후였다.

“이미 리텔니 경에게도 몇 번이고 의사를 밝혔습니다만, 저희는 황자님의 결정에 힘을 보탤 겁니다.”

모두의 얼굴에 비장함이 서렸다.

“되도록 빠른 시일 안에 형님이 그간 해 온 것들을 공론화시킬 겁니다. 증거도 계속해서 수집하고 있고.”

이스카는 딱딱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부드럽게 웃었다.

“형님께서 얌전히 황태자위를 내려놓도록 만드는 걸 우선으로 둘 겁니다.”

“전쟁 없이 깔끔하게 가면 좋겠지만, 최악의 경우도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의 지적에 이스카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라벨라와 손을 잡고 영지마다 거대한 농장을 세운 거였다. 물자와 군사력을 동시에 관리하기에 최적화된 체계.

몇 가지를 간단하게 논의하고 나서야 이스카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함께 술잔을 드는 건 조금 뒤로 미루도록 합시다. 꼬리가 길면 잡힐 테니.”

어둠 속에 모여들었던 이들이 다시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

“정말 시작이군요.”

텅 비어버린 공간을 보던 리텔니가 읊조렸다.

모두가 사라지고 난 뒤 주군은 혼자 자리에 앉아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들기고 있었다.

주군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 것도 같았다.

“그래, 진짜 시작이지.”

이스카가 기지개 켜듯 몸을 늘이며 일어났다.

“참, 확인해 봤어?”

어두운 회의실을 나서며 이스카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황태자에게 간 것이 맞습니다. 목격담도 있고요.”

리텔니가 주변의 기척을 살피며 빠르게 대답했다. 황궁 내에는 이미 그들의 사람들이 곳곳에 심어져 있었다.

“……황궁에 있는 녀석들과는?”

“아니요, 페시니와도 다벨과도 접촉한 흔적은 없습니다.”

“……후.”

“라벨라 님께 말씀하실 건가요?”

“숨겨도 금방 들통날 거야.”

이스카는 땅이 꺼질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라벨라를 만나러 가는 시간만 기다렸는데, 들고 가는 소식은 썩 좋지 못했다.

칸피덴, 도움도 안 되는 자식 같으니라고.

“그럼 오늘은 만나러 가시지 않는…….”

“장난해?”

지척에 라벨라, 그녀가 있는데.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간다.”

리텔니의 말을 똑 잘라 먹은 이스카가 성큼성큼 앞서갔다.

“저렇게도 좋으실까.”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지는 주군을 보며 리텔니는 착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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