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오늘 밤 주인공
‘뭐지? 내가 잘못 봤나?’
라벨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라벨라가 있는 곳은 연회장 초입이었고, 황태자는 연회장 가장 안쪽의 상석에 있었다.
‘아니, 녀석이 맞아.’
거리가 멀긴 했지만 라벨라의 좋은 시력과 관찰력이 낯익은 얼굴을 놓칠 리가 없었다.
짙은 남색 머리. 날카로운 얼굴에 한결같이 덤덤한 표정. 평소와 달리 기사 정복을 입고 있지만 분명 칸피덴이었다.
‘쿠즈네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하지만 라벨라에게 전해진 소식은 없었다. 칸피덴이 제 허락 없이 독단으로 움직일 녀석도 아니었고.
행여나 쿠즈네에 무슨 일이 있다 해도 칸피덴이 황태자 곁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의문투성이였다.
라벨라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둥둥 떠다니는 사이 황태자에게 무어라 귓속말을 한 칸피덴이 빠르게 연회장 뒤편으로 사라졌다.
녀석이 라벨라의 눈에 띄고 사라지기까지는 찰나의 시간이었다.
“……아가씨?”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린 라벨라를 본 공자가 제 팔에 얹어진 손등을 톡톡 건드렸다.
“아.”
몸을 움찔한 라벨라가 금세 미소 지었다. 녀석의 뒤를 뒤쫓고 싶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나 보다.
중요한 자리였다. 심지어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제게 쏠려 있고. 생각처럼 당장 박차고 뛰어나가 칸피덴의 뒤를 쫓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 내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는 것 같은데.’
칸피덴이 사라진 곳을 힐끔 확인한 라벨라는 불쾌한 예감이 들었다.
‘역시 그때 캐물었어야 했나.’
어쩐지 찝찝하더라니. 라벨라는 어금니에 지그시 힘을 주어 물었다가 풀었다.
바랍스에서 아무것도 묻지 않고 넘겼던 게 조금 후회가 됐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튀어나오는 건 정말이지 질색이었다.
‘답답하네.’
연회가 끝날 때까지는 꼼짝없이 새장 속에 갇힌 새 신세였다.
일단 쿠즈네에 확인부터 해야겠다. 라벨라는 머릿속으로 할 일을 정리하며 미소를 유지했다.
‘칸피덴 녀석, 쓸데없는 일을 벌인 건 아니겠지.’
속으로 혀를 찬 뒤 표정을 완벽하게 가다듬은 라벨라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라벨라의 커다란 눈에 빛으로 가득한 공간이 담겼다.
금으로 된 화려한 샹들리에가 천장에 줄지어 매달려 있고, 연회장 벽면마다 은으로 된 커다란 촛대가 놓여 있었다.
공간이 주는 압도적인 화려함은 황실의 권력을 과시했다.
연회장을 가로질러 제국에서 가장 높은 이에게 가는 길.
‘지금은 다른 생각할 때가 아니지.’
라벨라는 눈앞에 놓인 목표에 집중하기로 했다. 황태자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 공작이 몸을 일으키며 황후와 황태자에게도 차례로 인사를 올렸다.
한가운데에 앉은 황제의 양옆으로 황후와 황태자가 비스듬히 마주 보고 있는 상태였다.
덕분에 의도하지 않아도 황태자와 황후의 표정이 라벨라의 시야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공작, 딸이 생겼다는 소문이 진짜였군.”
“네, 소싯적 신세 졌던 먼 친척의 하나뿐인 딸입니다. 최근 그들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제가 거두게 됐습니다.”
“그런 일이…….”
자신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오가는 말에 라벨라는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제 얼굴을 힐끗 관찰하는 황태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황후의 호기심 어린 시선도.
“라벨라.”
뒤늦게야 공작이 몸을 틀며 라벨라를 앞으로 이끌었다.
“제국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들의 얼굴을 뵙습니다.”
입꼬리를 굳힌 라벨라가 무릎을 굽혔다. 드레스 자락을 쥔 손은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귀여운 영애로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나중에 황후궁으로 초대해도 괜찮지요?”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라벨라는 한 박자 늦게 대답하면서 아랫입술과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라벨라에게 쏠렸던 시선이 거두어진 후에도 공작은 황제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후에야 물러났다.
황제와 대화를 많이 나눌수록 권력을 증명하는 셈이니 오늘도 네이트랄 부자는 자신들의 위치를 확실히 각인시켜준 셈이었다.
단상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고 나서야 라벨라는 입꼬리 끝을 비틀었다.
“……그쯤 하셔요.”
라벨라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이는 공자를 향해 눈을 흘겼다. 소리내어 웃지 못하는 공자는 눈꼬리에 눈물까지 매달고 있었다.
“아니, 볼 때마다 감탄이 나와서 그렇습니다.”
눈꼬리를 손가락으로 슥 닦아낸 공자가 변명을 시도했다.
웃음기를 머금은 그는 연회를 앞두고 무감하고 귀찮아하던 라벨라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무리 그에게 여자 형제가 없다고는 하나, 연회를 앞둔 영애들이 어떻게 구는지는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연회 몇 달 전부터 제국 내의 유명하다는 의상실을 선점하기 위한 피 튀기는 경쟁이 시작되곤 했다. 황성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보석상과 의상실 디자이너들은 각 귀족가로 불려 다니느라 바빴다.
연회에서 가장 돋보이는 영애가 되는 것이 그 또래 영애들의 관심사요, 과제였다.
하지만 라벨라는 확실히 그런 영애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직업이 그러하고 배경이 다르다고는 하나 그녀도 여인이거늘.
심지어 황궁에 도착하고 거대한 연회장을 보면서도 압도당하기는커녕 심드렁했다.
그래놓고 황실 사람들 앞에서 긴장한 ‘척’ 연기하는 걸 봤으니 자꾸 웃음이 나올 수밖에.
조금 전의 라벨라는 누가 봐도 갑자기 중앙 사교계로 불려 나온 시골 출신의 순진한 영애였다.
황제 부부와 황태자는 라벨라가 의도한 대로 철석같이 믿을 것이다. 예전에 제가 그랬던 것처럼.
솔직히 천하 태평한 그녀라도 황실 앞에서 조금은 긴장하지 않을까 궁금했는데, 역시 쓸데없는 호기심이었던 모양이었다.
공자는 대체 뭘 먹으면 저런 강심장이 되는 걸까 궁금해졌다.
“역시 라벨라 양 곁에 있으면 재미있는 일이 많습니다.”
공자가 쿡쿡 웃자 라벨라는 쥐고 있던 공자의 팔을 확 꼬집어버릴까 고민해야 했다.
“공자님.”
“어허, 듣는 귀가 많아요.”
공자가 짐짓 헛기침하며 라벨라에게 핀잔했다.
“……오라버니.”
그제야 공자가 말하라는 듯 미소 짓는다.
쯧 혀를 찬 라벨라가 한층 더 목소리를 낮췄다.
“아까 연회장에 들어섰을 때, 황태자 옆에 있던 자를 보셨나요?”
“……?”
눈썹을 끌어올린 공자가 잠시 기억을 되짚었다.
“누가 있었던가요?”
칸피덴을 알아본 건 아무래도 그녀 하나뿐인가 보다.
“……아뇨, 연회가 시작되면 아르젠을 좀 불러주시겠어요?”
“사랑스러운 동생님의 청인데, 물론이죠.”
사용인들은 연회장 내에는 출입할 수 없으니 아르젠은 성안의 어딘가에서 대기하고 있을 터였다.
진즉 황궁에 녹아들었을 페시니와 다벨도 마찬가지겠지만.
공작과 떨어진 두 사람이 연회장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 부드러운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굵직한 귀족 몇 가문하고만 나누던 황제의 인사가 드디어 끝난 모양이었다.
“주인공이 오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이 첫 춤의 영광은 이 오라비가 가져야겠군요.”
라벨라의 귓가에 장난스레 속삭인 공자가 라벨라를 마주 본 채 한 걸음 물러섰다.
그가 막 허리를 숙이려는 찰나, 주변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음?”
이런.
고개를 든 공자는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는 이를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
하지만 루카비가 채 알아채기도 전에 눈을 곱게 접은 브라트는 미소 뒤에 감정을 숨겼다.
“그대의 동생에게 첫 춤을 청할까 하는데.”
“전하께서 이리 마음 써주시니, 좋은 기억이 될 겁니다.”
공자가 예의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루카비가 기분 좋을 만한 말을 골라 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영광입니다.”
쑥스러운 척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숙이는 라벨라의 앞에 커다란 손이 들이 밀어졌다.
‘그럼.’
공자가 응원이 담긴 눈인사를 한 뒤 슬쩍 뒤로 빠졌다.
황태자의 에스코트를 받아 중심으로 향하는 두 사람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영애들의 질시 어린 시선과 귀족들의 여러 생각이 담긴 시선들.
“딸이라기에, 더 어린아이일 줄 알았더니.”
“그러게 말일세. 저렇게 과년한 딸이라니. 의도가 너무 뚜렷하지 않나?”
“허. 공작이 황태자비 자리라도 노린다는 건가?”
“그럼 하필 이 시기에 수양딸을 들일 이유가 뭐가 있나?”
“에이, 이 사람아. 네이트랄 공작이 뭐 하러.”
“뭘 모르는 소리. 원래 있는 사람이 더한 법이야. 공작도 이런 때에 권력을 더 공고히 하고 싶지 않겠나.”
“어쨌든 잘 어울리는 한 쌍이긴 하네.”
“그렇긴 하군.”
주위에서 숙덕대는 이야기들이 팔랑팔랑 날아든다.
라벨라의 날카로운 귀에 몇 가지 단어들이 꽂혔지만, 솔직히 제 얼굴에 꽂힌 황태자의 시선이 더 따가웠다.
‘흥, 잘 어울리긴 어디가.’
라벨라는 속으로 콧방귀를 꼈다.
외모야 이스카와 썩 닮은 얼굴이니 봐준다 쳐도, 검 한 번 제대로 휘둘러 본 적 없을 것 같은 이런 부드러운 손을 가진 남자는 애당초 논외였다.
라벨라는 일부러 맞잡은 손의 간격을 띄웠다. 그러자 예상대로 의아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소, 손이 험하여…….”
창피한 것처럼 말끝을 흐리며 ‘나 고생하며 자랐어요.’라고 말하듯 티를 또 슬쩍 내주었다. 물론 각종 훈련으로 갖게 된 굳은살이지만.
루카비는 귓등까지 붉어진 여인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상당히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인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교계에 능숙하지 않은 순진한 구석이 드러났다.
얼핏 봤을 때 느껴지는 고고함은 아무래도 네이트랄 가의 속성 교육 덕분인 모양이었다.
지금도 잠깐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불에라도 닿은 듯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지 않나. 다른 영애들 같으면 이러고서 다시 은근슬쩍 눈을 마주쳐 올 텐데.
‘재미있는 영애로군.’
라벨라를 관찰하며 나름의 결론을 내린 루카비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모르고 보면 깜빡 속겠어.’
루카비의 미소는 라벨라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뒤에 숨겨진 본성을 알아서 그런가, 천사처럼 웃는 미소가 참 새롭다. 차메르의 저주가 아니었더라면 또 달랐으려나.
루카비가 제게 살기를 드리운 게 아닌데도 귀밑의 솜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부드럽기만 한 황태자의 손을 잡고 있자니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인 녀석의 손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는 반사작용이었다.
‘녀석은 언제 오려나.’
이스카의 등장이 기다려졌다.
황태자를 보며 이스카를 그리는 사이 긴장감으로 점철된 황태자와의 첫 춤이 끝났다.
“가, 감사합니다.”
후다닥 손을 내리고 우물쭈물하던 영애는 모기만 한 소리로 감사를 표하고는 제 오라버니를 찾아갔다.
“…….”
마치 새끼 오리 같은 뒷모습을 보던 루카비는 뒤늦게야 몸을 돌렸다.
“괜찮은 영애 같은데. 그렇지 않소, 황후?”
“네, 차분하고 아름다운 영애네요.”
다른 영애에게 춤을 청하지 않고 단상으로 돌아온 루카비는 황제와 황후가 나누는 대화를 조용히 귀에 담았다.
황태자는 눈으로 라벨라를 좇으며 생각에 잠겼다.
아름다운 건 맞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여인이었다.
그런데 왜 기시감이 들까.
이상한 일이었다.
* * *
새로운 얼굴의 등장에 연회 첫날은 떠들썩하게 마무리되었다. 정작 이야기의 주제가 된 라벨라는 연회 내내 평화로웠다.
갑자기 나타난 권력자의 수양딸에게 호기심을 보일지언정 먼저 다가오는 자들이 많지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연회 이튿날이 되자 라벨라는 조금 바빠졌다. 여전히 연회의 주 관심사는 단연코 라벨라였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이미 농장 문제로 라벨라를 만났던 이스카의 지지자들은 말을 섞을 적당한 기회를 노리다가 은근하게 다가왔다.
라벨라와 안면이 있다는 사실을 굳이 다른 귀족들에게 알릴 바보 같은 이는 없으니까.
“그냥 상단 사람인 줄 알았더니, 저희를 감쪽같이 속이셨군요.”
“의도한 건 아니었네. 나도 뒤늦게야 먼 친척이라는 걸 알게 됐으니.”
놀란 기색과 서운함을 드러내는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해시키는 건 네이트랄 공작의 몫이었다. 물론 입단속을 시키는 문제까지도.
라벨라도 티는 안 내지만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왜 안 오는 거지?’
도통 나타날 생각을 안 하는 이스카와 뜻 모를 칸피덴의 등장 때문이었다.
첫날 이후 칸피덴을 다시 볼 수는 없었다. 녀석의 흔적을 짚었지만 잡히는 것도 없었다. 쿠즈네의 소식은 며칠이 지나야 답을 받을 터.
두 사내가 라벨라의 속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답답함에 라벨라의 짜증이 한계치에 이르렀을 때, 연회의 마지막 날이 시작되었다.
며칠간 이어진 연회에서 역할을 다 한 황제 부부는 더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덕에 귀족들은 긴장을 푼 채 마지막을 즐기고 있었다.
라벨라 또한 춤을 청해 오는 사내들과도 한 번씩은 안면을 트면서 성향까지 파악했다.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의 관계도와 서열을 파악했음은 물론이었다.
더이상 연회에서 얻을 것도 없는데.
라벨라는 펼친 부채 뒤에 지루한 표정을 숨겼다.
‘대체 언제 오는 걸까, 우리 황자님께서는.’
빈정대던 라벨라는 시선을 느른하게 옮기다 웃음을 참고 있는 브라트와 눈이 마주쳤다.
‘흥.’
놀리고 싶어 하는 공자의 표정에 휙 고개를 돌릴 때였다.
닫혀 있던 연회장 문이 갑자기 활짝 열렸다.
입구에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지더니 썰물처럼 사람들이 양쪽으로 물러서며 길을 만들었다.
갈라진 인파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남자.
“!”
이스카였다.